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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2장 12-19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시여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종교지도자들의 명령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시기도 하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뜻은 의도 자체는 다를지라도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한 당시 대제사장으로 있던 가야바의 말과 같습니다. 즉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죄를 위한, 그러나 모든 자가 아니라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화목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내놓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때가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장소는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베다니 지역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향유를 부은 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라는 전제 아래 이제 유월절을 이틀을 남겨 두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이적으로 말미암아 큰 은혜를 받은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함께 하였습니다. 마르다의 경우는 잔치를 위한 일을 했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습니다. 이때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자기 머리털로 발을 닦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 무엇까지 담겨져 있는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부활이요 생명까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안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것이지만,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실 것이요, 나아가 그를 믿는 모든 자가 부활이요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마리아의 향유 부은 사건 안에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했던 제자들은 마리아의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가룟 유다의 경우 비싼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합당한 것인 양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에 모든 제자가 동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말과 그의 마음은 전혀 일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말 자체는 선한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돈의 일부를 훔쳐갈 악한 뜻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행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시는데, 바로 자신의 장례할 날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으시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이제 때가 되어 자신을 내놓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세 번이나 알리신 제자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알게 하셨습니다. 조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값비싼 향유조차 그를 위해 부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일에 대하여 결코 허비하거나 낭비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에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300 데나리온의 가치밖에 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것 중 가장 값비싼 것을 드렸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은 한번으로 족합니다. 마리아를 따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가난한 자를 돌볼 것을 말씀합니다. 마리아의 일에 대하여는 귀한 것으로 여겨야 하지만, 이후로는 너희가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와 관련된 사건과 달린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다가 나타나신 때가 유월절 엿새 전입니다. 그리고 이틀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명절날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느냐, 올라오지 않느냐로 이런 저런 말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그때 명절에 올라갈 것을 밝히신 듯합니다. 바로 그 소식이 많은 사람에게 전달이 되었던 겁니다.
13절 이하 15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매우 요약적으로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한복음은 유월절에 대한 언급을 세 번이나 합니다. 또 다른 명절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율법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유월절에도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분위기는 다른 모든 명절과는 다르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 예로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초막절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요7:11). 그러나 예수님을 찾는 목적은 그를 환영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1절에서 밝힌 것처럼 예수님을 죽일 마음으로 그를 찾았던 겁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환영하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환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의하면 이렇게 된 것이 나사로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것을 밝히지 않지만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고, 또한 무리들도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 온 무리가 예수님께서 유대의 명절인 유월절 날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예수님을 환영했던 겁니다.
여기서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이했다는 것은 새로운 왕을 환영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표시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외치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시118:25-26) 여기서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이 ‘호산나’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근거한 것이고, 그 일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할 자가 오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하던 그 메시아가 오셨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를 왕으로 환영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온 큰 무리가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이하고 있습니다. 맞이하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이제 우를 구원해 주시기를 외칩니다.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고 말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가 구약에서부터 예언해 오던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입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왕은 어떤 왕입니까? 구원해 달라고도 하는데, 도대체 그들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의 구원입니까?
요한복음 6장을 살핀 바 있지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이적을 보고 경험한 자들이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요6:14).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예수님께로 가서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떠나 가셨습니다(요6:15). 심지어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오병이어와 관련하여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심, 하늘에서 내려온 떡임을 밝혔습니다(요6:35,51). 그러나 그 말씀의 어려움으로 인해 그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요6:66).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왕이 저들이 바라고 있는 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가 저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들이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왕, 메시아는 간단하게 말하면 정치적인 왕이요, 메시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에서 알려진 것처럼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그들을 해방하여 다시금 다윗 왕국과 같은 그런 나라를 지상에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있지만,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주를 맞이하고 있지만, 결국 저들의 외침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메시아의 차이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밝힙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 둘에게 명하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도록 하신 것까지 밝히는데,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타신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나귀 새끼인 것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구약에서 인용한 말씀은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는 어떤 왕인가? 공의로우십니다. 구원을 베푸십니다. 무엇보다 겸손하십니다. 겸손의 상징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다고 기록합니다. 이어지는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도 기록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다, 전쟁하는 활도 끊겠다는 것은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한다고도 말씀합니다. 이런 통치가 어디까지 이르는가? 땅 끝까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스가랴 8장에서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말씀하시고, 9장에서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도 말씀하시지만, 바로 그 장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느냐? 한 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오늘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왕이란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 그런데 겸손한 왕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참된 화평이 증거 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스가랴를 통해 말씀하시는 메시아, 장차 오실 왕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해하는 그런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물론 공의롭다는 것, 구원을 베푼다는 것, 심지어 겸손하고 평화를 베푸는 것까지 일반적인 왕으로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겸손하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탄다는 것은 일반적인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왕의 모습이라면 말이나 병거, 마차를 타고 화려한 모습으로, 강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왕이 아니란 것입니다.
