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번의 구타>를 중심으로 본 성장영화에 대해서
2011113147 이은수
0.들어가며
성장이라는 테마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어필하는 매력적인 소재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나름의 성장통을 앓기 때문에 성장영화는 다른 소재에 비해 공감대의 폭이 넓고 이를 통해 관객들은 지나간 자신의 유년시절을 반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누군가의 성장담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기능도 상당부분 성장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키는데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흔히 성장영화를 떠올릴 때면 <400번의 구타>의 앙뜨완처럼 갖가지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통제불능 10대의 한바탕 소동을 일차적으로 연상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의 성장영화다. 성장영화의 주동인물은 비단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만 국한된 영역이 아니다. 삶의 과정 중에서 우리는 어떤 도전이나 장벽에 직면해야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이 때 그것을 뛰어넘어 한 단계 발전하느냐 혹은 그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느냐의 기로에 선 개인의 모습은 충분히 성장의 범주에 놓고 볼 수 있다. 소설『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처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업이자 숙명이기에 성장담의 주인공은 세대를 초월한다.
1. 미성년
앞서 언급했듯 성장담의 주인공으로 가장 첫 손에 꼽히는 대상은 역시 청소년이다. 아직 성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어린아이이지도 않은 주변인으로서 존재하는 청소년기는 ‘성장’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400번의 구타>의 앙뜨완은 이러한 성장영화 클리셰 속의 전형적인 인물로 학교 무단결석과 가출, 절도를 일으켜 급기야 소년원에 수감되고 마는 거친 문제아로 나타난다. 처음부터 앙뜨완이 소년원에 송치되어야할 만큼 비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앙뜨완을 몰아세울 뿐이고 무관심 속에서 앙뜨완은 점점 더 엇나간다. <400번의 구타>는 앙뜨완의 도전적인 시선으로 강렬하게 끝맺는다.
<400번의 구타>의 앙뜨완 드와넬이 ‘할 수 있는 모든 어리석은 짓은 다’ 하는 폭풍 같은 소년이라면 <열세 살 수아>의 수아는 그에 비해 한참 얌전한 산들바람 같은 소녀다. 앙뜨완이 자신의 방황을 비행으로 표출한다면 수아는 자신만의 이상적인 엄마(가수 윤설영)를 설정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방황을 삭힌다. 병적일 정도로 내성적인 수아는 아버지를 잃고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생활한다. 홀로 생계전선에 뛰어든 엄마는 수아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그렇게 방치된 수아는 앙뜨완처럼 방황한다. 결국 수아는 자신의 이상적인 엄마 가수 윤설영을 만나러 서울로 가출을 감행하고 콘서트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윤설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딸을 찾으러 서울에 온 엄마와 콘서트장에서 재회한 모녀는 그렇게 극적으로 화해하고 수아는 안정을 찾는다.
앙뜨완은 난생처음으로 바다를 보며, 수아는 자신이 만든 환상이 붕괴됨을 통해 성인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서로 자신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은 매우 달랐지만 앙뜨완과 수아는 다행한 타락(Fortunate fall)을 겪은 탕아로 마무리된다.
2. 여성
<델마와 루이스>는 페미니즘영화를 대표하는 고전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으나 더 넓은 범주에서도 충분히 재고할 가치가 있는 영화다. 가부장적인 남편 대릴에게 억눌려 사는 주부 델마와 비전이 보이지 않는 웨이트리스 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루이스의 여정은 앙뜨완의 방황 이상으로 파괴적이고 극적이다. 그들의 여정은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자아를 바로 세움과 동시에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정지된 일상의 억압에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 오롯이 담겨있다. 그들은 최후의 순간 비타협적인 각성을 거쳐 자살을 선택한다. 자기파괴로 완성되는 그들의 성장은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며 자유인으로 비상하는 모습을 매우 효과적으로 실현했다.
델마와 루이스는 JD가 돈을 훔쳐가지 않았더라면 할렌을 죽인 이후 사건을 더 키우지 않을 수 있었다. 앙뜨완도 마찬가지로 소년원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과 교훈은 그리 녹록치 않으며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매 순간 우리는 선택해야 하며 델마와 루이스, 그리고 앙뜨완이 선택한 길은 결국 그들을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3. 애어른? 어른애?
<어바웃어보이>의 주인공 윌은 도무지 진지할 줄을 모르는 한량으로 철듦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남자다. <400번의 구타>에서 등장하는 어른들은 모두 앙뜨완 드와넬에게 일방적으로 훈계하고 지시하는 수직적 관계다. 그러나 <어바웃어보이>에서는 어른 윌과 아이 마커스가 수평적이고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십대 소년 마커스의 제안을 삼십대 후반 성인 윌이 결코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적용한다. <어바웃어보이> 초반에 사용되는 부감은 윌의 대사처럼 ‘섬’과 같은 윌과 마커스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윌은 마커스가 자신의 완벽한 개인주의 삶을 망쳤다고 불평하면서도 마커스가 자신의 삶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줄 안다.
윌과 앙뜨완의 성장이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의 성장이 결코 완벽하게 완성된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섬이라고 주장했던 이기주의자 윌이 갑자기 인류애를 보여주지도 않고, 어긋날 대로 어긋나버린 앙뜨완이 순식간에 모범생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그들의 성장은 반단계만큼의 성장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매우 현실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4. 나오며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한 사람의 성장은 죽을 때까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이란 단순하게 물리적인 나이를 기준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를 수 없으며 인간은 매 순간 자기반성과 부단한 노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끝없이 인간으로서 완전해지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곧 삶이자 성장이다. 성장영화의 진면모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