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제4권: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금성(金城)의 옥사와 단종의 별세
정축년(1457) 가을에 금성대군 유(瑜)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더불어 거사하기를 꾀하다가 얼마 안 되어 발각되었다. 종친과 재집(宰執)과 대간이 법으로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청하니, 유(瑜)에게는 사사(賜死)를 명하고 한남군(漢南君) 어(
)와 영풍군(永豐君) 선(瑔)과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 등은 모두 극변에 안치하여 금고(禁錮)하였다. 《해동야언》
○ 처음에 유가 순흥에 이르러 매양 이보흠과 함께 만나기만 하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해동야언》에 말하기를, 산호(珊瑚) 갓끈을 이보흠에게 주고 거사를 꾀하였다. 비밀리에 남쪽 인사들과 결탁하여 노산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는데, 하루는 유가 좌우를 물리치고 이보흠을 불러서 격문을 초하게 하고 격문이 한 구절만 전하는데,“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니, 누가 감히 좇지 않으랴” 하였다. 장차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을 맞아서 계립령(鷄立嶺)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鳥嶺)과 죽령(竹嶺)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순흥 관노 급창(及唱)으로 있는 자 가 벽장 속에 숨어서 엿듣고 금성의 시녀를 사귀어 그 격문을 훔쳐 가지고 서울로 달려 올라갔다.기천(基川) 지금의 풍기 현감이 그 말을 듣고 말을 서너 번이나 갈아타고 빨리 쫓아가서 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먼저 서울에 들어가서 고변하여 드디어 큰 공을 얻고, 유와 이보흠은 모두 잡혀 죽었다. 《순흥 야사(順興野史)》에는 이보흠이 사람을 띄워 서울에 달려가 고변을 하게 하고, 이보흠이 또 이어 말을 달려 올라가 고변하였는데,처음에는 자수한 것으로 면하였다가 필경은 격문을 초한 죄로 베임을 당하였다. 유가 안동(安東) 옥에 갇혀 있는데, 하루는 알몸으로 빠져나가서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금부도사와 부사가 놀라고 두려워서 종을 울리고 사람을 동원하여 수색하였다. 한참만에 유가 밖에서 들어오면서 담소하기를, “너희들이 수가 많으나, 만일 내가 도망한다면 추격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여러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한 사람 죽는 것이 편하다.” 하였는데 한 사람이란 것은 자기를 가리킨 것이다. 의관을 정제하고 걸상에 걸터앉으니 금부도사가 말하기를, “전패(殿牌)에 절을 해야 한다.” 하고, 서쪽으로 향하여 절을 하게 하였다. 유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은 영월에 계시다.” 하고, 드디어 북으로 향하여 통곡 사배하고 죽음에 나가니, 여러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 유의 이름을 《선원록(璿源錄)》에서 삭제하였다. 뒤에 도로 복적을 명하였다. ○ 《병자록》 《논사록》
그때, 좌찬성 신숙주가 홀로 아뢰기를, “작년에 이 개의 무리가 노산을 복위시킨다는 명목으로 모의하였고, 지금 유가 또 노산과 영(瓔)을 꾀어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니, 노산은 편안히 두어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의정부에서 반드시 다시 와서 청할 것이니,다시 의논하여 시행하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의정 정인지ㆍ좌의정 정창손ㆍ이조 판서 한명회 등이 와서 신숙주와 함께 아뢰기를, “노산이 반역자의 주인이 되었으니, 편안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노산을 이미 군으로 강봉하였으니, 폐하여 서인을 만드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실록》
