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옥연의 수필세계
- 작은 틈새에서 빛나는 성찰과 응시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로그인
최옥연의 수필집 발간으로 ‘틈’이 중심적 화두로 떠오를 것 같다. 어쩌면 채우고 매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튼튼한 틈을 갖는 것이 아닐까싶다. 사이는 틈바구니다. 틈바구니는 경계다. 경계에 꽃이 필 수 있도록 경계와 경계 사이를 고민하는 최옥연 같은 사람이 많아야 사람과 사람 사이가 좋아진다. 이런 차원에서 최옥연의 이 수필집은 독자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는 존재방식에 대해 되짚어보게 하는 호소력이 짙은 작품들의 집합체라 하겠다. 작가의 시선은 이름도 빛도 없이 따스한 온기를 향기처럼 퍼뜨려 세상을 꽃피우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고, 작가가 채취한 언어들은 시골 온돌방처럼 따뜻한 온도가 느껴져서 좋다.
이 수필은 비유, 상징 등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문학적 의미와 울림으로 가득하다. 그 힘은 수필세계는 물론 작가의 사상과 철학을 효율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끝없는 인내와 묵묵한 도전의 작가, 최옥연은 이러한 문학적 표현 방식과 매우 친숙하다고 하겠다. 한국의 현대여성수필 중에서 이만큼 미적 울림통을 지닌 작품이 흔치 않다. 그것은 구조시학의 차원에서 한편으로는 모성원리를 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성찰이라는 수필 본질의 특성을 가져와 이 특성을 변증법적으로 통일시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할 때, 최옥연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모성성의 원리와 반성적 성찰이라는 축을 근간으로 해서 수필이라는 따스한 집의 벽돌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놓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최옥연은 2002년 『울산문학』 신인상, 2004년 『현대수필』에 「빈집」으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울산문인협회, 한국수필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에세이문예작가상, 한국에세이작가상, 2012년 『울산문학』 올해의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그녀의 삶이 문학과 교육 사이의 균형을 탐색하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녀의 수필은 모성의 향기가 서정이 되어 내면을 촉촉이 적시는 성찰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의 글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살아낸 이력서의 소중함을, 모성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청량한 눈과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는 차원에서 그녀의 틈새 미학은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1. 모성과 동행하는 그리움의 힘
그녀의 수필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승화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추구해 나간다. 문학적 기법을 통해 완성된 문예미학은 이 수필집이 가지는 고유한 미덕이다. 수필 속에서 작가의식의 깊이와 미적 울림을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본래성의 회복이야말로 철학자의 과제이고 또 인간의 근본적인 지향목표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의 어머니의 품은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대상으로서 본향을 지시한다. 최옥연 작가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백발이 된 머리카락과 더딘 걸음, 느린 말투로 오래된 시계처럼 다가온 어머니가 내 앞에서 주춤거린다. 태엽을 감아야 하는데 그럴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몸을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당신에 대한 측은지심을 기둥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괘종시계로 이관한 듯하다. 어머니가 멈춰선 시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계추처럼 쉬지 않고 살았던 청춘의 날들. 그 궤도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날들이었으니.
- <괘종시계> 일부
<괘종시계>는 시계의 밥을 주며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를 그리는 글이다. 이런 측면에서 최옥연 수필의 한 특성은 한마디로 모정을 향한 진한 그리움의 표백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자신의 심중에서 여울치는 어머니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문학적 그림자 형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움'이다. 작가적 현실 세계가 삶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보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키를 틀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문학적 향기를 발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수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괘종시계'와 '시계추'다. 이런 문학적 장치로부터 수필은 맛을 낸다. 작가는 ‘괘종시계’로부터 ‘어머니의 모습’을, ‘시계추’로부터 ‘어머니의 삶’을 건져낸다. 시계는 그녀에게 ‘어머니’를 상상하게 하는 매게체다.
