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포철의 최대 위기(1)
1977년 4월 24일, 그날도 새벽잠을 깨우는 비상전화가 걸려왔다. 당시는 전화기도 귀해 야간 동원이 자주 일어나는 부서에만 비상전화를 비치해주었다. 비상전화기가 울릴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온 가족도 비상이 걸렸다.
정비라는 직종은 언제 불려 나갈지 몰라 초저녁부터 일찍 잠들어야 했다. 물론 술이나 외식은 그만큼 삼가야 했다. 수화기를 받아 든 순간 귀가 쩡 하도록 울리는 음성은 ‘회사에 불이 났으니 간부들은 총 출동하라’는 거였다. 수화기를 놓고 회사 쪽을 바라보니 섬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아직 통금이 해제되려면 몇시간 기다려야 했다. 주택단지에서 회사까지는 거의 10 Km가 넘었다. 제철소가 여의도의 4배가 넘는 부지라 직선거리도 4Km가 넘었다. 보통 심야에 설비사고가 생길 때는 회사에서 당직차를 보내어주었다. 당시 통금시대라 12시 이후는 통행이 불가능했지만 국가주요시설이라 포항경찰서에서는 당직차의 통행증을 발부해 주었다. 출퇴근시 교통편은 부장 용 승용차를 편승하거나 열차를 타고 다녔다. 오늘은 비상이라 당직차를 보내어 올 여건도 안되는 모양이었다. 무작정 제복을 입고 현관으로 뛰쳐나와 주택단지 정문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지나가는 다른 고위간부의 차를 얻어 타고 겨우 현장에 도착했다. 경찰들도 화재 내용을 알았는지 회사로 향하는 차는 그냥 통과시켰다. 아마 회사에서 SOS를 경찰로 보냈을 것이다.
제강공장의 전기실이 불에 타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큰불길은 잡혔다. 하지만 전기설비의 붙은 소화기의 화공약품으로 끄야 하는데 사내 소방서에서 물을 뿌려 전기실은 완전히 망가뜨렸다. 살아있는 전기에 물을 뿌렸으니 서로 스파크를 일으키며 다 망가졌을 것 같다. 하지만 불이 인근 공장으로 옮겨갈까 걱정을 해서 주저하다 할 수 없이 물을 뿌렸다는 그들을 탓할수도 없었다. 당시 회사는 소화분말용 소방차는 갖추지도 못했다.
전기실내부는 매캐한 냄새와 열기와 연기가 자욱해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정비부 차장이지만 부장이 기계분야라 전기분야는 내가 담당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 어찌 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 한두 발자국 전기실로 발을 들여 놓다가 현기증을 느끼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소방대원이 극구 막아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굴렸다.
새벽 5시경이야 전기실 내부의 연기를 배풍기로 뽑아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한대로 전 설비가 폭격을 맞아 파손된 것 같았다. 전기정비 책임자로 졸도할 지경이었다.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는 제선공장(용광로)은 2기였지만 제강공장 전로(강철을 만드는 설비)는 3기가 한 공장 내에 있었다. 철강은 제선-제강-압연공정으로 흘러가는데 중간공정이 망가졌다. 후공정인 압연공정은 최악의 경우 휴지할 수 있지만 전 공정인 용광로에서는 계속 쇳물을 만들어 내야 했다. 만약 불이 꺼져 내부의 쇳물이 굳으면 폭파하고 새로 지어야 한다. 설비가 복구될 때까지 용광로를 어떻게 버티어 나가는 가가 우선 급선무였다. 우리가 일본 연수에서 배워 온건 정상적인 조업이지만 비상시 대비책은 없었다.
5시반쯤에야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제강부장이 사고보고를 했다. 기중기공이 용강을 작업중 졸아서 바닥에 흘리면서 그 쇳물이 높이가 제일 낮은 케이불 피트로 흘러가 전선이 타면서 열전도가 빠른 구리가 엉겨붙으며 전기실로 화재가 옮겨붙었다고 한다. 하지만 뒤처리는 정비 몫이었다. 대책이 없었다. 당시 한국 기술 수준으로는 대안도 방법도 없었다. 방법은 일본에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도와즐는지도 모르고 또 현실적으로 바다 멀리 있다.