○ 양녕대군 제(禔) 등이 소를 올려 아뢰기를, “전날 간흉의 변에 노산이 참여하여 종사에 득죄 하였고, 유가 군사를 들어 모반하여 장차 노산을 끼고 종사를 위태하게 하려 하였으니, 죄악이 차고 넘쳐 천지에 용납할 수 없으니, 대의로 결단하여 전형(典刑)을 바르게 하소서.” 하였다. 《실록》
○ 종친부ㆍ의정부ㆍ충훈부ㆍ육조가 아뢰기를, “노산군이 종사에 득죄하였으므로, 근일에 어지러운 말을 하는 자는 모두 노산으로 구실을 삼고 있다. 지금 만일 법으로 처단하지 않으면, 부귀를 도모하고자 하는 자가 빙자하여 난을 꾸밀 것이니, 용서할 수 없고, 유는 천하의 대역죄인이니, 개인적인 은혜로 법을 굽혀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임영대군(臨瀛大君) 요(璆)가 정창손의 옆으로 가서 말하기를, “어(
)ㆍ선(瑔)ㆍ송현수는 유(瑜)와 죄가 같으니, 혼자 살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여러 신하의 뜻은 잘 알겠으나, 따르지 않는 것은 내가 착해서가 아니다. 박덕한 처지로서 어찌 감히 다시 골육을 해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죄가 있더라도 오히려 보전하여야 하거늘,어찌 어(
)ㆍ선(瑔) 같은 죄 없는 무리까지 이르랴. 이것은 여러 신하의 계책이 틀린 것이니, 속히 물러가서 나의 헤아림을 기다리라.” 하였다. 《실록》
○ 정인지 등이 또 상소하여 유의 처벌을 청하니, 세조가 유(瑜)에게 사사를 명하고, 영(瓔)ㆍ어(
)ㆍ선(瑔)ㆍ송현수의 죄는 의논하지 말라 하였다. 정인지 등이 다시 아뢰자, 이르기를, “불가하다. 예전 사람이 ‘그 괴수는 죽이고 따라다닌 자는 다스리지 말라’는 말을 하였고, 또 성인은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만일 모두 법으로 처리하면 너무 심하니, 송현수만 교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모두 논하지 말라.” 하였다. 《실록》
○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를 사사하였다. 부원군의 부인 민씨(閔氏)를 시월에 정부 상소로 인하여 교형에 처하였다. 《해평가승》
○ 혜빈(惠嬪) 양씨(楊氏)는 한남군 어와 영풍군 선의 어머니로서, 단종에게 젖을 먹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모자가 한꺼번에 죽었다. 《해평가승》
○ 순흥부를 혁파하여 기천(基川)ㆍ영천(榮川)ㆍ봉화(奉化)에 나누어 붙였다. 순흥에 사는 사람들이 말[辭]에 연루되어 도륙을 당하니 죽계(竹溪)의 물이 모두 붉어졌다. 금성이 처음 귀양왔을 때에 경내에 무재(武才)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금은을 싸서 비단 주머니에 넣어 봉하여 집으로 보내고,그 사람이 와서 사례하면, 책에 이름을 적게 하여 심복을 삼았다. 일이 발각된 뒤에 조정에서 <당여록(黨與錄)>을 찾으려고 사람을 시켜 순흥 읍내 근처의 땅을 팠으나 마침내 찾지 못하였다. 《노릉지(魯陵誌)》
순흥을 혁폐(革廢)하니, 거민(居民)들의 노래에 이르기를,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이 복위한다.” 하였는데, 그 뒤 이백 삼십여 년 만에 순흥부 동쪽에 나무 은행(銀杏) 가 홀연히 살아나서 자랐다. 항간에서 전하기를,“예전에 이 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요가 있었다.” 하였다. 얼마 후에 민원으로 인하여 다시 순흥부를 설치하였고, 그때에 신 규(申奎)의 상소가 있어 단종의 위호를 회복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
○ 동학사 《혼기(魂記)》에 쓰인 사람은 유(瑜)ㆍ정종(鄭悰)ㆍ송현수(宋玹壽)ㆍ최면(崔沔)ㆍ최시창(崔始昌)ㆍ이수정(李守禎)ㆍ박수량(朴遂良)ㆍ임진성(任進誠)ㆍ박윤(朴潤)ㆍ홍적(洪適)ㆍ이상손(李祥孫)ㆍ권완(權完)ㆍ이귀(李貴)ㆍ김충(金忠)ㆍ인평(印平)ㆍ유대(柳岱)ㆍ윤기(尹奇)ㆍ김득상(金得祥)ㆍ길유선(吉由善)ㆍ최찬(崔璨)ㆍ조희(曺熙)ㆍ서성(徐盛)ㆍ김옥겸(金玉謙)ㆍ허수(許遂)ㆍ홍구성(洪九成)ㆍ홍옥봉(洪玉峰)ㆍ최승손(崔承孫)ㆍ최자척(崔自滌)ㆍ진유번(陳有蕃)ㆍ조유례(趙由禮)ㆍ목효지(睦孝智)ㆍ성문치(成文治)ㆍ이문(李聞)ㆍ이례숭(李禮崇)ㆍ신경지(申敬之)ㆍ맹지(孟之)ㆍ중지(仲之)ㆍ근지(謹之)ㆍ내관 엄자치(嚴自治)였다.