오빠도 나도 더는 멈춰 선 괘종시계를 버리란 말을 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지 않는 시간에도 어머니에게는 태엽처럼 감긴 기억이 있다. 멈춰 선 시계에게도 그런 기억을 부여하는지 멍한 시선이 곧잘 괘종시계로 향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료한 어머니의 눈빛이 조금씩 살아난다. 한 곳에 고정된 시선이 고승의 그것처럼 깊다. 괘종시계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앉은 시골집 마루의 풍경이 아름다운 정물화 같다. 그 정물 속으로 뎅그렁뎅그렁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끼어든다. 노을이 기웃이 고개를 들이민다.
- <괘종시계> 일부
이 수필은 문맥의 곳곳에 놓여있는 비유로 인해 문학적 형상화가 빛난다. 수필은 감동과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다. 감동과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주제화를 위한 전개 과정이 논리성을 가져야 한다. 최옥연은 ‘괘종시계’와 ‘어머니의 삶’을 씨줄 날줄처럼 교차해가면서 형상화해가는 전략으로 독자를 사유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다. 인용된 결말부에서 보듯, 제재를 묘사한 대목에서 주제의식이 문학적으로 상상된다. ‘괘종시계를 바라보는 어머니가 앉은 시골집 마루의 풍경이 아름다운 정물화 같다. 그 정물 속으로 뎅그렁뎅그렁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끼어든다. 노을이 기웃이 고개를 들이민다.’라고 하면서 작가는 제재와 글감을 상관화시켜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한다. 이 수필의 문학적 성취는 그 느낌의 정서적 객관화에서 나온다. 이 지점이 독자를 감동과 깨달음의 길로 달려가게 한다고 하겠다.
새벽 시간에 가장 먼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이다. 마을 사람 누구도 물을 긷기 전에 하는 일이었다. 비닐에 정성들여 싸두었던 신발을 조용히 꺼내 신고 사뿐사뿐 우물로 가는 걸 종종 보았다. 그렇게 길어온 물을 대접에 붓는 모습은 경건했다. 봉창을 통해 몰래 보면서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할 만큼 정성스러웠다. 그 대접을 부뚜막에 고이 놓고 절을 하던 어머니. 선잠 깬 귀로 들어도 어머니의 중얼거림은 모두 자식을 위한 기도였다. 타국에 있는 아들들의 무사함을 빌었다. 잔병치레로 키가 덜 자라는 자식의 건강을 빌기도 했다. 험한 세상에 지치지 않기를 비는 기도도 모두 자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하면 나의 행위는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 몇 푼의 돈으로 마음부담을 턴 것만 같아 달아둔 등이 문득 민망했다.
- <등을 달다> 일부
객관적인 회상을 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찾아 바로 세우는 일이 바로 수필적 생활이다. 독립을 원하는 아들을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는 엄마의 심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풀어내되 아들의 어머니인 자신과 아들의 할머니인 자신의 어머니의 비교를 통해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재현해 낸 것이 공감의 확대를 가져왔다. 작가의 의도는 ‘아들의 부재’가 얼마나 작가의 젖은 슬픔을 무겁게 해주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어머니에게 ‘아들’ 이 어떤 존재인가를 이보다 더 진솔하게 표현한 글이 어디 있을까싶다. 작품 속의 이야기는 씨줄과 날줄의 얽힘처럼 작가의 정서를 이완과 응축의 절묘한 방식으로 조절된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어머니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자 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말이 없다. 넋을 놓고 있는 어머니를 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늘 동동거리며 빠르게 돌던 어머니의 시계태엽이 늘어진 듯 서글프다. 다 풀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이 언뜻 편안해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묶인 고를 풀어주고자 했던 일이 어머니의 삶에 대한 애착까지 풀어버린 건 아닌지 문득 겁이 나기도 한다. 복잡한 심경 중에도 굳이 위안이 되는 건, 두서없이 엉킨 실타래를 잘라내지 않은 일이다. 어머니의 삶을 아픔으로 묶었던 고를 하나하나 노래로 풀어낸 것은 잘한 일 같다.
