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남산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길. 멀리 가장 높은 산이 정수산 정상부다.
백두대간 덕유산에서 분기한 진양기맥은 산청과 거창의 경계를 그으며 또 하나의 곁가지를 만든다. 소룡산과 밀치 사이 629m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정수지맥이다. 34.7km의 이 지맥은 산청 동부지역의 울타리를 이루는 산줄기로 신안면 하정리(원지) 경호강에 그 맥을 빠트리며 끝난다. 정수지맥을 대표하는 산이 정수산(淨水山)이다. 산자락의 율곡사와 새신바위(鳥神巖) 전설로도 알려져 있다.
경상남도의 지명유래 산청편에 ‘이 산에 있는 정수암이라는 절에 물이 맑고 좋았다 하여 산을 정수산이라 함’이라고 했다. 정수산은 정수암에서 따온 이름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산(淨山)으로 불렀으며, 옛 명칭은 척지산(尺旨山)이라고 했다.
정수산은 산세로는 평범해 보인다. 그러나 전망은 여느 산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반면 등산로는 단조로워 주로 척지ㆍ철수ㆍ율현마을을 기점으로 산행이 이뤄지고 있다. 들머리는 대중교통이 편리한 차황면 소재지로 했다. 능선을 따라 남산으로 올라 비득재 갈림길에서 정수지맥 569m봉~정수산 정상~부봉~척지고개~719.1m봉에 이른다. 이후 새신바위를 거쳐 율곡사를 둘러보고 율현마을로 내려서는 코스다.
산골이라 10월의 아침 날씨는 코끝부터 싸하다. 차황면사무소 앞 버스정류장에서 산청중학교 차황분교 정문 앞에 이른다. 정면에 남산의 전위봉인 472m봉이 빤하다. 학교 옆 장위천에 걸린 다리를 건너 콘크리트포장도로를 따라 오른편으로 꺾어든다. 길가에 놓인 컨테이너 박스를 지나면 성산 이씨ㆍ용궁 김씨 묘를 만난다. 여기서 산등성이를 따라 무작정 오른다. 처음부터 산길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간벌로 방치된 소나무 가지와 가시나무가 거치적거려 성가시게 한다. 하지만 15분만 오르면 472m봉에 닿는다.
- ▲ 정수산 정상 직전 오름길. 정상에 올라서면 지나온 능선이 뚜렷하고, 뒤로 월여산, 감악산, 소룡산, 보록산, 바랑산 등이 너울처럼 출렁거린다.
- ▲ 841m봉 직전에 만나는 벤치. 정수산은 등산객이 거의 없이 한적한 편이다.
밋밋한 산봉우리를 뒤로하면 묵은 임도. 길가에는 꽃대를 세운 억새가 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뒤돌아보니 군주처럼 우뚝 솟은 황매산이 주변 산을 거느리고 위세를 뽐낸다. 옹기종기 지붕을 맞댄 산골마을에 평안함이 묻어나고 들판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온통 가을빛 채색으로 분주하다. 뒤이어 콘크리트임도에 이른다. 그대로 능선을 따르면 남산으로 올라서는 희미한 산길이다.
콘크리트임도에서 30분쯤이면 남산(628m)에 선다. 차황면 마을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붙은 이름이다. 산정은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철탑이 차지했다. 약간 떨어진 곳에는 밑동이 불에 그을린 노송 한 그루가 자리한다. 억새와 잡목이 주변을 뒤덮었지만 전망도 그런대로 좋다. 북동쪽의 황매산, 베틀봉, 감암산, 부암산, 국사봉, 효렴봉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깝다. 이들 산은 산행 내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남산을 뒤로하고 내려서면 이어갈 산릉이 뚜렷하다. 능선 끝에 정수산이 우뚝하고 오른편에 숨은 듯이 보이는 둔철산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남서쪽에는 경호강 물길 따라 낮게 깔린 물안개가 웅석봉 자락을 환상적으로 휘감았다. 웅석봉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달뜨기 능선 너머로 지리산이 선명하다. 천왕봉, 중봉, 하봉, 왕등재로 잇는 지리산 동부능선이 환영처럼 다가온다. 산비탈은 오래전 산불이 할퀴고 간 상처가 아직도 역력하다. 불탄 자리는 억새와 가시덤불이 있어 산길 찾기가 쉽지 않다.
산릉 왼편으로 내려서면 임도로 추정되는 숲길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빼곡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은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하다. 소나무 간벌목을 쌓아둔 지역에서 595m봉을 넘으면 비득재에서 올라오는 정수지맥 합류점이다. 서서히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정수지맥의 마루금으로 잇는다. 산길은 희미하나마 능선을 따르게 된다. 참나무와 잡목이 들어찬 숲속에는 사람의 흔적보다 산짐승이 남긴 배설물만 눈에 띈다. 능선 길은 차츰 동쪽으로 휘어지며 된비알을 치오른다.
- ▲ 고요함이 지배하는 율곡사. 대웅전과 영봉당 사이로 새신바위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정상 표지석은 840m봉에 있어
한바탕 땀을 쏟으며 올라선 곳은 철수마을 갈림길. 바람에 나부끼는 리본이 반갑다. 하늘도 열리며 시야도 넓어진다. 곧장 올라선 봉우리는 지형도상 정수산(828.2m) 정상이다. 그러나 꽃대를 세운 억새만 무성할 뿐 별다른 특징은 없다.
다만 조망이 좋다. 지나온 능선이 뚜렷하고 뒤로 월여산, 감악산, 소룡산, 보록산, 바랑산이 너울처럼 출렁거린다. 응봉, 구인산, 비득재를 잇는 정수지맥의 산과 언저리에 자리한 상여봉, 와룡산도 볼 수 있다. 평탄한 능선 길에 묵은 헬기장을 만나고 내수마을 갈림길을 지난다.