○ 10월 24일에 노산군을 사사하였다. 《병자록》에는 유시(酉時)에 죽었다고 쓰여짐
그때에 조신들이 노산을 처형하여 그에게 향한 백성의 마음을 단념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사관이 기록하기를, “노산이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하였다. 《해동야언》
○ 수상 정인지가 백관을 거느리고 노산을 제거하자고 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지금까지 분하게 여긴다. 《대동운옥》
○ 그 죄를 논한다면, 정인지가 으뜸이 되고 신숙주가 다음이다. 《죽창한화(竹窓閑話)》
○ 말하는 자가 이르기를, “정인지가 곧은 절개는 있다.” 하여, 《필원 잡기(筆苑雜記)》 같은 데서는 그 사람됨을 대단히 칭찬하였으나, 노산이 상왕으로 별궁에 있을 때에 정인지가 소를 올려 청하기를, “일찍 노산 죽이기를 도모하여 후환을 막자.” 하였다. 조금 있다가 영월로 옮기게 하고 뒤이어 처형을 행하였으니 참으로 간흉의 우두머리라 하겠다. 《축수록》
○ 사약을 내릴 때의 공사(公事)는 금부에 있다. 《논사록(論思錄)》
○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나장(羅將)이 시각이 늦어지다고 발을 굴렀다. 도사가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고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도사가 대답을 못하였다. 통인(通引) 하나가 항상 노산을 모시고 있었는데,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겼다. 그 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통인이 미처 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아홉 구멍에서 피가 흘러 즉사하였다. 시녀와 시종들이 다투어 고을 동강(東江)에 몸을 던져 죽어서 둥둥 뜬 시체가 강에 가득하였고,이날에 뇌우(雷雨)가 크게 일어나 지척에서도 사람과 물건을 분별할 수 없고 맹렬한 바람이 나무를 쓰러뜨리고 검은 안개가 공중에 가득 깔려 밤이 지나도록 걷히지 않았다. 《병자록(丙子錄)》
노산이 항상 객사(客舍)에 있으므로, 촌 백성들로서 고을에 가는 자가 누(樓) 아래에 와서 뵈었는데, 해를 당하던 날 저녁에 또 일이 있어 관에 들어가다가 길에서 만나니 노산이 백마를 타고 동곡(東谷)으로 달려 올라가는지라 길가에 엎드려 알현하며, “관가께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더니,노산이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태백산으로 놀러간다.” 하였다. 백성이 절하며 보내고 관에 들어가니, 벌써 해를 당하였다. 《영남야어(嶺南野語)》
○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옥거리[獄街]에 왕래하며 통곡하면서 관(棺)을 갖추어 이튿날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군 북쪽 5리 되는 동을지(冬乙旨)에 무덤을 만들어서 장사지냈다 한다. 이때 흥도의 족당들이 화가 있을까 두려워서 다투어 말리매 흥도가 말하기를, “옳은 일을 하고 해를 당하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 하였다. 《영남야언》 《병자록》
사기에 말하기를, “노산이 영월에서 금성군의 실패를 듣고, 자진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의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다. 후일에 실록을 편수한 자들이 모두 당시에 세조를 종용(慫慂)하던 자들이다. 《계유 실록》이라는 것에 대개 이러한 내용이 많다.혹은 말하기를, “노산의 무덤을 충의배(忠義輩)들이 몰래 파서 법물(法物)에 의거하여 이장하였다.” 하나, 이것도 공연한 말이다. 다만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애통하게 여겨 제물을 베풀어서 제사지내고 길흉ㆍ화복에 이르면 모두 묘소에 나가서 제사지냈다. 부녀자라도 오히려 전하기를, “정인지 같은 간적 놈들에게 핍박받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제 명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였다.슬프다, 옛부터 충신ㆍ의사가 반드시 대가 세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당시에 임금을 팔고 이익을 꾀하던 무리들은 반드시 자기 임금을 혹심한 화란에 몰아넣고야 마음에 쾌감을 느꼈으니 이런 자들을 엄흥도에 비하여 보면 어떠한가. 촌 부녀자나 동네 아이들은 군신의 의리도 알지 못하고 직접 흉한 변고를 보지 못하였건만, 지금까지 분하게 여겨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새어 나오고 전하니, 사람의 본성이란 속이기 어려운 것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음애일기(陰崖日記)》
○ 노산이 해를 입자, 명하여 강물에 던졌는데, 옥체가 둥둥 떠서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데, 가냘프고 고운 열 손가락이 수면에 떠 있었다. 아전의 이름은 잊었으나, 그 아전이 집에 노모를 위하여 만들어 두었던 칠한 관이 있어서 가만히 옥체를 거두어 염하여 장사지냈는데 얼마 안 되어 소릉(昭陵 단종의 어머니 능)의 변이 있어 다시 파서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아전이 차마 파지 못하고 파는 척 하고 도로 묻었다. 《아성잡설(鵝城雜說)》 《축수록》
○ 노산이 영월에서 죽으매, 관과 염습을 갖추지 못하고 거적으로 초빈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슬피 울고 스스로 말하기를, “이름을 통하고 구휼을 받은 정분이 있다.” 하며, 며칠을 묵다가 하루저녁에 시체를 지고 도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산골에서 불태웠다.”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강에 던졌다.” 하여, 지금의 무덤은 빈 탕이요 가묘라 하니,두 말 중에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점필재(佔畢齋)의 글로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틀림없다. 그러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들의 지휘를 받은 자인가. 영원히 한이 그치랴. 혼이 지금까지도 떠돌아다닐 것이니 참으로 슬프다. 《송와잡기(松窩雜記)》
○ 11월에 종부시(宗簿寺)가 아뢰기를, “노산과 영(瓔)과 어(
)와 선(瑔)은 죄가 종사에 관계되니, 속적(屬籍)을 마땅히 끊어야 합니다. 자손도 아울러 종친록(宗親錄)ㆍ유부록(類附錄)에서 삭제하소서” 하매, 그대로 하였다. 《금석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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