- <고를 풀다> 일부
이 작품은 어머니가 늘 부르는 노래를 녹음하는 작가의 따뜻한 심성이 대상과 상호 삼투되어 동일시를 이루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공감과 감동을 주고 있는 수필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풀어내고자 하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그녀는 어머니가 평소 부르던 노래를 녹음하는 해야 만하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긴다.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작가의 눈이 사랑으로 그윽하다. 그 사랑을 절제된 정서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름답기만 하다. 인생에는 소중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사랑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에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귀한 것이 사랑이기에 그것이 결핍된 삶은 비참한 것이다. 이 작품의 가치는 수필적 화자가 갖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2. 자기성찰로 얻은 삶의 진실
수필을 쓰게 되는 일상적 삶의 구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최옥연은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도 또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를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작가는 이런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면서 깨달은 이야기를 수필화한다. 영혼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내고자 하는 과정이 없으면 수필은 쓰여질 수가 없으며, 자아와의 피나는 싸움이 없으면 수필작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틈이 크거나 작거나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을 거치게 되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결이 된다. 시간과 환경의 순기능이다. 사람관계도 사찰의 오래된 기둥과 같다. 이런 저런 사람과 섞여서 그 사이를 메워 나가는 것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 관계의 순기능이라 생각하다. 그러나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보니, 늘 움직이고 변하기 마련이라 처음처럼 일관되게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고운 말을 하면 누군가도 고운 말을 보내겠지 여겼다가도, 뜻밖의 상처를 받게 되면 더 깊은 틈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 또한 고운 결을 만들기 위한 담금질이라 생각는다.
<틈이 생길 때마다>란 수필은 추상적인 제재를 취했지만, 문학적 형상화가 대단히 잘된 작품이다. 상처와 갈등을 ‘틈’으로 치환한 것도 멋지지만, ‘틈’이 ‘결’이 된다는 인식과 ‘틈’을 시간과 환경의 순기능이라 의미화한 바도 놀라운 통찰력의 발휘하 하겠다. 평자는 사람과과 사람 사이에 대한 담론을 통해 삶의 부조화를 잘 승화시켜 헹궈낸 수필이라는 데에 주목하고자 한다. 더 깊은 틈 또한 고운 결을 만들기 위한 담금질로 보는 작가의 역설적 인식이 아주 멋지다. 변화무쌍한 인간심리문제를 문학적으로 풀어내어 형상적 의미화에 성공하고 있다. 현실 체험이 연상과 상상력을 만나 햇살 같이 밝게 빛날 뿐만 아니라 사과 속의 영양분처럼 사상이 문맥에 녹아있음으로 해서 이 작품의 주제의식, 즉 ‘틈의 필요성’이 독자에게 은근하게 전달된다. 통찰 결과를 미학적으로 재배열한 거라든지 치밀한 담론구조는 이 수필의 가장 큰 매력이다.
1도 없는 감정, 1도 없는 애정, 1도 없는 사랑이나 관심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1도 없는 무엇들을 감춘 채 사는 건지도 모른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만큼 불편하고 낯선 말이다. 쓰고 싶지 않은 표현이다. 1도 없다는 얄궂은 표현보다 때로는 대충, 많이, 적당히, 별로 등의 애매한 표현이 정겹다. 두루뭉술한 말이 답답할 때가 있다. 속에 숨은 의미를 생각해야 할 때다. 그래도 1도 없는 명쾌함보다 마음을 읽는 것이 아직은 편하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난산증(難算症)이 있는가 싶다.
