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고전 15: 19-26, 부활 주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과 정교회 등, 국내외 전 세계 교회가 오늘을 부활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전통에 따라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절기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절기로서 부활절 이야기가 기독교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전하는 모든 메시지의 핵심도 바로 예수 부활입니다. 그런데 막상 부활이 무엇인지 설명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사셨고, 따라서 그를 믿는 우리도 죽음 다음에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정답을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런 대답 자체가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게 가능한지, 다시 산다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인지, 아직까지 다시 살아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질문할 게 수없이 많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과 영지주의
초기 기독교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인 고전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전15: 5-8절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게바,열두 제자, 오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이 그들입니다. 이 목록에 따르면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숫자는 오백여명쯤 됩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숫자의 이들이 초기 기독교의 핵심 구성원이었겠지요. 이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중의 한 곳이 당시 그리스에서 잘 나가던 국제도시인 고린도입니다. 이 교회에서 부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고전 15: 12절에 따르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좀 이상하지요? 교회는 당연히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데,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말입니다. 12절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다음 구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13-15).
여기서 반복되는 문구는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바울과 논쟁하고 있는 대상들은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부정하는 겁니다. 이들은 영지주의 신자들로서 신플라토니즘의 한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영지주의(Gnosticism)를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켜보려고 했습니다. 이런 시도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초기 기독교에서 큰 세력을 떨쳤습니다. 영지주의는 철저한 영육 이원론에 입각해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합니다. 영은 무한하고 육체는 유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이 육체적으로는 죽지만 영적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소위 영혼불멸설입니다. 이들에게는 죽음이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영혼이 자유를 얻는 사건입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청년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약사발을 받으면서 이웃집에서 빌린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다는 겁니다. 육체적 죽음을 초월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영지주의 신자들은 육체로는 죽지만 영혼으로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죽은 자의 부활’은 없다고, 이미 지금 영적으로 부활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영지주의자들과 바울의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습니다. ‘죽은 자’라는 개념이 차이라고 하면 차이인데, 그 차이라는 것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헤칠 염려는 없으니 그런 차이만으로 너무 크게 대립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차이를 대충 봉합하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단 논쟁에 이를 만큼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가현설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지닌 분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정통 교부들은 가현설을 이단으로 규정했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영지주의 신자들 사이의 논란도 이런 전체 신학 논쟁이라는 구도에서 벌어진 겁니다. 여기서 핵심은 죽음을 얼마나 실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살짝 비틀어서 피하고, 정통 기독교는 정면으로 부딪쳤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를 보십시오. 죽음을 영혼의 해방으로 여긴 헬라 철학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전체 실존이 파멸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두 장면만 소개하겠습니다. 첫 장면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예감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땀방울이 핏방울로 보일 정도로 고통스런 순간이었습니다.
둘째 장면을 십자가에 달린 모습입니다. ‘목마르다.’는 호소도 하셨고, 급기야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자신의 사명이 실패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의 표출이지만, 그 안에는 죽음이 모든 것을 파멸시킨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죽음 문제를 영혼불멸설로 우회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래서 바울은‘죽은 자의 부활’을 반복해서 역설한 겁니다.
현대인들은 정통 기독교의 입장보다는 영지주의 입장을 따르는 경향이 강합니다. 죽음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실질이 아니라 관념으로 떨어졌습니다. 자신의 실존이 아니라 멀리 해도 좋을 상품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을 절대화하는 자본주의는 21세기 영지주의입니다. 돈을 버는 것으로 영혼불멸의 영생을 꿈꿉니다.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국가를 통해서 영혼불멸의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현대과학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과학이 발전하면 인간의 영생불사가 가능하다는 암시를 우리는 매일 받고 삽니다. 일종의 세뇌인데, 그게 반복하면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 외에도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믿는 구석이 있어서 죽음을 실질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중세기 유럽 사람들의 경구는 속된 표현으로 ‘재수 없어’하는 식으로 처리됩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죽음은 무슨 죽음, 합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2천년 만에 다시 현대판 영지주의와 투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첫 걸음은 죽음을 피하지 말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직시할 것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보다 약간 뒤로 간 고전 15: 55절에서 호 13: 14절을 인용하면서 ‘사망아 너희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죽음이 최종적인 승리자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심장을 작살내는 화살과 같습니다.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해체됩니다. 마음을 두고 있는 모든 것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몇 년 전에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뇌경색 증상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뇌사 상태인지 어떤지 아직 생사도 비밀에 붙여 있습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그분의 형인 이맹희 씨와 사이에 가족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부자들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며, 그 죽음 앞에서는 천문학적 재산이 무용지물입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 수고했던 것들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요즘 총선을 앞두고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많은 이들이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듯한 행동을 보입니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대통령 했던 분들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저런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죽음이라는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함으로써 여러분을 종교적으로 위협하거나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것뿐입니다. 이런 죽음의 현실을 직시할 때만 역설적으로 이 세상에서 참된 위로를 얻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눈에 들어옵니다.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재앙과 불행을 만난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앙과 불행 자체보다 더 큰 재앙이자 불행입니다.