처음 제철소를 본 사람이 단 두 사람(회장과 기술상무-재일교포)으로 시작한 포항제철소다 그 사이 1기준공(103만톤체제)와 2기준공(260만톤체제)로 안정이 되어가던 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다행히 처음 짓는 제철소라 몇 년 전에 준공한 브라질 제철소의 실패를 재현할까봐 회장님이 일본제철소 정년 퇴직자를 특별히 고용해서 JG(Japanese group)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들이 비상대책회의에서 지침을 주었다. 용광로를 하루 이상 쉴 수가 없으므로 휴풍후 최소용량으로 운전하여 용선 량을 최대한 줄여서 조업하고 어쩔 수 없는 용선은 마른 모래를 구해서 그 위에 용선을 뿌려 고철로 만들라는 것이다. 멀쩡한 선철을 고철을 만든다는 게 한심하지만 용광로를 살리자면 그 방법 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용광로를 살릴수 있다는 그 한마디가 천사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압연공정은 스라브를 구입하여 가동하며 최소한 단시간안에 복구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제강설비는 가와사끼(川崎) 중공업에서 주공급(Main supplier)했지만 전기설비는 보조공급자(Sub supplier)로 후지덴끼(富士電氣)가 가와쭈(川崎重)를 통해 공급했다. 회장님이 개인적인 채널을 이용해서 급거 설비공급업체인 가와사끼 대표를 불려들였다. 급거 하늘을 날라온 가와쭈(川崎重)부장(오하라)은 다 타버린 전기실을 둘러보면서 혹시나 희망적인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귀를 기울이며 그를 따라다니는 포스코 임직원들에게 ‘고마루네(困難하네)’만 연발하며 아무 말도 없이 심지어 제철소장에게도 한마디 않고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겠다며 함께 떠나버렸다. 그만큼 그들은 도도했다.
처음부터 일본철강계에서는 포항제철도 브라질처럼 가동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연수 중에 기술적보다 기능적으로 배워온 감각으로 돌렸던 제철소이다. 당시 우리보다 선진이었던 브라질이 제철소를 지었지만 가동을 못했기 때문에 한국도 그러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회사는 급격히 복구반 조직을 만들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다 타버린 전기실을 정리하며 일본에서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만 기다릴 뿐이었다.
복구반 조직은 정비담당상무를 복구위원장으로 복구총괄반장 복구1반장 복구2반장으로 편성되고 예하는 회사내 가용인력을 우선적으로 차출했다.
복구총괄반장은 행정과 기자재, 복구1반장은 케이블 포설, 복구2반장은 제어반 수리를 담당했다. 얼떨결에 정비부차장에서 부장대우 복구 2반장으로 명을 받았지만 복구총괄반이나 복구1반장은 자재를 발주하고 케이블 포설을 할 건설업체를 선정하는 등 일을 시작했지만 복구2반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다 타버린 제어반을 정리하는 일 뿐이었다. 전 직장에서 겨우 수배전반정도를 설계 제작했지만 제어반은 운전하기도 정비하는데도 쩔쩔매는 게 우리들 형편이었다. 더욱이 내가 압연 쪽에 근무해서 제강설비는 잘 모르는 상태였다.