-<1도 없다> 중에서-
이 수필의 우수성은 한마디로 대립항의 도입으로 인식을 보다 명징하게 보여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비교와 대조라는 수사적 기법의 기능에서 이 수필은 가치를 발한다. 작가의 시선은 서로 상충하는 ‘양적 평가’와 ‘질적 평가’의 대립항에 머문다. 주로 실증주의적 가치를 비판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녀의 내면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질적'이고 ‘정적’이다.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산술적 계산이나 평가에 작가는 도리질을 친다. 작가는 감정 표현이 객관화되는 것보다는 ‘두루뭉실’이라는 주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다. 이 수필의 맛은 단순히 작가의 시선이 정확성으로만 향하고 있거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애매성’을 옹호를 위한 반론적 성격을 띠어 사색이라는 자기 관조와 숫자화되는 우리 사회의 비정상성을 이겨내려는 의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첨단 시대인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복에 대한 감정만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었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 같았다. 이도 저도 아닌 추억과 현실의 어중간한 어디쯤에 놓였던 감정을 정리하며 노인을 돌려세웠다. 천 원 지폐 두 장을 발품 대신 건네며 조리는 받지 않기로 했다. 복은 사는 것이 아니라 짓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말과 밥이 복 짓는 일의 작은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복 짖는 일> 중에서
이 수필은 일상을 소재로 해서 정서와 그를 통해 획득되는 깨달음을 유감없이 기술한 글이다. 21세기에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 산다는 데 대한 반성을 통해 ‘복’은 사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수필의 이러한 고유 영역과 특성을 제대로 살렸을 때 그 글은 향기를 지닐 수 있다. ‘복은 사는 것이 아니라 짓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른다.’라는 작가의 진술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이 수필 역시 반성적 성찰을 축으로 하고 있다. 흔히 수필은 자신의 심적 나상이라고도 하고 독백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최옥연의 수필은 자신을 말하면서도 이야기에 초점을 두기보다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적 성찰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하겠다.
3. 평범 속에서 찾는 경이와 충격
문학의 가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의 추구에 있고, 그러한 삶의 추구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정신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정신 자세를 바로잡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도록 해야 한다. 작가는 이런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긍정마인드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일 것이다. 그리고 수필가는 이 같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와 명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미적 형상화 차원으로 고양되지 못하면 신변잡사에서 맴돌게 된다. 최옥연은 이런 삶의 문제를 경이와 충격 속에서 풀어내어 공감을 유도한다. 인성적 통찰력이 돋보이고, 작가 자신의 태도를 실존적 삶의 수준까지 보여준 점에서는 그녀의 제재통찰이 평범 속에서 본질 차원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하겠다.
굳이 말을 만든 이의 뜻까지 헤아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부정보다 긍정으로 나타내면 되지 않을까. 말은 행동을 지배한다. 말하는 습관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도 한다. 좋은 습관을 들이려면 어릴 때부터 듣는 말이 밝고 고와야 한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아이가 그런 말을 쓰는 어른이 된다. 언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말의 효용성은 자주 쓰는 말에서 이해하게 마련이다. 청소년들의 말에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거칠고 험악한 말을 표정의 변화도 없이 하는 아이들. 암호 같은 은어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언어사용 설명서가 필요한 말이지만, 또래들만의 세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헤집고 싶지는 않다. 세대분리욕구로 뭉친 말이어도 좋다. 다만 좀 더 밝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말이기를 바랄 뿐이다.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먹먹하게 하는 가슴 뭉클해지는 문구도 있다. ‘느려서 죄송합니다.’, ‘위급상황에 아이를 먼저 부탁합니다.’ 등은 모두에게 감정 이입되는 좋은 말의 방점이다.
- <언어사용설명서> 중에서
위의 작품도 삶의 체험에서 얻은 언어사용의 중요성을 작가답게 전달하고자 한다. 상식대로 돌아가는 진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보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재해석하는 것은 수필창작에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의식 한켠에 속해 있는 체온보다 더 뜨거운 것으로 자리했던 감동을 주는 말을 되살리는 것이라 하겠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져진다고 하지 않는가. 마음 깊숙이 꽃힌 온도가 느껴지는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언어사용설명서라는 제목도 멋지다. 그렇다. 세대분리욕구로 뭉친 말이어도 좀더 밝은 언어였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통해서 작가는 우리 사회의 오염되고 저급한 말은 추방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가끔은 어디에 제출하기 위해, 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이력서를 써 보는 것도 괜찮다. 적다 보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 제출용 이력에서 떨어진 시간들을 챙겨본다. 추수들판의 이삭 같은 것들이다. 굳이 예쁘게 포장하지 않아도 절로 반짝이던 시절이 적힌다. 절망으로 꺾인 무릎을 힘주어 세웠던 순간도 새기듯 적는다. 앙버팀의 순간들인데 이젠 이를 악물지 않아도 된다.
