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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超越은 “뛰어넘을 초超”와 “넘을 월越”의 합성어입니다. “한계, 표준, 상식 등을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서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乖離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힘겨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다 한번쯤 일어났으면 너무나 좋겠다며 바라고 있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처해 있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에 전혀 상관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이 이상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힘겨운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초월만 추구하는 극단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포월匍越은 “기다 또는 길 포匍”와 “넘을 월越”의 합성어입니다. “기어 넘는다.”라는 뜻입니다. 현실 속에서 만나게 되는 변화가 대단히 느리고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리는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고 싶은 여러 가지 힘겨운 경험과 인식을 단번에 뛰어넘기는커녕 오히려 안타깝게 여기며 끌어안고 낑낑거리며 기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 곧 인생에게 속한 영역입니다. 당연히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옷을 찾게 된 선녀가 냉정하게 나무꾼과 아이들을 버리고 그냥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된다면 초월超越입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문제로부터 순식간에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던 옷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이 들 대로 들어버린 나무꾼은 물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함께 살게 된다면 포월匍越입니다. 당장이라도 마음에 작정만 한다면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다는 유혹을 과감하게 떨쳐버리고 현실이라는 바닥에 배를 깔고 치열하게 포복하면서 살아내야 하는 삶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희생, 헌신, 후회, 갈등, 혼돈, 낙심, 절망 등의 감정들이 무질서하게 혼재混在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과 갈등이라는 복잡한 감정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힘겨운 삶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루하루가 예측하기 힘든 치열한 싸움입니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포월은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역시 포월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지으신 세계를 탁월한 섭리와 누구도거부할 수 없는 절대 능력으로 다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일 마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힘겨운 현실을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아니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초월해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초월을 간절하게 바라거나, 초월을 시도 때도 없이 꿈꾸거나, 아예 현실로부터 떠나서 초월해 계시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무거운 인생 짐을 이고, 지고, 가슴에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짧은 인생 전부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가슴에 품었던 사람들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까지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역사 이래 단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선포하셨던 바로 그 방법 곧 성육신, 고난, 죽음으로 점철된 느리고 힘든 길을 기어가셨습니다. 당신에게 사명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마침내,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 속으로 몰아넣는 죄를 넘으셨습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초월, 당신이 세상에 나타나셔야만 했었던 궁극적인 목적인 진짜 초월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포월은 여전히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과 벌이는 치열한 전투입니다. 사탄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거룩한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 절망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는 인류를 위한 빛과 소금과 파수꾼으로 부름 받은 저와 여러분은 힘겨운 현실로부터의 완벽한 초월보다는 고달프고 눈물 나는 현실을 품고 오롯이 살아내야 하는 포월을 추구해야합니다.
마치 기어가는 것 같이 느리고 또 느리다 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된다 할지라도 주어진 삶을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살아내기 위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말이 아니라 삶으로 “제가 당신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바로 그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너무나 다릅니다. 절대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초월을 꿈꿉니다. 사모합니다. 이유를 불문하고 가족 모두가 대를 이어서 잘 살아야합니다. 무병장수해야합니다. 모든 일이 술술 풀려야합니다.
형통해야합니다. 모든 소원이 빠짐없이 이루어져야합니다. 지극이 이기적이고 탐욕으로 채워져 있는 자아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목사라는 이름을 가진 장사치들이 조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살아내신 포월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습니다. 심지어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고,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어도 포기하지 않고 너무나 느리기 만한 포월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믿음의 사람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정죄하기도합니다. 초월이 무조건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비와 초월을 뺀 기독교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면에서 초월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간절한 마음으로 초월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이 초월로만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초월로 채워진다고 해서 믿음이 견고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할 하나님이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여러 가지 수단들 가운데 하나로 전락할 가능성도 대단히 높습니다. 지난주에 이미 성민 이스라엘의 경우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어떤 삶을 추구하십니까?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힘겨운 현실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는 초월입니까? 아니면 현실이 비록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어렵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앞서가셨던 길을 오롯이 따라가는 포월입니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17:7)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Joshua는 아말렉과 벌이게 될 전투를 위해서 군사 선발권을 위임받을 정도로 남다른 믿음과 용기로 무장한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가나안을 살펴보기 위해서 각부족의 대표로 선발된 열두 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에는, 가나안 땅 완전 정복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외치는 열 명과는 달리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그는 “올라가자! 올라가서 취하자! (얼마든지) 점령할 수 있다.”(민13:30b)라고 외치는 동료에게 가려졌습니다. 이후,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초월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모세의 무지막지한 그늘에 완전히 가려졌습니다. 그의 행적을 찾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가끔 모세의 시종侍從으로 언급되고,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만나고 떠난 성막을 지켰고, 모세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했다는 것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야말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만년 2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을 도맡았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완벽한 역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지워져 있었던 그를 모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낙점해 주셨습니다. 비록 초월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름도 없고, 빛도 없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자리라 할지라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켰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지도자의 능력이 거의 사장死藏되는 상황에서도 묵묵히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민16:3b),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노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16:12b-13)라는 증거대로, 다수의 지도자들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 한 분만 알아주면 된다는 믿음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행사했던 모세에게조차도 대단히 버거운 존재로 여겨졌던 성민 이스라엘 때문에 두려워하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당신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보지 말고 믿음으로 가나안을 향해서 진격해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친히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앞장서 주셨습니다. 가나안을 향해서 진격해 들어가셨습니다.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전술과 전략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이끌어주셨습니다. 그가 한 일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다 보니까 어느 틈엔가 전쟁이 끝나 있었습니다. 