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주권적 가혹함, 식은 죽 먹기 대처법>의 줄거리 :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거침없이 막힘없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사자인 요셉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싶은 상황이 반복하여 주어집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냉혹하고 가혹하게 여겨지는 삶의 상황을 대하는 요셉의 태도입니다. 고민 갈증 고통 번뇌의 흔적이 없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 같은 분위기만 보입니다.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요셉 영성의 비밀을 들여다봅니다.
주권적 가혹함, 식은 죽 먹기 대처법
(창세기 38:19~30)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본문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의 일상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0절 이후에는 자존심이 상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씌우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에 친위대장 보디발은 심히 노하여 그토록 신뢰하던 요셉을 궁정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곳에서도 옥중 죄수들의 관리자로 임명을 받을 만큼 간수장의 신뢰를 얻습니다. 이러한 본문을 중심으로 ‘주권적 가혹함, 식은 죽 먹기 대처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오늘 본문은 참 기이한 면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노예로 팔려서 애굽의 절대 권력자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지 보디발은 집안 전체의 총무를 맡깁니다. 유랑민 집안의 출신이자 노예로 팔려 온 청년 요셉이 초강대국의 절대 지존인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 집안 전체를 다스리는 총무를 맡다니 굉장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편 이로부터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신뢰를 등졌다고 여기고 궁정 감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요셉은 감옥에서도 간수장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습니다. 환경의 변화가 천지개벽 수준으로 일어나는 가운데 요셉은 모든 삶의 현장마다 엄청난 신뢰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참 기이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는 지금 벌어지는 일들, 지금 처해있는 삶의 조건이나 환경, 지금 상대해야 하는 사람과 상황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제발 이런 것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형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있기 때문에 삶은 힘듭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비교하자면 요셉이 마주하게 되는 상황보다 더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요셉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에 팔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요셉을 향해 갖고 계신 계획을 거침없이 수행하실 수 있는 자유를 얻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실행되는 족족 청년 요셉의 삶에는 너무나 가혹한 상황이 주어집니다.
요셉은 비록 유랑민이었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열두 형제 중에서도 특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채색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던 요셉이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의 삶은 익숙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상전벽해와 같습니다. 뽕나무 밭에 살던 사람이 어떻게 바다에서 살겠습니까? 그렇기에 요셉은 날마다 형들을 원망하며 아버지 집을 그리워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처한 상황을 마음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매일 눈물로 지새우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게 된 요셉의 삶을 보면 오히려 잘 된 것처럼 보입니다. 노예로 팔리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3절을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요셉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있는 동안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며 불도가니 속에서 타 죽어가는 심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창세기 44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뒤에 형제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 앞에서 유다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면 아버지 야곱이 얼마나 괴로운 삶을 살았는지 잘 드러납니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마음은 요셉이 죽었다는 것으로 끝났던 것이 아닙니다. 간섭할 수 없고, 편애할 수 없고, 배려할 수 없고, 관심할 수 없었을 뿐이지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는 생각은 영광의 세상을 붙잡고 있었던 야곱을 불도가니에 집어넣고 태워죽이는 효과를 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요셉은 노예로 팔리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역량과 기량을 백분 발휘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하는 모든 일을 잘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요셉의 마음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노예 생활에서 평안했음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노예로 사는 현장에서 적합하고 필요한 효용성 있는 말과 행동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말과 행동에 대해 결과가 나타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상전벽해와 같은 상황에서 요셉이 어떻게 이처럼 잘할 수 있었는지 이상할 정도입니다.
이로부터 ‘주권적 가혹함, 식은 죽 먹기 대처법’이라는 제목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혹한 상황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당장 몸에 암이 발생했다든지, 남편의 사업이 갑자기 실패했다든지, 직장에서 쫓겨났다든지, 가족이 아프다든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과물들은 가혹하게 여겨질 정도로 우리 삶에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겪는 가혹함이란 요셉이 겪은 가혹함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당시의 노예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지독함과 참혹함 이상의 삶입니다. 가장 사랑받던 아들로서 유복하게 자라온 요셉은 하루아침에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를 겪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된 요셉의 태도를 보면 마치 태어나자마자 노예 생활을 시작한 사람 같습니다. 노예 생활에 대한 좋고 나쁨의 기준이 없습니다. ‘원래 사람은 이렇게 사나보다.’라며 살아갑니다. 다른 상황은 있을 수도 없다는 느낌으로 노예 생활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요셉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매일 눈 뜨고 일어나서 마주하는 모든 상황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이것밖에 주어질 수 없기에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눈 뜨게 하셔서 살게 하시는 이유는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살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도, 보디발 아내의 요청을 거절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여기에는 갈등, 고민, 원망, 복수심,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에게서는 고통과 갈등에 의해서 짓눌린 흔적이 없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린 것, 감옥에 들어간 것을 비롯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의해 수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권적 계획은 냉혹하고 가혹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것을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대처하고 있습니다. 식은 죽 먹기는 영어로 ‘a piece of cake.’라고 표현합니다. 쉽게 말해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것처럼 쉽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대처법이 이러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어진 가혹한 현실을 마치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을 먹듯이 대처하고 있습니다.
