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항로(蒼天航路)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삼국지를 소재로 고 이학인씨가 스토리를 맡고, 킹 곤타(왕흔태)씨가 작화를 담당한 만화입니다. 이 만화는 조조를 중심으로 삼국지의 주요 사건들을 서술해가며, 그 와중에 드러나는 파격적인 인물 묘사와 해석으로 많은 인기를 끌게 되었죠.
이 만화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인물들은 두말할 것 없이 조조와 유비입니다.
창천항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조조라는 인물상은 이 만화에 등장하는 제갈공명의 대사를 통해 핵심적으로 묘사됩니다.
"신앙, 사상…. 인간은 무언가 환상에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억조창생을 통치하는 자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조조. 너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외하지 않으며, 신의 뜻도 믿지 않는다. 한 조각의 환상조차 품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이 생각하고 완전히 자유로이 살아간다."
"멋지다! 너무나 지나치게 멋지지 않은가!"
"조조! 너는 만물의 법칙이 절대적으로 비정함을 알면서도, 그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겸허함은 터럭만큼도 없다."
"냉철하게 현실을 응시하며, 그 뻔뻔스러운 본성 그대로 독단으로 정치를 편다. 자력! 종횡무진으로 그침이 없는 자력을 본의(本意)로 하여!"
"조조! 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극치가 아닌가!"
"무한대의 정욕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사(正邪; 선악)를 한 개인의 본성 안에 갈무리하고, 한편으로 치우치는 일도 없이, 그 위에 뻔뻔스럽게 상쾌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냐!"
이처럼 묘사된 조조라는 인물은, 인간의 온전한 생명됨을 가장 생생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는 스토리작가인 이학인씨가 초지일관 묘사하고자 했던 하나의 완성된 인물상이죠. 사실 이 인물은 역사적인 조조와는 사뭇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이학인씨가 묘사한 인물상은 보다 더 일본적인 선(禪)의 풍취로 재해석된 인물이에요.
그래서 이 만화를 선적인 감성으로 접근해보면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아마 가장 선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일본만화를 손꼽아보자면, 바로 이 '창천항로'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배가본드'를 대표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의 모든 인생사에 걸쳐 마치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을 그대로 체현한 듯한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그는 만화 속에서 단 한 번도 성장하거나, 변화된 적이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늘 가장 완벽하게 완성된 조조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조조를 '깨달은 자'라고 얘기하기보다는, '완성된 자'라고 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만화에서 '깨달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유비입니다. 특히 스토리작가인 이학인씨가 별세한 후, 작화를 맡던 킹 곤타씨가 스토리에도 개입하게 되면서부터, 유비의 그러한 상징성은 배가되게 되었죠.
창천항로 21권에서는 정확하게 유비가 깨닫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유비는 그 전까지는 그저 결핍과 부족함에 시달리고 방황하며, 마음의 중심을 세우지 못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갈공명의 안내를 통해 그러한 결핍된 자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유비는 스스로가 정말로 누구인지 깨닫게 됩니다.
맞습니다. 비어있는 그릇으로의 자신의 실재가 이제 유비에게 확인된 것이죠. 유비에게 무아(無我)적 감수성은 이렇게 가장 명료한 사실로서 꽃피어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감수성은 정확합니다. 그런데 다만 그 그릇의 실체됨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죠. 그러한 유비가 그 그릇의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빈 공간을 확인한 순간, 그릇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빈 공간이야말로 자신의 실재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빈 공간 안에 담겨있던 그 무수한 마음들, 그 무수한 생명들의 목소리가 곧 자신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비는 자신을 그릇으로 정체짓는 것이 아니라, 빈 공간과, 그 공간에 담긴 생명 그 자체를 함께 아우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곧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는 더는 세상(천하)과 짝사랑을 하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혼자서만 가슴 아픈 사랑을 할 뿐, 세상의 사랑을 받지 못해 늘 목말라하고 굶주린 자가 아닙니다. 그가 자신 안에 곧 세상이 있다는 걸 정말로 확인하게 된 순간, 이미 그는 세상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자입니다. 그가 곧 세상이니까요.
유비는 곧 모든 생명이고, 모든 마음이며, 모든 인간입니다.
유비라는 개인의 정체성이 모든 세상일 정도로 가장 위대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 유비라는 정체성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이미 늘 거기에 존재해왔던 모든 세상이 발견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곳, 그곳이 이미 천하다!"라는 이 선언은, 유비라는 개인의 선언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인간의 선언인 것입니다. 유비가 의미하는 '나'는 곧 모든 인간입니다. 모든 인간이 그의 자리에 당당하게 서게 되는 온전한 현실이 이와 같이 노래되고 있습니다.
유비는 이렇게 깨닫고 난 후에, 비로소 조조와 대등한 위상을 점하게 됩니다. 창천항로의 후반부는 이 둘의 대립을 본격적으로 조명하며, '완성된 자'와 '깨달은 자'의 각각의 길을 묘사해갑니다.
제갈공명은 이러한 대립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제갈공명은 역사적으로도 허(虛)와 실(實)의 운용에 대단히 능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지죠.
그가 허(없음)의 궁극으로 보는 것이 바로 유비며, 실(있음)의 궁극으로 보는 것이 바로 조조입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이 유비를 보좌하며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은, 유비가 지닌 허의 면모를 핵심적으로 드러내는 형태로 전개됩니다.
비어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 와서 쉴 수 있습니다. 꽉 차있는 곳에서는 쉼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유비의 정치는 누구든 품어질 수 있는 '수용'을 지향하게 되고, 조조의 정치는 누구든 위로 오를 수 있는 '실력'을 지향하게 됩니다. 제갈공명은 누구보다 뛰어난 인재였던만큼 조조의 길에 깊이 공감하나, 반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현실은 유비를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음양의 이치와 같이, 제갈공명을 통해 보다 구체화된 유비와 조조의 대립 구도는, 창천항로의 후반부를 견인하고 있는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재밌는 점은, '완성된 자'로서의 조조와, '깨달은 자'로서의 유비가 보이는 모습은 크게 차별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 성립의 과정만 다를 뿐, 둘 다 인간의 진수를 대표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깨달음이란 대단한 기회인 셈입니다. 그 모든 재능, 신분, 출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 모두를 홀연히 인간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주니까요.
이 작품 속에서 유비가 깨달은 묘사 이후의 후반부에, 독자들에게 유비의 인기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사실은, "내가 있는 곳, 그곳이 이미 천하다!"를 소리높여 외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