2020 여름호 추천시
오성인 - 기절낙지 (2020『애지』봄호)
장수진 - 죽음에 대해 띄엄띄엄 말하기 (2020『시로여는세상』봄호)
임지은 - 사운드 (2020년『포지션』봄호)
기절낙지
오성인
얽힌 발을 지닌 물고기라 하여 옛말로 낙제어(絡蹄漁)라 불렸던 낙지는 수명이 고작 일 년입니다만 그 힘 하나는 허벌나지요 매년 봄, 가을에 열리는 투우 대회를 앞두고 싸움소들 강변 모래밭에서 연신 무거운 수레 끌고 둘레가 한 아름 넘는 나무 밑 둥치 뿔로 치고 걸며 맹훈련하는데요 워낙 고된 나머지 다리 풀려 주저앉기 일쑤이지요 이때, 소의 입에 큼지막한 낙지 하나 넣어주면 생각도 못한 호강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그러나 모든 낙지가 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낙지 중의 낙지는 바로 꽃낙지, 겨울잠에 들기 전 영양 비축 들어간 요맘때가 맛이 가장 솔찬하여 요로코롬 어여쁜 이름이 붙었다나요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반드시 나는 놈 있다고 기절낙지란 놈은 그야말로 정점을 찍지요 낙지를 바구니에 담고 굵은 소금을 뿌려 사정없이 문지르면 글쎄 이놈이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어 몽글몽글 거품을 내며 잠에 빠져드는 겁니다 사지가 절단나도 여간해서 아우성을 그치지 않는데 어찌 그리 새색시마냥 얌전해질 수 있는지 접시에 가지런히 누운 모습이 정돈된 드레스 같은데요 하여튼 이랬던 것이 삭힌 막걸리로 만든 초장에 들어가면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 흘리며 잠 깨듯 소스라치며 일어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눈으로 한 번, 그 맛에 두 번 놀란다고 하니 어떻습니까 쓰러진 소를 일으켜 세운다는 이야기가 결코 실없는 우스갯소리가 아닌 게지요
---- 2020『애지』봄호
죽음에 대해 띄엄띄엄 말하기
장수진
죽었다는 거는 나도 알고 있고 들은 거 같은데
백혈병으로 죽었더구만 아니 걔는 살아 있고
살아 있어 그래
어 어 알았어 그래
이번 역은 화정 화정역입니다 디스 스탑 이즈
화정 화정 내리실 문은
여보세요 나야 하여튼간
가만 있어봐 자네가 부영 초등학교
부영 초등학교 옆에 사는
맞지
노약자와 어린이는 보호자의 손을 잡고
다니십시오
장난치지 마십시오
어 어 죽었다는 거는 나도 알고 있고 들은 거 같은데
오늘 구름 크림 빵 세일합니다
아니 나는 살아 있고
살아 있어 아직 그래
날씨가 추워
부길아
밥은 먹었냐
양말 두꺼운 거 신고 아무튼
나도 이따가 죽을 거 같은데
여보세요 부길아
팥빵 좀 사갈까 너 당뇨 저기
----2020『시로여는세상』봄호
사운드
임지은
17층에서 누가 떨어졌다
신음은 생각보다 커서
창문 안으로 타고 들어왔다
조금 열린 창문을 더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었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
영수야, 아빠 왔어, 이젠 괜찮다
우는 소리가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싸우다 홧김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아마 살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앉아서 17층에서 떨어지면, 을 검색했다
18층에서 떨어지면,
19층에서 떨어지면,
20층에선 제발 눈물도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흐느꼈다
괜찮다는 말이 필요했던 거라면
해줄 수 있었다
그럼 영수는 단풍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늦여름에 낙엽이 떨어지고 있어,
라는 시를 쓰고 있었을까
글자들이 종이 위로 떨어져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다
무의미가 될까 봐 무서워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 모든 걸 전해 들은 친구는 운전 중이었는데
잠시 갓길에 멈춰섰다고 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아팠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데
신음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은 전생에 수많은 사람을 기르던 나무였는데
자동차 위로 심장 하나가 쿵 떨어질 것만 같아서
출발하지 못했다고 했다
----2020『포지션』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