불과 17세의 청년이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요? 요셉이 이러한 태도를 보이게 된 과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를 통하여 요셉에게 형성된 영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국 영광의 하나님을 마음에서 지켜냈던 아브라함과 같은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때 했던 말에서 그 내용이 잘 드러납니다. 8~9절을 보면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말이 기가 막힙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 넘어갔다면 보디발에게 죄를 짓는 것이지 왜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일까요? 얼핏 당연하다 여기며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가 쉽게 가질 수 없는 요셉의 영성이 드러납니다.
주석을 보거나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이 장면에서 요셉의 윤리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무장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요셉이 가진 믿음의 특이함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치던 시절부터 드러납니다. 형들은 양 떼를 치면서 아버지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하지 못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러한 모습을 용납하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알립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이 집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요구 받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와 마찬가지로 이를 거부합니다. 요셉 안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이상하게 펄펄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상하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존재감을 느끼며 대합니다. 주인이 없는 자리에서도 주인이 있는 것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요셉이 가진 믿음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요셉은 ‘내가 지금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일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허락하신 일이다.’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이 냉혹하고 가혹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 유복한 집안에서 잘 살던 요셉을 하루아침에 노예로 만드셨으니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이 이 상황을 허락하시고 보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요셉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확고히 살아있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보다 더 먼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꼈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노예로서 보디발 장군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필연적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셉은 보디발 장군이 집을 비웠다고 해서 보디발 장군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현장을 보고 계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요셉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있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는 요셉으로서는 보디발 장군 아내의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영성의 특징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입니다. 이것이 영광의 하나님을 잃지 않으려 했던 아브라함의 영성과도 일치합니다. 굳이 요셉의 영성의 특징을 표현해 보자면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함은 이상한 현상을 만듭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왔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마음은 1cm도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몸만 아버지 집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옮겨왔을 뿐이지,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감옥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은 하나도 변동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함이란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좋음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가 작동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있으면 마음이 삶의 현장에 대해 접촉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이 요셉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총리가 되기 위한 지름길을 밟고 있습니다.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고, 누명을 써서 궁정 감옥에 갇히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한 것을 계기로 바로의 꿈을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지름길임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이 상황을 겪는 요셉은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수용이 불가능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몸이 처한 상황의 변화는 요셉의 마음에 와닿지를 못합니다.
상황이 마음에 와닿지 못하기에 아무리 가혹하고 참혹한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마음은 상황에서 기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마주하는 상황에서 마음을 채울 만족 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겉으로 볼 때 하나님은 요셉의 삶을 냉혹하고도 가혹하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몸이 처한 환경은 말할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마음 상태는 달랐습니다. 요셉은 주어진 상황을 마음에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냉혹하고도 가혹하게 와닿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닻을 내린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몸이 처한 상황이 끊임없이 변해감을 압니다. 그러나 몸이 처한 상황이 변하거나 말거나 마음은 냉혹하게 대처합니다. 몸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은 빨리 없어져야 한다. 내가 왜 이런 상황을 맞이해야 하느냐?’라며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냉혹하게 주어진 상황과 마음이 분리된 상태를 유지합니다. 마음이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그곳에 정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냉혹해집니다. 내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내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갖는 태도 또한 그만큼 냉혹하고 가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몸이 처한 상황에 절대 달라붙지 않고, 이 상황이 좋다 나쁘다 훈수를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께 닻을 내린 상태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있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갈 때 주어진 상황에 대해 가장 적합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영광의 세상 것을 붙잡고 있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여기며 고통에 짓이겨지고 있었습니다. 