卿宰
柳淰 墓碣銘[姜栢年]
於乎! 吾尙銘吾友也? 夫相約爲傳, 固不敢竊比於往哲, 而後死志墓, 不能忘平生之言。 謹按狀公諱淰, 字澄甫, 號道溪。 柳爲全州大姓, 鼻祖諱濕, 五子、一婿竝文科, 紱冕蟬嫣。 諱軒、諱世麟, 爲名臣。 諱儀, 參奉, 以孝友聞。 諱永慶, 領議政。 悅, 縣監, 贈領議政, 卽公祖以上五代也。 考諱廷亮, 尙貞徽翁主, 錫號全昌尉, 萬曆戊申正月擧公。
生而嶷, 宣廟錫以朱纓, 志貴也。 生未晬, 慘罹家禍, 至癸丑而冞酷, 公仍畏約失學。 年十三, 始就兪公守曾受業, 志日篤。 兪公嘗曰: “柳氏有子矣。” 逮仁祖, 誅凶雪冤, 馹召全昌於謫所, 復議政公官爵。 丁卯, 魁司馬, 連拜參奉、侍直。 乙亥, 登文科, 肄槐院, 入史局薦。 未及拜, 丙子, 扈入南漢, 拜注書, 俄薦典籍, 選入玉堂。 自此至丁亥, 遍歷兵・吏曹正、佐郞、三司亞長、政府舍人, 常帶知製敎, 如諸正寺職多不盡載。 外則歷楊州、東萊、廣州、嶺南、關西兩藩及江都留守, 內則自同副至都承旨, 歷兵曹參議、判決事若禮・兵・刑・工參判、右尹、兼摠管・軍器・內資提調, 以勳嫡襲封。 公之始入銓, 喜事者侵斥, 天怒甚至, 詢大臣, 罪其人。 有友人橫被刺擧, 公以亞憲任怨爭辨, 以直其怨。 辛巳, 拜輔德, 將赴瀋, 以親病疏遞, 枉遭臺參, 謫興海, 一年而還。 以繡衣往湖西, 奉法嚴, 以書狀及使臣再赴燕, 簡絜甚。 至如圻輔保障、關・嶺兩藩, 素難其人, 而恢刃肯綮, 律己氷檗。 公黜陟, 遠聲色, 所到皆如一, 民追思而碑之。 丁未二月, 以疾終于第, 弔祭如儀。 以寫竹冊勞贈判書, 葬于楊州道峯先兆負乾之原。
前夫人寧越嚴氏, 考應敎諱惺。 後夫人海平尹氏, 考縣監諱敬之女。 前後媲率所言、所行皆從儀法, 事君子, 無違德, 柔嘉淑悊, 得婦道甚, 祔公墓。 生五男五女: 男以泰, 判官; 以謙, 靜士; 以升, 府使; 以井, 別坐; 以復, 才而篤學。 女水使姜萬碩、監司朴純、正郞沈柟、生員鄭來祥、士人邊佾。 末男女, 後夫人出。 側室三男一女: 男以奠、以勉、以培。 女鄭懲。 以泰初娶監司吳端女, 再娶正言盧峻命女, 生二男二女: 男述、近。 以謙娶掌令林聖翊女, 生三男二女: 男遃、
、遆。 以升娶縣監李觀夏女, 生一男二女, 幼。 以井娶郡守邊命益女, 生一男三女, 男迪。 以復娶奉事權偳女, 生二女, 幼。 姜五男五女, 朴三男二女, 沈二男一女。 內外孫曾男女竝八十餘。
噫! 公器度凝重, 姿稟和粹。 以孝友爲持身大閑, 在親側, 常愉惋。 親痾至血指, 居憂則苫堊盡禮。 待寡姝, 畜庶弟, 皆出於至誠, 姻睦亦遵先範, 嫁再從妹之早孤靡歸者。 凡接人, 不設町畦, 於朋友信義尤篤。 蘊才若沖, 不以文藻自多, 而簡牘篇什, 人多藏去。 筆法妙逼松雪, 及書竹冊, 竹南吳公亦讓於公。 平生以正自持, 不隨俗脂韋。 西臬時, 迕燕行相臣, 索瘢終不得, 則懷之未發, 隨事陰擠, 公猶不袃薊。 惜乎! 以公公輔器, 與世抹摋, 年與位俱靳, 天何意哉? 悲夫! 銘曰:
嗟我二人, 平日言何如? 刻玆貞珉, 一言不敢虛。
유심[柳淰]의 묘갈명(墓碣銘) 강백년(姜栢年)
아! 내가 차마 나의 벗의 명(銘)을 써야 한단 말인가? 서로 전(傳)을 짓기로 약속을 하였음은 진실로 감히 옛 철인(哲人)에게 가만히 견주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중 죽는 자가 묘갈명을 쓰는 것은 평생의 말을 잊을 수가 없어서이다. 삼가 행장(行狀)을 상고해 보면 공(公)의 휘(諱)는 심(淰)이고 자(字)는 징보(澄甫)이며 호(號)는 도계(道溪)로 유씨(柳氏)는 전주(全州)의 대성(大姓)이다. 시조 유습(柳濕)은 다섯 아들, 한 사위가 아울러 문과에 급제하였고 높은 벼슬이 끊임없었다. 유헌(柳軒)과 유세린(柳世麟)은 명신(名臣)이었고, 유의(柳儀)는 참봉(參奉)으로서 효성과 우애로 알려졌으며, 유영경(柳永慶)은 영의정(領議政)이고, 유열(柳悅)은 현감(縣監)으로 증 영의정(領議政)인데 곧 공의 조부 이상 5대이다. 고(考) 휘 정량(廷亮)은 정휘 옹주(貞徽翁主)와 혼인하여 전창위(全昌尉)란 호가 내려졌다.
