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矜恤의 結果 약二章十三節 宮井夕
有物有影, 有聲有響. 人之行亦然, 貶人受貶 讃人來讚. 非但應于現世 亦應于來世. 可不愼哉! 或云一死者無事 瀆則投身㤪則自絚, 果無報于後世乎? 自殺与殺人無異, 殺人而果無報乎? 或云 人不見則 犯亦無罪云, 人之犯罪 多在于此. 故犯人之利 犯人之權 甚忌. 犯法犯神 是果無報于後世乎? 或云犯者 在下者之事 非同在上. 故法之不行 自上犯之云 是也. 在上者無可審之人 甚錯之. 然則 秦皇漢武 何故死亡也?
神之公義 必有審判, 今世何人 不立于其前者乎? 今言矜恤, 能免審判云 何意? 此公審 人不能免. 金錢不能免, 學識地位 皆不能免. 惟矜恤者能免, 矜恤之要 有用來世 人當貴守.
矜恤有兩種, 一施恤 一被恤. 主祈文曰 我免人負, 不寧惟是 見貧者弱者病者 吾當發悲施恤. 來今城逢賊者 恤之請蕩 百兩者 不恤者 罰之. 深山逢佛不救爲罪 慈悲者福必受慈悲. 人之善行多 而慈善爲㝡, 能免審判故也.
其次 被恤. 人皆有罪 後至坮前 主代言曰, 彼信我血 而贖之 罪雖當罰 蒙血之功 而赦之. 主祈文曰 乞赦我負是也, 是無功而受. 我施恤 而能被恤. 矜恤之功 豈非大乎?
今世甚無慈悲. 於電車特見 倒負兒之婦 而欲上者 扶供持上 不欲許入者, 到處有毆血亂鬪者 皆無恤之病. 少女頃喫酷使 雇傭者不信雇錢者, 亦皆無恤之病. 主說紅袍乞人之譬 又言山羊綿羊之譬. 皆欲施恤德 而言恤德 是天國之物, 故行恤者 無罰. 世罰猶難, 況天罰乎? 便敎無恤德 互相分黨殺人 如魔今人醱突. 有恤德 是文明之國. 不知恤者 不能保國, 況免永罰乎?
033. 긍휼(矜恤)의 결과 / 야고보서 2:13 궁정교회 저녁예배
물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소리가 있으면 울림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도 그러하니 남을 폄하(貶下)하면 폄하를 받고, 남을 칭찬하면 칭찬이 돌아옵니다. 비단 이 세상에서만 그런 반응이 있는 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역시 보응이 있습니다. 가히 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이 말하기를 한 번 죽으면 그만이라며 명예가 더렵혀지면 몸을 던지고 원한에는 스스로 목을 맵니다, 과연 후세에 보응이 없겠습니까? 자살은 살인과 다름이 없는데, 살인하면 과연 보응이 없습니까? 혹 말하기를 남이 보지만 않으면 범행도 역시 무죄(無罪)라 하니, 사람의 범죄가 이로서 많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범인의 이익과 범인의 권익이라는 것은 심히 꺼려야 합니다. 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어기면 그 결과에 대한 보응이 후세에 없겠습니까? 혹은 말하기를 범죄라는 것은 지위가 낮은 아랫사람의 일이라 높은 사람에게는 같지 않다고 합니다. 지위가 높은 자에게는 법이 집행되지 아니하기 때문에 위에서 범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높은 사람에게 심판이 없다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랬다면 진시황(秦始皇)과 한무제(漢武帝)는 무슨 연고로 사망했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인들 그 앞에 아니 설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 긍휼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심판을 면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공의의 심판은 인간이 면할 수 없으니, 금전으로도 면할 수 없고, 학식이나 지위도 모두 면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긍휼자만이 면할 수 있으므로 긍휼의 요구는 내세에 유용하므로 사람이 마땅히 귀하게 지켜야합니다.
긍휼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베푸는 긍휼이요 하나는 받는 긍휼입니다. 주기도문에 내게 빚진 자를 사하여준다 라고 했는데, 단지 이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 약자, 병자를 보면 우리가 마땅히 불쌍히 여기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금방 도성에 나가서 100량의 탕감을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아니 베푼 못된 자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깊은 산 불상에 가서 죄에 대해 구하지 아니하여도 자비를 베푸는 자는 반드시 자비의 복을 받습니다. 사람의 선행이 많지만 자선(慈善)이 제일이니, 능히 심판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받는 긍휼입니다. 사람은 모두 죄가 있어 훗날 심판대 앞에 이르면 주께서 대언하시기를, 저 사람은 내 피를 믿어서 속죄되었으니, 죄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지라도 피의 공로를 입어 사죄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내 빚의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이것이니, 이는 공로가 없이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긍휼을 베풀면 능히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긍휼의 공이 어찌 크지 않습니까?
지금 세상은 너무나 무자비합니다. 전차(電車)에서 특별히 보면 아이를 업은 부녀자가 넘어지면서 타려는 것을 도와 올리는 자와 이를 허락지 않는 자가 도처에서 피를 흘리도록 난투하는 것은 모두 긍휼이 없는 병폐입니다. 소녀가 혹사를 당하여 고용자가 고용인을 불신하는 것도 역시 긍휼이 없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또 염소와 양의 비유를 설교하셨습니다. 모두 베푸는 긍휼의 덕을 바라심이니 이는 천국의 물정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베풀면 징벌이 없습니다. 세상의 벌도 받기가 오히려 어려운데, 하물며 하늘의 징벌은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긍휼의 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서로 당을 짓고 살인하니 오늘의 사람들은 마귀와 같이 악을 마구 빚어내고 있습니다. 긍휼의 덕이 있으면 이는 문명의 나라이지만 긍휼을 모르면 나라를 보전할 수도 없는데, 더구나 영원한 징벌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