가나안 온 땅에 하나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신을 가슴에 끌어안고 치열한 전쟁을 치러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혁혁한 공적을 세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자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고의 지도자로 자리를 굳힌 자신을 찾아와서는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산지를 이제 달라는 동료의 당돌한 요구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졌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수24:15a)라고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을 직역하면 “만일 너희의 눈에 악하다면”입니다. “내키지 않거든”(RSV),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거든”(NIV) 등으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나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실과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의 말에는 자신이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섬겨온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인생 전체를 쏟아 부은 사람으로서의 당당함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가져야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는 또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24:15b)라고 촉구했습니다. 여호와는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 정도가 아닙니다. 다른 많은 신들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탁월하고 출중한 능력을 갖춘 분 정도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한 분만 홀로 참 하나님이십니다. 유일唯一한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신7:7)라는 증거에 따르면,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크게 기뻐קשׁח(하솨크)하셨습니다.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갈망하셨습니다. 매달리셨습니다. 연연하셨습니다. 완전히 반하셨습니다. 사모하셨습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사랑하면 그러하듯이 전전긍긍하셨습니다. 하늘을 울릴 정도로 간절히 부르짖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지옥 같이 고통스러웠던 바로의 압제와 노예 생활로부터 건져주셨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해주셨습니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소중하며 특별한 소유סגלה(세귤라)로 삼아주셨습니다. 당신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완벽한 하나로 결합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이미 부족과 민족과 고대 국가를 이루고 있던 나라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수가 남달리 많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은커녕 아직 부족조차도 이루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숫자도 턱없이 적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명령의 순종해서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이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 그야말로 지극히 연약했을 때 은혜로 선택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불신앙으로 광야를 방황하던 그들을 40년 동안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습니다. 은밀하게 다가와 취약한 부분만 골라서 공격하는 원수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셨습니다.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며 또 소중하게 여기는지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내 영광과 이집트와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들을”(민14:22)이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베풀어진 여호와의 능력을 충분히 경험하고서도 눈만 뜨면 거역했습니다.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한낱 돌, 나무, 쇳조각 등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처럼 섬겼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했습니다. 마치 습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시로 반복했습니다.
입으로는 성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랑하면서도 불신앙으로부터는 돌아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고사하고 일말의 양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광야에서는 물론 철병거로 무장한 가나안 족속을 완전 정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불신앙적인 행동을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다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무수히 경험했던 초월이 아니라 포월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비록 당장 그들의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느리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포월을 보여주었습니다. 임종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까지 여호와께서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은혜들을 일일이 나열했습니다. 성실과 진정 곧 잡다한 생각을 완벽하게 버린 순수한 마음과 온갖 시험과 유혹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으로 하나님 한 분만 섬기라고 촉구했습니다. 어중간한 태도를 단호하게 배격하고 우상을 섬기든지 아니면 여호와를 섬기든지 확실하게 결정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중간한 중립지대 곧 회색 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양쪽을 다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은 각종 우상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우상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특히, 그는 성민 이스라엘에게 결단을 촉구한 직후 지체 없이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c)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는 선동이나 위협이 아닙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신앙 고백입니다. 삶을 통해서 확실하게 체득體得한 진실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실과 진정이 담겨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전심全心으로 쏟아놓은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성민 이스라엘이 어떤 결단을 하든지 전혀 상관없이, 민족 전체가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그것에 지극히 작은 영향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조금도 지체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은 상태에서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포월과 함께 초월로 채워져 있는 자신의 삶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전부가 한 마음으로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신 여호와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할지라도 자신과 자신의 만큼은 여호와 한분만 섬기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를 아니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내신 분이 바로...여호와이신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우리 눈앞에서...큰 기적들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우리가 이리로 오는 도중에 시종 지켜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 줄곧 지켜주시지 않으셨습니까?...그러니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수24:16b-18a)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로부터 자신들 역시 여호와 한 분만 섬기겠노라는 고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바로 그 대답이었습니다. 기고 또 기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기었습니다. 평생 그렇게 기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새 경계를 이미 넘어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머물러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멀게만 보였었고 또 어렵게만 보였었던 경계를 이미 넘어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는 별로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뻘 밭 같은 힘겨운 현실의 밑바닥을 기어가고 있었는데 이미 넘어섰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넘어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都鐘煥는 “담쟁이”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가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담쟁이는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떡 하니 나타나서 가로막고 있는 벽 앞에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말없이, 천천히, 그렇지만 보란 듯이 오르기 시작합니다. 절망을 완전히 덮어버릴 때까지 오르고 또 오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담쟁이 잎 하나는 마침내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절망의 벽을 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친히 보여주셨던 성육신의 신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영원한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저주의 벽을 포월匍越하셨기 때문입니다.
담쟁이처럼 저주의 벽을 기고 또 기어서 기어코 넘으셨기 때문입니다. 수천, 수만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영혼들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곧 하나님의 교회가 반드시 갖춰야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41:10)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임재와 동행을 점층법을 통해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강조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반드시 임마누엘 하고 동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약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지키기 위하여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나타나셨습니다. 포월 하셨습니다. 속도를 숭상하는 세상이 어리석다고 비웃고 조롱하던 바로 그 방법으로 생명을 싹틔우셨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보폭으로 벽을 기어오르고 또 올라서 마침내 넘고 마는 담쟁이처럼 포월匍越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무엇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동행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고해 같은 인생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절망을 뛰어넘는 복된 삶,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어떤 삶을 사는지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복된 삶,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주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