만력(萬曆)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 정월에 공을 낳으니 태어나면서 슬기로웠다. 선조(宣祖)가 주영(朱纓)을 내리니 귀(貴)를 뜻함이었다. 돌이 못되어 참혹하게 집안이 화를 입었고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이르러 더욱 혹독해 지니 공은 배움의 시기를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나이 13세에 비로소 유수업(兪守業)공에게 나아가 수업하였는데 뜻이 날로 독실해 졌다. 유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유씨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였다. 인조(仁祖)가 흉한 무리들을 베고 원통한 이들을 풀어주고 전창위를 적소(謫所)에서 역마로 부르고 영의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수석을 하였고 연이어 참봉(參奉)ㆍ시직(侍直)에 임명되었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어 사국(史局)의 추천에 들었으나 미처 임명되기 전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거가(車駕)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 전적(典籍)에 추천되었고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이로부터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까지 11년 동안 병조ㆍ이조의 정ㆍ좌랑(正佐郞), 삼사(三司)의 차관, 의정부의 사인(舍人)을 두루 거쳤는데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은 늘 띠었고 여러 시(寺)의 정(正)인 경우는 많아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그리고 외직으로는 양주(楊州)ㆍ동래(東萊)ㆍ광주(廣州)와 영남 관서의 두 도 및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지냈고, 내직으로는 동부승지(同副承旨)로부터 도승지(都承旨)까지, 병조 참의(兵曹參議)와 판결사(判決事) 그리고 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의 참판(參判) 및 우윤(右尹)과 겸(兼) 총관(摠管), 군기시(軍器寺)ㆍ내자시(內資寺)의 제조(提調)를 지냈으며 훈신(勳臣)의 맏이임으로 해서 습봉(襲封)되었다. 공이 처음으로 전조(銓曹)에 들어갔을 때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가 비방을 하니 임금이 매우 화를 내어 대신과 상의하고 그 사람에게 죄를 내렸다. 뜻밖에 무함을 받은 친구가 있자 공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서 원망을 떠맡고 변명하여 그 억울함을 바루었다. 신사년(辛巳年, 1641년 인조 19년)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장차 심양(瀋陽)에 나아가게 되어 있었으나 어버이가 병환 중임을 들어 상소하여 체직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대참(臺參)을 받아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어사(御史)로서 호서(湖西)에 가서 법의 집행을 엄정히 하였고, 서장관(書狀官) 및 사신으로서 두 번 연경(燕京)에 나아가 매우 간결히 처신하였다. 그리고 강화 유수, 관서ㆍ영남 등 두 도의 경우는 본래 그 적임을 구하기 어려웠는데 가장 긴요한 부분을 여유있게 처리하였고 스스로의 단속은 빙벽(氷壁)을 편안하게 여겼다. 고과(考課)에 공정을 기하였고 풍류와 여색을 멀리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한결 같으니 백성들이 사모해서 비를 세웠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 2월에 병으로 집에서 졸(卒)하니 조문과 사제(賜祭)는 예와 같이 하였다. 죽책(竹冊)을 쓴 공로로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양주(楊州)의 도봉(道峰) 선영(先塋) 건좌(乾坐)의 원(原)에 장사지냈다. 전 부인은 영월 엄씨(寧越嚴氏)로 응교(應敎) 엄성(嚴惺)의 딸이며, 후 부인은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현감(縣監) 윤경(尹敬)의 딸이다. 