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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귀가 해석한 이웃사랑 개념>의 줄거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윤리적 차원이나 신앙적 덕목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는 길이 주제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접하면서 내가 이 비유 안에서 사마리아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됨으로써 영생도 이웃 사랑도 모두 다 사라지게 됩니다. 정확히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마귀가 내린 해석을 인류가 따르고 있습니다.
마귀가 해석한 이웃 사랑 개념
(누가복음 10:25~28)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귀가 해석한 이웃 사랑 개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귀가 해석한 이웃 사랑 개념’
본문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과 율법사가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도입 부분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는 자기 것을 우리에게 주는 법이 없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을 망가뜨리고 왜곡시키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또 마귀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자기의 소신을 드러내는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속마음을 뒤틀리게 이해해서 받아들이게 합니다. 이웃 사랑은 무척 중요한 일이기에 마귀는 이것 또한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개념에 접근해서 폭탄 테러를 자행합니다.
이웃 사랑의 개념을 생각하면 언제나 언급되는 대표적인 사례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 죽게 된 유대인을 돕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귀가 이웃 사랑 개념에 대해 폭탄 테러를 자행한 결과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해 마귀가 해석해 놓은 개념을 따르는 한 우리는 절대 참다운 이웃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본래 이웃 사랑은 영생을 이룬 자에게서 나타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웃 사랑을 보았다면 그 바탕에 있는 구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 받은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마귀에 의해 해석된 뒤틀린 이웃 사랑을 보는 한 증거가 불확실하기에 받은 구원을 이루어갈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한번 받으면 끝나는 일회적 사건으로 여기는 이유도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귀나 사탄은 동일하게 악한 영의 대장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귀신들은 그 졸개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도입부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두 사랑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참 의미 또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세상은 이러한 오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귀가 만든 해석을 이웃 사랑이라 여기며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종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이웃 사랑이나 박애정신이나 이타적 마음과 같은 일련의 유사한 개념들을 떠올릴 때는 으레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돕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의미를 모른 채 멋대로 해석을 남발하는 이 상황은 그야말로 마귀가 대승한 장면이자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룬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봅니다. 강도를 만나 죽기 직전의 사람을 돕고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말씀하시는 이웃 사랑일까요? 또는 세상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는 것이 복음이 말씀하는 이웃 사랑일까요?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도와서 그 사람을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이웃을 사랑해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기적을 베풀어 병자들을 고치셨고 굶주린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이 모두 이웃 사랑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타인을 상대하실 때에는 직접 주체가 되어보신 적이 없으셨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제자들을 상대할 때든, 추종자들을 상대할 때든, 반대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든, 병자들을 상대할 때든, 굶주린 사람을 상대할 때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시는 계기가 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의로 타인을 상대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셨다는 묘사는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이 또한 그 사람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예수님에게 전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계셨고 한번도 그 자세를 흐트러뜨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시고자 하신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실 수 있으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공생애 때의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하나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몸으로 만나던 사람들에 대해 관계하신 내용들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장 10~1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 됨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기쁨의 관계이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을 보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사랑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들어오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가 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채우심을 통해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예수님은 총력을 기울이셨습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일은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과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관계하실 수 있었습니다.