부자가 죽지 않고 천년만년 부자로 산다면, 그리고 독재자가 죽지 않는다면 가난한 사람과 독재자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하나도 예외 없이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그 어떤 불행도 영원하지 않으며, 그 어떤 행복도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아 사실을 직시하는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교만하게 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승리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믿습니다.
생명 경험
여기까지만 말하면 철학이나 인문학 수준의 이야기가 됩니다. 바울이 말하는‘죽은 자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 담겨 있는 전혀 새로운 영적 시각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바울은 단순히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합니다. 죽음의 현실에서 부활의 현실로 달라지는 기독교인의 운명을 가리킵니다. 이런 운명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요? 고전 15: 20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바울은 여기서 죽음을 ‘잠’이라는 메타포로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생리적 현상인 잠이 죽음 자체는 아닙니다. 잠든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동이 정지되었다는 점에서 죽음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잠자는 자’는 곧 ‘죽은 자’입니다. 21-22절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하는 것으로 죽음과 부활을 설명합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죽음이 인류에게 들어온 것처럼 한 사람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이 인류에게 들어왔다고 말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머리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죽음이 아담을 통해서 들어왔다는 말은 일단 인간에게 죽음이 가장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사건이니 그렇다 치고, 부활은 아직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아직은 현실이 아닙니다. 23절에 따르면 부활은 그리스도에게만 현실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사태를 가리켜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종말에 부활의 현실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이 과연 옳을까요? 그게 자연과학적인 차원이나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도 옳을까요? 바울의 주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옳은지 아닌지를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고유한 부활 경험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바울의 모든 진술은 앞에서 부활 목격자 목록에 나왔듯이 예수 부활에 대한 경험이 전제 됩니다. 시(詩)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걸 쓴 시인의 경험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바울의 이런 종교적 진술도 그의 부활 경험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대는 나의 태양!’이라는 문장은 사랑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저 문장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바울의 부활 경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변은22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삶을 얻는 것이 곧 부활입니다. 삶이 따로 있고 부활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즉 생명이 부활입니다. 바울을 비롯해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이런 생명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예수는 부활했다.’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살아있으니 이것도 부활이냐,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중요하기는 하나 이것 자체가 부활은 아닙니다. 이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통과한 이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바울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극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다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과도한 욕심으로 살아가는 것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순간에 생명 충만감을 느끼는지를 질문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느낌이 영혼에 가득한 순간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십시오. 어떤 순간인가요? 사람들이 기뻐하는 순간을 손가락에 꼽으면 대충 답이 나올 겁니다. 소원하던 것이 이루어지거나 뜻밖에 기쁜 일이 일어난 순간, 또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거나, 존재의 한 순간(Augenblick)을 포착하고 빠져들 때 생명 충만감을 느낄 겁니다.
크고 작은 순간들이 많긴 하지만 모든 순간이 생명 충만감으로 다가오지는 않을 겁니다. 이러 저런 자극을 받는 순간은 많지만 생명 충만감은 드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한 생명 충만감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말, 그의 행동, 그의 태도와 그의 운명 전체에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 충만감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 생명체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피력했듯이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고백하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고백을 양심적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그리스도의 강림 순간을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