불도가니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 위한 혹독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려서부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계신 곳에서도 아버지가 계신 것처럼 행동했던 태도가 말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감을 어떤 현장에서든지 충만하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냉혹하리만치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마음을 분리하여 하나님께 머무는 초인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떠오르는 말과 행동을 하고,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말과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얻는 결과로 뒷받침해 주십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 가혹함을 식은 죽 먹기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기 힘든 일이지만 할 수 없다고 끝내버릴 일은 아닙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쓰임을 받는 특별한 자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는 자유가 주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한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계획을 갖고 수행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야곱의 수준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과 요셉에 대해 의논하는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세운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겠다.’라고 말씀하셨다면 야곱이 받아들였을까요? 야곱은 회의 테이블을 뒤집어엎었을 것입니다. ‘내 아들 요셉을 애굽에 파실 거라면 차라리 나를 죽이세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 절대 안 됩니다.’라고 하며 얍복강가에서 씨름했듯이 다시 한번 하나님을 이기고자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내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의 가혹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버려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야곱과 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도저히 수용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셉과 같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서 머물고 하나님께 닻을 내려야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지금 몸이 처한 상황에 대해 냉혹하고 가혹하게 분리되어야 합니다. 상관하지 말고 내쳐야만 합니다. 그렇게 주어진 현장에서 해야 할 말과 행동을 할 때 하나님은 원하시는 결과를 만들어 가실 수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 들어가서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형들이 자기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제 요셉은 형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불탈 수 있습니다. ‘내가 형들을 반드시 죽이리라.’라는 생각을 하려다 보니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하나님을 먼저 상대하는 것이 다급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단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으로 상대해야 할 형들은 미뤄두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다급하게 마주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주하는 대상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게 해주세요.’라는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가득해지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믿음에서 하나님만으로 배부르고 싶다는 열망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그러자 요셉의 마음은 더는 형들이라는 존재에 붙을 수 없게 됩니다.
노예로 팔린 것은 몸이 처한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 마음이 곧바로 닿으면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는 채색옷을 입고 다녔는데 노예라니 대체 무슨 일이냐? 왜 이런 상황이 나에게 주어졌지?’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몸이 처한 상황보다 하나님을 다급하게 여겼습니다.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 보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보고 계시기에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과 눈 마주치기를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습니다.
마음은 지금 하나님과 마주해야 합니다. 모든 미래의 시간은 지금으로 흘러가기에 매 순간 지금을 맞이합니다. 지금 가장 다급하게 해야 할 일은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는 것입니다. 요셉이 주어진 상황과 눈을 마주치고자 했다면 ‘내가 미워할 거야. 내가 죽일 거야. 내가 복수할 거야. 내가 싫어할 거야. 마음에 안 들어 할 거야. 괴로워할 거야.’라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몸으로 마주하는 것들에 대해서 대응하기 전에 우선 급한 일은 먼저 나를 보고 계신 하나님과 상대하고자 다른 것들을 제쳐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문제, 자녀 문제, 건강 문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해결해야 할 다급한 문제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마주하다 보면 미래의 시간이 계속해서 지금이 됩니다. 또 지금 다급하게 하나님과 마주하고, 또 지금 하나님과 다급하게 마주합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보면 원수 갚기, 원망할 것, 좋아할 것, 싫어할 것은 다 뒤로 제쳐지게 됩니다. 항상 지금 다급하게 하나님을 마주한 채로 인생이 끝납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이고 선민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과 상황과 조건과 일과 문제에 대해 십자가를 통해서 일단 간격을 두는 것입니다. ‘너희는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다급한 일 처리하고 와서 다 처리해 주마.’라고 여기고 십자가를 보며 간격을 둡니다. 그리고 지금 다급한 일로써 하나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일단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가장 다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급하게 하나님을 마주함이 계속되는 동안 세상일들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어느덧 인생이 끝납니다.
그렇게 인생을 끝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며 몸으로 만나는 것들에 대해 잠깐 멈춰라. 세상일에 죽은 자인 것처럼 되어서 나를 따라 하나님께로 가자.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다급한 일이고 가장 우선적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의식하며 세상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마음이 닿지 않은 채로 살다가 죽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보여준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계획하신 일들을 주권적으로 행하실 때 어떤 가혹한 상황이 주어져도 우리는 한 조각 케이크를 먹고, 식은 죽을 먹듯이 대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바라보며 몸으로 만나는 모든 것을 뒤로 미루고 우선 다급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해야 할 다급한 일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 지금을 살고 있기 때문에 우선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이것만 하다가 생을 마칠 수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이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모든 감정의 움직임과 모든 의지의 발동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몸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든 아버지의 주권에 의한 일입니다. 이 상황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내게 최우선으로 다급한 문제는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마주하기 위해서 내 의식이 십자가 예수님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