- <나만의 이력서> 중에서 -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진솔한 내면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필은 자조의 문학이다. 자기 정체성의 확인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작가는 자기 이력서 쓰기가 성찰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문학적 향취가 풍겨낸다. 문학의 감동이란 결국 신선한 사유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다. 그것이 연상과 상상의 작용으로 이미지화될 때, 문학적 감동이 찾아드는 것이다. ‘이를 악물지 않아도 된다’라는 진술 역시 살아온 날들보다 날아갈 날들이 적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적절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원칙이나 형식보다 더한 것이 마음의 흐름인 것 같다. 길지 않은 세월동안 가족에게 곡진했던 삶도 당신의 자리에서 나름으로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시어머니의 바람직한 문화 방향은 일회용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속성 속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리라. 당신의 삶이 장롱에 묻어 내게로 왔듯 나의 삶이 내 아이에게로 이어지게 하고 싶다. 시어머니의 장롱이 만들어온 반백의 이야기를 온화하게 다시 이어가고 싶다.
거실 벽면에 장롱의 자리를 정하고 걸레질을 했다. 시어머니와 나와의 거리가 좁혀지는 시간이다. 반질반질한 장롱을 놓고 보니 처음부터 제 자리인 양 어색하지 않다. 철이 바뀔 때마다 계절 옷들이 드나들 것이다.
<장농이 놓인 자리> 중에서 -
수필은 성찰의 문학이다. 가장 독자의 공감을 받는 부분이 성찰의 자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롱의 역사를 이어받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발상이 가상하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처럼 최옥연은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무엇보다도 깨달음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스럽게 확대시키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특별히 무엇이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아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만 해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작가는 시어머니의 역사를 품고 있는 장롱을 닦으면서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독자에게 일러두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4. 비움의 실천을 통한 우리-되기
수필의 구조적 특성 중 하나가 화해해결구도이다. 수필은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는 거와 같다. 최옥연의 수필이 거처하는 또 하나의 공간은 비움과 나눔의 공간이라 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진정한 자아의 영토에서 낮추는 작가다.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작가다.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칼칼하게 붓으로 멋지게 씻어내기 때문이다. 모든 수필가가 지녀야 하는 공통적 요건 중에 하나가 대상을 바라보는 측은지심의 안목이라면, 이런 요소는 최옥연 수필에도 풍성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가 긍정적인 마인드로 우리-되기 차원에서 대상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터전이라고 만든 곳이 과연 내 것인가. 어쩌면 나보다 먼저 자리 잡고 살았던 새들이나 동물들을 잠시 생각했다. 그들이 마음껏 노닐 수 있는 곳을 내가 주인이란 이름으로 차지한 것 같아서다. 사람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지낼 그들의 터전을 뺏기라도 한 듯 미안해진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누리고자 하는 욕심에 그걸 잊고 사는 때가 많다. 연통에서 한가득 쏟아진 검정과 부서진 새집을 밭에 버렸다. 어차피 사람의 손길을 탄 집이니 새가 깃지 않을 것이다. 검정을 묻힌 채 동그란 새집이 바람에 날린다. 새가 연통으로 들지 못하게 철망으로 막자는 임시방편도 생각했다. 언제 또 새들이 품속처럼 아늑한 곳이라고 날아들어 집을 지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산다> 중에서 -
자연 속에서 겪었던 작가의 생태의식이 그려져 있는 글이다. 작가는 몇 년 전 인근에 밭 한 뙈기를 장만하고, 비닐하우스를 만들었다. 연통을 청소하다 새집을 발견하고 공존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오늘의 인간이 문명을 형성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타자와의 공존의 삶을 살아왔는가에 답하는 과정이 인간중심주의보다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우리 기억의 한켠에 속해 있는 인간중심주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며, 체험을 통한 생태적 합리성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다’ 의 눈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제공한다. 이 수필은 공존과 상생을 위해 우리가 어떤 인격을 완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되묻고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옥련’은 호적에 실린 이름이었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은 어머니가 지었다. 호적에 올린 이름은 따로 살던 아버지가 이웃 어른에게 부탁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새 이름을 듣는 순간의 낯섦이 싫었다. 그렇지만 어쩌랴. 호적에 오른 이름이니 어쩌겠는가. 그날부터 나는 낯선 이름과 동고동락했다. 내 몸에 겉도는 큰 옷처럼 귀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입에 붙지도 않았다. 6년 내내 그 이름은 낯선 그림자처럼 나를 졸졸 따라 다녔다. 이름이 주는 혼란은 그것만이 아니다.