엄격하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주체가 되어보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주체는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과정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 되어 계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에 우리의 마음도 참여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절대기쁨과 절대만족과 절대평강이 생겨납니다. 이 기쁨과 만족과 평강이 절대적인 이유는 이 세상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으로 파송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는 이유가 없는 기쁨과 만족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제시하는 논리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는 시간문제입니다. 약속으로써 주어진 복음을 붙잡고 있는 한 마음은 하늘에 도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파송 받은 자로서 살아갈 때 육체와 연관된 모든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뜻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죄인으로 여겨지는 세리와 함께하신 것도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새인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맹공을 퍼부으신 것도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채찍을 들고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으신 것도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으로부터 이웃 사랑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타인을 향한 행위입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비난조차도 이웃 사랑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는 나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과의 관계 또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관점을 넓혀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타인이고 이웃입니다. 가족을 대할 때든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든 모든 상황에서 내가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관계에 주체가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나에게서 나타나는 일이라면 설령 그것이 이타심에서 발현된 일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이웃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흔히 일어납니다. 우리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을 돕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 여깁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과 관계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적 관점에서는 결코 이웃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 사랑에 대해서 폭탄 테러를 자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분별이 없으며 악하기까지 합니다. 실제로 도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중 문제입니다. 나 스스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생각자체가 악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내린 이웃 사랑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기에 죽었다 깨어나도 온전한 이웃 사랑에는 도달할 수 없고, 나 자신의 영생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해석은 우리를 복음에서 떨어뜨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웃에 대한 관계에서 주체가 되라고 부추깁니다. 이것은 치명적인 유혹입니다. 우리가 파송 받은 자로 삶을 살아간다면 결코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연쇄 사건의 과정을 따라서 땅을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뿐입니다. 이 땅에 대해서는 가족뿐만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이웃에 대해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송 받은 사람은 파송하신 분의 뜻만을 전달하면 됩니다. 파송하신 분의 마음을 전달하고 계획을 이루면 파송된 자의 일은 끝입니다. 파송된 자는 파송하신 분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자들이지 스스로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귀는 이러한 파송의 관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자리에 서야 한다고 유혹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해석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 나타나는 등장인물의 특성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절대 사마리아 사람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동일시해야 할 대상은 오히려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럴 때에 비유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며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고자 이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비유는 “강도 만난 자의 비유”라고 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가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강도 만난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웃 사랑은 나를 돕는 자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귀의 해석을 따르자면 이웃 사랑이란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내가 가진 무엇인가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 비유를 온전히 해석하자면 나야말로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입니다. 주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오는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이 이웃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율법사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해 말씀하시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율법사가 영생에 대해 물었다는 것으로부터 이 비유의 주제 또한 윤리적 차원이나 신앙적 덕목에 관한 것이 아닌 영생(구원)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율법사로부터 발견하신 문제점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율법사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전제를 확고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이러한 전제를 묵인하시고 율법사 자신이 가진 대답을 해보라 요청하십니다. 27절을 보면 율법사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스스로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의미에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사의 이해에서 간과된 것이 무엇일까요? 율법사의 대답을 살펴보면 모순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인격적 요소 전부를 다 쏟아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또 무슨 힘이 남아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일까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였다면 이웃을 사랑할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바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마주할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이웃을 마주할 때는 나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력과 뜻과 힘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드러내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나는 누군가와 만날 때에 빈껍데기인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들오셔서 나의 마음이 되어주시고 나의 힘이 되어주시고 나의 뜻이 되어주시고 나의 목숨이 되어주십니다. 이제 그 사람은 나를 만나면서도 본의 아니게 하나님과 접하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에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생선을 조리하기 위해 내장을 훑어내듯이 나라는 존재는 훑어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이웃과 만나시게끔 하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러한 비유를 오해하게 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이웃들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가가서 도움을 주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 여기게 합니다. 그리고 남을 도울 수 없으니 이웃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내가 이웃 사랑을 못하며 사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반성도 회개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악함입니다. 파송 받은 자라면 사람을 대할 때에도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7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이웃입니다. 이웃을 대할 때에는 설령 그것이 가족일지라도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자녀가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 없고, 어려움에 처한 배우자가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이 하나님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다 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스데반 집사님처럼 몸까지도 순교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해 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한 채 내가 주체가 되고 내가 나서서 어려운 지경에 있는 사람을 돕고자 한다면 이것은 복음적 이웃 사랑에 대한 폭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폭거를 이웃 사랑이라 여기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 또한 본문 말씀과 상통합니다. 설령 내가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다 하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이 아닌 마귀에게 감동 받은 죄악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이웃을 대할 때에는 나의 주체성은 훑어내져야 하고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파송 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이웃 사랑 또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써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이웃을 대할 때에 껍데기만 남은 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껍데기 안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이 들어오면서 이웃들이 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접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온전한 이웃 사랑의 길입니다. 오늘은 이웃 사랑의 복음적 개념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내일은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절대로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여 빈껍데기만 남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음도 쓸 수 없고 목숨도 쓸 수 없고 힘도 쓸 수 없고 뜻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한 사람으로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성공함으로써 파송 받은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한 삶에는 내 마음이나 목숨이나 힘과 뜻이 한 톨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마음과 생명과 뜻으로만 이웃을 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이웃을 보듬게 되고 구제를 베풀 수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오히려 도움을 받거나 화를 내는 상황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이웃 사랑이 됩니다. 타인을 대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이 이웃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송 받아 사는 사람은 잠을 자는 순간에도 이웃 사랑을 합니다. 이웃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존재 자체가 이웃 사랑이 되는 파송 받은 자들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복음적 이웃 사랑을 통하여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이웃 사랑이 되고 자유롭고 가볍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귀가 해석한 이웃 사랑의 개념을 깨뜨려버리고 온전한 예수 따름을 통하여 이웃 사랑의 경지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