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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의 줄거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사상적으로 떠받쳐지고 있던 유대교를, 거듭된 저주를 쏟아내시기 전에 철저히 끊어내십니다. 이유는 위선 때문이었습니다. 즉 마음으로 전혀 하나님을 만족과 기쁨의 대상으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었던 상황이지요. 이제 그렇게 예배당 조직을 끊을 때가 되었습니다.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
(마태복음 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대교 끊으시듯 예배당 끊기’
본문 말씀은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무리들에게서 유대교를 끊어내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끊어내시고자 하신 유대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로써의 유대교가 아니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을 비롯하여 당시 이스라엘 사회의 모든 방면에 유대교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간의 삶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의미에서의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시대상에 비추어보자면 유대교의 근간을 끊어내는 예수님의 말씀은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흐름과 내용이 우리에게도 신앙생활을 돌아볼 여지를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예배당을 끊어내야만 합니다. 끊는다는 말에서 쉽게 연상되는 대표적인 해악에는 담배나 술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끊어내야 한다니 의아하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하였습니다. 현세적 결핍과 어려움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내세에서 보상받고자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르크스의 생각에는 인민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부를 독점한 부르주아 세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맞서 싸우고 혁명을 일으켜서 부를 나누어가져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사상에 있어서 내세 즉 천국을 언급하는 종교는 현실을 도피하게 하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부의 재분배를 주장한 마르크스 또한 돈과 물질에 중독되어 있던 사람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종교의 해악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다고 해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천국에서 받고자 예수를 믿는다면 마르크스가 언급한대로 아편으로써의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다고 해서 천국에서 부자로 살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살아서 갖지 못한 부귀영화를 천국에서 누리기를 바란다면 돈과 물질에 중독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추구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오히려 죽어서도 세상을 추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보다도 더한 중독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적 추구방식을 선택했다면 예배당에서는 자본주의적 추구방식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부의 재분배도 결과적으로는 지금보다 돈이 많아지는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예배당에 나가는 목표 또한 결국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겠다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배당 출석은 아편 중독과 같다고 봅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의 저변에는 예수님이 경계하신 위선이 깔려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돈을 탐하면서 행위로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위선입니다. 지금 기독교에도 이러한 위선이 아편처럼 퍼져있습니다.
예배당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렇게 세뇌를 당해왔기 때문입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을 성수주일이라 배워왔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가르쳤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수주일은 예배당에 출석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오히려 위선에 절어있는 예배당 모임에 참여하면 할수록 참 교회로부터의 이탈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출석하는 곳이 아닙니다. 출석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에 출석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멀리 아프리카에 가있을지라도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교인이 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으로써의 증표를 가진 사람은 예배당 모임의 출석과는 상관없이 교회에 속한 교인입니다.
우리는 예배당 조직을 끊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배당 조직에 대한 위선적인 참여를 끊을 수 없다면 구원도 받을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당 조직에 출석해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는 믿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면 그러한 생각을 가질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생각부터 고쳐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기존에 존재하는 예배당은 어떻게 여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생겨납니다. 예배당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으로 나가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지원 센터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태승철의 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 참 교회의 모습을 고려할 때에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예배당 조직은 종교 활동의 목적지가 아닌 성도들의 신앙을 보살피는 지원센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져야 할 곳은 예배당이 아닌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같은 삶의 현장입니다. 예배당은 이러한 삶을 지원해주는 보조적 위치에 서야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사상입니다.
성도들을 끌어 모으려 하는 동안에는 장사하여 이득을 남기길 바라는 자영업자의 마인드에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러한 마음에는 담길 수 없고 전파될 수도 없습니다. 담배와 술과 마약과 도박 중독을 끊어내듯이 예배당 참여 중독은 끊어져야만 합니다. 진리 없는 예배당에는 구원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가 무엇인지가 본문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서 유대교를 끊어내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일곱 번에 걸쳐 바리새인들과 외식하는 서기관들을 저주하십니다. 이 모습이 마치 폭격 전에 아군을 철수시키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당시의 유대교의 사상적 측면을 담당하던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측면을 모세의 자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들에게서 위선으로써의 유대교를 끊어내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유대교는 생활이고 문화와 역사였습니다. 그 유대교를 끊어내는 것은 우리가 예배당 출석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위선을 지목하시며 유대교를 끊어내십니다.
2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어 거대한 두루마리의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서 한 권을 보려고 해도 지게로 짊어져야만 할 정도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을 접하는 방법은 성경을 관리하고 공부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입을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성경을 가르치던 자리가 바로 모세의 자리라 일컬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성경말씀은 버리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만 이 말씀은 오늘 말씀과 대치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유대교의 근간이 된 성경말씀은 지키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이 깔려있는 유대교의 가르침은 끊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은 버리지 말고 예배당을 끊는 것으로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교를 끊으라고 말씀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위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선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이는 곧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위선이 아닌 참 신앙은 당연히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함에 대해 성경에서는 두 가지 기준이 제시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에 존재한 떡상과 금촛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떡상은 하나님을 통한 배부름을 상징합니다. 배가 부르면 다른 음식을 탐하지 않듯이 하나님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은 세상에 대한 바람을 갖지 않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멋진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나도 언젠가는 저런 차를 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생각이 아니라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나타난 배고픔의 표현입니다. 그럴 때에 떡상을 생각하며 자동차에 대한 욕심을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동차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일만큼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돈 많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떡상을 생각하며 돈이 있으나 없으나 아무 상관이 없을 정도로 마음이 하나님으로 배부르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위선이 아닌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금촛대는 하나님을 더 먼저 보고 더 크게 바라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지구의 35억 명이나 되는 여자가 있지만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청년에게는 오직 한 사람만이 여자입니다. 육체의 눈에는 다른 여자들이 보일지라도 마음의 눈에는 오직 한 여자만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이 금촛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풍랑만난 배위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했지만 예수님은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보다 하나님을 먼저 보셨고 제자들은 하나님보다 풍랑을 먼저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어떤 순간에도 금촛대를 생각하며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떡상과 금촛대가 바로 하나님을 좋아함에 대한 두 가지 기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육체를 입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꾸만 이 세상의 가치들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이러한 나의 마음을 죽은 것으로 인정할 때에 비로소 떡상과 금촛대의 의미가 지켜지는 삶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유대교의 사상을 담당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백성들에게 이러한 구체적 신앙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전을 통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져버리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마음으로는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였습니다.