<나의 이름들에게> 중에서 -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서는 수필까지 다양한 세계를 확보하고 있는 그녀의 수필 영토를 작가적 삶에 연계시켜보면, 그녀의 강인한 인생관과 행복 지향적 삶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의 다양한 이름들을 읽어나가면 작가로서 또 교육자로서 누구보다도 깨어있는 자세로 성실히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조적인 이야기를 다루면서 작가의식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등 그녀는 구조와 담론 전략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자조적인 문학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수필은 자기 조명을 통해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수필쓰기는 자기 속에 내장되어 있는 기억을 불러내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름은 바로 숨어 있는 실체를 파악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희, 설리, 옥련, 옥연’은 작가에게 안쓰러웠던 이름들이다. 그 이름들에게 한 잔의 온기와 향기를 건네는 작가의 모습이 애잔하다.
높은 가격을 형성하는 지역의 부자들이 사는 곳을 좋은 동네라고 하는 게 보편적 잣대다. 그 잣대대로라면 나는 상류에 살아 본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돈이 있는 사람들이 문화적인 모임이라고 지칭하는 단체나 스포츠 모임 같은 데도 적을 두지 못한 채 백세시대 절반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문화예술이나 스포츠가 꼭 넉넉한 경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향기로운 문화예술과 건강한 몸과 마음을 만드는 스포츠는 다양하다. 넉넉한 경제력이 뒷받침 되는 것과 그렇지 않고도 창조와 향유가 가능한 것들이 조화로울 수 있는 깊이를 찾아서 잘 섞이는 것이 당연하다. 굳이 하류와 상류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 향기로운 문화예술과 건강한 몸과 마음을 담보하는 스포츠다. 잘 섞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하류로 흐르는 과정에서 자정과 정화를 거치며 흐르는 물이 그걸 일깨운다.
<태화강 하류에서> 중에서 -
인간의 여러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욕심을 버리려는 반성적 성찰이다. 바로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는 삶에 대한 겸허다. 그녀가 이 수필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는 ‘중화’다.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 잡게 된다. 잘 섞이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은 지금도 진리다. 이 수필을 읽고 나면, 뭐든 이분법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글은 인간의 정신을 고원한 곳으로 끌어올려주는 깊이가 있다. 기득권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운 자리에 순수를 채우는 일은 최옥연에겐 일상인 것이다.
III. 로그아웃
수필의 묘미는 작가의 체취를 잘 읽어내는 데 있다. 감동 또한 연상과 상상을 통해 나오는 만큼 그녀가 보여주는 내면풍경에 집중하면서 그녀 수필의 미적 구조를 함께 살펴보았다. 청정한 노도의 바람과 남해의 햇빛을 함유하고 있는 최옥연 수필은 맛있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최옥연 수필들은 하나같이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수필들은 견고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격조 높은 예술적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일상의 소중한 체험의 문학적 변용에서 건져낸 글이기에 그녀의 수필은 문학적 향취가 풍긴다는 게 강점이다. 자기 존재의 성찰과 인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완성에 이르는 구도의 길에서 찬연한 꽃을 피우고 있다.
최옥연 수필세계에는 인간애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반성적 성찰의 원리로 승화되어 순수 문학적 색채를 띠고 있다. 서정과 지성의 절묘한 융합으로 수필의 효용을 극대화한 전략이 돋보였다.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은 최옥연 수필의 최대 매력이다. 매듭의 고를 풀어 갈등의 세계로부터 벗어나서 생성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전략이 공감을 얻게 한다. 최옥연 수필의 최대 강점은 형상적 체험성의 승화요, 진한 모성 원리의 표백에 있다. 그녀의 글쓰기는 재현이 아니고 촉감적 생성이다. 그녀가 소환하려고 하는 것은 틈의 부재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앞으로 3집 4집이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