마태복음 설교 때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이때 겸손이라는 단어의 뜻 안에는 ‘가난한’, ‘고통스러운’, ‘약한’, ‘비천한’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 겸손하다는 것은 세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난할 수밖에 없고,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런 만큼 약하고 비천한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화려함과 강함을 가지고 있는 그런 왕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사실을 무엇을 통해 보여주는가?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호산나를 외치는 자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나귀 새끼를 타시는데,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왜 보이지 않습니까? 이미 자기 생각 안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는 메시아는 이런 분이다. 내가 바라는 왕은 이런 분이다. 즉 저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정치적인 메시아, 정치적인 왕의 입성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생각과 다른 왕임을 친히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기록했을 때 그 말씀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상의 허세와 부귀와 영화와 거리고 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과 관련해 마태복음 주석도 언급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그 나라는 땅의 나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 세상의 일시적인 부(富) 안에 세우진 것이 아님을 교훈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방법을 택하신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비천한 신분이 우리가 이 광경 속에서 그의 영적 나라를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왕들의 온갖 치장으로 호화롭게 꾸미시는 것보다는 거지와 같은 가련한 모습으로 그를 꾸미셨다는 하늘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호산나를 외친다고 해서 같은 의미의 호산나가 아닙니다. 이제 구원해 달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같은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런 메시아가 아닐 수 있습니다. 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세상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까? 성경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말씀합니다(요6:26). 이적 자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적을 통해 알리고자 하시는 바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적을 보면서 놀라긴 하지만 정작 그것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철저히 세상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을 찾고 구하고 소망할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런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히 기복주의 신앙은 다름 아닌 오병이어를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임금 삼으려는 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 임금이 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분명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지금도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또한 그분은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삶을 윤택하게 하는 왕, 힘들고 어려운 세상 삶에서 구원하실 그런 분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원수가 되게 했기 때문에 원수 된 그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먹고 배 불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먹고 마시도록 하기 위해, 달리 말하면 그분은 믿도록 하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이제 죽으시려고 하시는 겁니다.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기 위해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은 예수님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로 환영할 뿐입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구원할 분으로 환영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윗 왕국의 실현을 꿈꾸면서 환영할 뿐입니다. 먹고 배부르게 될 것만 생각하면서 환영할 뿐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지금 죽으실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참되게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먹고 배부르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예수를 믿고 따릅니까? 그의 죽으심의 목적과 부합합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죽으셨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즉 죄에 대하여는 늘 죽이며 살기 위해서요, 그런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 천국에 가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목적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면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물질을 모으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느냐?” 이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느냐? 얼마만큼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느냐?” 여기에 예수 믿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단순히 천국에 갈 목적으로만 살아서는 안 되고, 천국 백성다운 삶이 이 땅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고 구약의 예언에 따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말은 하지만,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서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왕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 자기가 생각하는 왕으로 여기고 그를 영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 1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먼저 16절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호산나’를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구원하소서”라고 말할 때 우리를 구원하실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 역시 저들과 하나 된 자로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까지 물었던 질문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지금입니까?”(행1:6)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회복하시는 것이 지금이냐고 묻는 것이 승천 하기 전 제자들의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하기에 오늘 본문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라고 할 때는 그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부활하고 난 뒤 곧바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부활 후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질문한 것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가르치실 뿐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욱 분명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 바로 앞에 질문하는 수준은 하나님 나라의 일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셨을 때 이 모든 것이 구약 성경을 이룰 뿐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사도들은 참된 믿음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이라 할지라도 성경에 무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에 있어서 무지할 수 있습니다. 듣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그들의 믿음과 직결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표적 자체는 더 이상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우리의 믿음과 직결되는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그 말씀을 말씀으로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깨달은 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라나도록 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밝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을 비춰주시는 것으로도 부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우리는 오직 성경을 고백합니다.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종교회의나 어떤 교회의 규칙보다도 오직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것들에 앞서서 주장되어야 하고, 다른 신학적인 주장은 오직 성경으로 검증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경이라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그것이 사람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은 성령의 도움이 없이 우리 눈은 가장 밝은 빛에서도 어둡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으로 하자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이와 같다면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의 사건으로 인하여 믿게 된 자들, 이제 믿음의 출발선에서 첫 발을 내딛는 자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17절과 18절을 보시면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고 기록합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든 것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금 살아났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을 본 자들이 있고, 그들이 그 사실을 말함으로 들은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그래서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아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말한 자들이 나중에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말한다면(눅23:21)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세상 임금 삼으려고 했던 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 예언 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을 여셨던 겁니다.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 자리로 나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보면서 더욱 적개심을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분명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의 모습은 자신들의 포고령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도리어 외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탓하듯 하기를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고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마치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것처럼 표현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로 있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적대적인 감정이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적대적인 감정만 가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적대적인 감정을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 뿐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따르기 때문에 이제는 인정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예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적대적인 것입니다. 그럼 환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본문 자체만 보면 외적으로는 환영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와 일치된 자로 있는가 할 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말하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산나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로마라는 나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지상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지상의 나라의 회복만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통해 알리고자 하신 뜻은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이요, 그 영광의 실체는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시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어놓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죽음만 있느냐? 죽음 이후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통해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 역시 이런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할 때 단지 강대국으로부터의 구원정도가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고,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할 때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제한 된 나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영적인 아들 모두를 의식한 이스라엘 나라의 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것을 말함으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것을 소망하는 자로 있게 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 가운데 힘써 싸워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만을 우리의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왕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의 다스림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만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말씀만을 우리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말씀의 뜻과 다른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과 일치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