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요새이신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짓불려 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합니까?
[시편 43:2]
살다보면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사실,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증거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시편 43편은 42편과 이어지는 시다. 아니, 한 편이었으나 분류를 할 때 나뉘어진 것으로 보인다.
5절의 말씀이 42편 5, 11절과 반복된다.
시인은 여전히 환난 가운데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는 그 순간 더욱 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기도의 성취는 미래형이지만, 그래야만 환난의 때를 이겨낼 근거가 되는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 절망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현실이라도 절망의 바깥을 바라보면 빛이 보인다.
그 빛이 허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빛은 그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한다.
하물며,
한결같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들이니 절망이 그를 가두지 못할 것이다.
인생은 흔들리면서 걸어가는 길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그 흔들림을 통해서 인생의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이가 있고 뿌리가 뽑히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
인생의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이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사는 이들이다.
자기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자기의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아뢴다.
그러는 사이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답을 얻게 된다.
비정한 무리(1)가 넘쳐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정함을 신앙의 진정성을 수호하기 위한 믿음의 행위라고 믿는다.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한다.
그런 지혜롭지 못한 행위를 꾸짖는 순간, 그들은 개떼처럼 몰려와 아가리를 벌려 날카로운 이빨롤 물러뜯는다.
신앙을 수호하는 일이라고 믿기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신앙을 수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존재감을 내세우기 위함이거나, 자신의 실패에 대한 핑곗거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비정하다.
비정한 무리들의 공격은 비정한 무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더 힘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승리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할 수 없다.
그들로 인해 흔들리는 이들, 한결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들이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