오후가 되어 들려온 소식은 전부 새로운 설비를 도입해야 되며 후지덴끼(富士電機)에서 제작하는데 6개월이 걸린다는 게 가와쭈의 답변이었다. 그 일정을 단축하려면 후지전기가 모든 작업을 세우고 포스코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일을 하려면 일본 통산성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단기간 복구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포스코의 운명이 부처님 손바닥이 아니라 일본제조업체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하루라도 먼저 착수하게 계약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자부에서 선 계약을 하고 납기는 추후 여건에 따라 재검토하자고 했지만 설비 공급 납기는 요지부동이었다. 우선 납기를 6개월로 하더라도 계약이 우선이었다. 그래야 일본에서 제작착수를 한다는 것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회사는 설비공급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겨우 2기설비를 마치고 거기에서 얻은 수익으로 3기, 4기까지 확장해야하는데 확장은 커녕 용광로를 6개월동안 지켜야 하는 게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JG의 제언대로 최소량의 조업을 하지만 나오는 용선을 모랫바닥에 뿌리자니 모래부터 구해야 했다. 무조건 이웃한 송도 해수욕장에서 모래를 덤프 추럭으로 날라와 대형 풍량기로 건조시켰다. 습기가 있으면 섭씨 1300도가 넘는 용선의 열에 의해 모래속의 습기가 분해되면서 폭발한다는 것이다. 멀쩡한 쇳물을 모랫바닥에 붓는 걸 보는 회사나 직원들은 마치 돈뭉치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회장님은 일본을 다시 두드려 보기위해 바로 설비공급계약을 하고 납기를 단축해 보려고 일본으로 가시고 복구반 직원들은 그날부터 타버린 시설물을 철거하느라고 사내에서 숙식을 시작했다. 식사는 공급되지만 잘 자리가 없었다. 사무실에서 잘 수 있지만 자지 말고 24시간 일하다가 졸리면 구석에 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서 눈을 조금 붙이고는 계속 일 하라는 뜻이다.
새설비가 들어오는 6개월을 생각하면 꼭히 밤 새워 할 일도 없었지만 우리가 열의를 보여야 일본이 움직인다는 뜻이었다. 혹시 회장님의 인맥으로 일본에서 일이 잘 풀려 한달이라도 설비가 빨리 들어오면 설치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일본 설비공급자들은 타버린 제어판의 부품을 분해하여 청소하고 말리는 것을 보며 전부 쓰레기인데 닦을 필요가 있느냐며 도자로 밀어 부쳐 용광로에 넣으라고 무식한 짓을 하고 있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내가 생각해도 그랬다. 지금 쓸데없는 일들로 우리가 밤을 새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광로에 넣더래도 플라스틱 같은 불순물은 제거해야 된다며 우리는 일을 계속했다. 주변을 맴돌며 히죽거리는 꼴들이 보기 싫어서 전기실 문을 잠그고 작업하려니 며칠이 지나도 매캐한 냄새가 빠지질 않아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말던 우리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닦고 사염화탄소로 청소해서 가마니 위에 늘어놓고 대형 풍량기로 말리며 습기를 제거했다.
며칠이 지나면서 타서 녹아 엉겨 붙은 케이블들을 걷어내고 그을린 벽체를 도색을 하고나니 어느정도 겉모습은 갖추었지만 검게 그을은 제어반은 산송장처럼 서 있었다. 일본사람들은 제어반도 해체해서 자리를 비워 놓으라고 압박을 해왔다. 그들 지시대로 제어반을 하나씩 뜯어내어 전기실 한쪽으로 옮기면서 우린 언제 우리 손으로 이런 제어반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도시바 후쭈공장의 제어반과장이 엘리베이트를 처음 만들어 시운전하는데 아무도 시승을 하지 않아 자신이 먼저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니 모두 타 보드라며 그가 저술한 책을 주면서 하던 말이 떠 올랐다. '기술자는 앞만보고 가야 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도 않고 도와줄수도 없다' 그게 내 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첫댓글 안정준 동문님의 소중한 체험과 노력이 담긴 값진 기록인것 같습니다. 관심깊게 읽겠습니다. 공들인 기록, 잘 읽겠습니다. 정성진 삼가절함
감사합니다. 그 당시의 한국의 실정속에서 선진기술을 향해 앞만보고 가야 하는 기술자로서 가장 어려웠던 시절의 체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