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폰이나 컴에 들어오면..
일중일체 다즉일, 일미진중 함시방..
하나 가운데 일체가 들어있고, 일체가 곧 하나요, 한 티끌 안에 온 우주가 들어있다는 말이 실감 난다.
21세기 특징이 세계 종교와 철학은 과학과 자연스럽게 만나 모든 사상이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설명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그런데 주장과 설명이 차이가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어느 게 참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직 아니니 혼란이 오게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교면 불교, 어느 하나를 정해 그것을 깊고 넓게 이해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불교 안에서도 이견이 있어 어느 게 옳은지.. 감이 잡히지 않을 때가 있지만..
사람이 동물임이 틀림없지만 창조적으로 생각하는 동물이다.
다른 동물은 본능적인 사고라 할 수 있는 생각뿐이므로 아무리 시간에 흘러도 환경에 맞추어 자기를 특화시켜 오는 정도에 그치지만
인간의 창조적인 생각 능력은 자연과 환경을 인간들이 편한 세상으로 바꾸어 왔고..
화산이나 지진, 스나미, 태풍, 그리고 질병과 전쟁에 대해 여전히 약한 존재이지만..
결국 그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지구의 지배자처럼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독특한 창조적인 사고 능력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창조적인 능력은 이기적인 탐욕과 어울리면서 타인을 해치고 더 나아가 핵폭탄과 같은 무기를 개발하여 인류와 지구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보다 많은 인간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랐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 이기적 탐욕을 멈추지 않는 소수의 인간들에 의해 다수의 인간은 그들의 종이나 도구처럼 움직이는 사회가 되어간다.
법과 종교는 그런 차별 사회를 부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데..
탐욕의 엘리트들은 법은 물론 종교마저 그들 구미에 맞는 상하복종 모습으로 변형시켜 놓고 있다.
공맹사상이란 상하복종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여 자신의 능력에 따라 위 또는 아래로 가는 것을 정당화하고.. 그것에 만족토록 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신이라는 절대자를 세우고 그 아래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친다.
그에 반해 불교는 민주주의 이상처럼..
인류 모두가 평등하다는 진리를 바탕으로..
사회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일시적이며 결국 평등을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불평등이란 생각은 불평등한 현실에 직면하여 나온 것이듯..
기독교나 불교는 분명 인류 평등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또한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사회에서 현실의 불평등을 허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적 권위가 절이나 교회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교인이라 하나 교를 잘 알지 못하고, 불자라 하나 불을 잘 모르기 때문으로 본다.
불교에서 불평등을 포함한 괴로움의 근본 원인으로 잘 모른다는 무명(無明)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자 자신이 잘 모르니..
불평등한 시스템이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다.
어느 스님은 불교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불. 법. 승 3보에 귀의한다는 것에서..
귀의(歸依)란 돌아와 의지한다는 것인데.. 부처와 중생이 본래 모두 평등한데 어찌 중생이라 하여 부처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말인가!..
중생이라면 마땅히 부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야 할 뿐이니..
‘삼귀의’가 아니라 불. 법. 승 셋에 돌아온다는 ‘삼귀’라 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 의미는 훌륭하지만..
본래 부처[무아]였으나, 지금은 중생[유아]으로.. 부처[무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맞다면..
지금 중생은 석가 부처님[무아]에 의지하여 미래 부처[무아]로 나아가야 하니..
귀의가 적당한 게 아닌지?.
그러면서도 그 스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 현 불교 시스템이 너무 상하적으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르면 3자 눈에는 불자들은 왜 부처가 되려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불자[유아]들은 왜 부처[무아]가 되려 하는가?.
불자라면 다 알고 있는 4성제에서 가르치듯..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움이 너무 심각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부처란 괴로움을 완전히 벗어난 분인데.
우리 자신은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괴로움을 줄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매일 전해지는 뉴스를 보면 거의가 전쟁이나 재해.. 좋은 소식보다 나쁜 뉴스로 도배되어 있다.
곳곳에서 일어나는 선행도 많은데 뉴스는 왜 악행을 주로 전하고 있을까..
악행에는 괴로움이 따르듯.. 그 속에는 괴로워하는 자들이 있다.
독자들은 스스로 안다 자기에게 괴로움이 있음을.. 하여 남도 괴로움 아니 더 큰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알면..
카타르시스.. 곧 괴로움을 겪는 자신에게 위로가 된다.
역으로 선행에는 즐거움이 따르는데.. 남의 즐거움은 자신의 괴로움을 배가 시킨다.
해서 남의 선행에는 눈을 감으려 한다.
뉴스를 발행하는 자 입장에서는 많은 구독자가 필요하다.
하여 매스컴은 선행 뉴스보다 악행 뉴스를 더 많이 보도하게 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부처에 이르려면.. 그 과정에
잘 모르고 있던 것을 잘 알고 [이해] 그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실천]해야만 한다.
이해와 실천이 있어야만 하는 것.
그런데 불자님들은 이해하는 공부에 너무 인색하다.
괴로움은 탐욕에서 생긴다. 탐욕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보는 자[안입처]와 보이는 것[색입처]이 만날 때 탐욕이 간섭한다.”
“불타고 있는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불[탐욕]을 꺼야만 한다” 고 석가세존께서 가르치시는데..
위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있는 불자는 몇이나 있나??.
보살행을 강조하는 것은 이타행이야말로 탐욕을 줄이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이에게 왜 참선을 하느냐고 물으면..
화두를 깨치기 위해서라고 한다.
틀렸다기보다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불자에게뿐 아니라 참선하는 이유와 목적은.. 경을 보고 외우는 이유는..
괴로움을 바로 보아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여 참선을 하니.. 경을 독송하거나 염불을 송하니..
괴로움이 적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진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스스로 경험하도록 해야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절에서 짓는 미소나 행복은 사회에서 모습에 마스크를 쓴 게 아니라..
사회에서는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내면의 모습이다.
절이 있는 이유는..
절에서 여유와 평안을 누리도록 함이다.
님은
절에 가면..
고민은 잊어버리고..
미소와 행복한 마음이 오로라처럼 피어오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