이들의 대표적인 위선이 바로 613가지 율법의 규정이었습니다. 이 규정을 만들어서 백성들에게 짐지게 하였습니다. 이 613가지의 규정이 생겨난 이유는 본래 십계명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삶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상황들에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적용한 판례를 613가지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이윽고 무거운 짐이 되어서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배당 조직의 각종 모임과 행사들이 이와 같은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각종 교육의 프로그램과 각종 모임이 이루어지고 충성과 봉사와 헌신이 강조됩니다. 이것이 모두 성도들에게 지켜야만 하는 무거운 짐이 되는 동안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일상생활이든 종교생활이든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쉼을 얻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613가지의 규정도 아니며 각종 교육의 프로그램이나 각종 모임의 참석이 아닌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셨으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서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는 한 가지 일만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진리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떡상과 금촛대가 상징하는 바대로 하나님 좋아하기를 이루려는 열망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613가지의 규정은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좋아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필요한 것은 각종 교육프로그램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자에게 봉사나 충성과 헌신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쓸모가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는 한 가지 일이 지켜질 때에 하나님 좋아하기는 완성됩니다. 떡상과 금촛대의 두 가지 기준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나를 가면으로 쓰시고 활동하심을 통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대교가 그랬듯이 예배당 조직에 얽매이는 동안 신앙은 위선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예배당 조직은 더 이상 성도들의 삶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고 오직 성도들을 예배당 조직에 묶어두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십계명으로부터 613가지의 규정을 만들어낸 것과 같습니다. 장로나 집사가 되려면 몇 개월 간 교육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담스러운 교육기간을 거쳐 교회에서 직분을 얻은 자들이 실제로 가정과 회사에서 십자가를 생활화를 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예배당을 끊어야만 합니다. 예배당을 끊어야 참 교회에 소속될 수 있습니다. 참 교인의 증표는 하나님 좋아하기입니다. 그 두 가지 기준이 떡상과 금촛대로 상징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기준으로 하나님 좋아하기를 이루고 싶어 하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그러나 마치 자영업자의 마인드로 운영되는 예배당 조직에 얽매이는 동안에는 하나님 좋아하기를 절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끊어내야 할 마약은 진리의 기둥이 없고 예수님의 동선을 파괴하는 예배당입니다. 마약을 끊듯이 예배당을 끊음으로써 참 교회에 소속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인들이 모임을 가질 때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서로의 신앙을 점검하고 응원하는 일뿐입니다. 예수님의 동선을 잘 따라 살고 있는가,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웠는가, 세상일보다 하나님을 우선시하였는가를 점검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돌이키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8~10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삶이 성경의 가르침에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랍비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은 랍비의 가르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방식의 삶이 이루어질 때에 삶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성전의 존재의미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님 앞에서 혹은 직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 될지 하나님이 직접 가르쳐주실 것이니 랍비가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여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이 요구되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성경말씀 전체는 예수님을 향해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에서 이 말씀들이 어떻게 실천되느냐는 것이지 얼마나 알고 있느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버리지 말라고 하신 성경말씀 전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나누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십자가에서 멀어져서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나누는 것입니다. 예배당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도 오직 이것뿐입니다. 여선교회 남선교회로 나누어져서 각종 행사를 벌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일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위선적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맹신에 불과합니다. 예배당을 끊어야만 합니다.
8~10절에서 나타난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는 말씀은 오직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동선을 따를 때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면 삼으시고 장갑 삼으셔서 행동해 나가실 것입니다.
목회자로 예배당을 가지고 계시다면 이제는 방향성을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밖에 있는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영업자의 마인드는 뒤집혀야만 합니다. 예배당은 성도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십자가 생활화를 도와주는 지원센터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예배당은 오히려 성도들의 삶을 참 교회로부터 이탈시키는 위선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선의 장소가 된 예배당은 끊어야만 하는 마약보다 심각한 해악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많은 목회자와 당회가 예배당의 조직이 확장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의 확장과 유지와 번영을 꿈꾸는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하기를 꿈꾸는 일과는 정반대에 놓여있습니다. 예배당이 자영업자의 마인드를 갖고 있는 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없는 위선적 조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유대교를 끊어내셨듯이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예배당을 끊어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전 세계의 모든 예배당 조직에 속한 교인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참 교회를 찾고 참 교인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십자가 생활 없는, 유대교적 기독교에서 모두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