전후배(前後配)의 말과 행동은 모두 예법에 따랐는데 남편을 섬기되 덕을 어김이 없었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맑고 슬기로워 매우 부도(婦道)를 얻었다. 공의 묘에 부장(祔葬)하였다. 5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 유이태(柳以泰)는 판관(判官)이고 유이겸(柳以謙)은 정사(靜士)이며 유이승(柳以升)은 부사(府使)이고 유이정(柳以井)은 별좌(別坐)이며 유이복(柳以復)은 재주 있고 배움에 독실하였다. 딸은 수사(水使) 강만석(姜萬碩), 감사(監司) 박순(朴純), 정랑(正郞) 심남(沈枏), 생원(生員) 정내상(鄭來祥), 사인(士人) 변일말(邊佾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남녀는 후부인이 낳았다. 측실(側室)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유이전(柳以奠)ㆍ유이면(柳以勉)ㆍ유이배(柳以培)이고, 딸은 정징(鄭懲)에게 출가하였다. 유이태의 초취(初娶)는 감사 오단(吳端)의 딸이고, 재취(再娶)는 정언 노준명(盧峻命)의 딸로 2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유술(柳述)ㆍ유근(柳近)이다. 유이겸은 장령 임성익(林聖翊)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낳으니 아들은 유언(柳遃)ㆍ유퇴(柳)ㆍ유장(柳遧)이다. 유이승은 현감 이관하(李觀夏)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낳으니 어리다. 유이정은 군수 변명익(邊命益)의 딸과 혼인하여 1남 3녀를 낳으니 아들은 유적(柳迪)이다. 유이복은 봉사(奉事) 권단(權偳)의 딸과 혼인하여 2녀를 낳으니 어리다. 강만석은 5남 5녀이고 박순은 3남 2녀이며 심남은 2남 1녀이다. 내외 손자 증손은 남녀 아울러 80여 명이다.
아! 공의 외모는 바르고 정중하였고 천성은 온화하고 순수하였다. 효성과 우애로 몸가짐의 절도(節度)로 삼았고 어버이 곁에 있어서는 늘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어버이 병에 손가락의 피를 내기까지 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짚자리를 깔고 예를 다하였다. 혼자된 누이와 서제(庶弟)를 대함에 있어 모두 지성을 다 하였고 인척과의 화목도 역시 선대의 규범에 따랐으며 고아로서 출가하지 못한 재종매(再從妹)를 출가시켰다. 사람을 접함에 있어 경계를 설정하지 아니하였고 벗과는 신의(信義)를 우선하였다. 재예(才藝)를 쌓음에 있어 여린 듯 더욱 독실하였고 글재주가 있음을 내세우지 않았으나 편지틀로 꾸며서 사람들이 많이 소장하였다. 필법(筆法)은 송설체(松雪體,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잘 썼는데 죽책(竹冊)을 쓰게 됨에 있어 죽남(竹南) 오공(吳公, 오준(吳埈))이 역시 공에게 양보하였다. 평생 바른 것을 지키되 세속에 영합(迎合)하는 일이 없었다. 관서의 감사로 있을 때에 연경(燕京)에 가는 상신(相臣)의 뜻을 거슬렸다. 흠을 잡으려다 찾지 못하니 속에 묻어두고 일마다 은근히 훼방하였으나 공은 오히려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공은 대신이 될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세상과 더불어 소멸되려 하였고 나이와 지위도 모두 인색하였으니 하늘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슬픈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우리 두 사람 평소에 말을 어찌 했던고? 이 비석에 새기니 한 마디도 감히 헛됨이 없다네.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五衛都摠府都摠管世子左賓客。行嘉義大夫禮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全平君柳公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