낙엽 쌓인 정수산은 한적하다. 산등성이에 놓인 나무벤치는 땀을 식히기에 알맞다. 전망바위도 있어 주변 조망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곧 정상 표석이 서있는 841m봉이다. 낡아 빠진 나무벤치 두 개가 있는 이곳은 정수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다. 서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가리키는 이정표도 있다. 지리산 가는 길이 아니라, 보인다는 뜻일 게다. 산청읍은 물론 왕산, 필봉산도 보인다. 2분 후 또 하나의 정상석을 만난다. 최신 버전 지형도에 840m로 표기된 부봉이다. 부봉은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산은 율곡사 방향이다. 급경사 내리막길은 잣나무가 숲을 이룬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조망도 보인다. 내려 선 척지고개는 사거리 갈림길이다. 오른편은 척지마을, 왼편은 도성사로 내려서게 된다. 그대로 직진하여 송전탑을 지나고 곧 삼각점(산청 424, 1981 재설)이 있는 719.1m봉에 닿는다. 서너 발자국 옮기면 새신바위가 내려다보이는 너럭바위다. 조망은 물론 쉼터로 그만이다. 남쪽의 둔철산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하다.
- ▲ 남산에서 내려서는 안부 일대는 하늘을 찌를 듯이 빼곡하게 들어찬 소나무 숲이다.
너럭바위 옆으로 내려서며 정수지맥과 헤어진다. 이정표와 새신바위 전설에 관한 안내판을 지나 새신바위에 오른다. 멀리 신등면 단계리 너머로 의령의 한우산, 자굴산, 진주의 집현산, 광제산이 아슴푸레하다. 산기슭 골짜기에 자리한 율곡사도 보인다. 하기야 원효대사가 이 바위에 올라 바라보고 율곡사 터를 정했다니 말해 뭐할까.
새가 앉아 있는 형상의 이 바위에 관한 전설은 율곡사와 연관이 있다. 붓을 물고 벽화를 그리던 새 한 마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한 스님 때문에 날아와 바위가 되었다는 것. 오래전 진주지역 클라이머들이 등로를 개척한 암벽등반 훈련장이다.
새신바위를 벗어나면 기다리는 건 급경사 길이다. 짧지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암릉도 있다. 산길은 능선에서 계곡으로 접어든다. 사각사각 밟히는 낙엽 소리와 숲에서 들려오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묘한 화음을 이룬다.
계곡을 건너 율곡사 절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절집은 왠지 모를 적적함과 고요함에 갇힌 느낌이다. 요사채 아래 수조에 넘치는 물 한 바가지로 목을 축인다. 대웅전과 영봉당 사이로 새신바위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율곡사는 주변 골짜기에 밤나무가 많아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절 아래 마을도 밤고개(율현)이다. 절집을 뒤로하고 마을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25분이면 닿는다.
산행길잡이
■차황면소재지 버스정류장~남산~비득재 갈림길(정수지맥)~569m봉~정수산 정상~부봉~척지고개~719.1m봉~새신바위~율곡사~율현마을 <5시간 소요>
■신등면 율현마을~율곡사~새신바위~719.1m봉(삼각점)~척지고개~정수산 정상~남산 갈림길~농장(독립가옥)~철수교~철수마을 버스정류장 <4시간 소요>
■산청읍 덕촌~와룡산~상여봉~비득재~남산 갈림길~569m봉~정수산 정상~부봉~척지고개~719.1m봉~새신바위~율곡사~율현마을 <6시간 소요>교통 (지역번호 055)
산청버스터미널에서 차황행 산청교통(973-5191) 군내버스를 이용, 차황면사무소 앞에서 내린다. 산행 후 날머리인 율현마을에서는 원지(신안면 소재지)로 나오는 것이 귀가 교통편을 이용하기에 좋다. 그러나 율현마을에서 원지행 군내버스는 막차가 오후 2시30분에 있다. 버스시간 맞추기가 곤란하다면 원지택시를 호출하면 된다. 요금은 2만 원 안팎. 경호택시(972-8800), 원지개인택시(972-0752). 원지에서는 서울, 진주, 부산 등지로 운행하는 시외버스가 수시로 있다.서울→산청 남부터미널(ARS 02-521-8550)에서 1일 7회(08:30~23:00) 운행
부산→산청 서부시외버스터미널(ARS 1577-8301)에서 30~50분 간격(05:40~19:41) 운행
진주→산청 시외버스터미널(ARS 1688-0841)에서 10~20분 간격(06:40~21:30) 운행
산청→차황 산청버스터미널(973-5191)에서 1일 13회(07:00~18:30) 운행숙박 (지역번호 055)
산청읍내에 킹모텔(973-7645), 리앙스모텔(972-7756), 산청파크(970-6000), T모텔(974-0949) 등 깨끗한 숙박업소가 많다. 산청하면 생각나는 먹거리가 어탕이다. 통영대전고속도로 산청나들목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금호식당(973-3458)은 어탕 한 가지만을 고집하는 30년 전통의 맛집이다. 읍내의 덕일식당(972-2867)은 청국장과 산청 흑돼지볶음(두루치기) 두 가지 메뉴만으로 입소문이 났다. 자연촌식당(973-8700)은 한방 소갈비찜과 갈비탕이 전문이다.볼거리
율곡사는 천년고찰이다. 신라 진덕여왕 5년(651)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본래는 당우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는 대웅전, 칠성각, 관심당(觀心堂), 요사채만 남아 있다. 특히 율곡사 대웅전(보물 제374호)은 단청에 얽힌 전설과 ‘목침절’이라고 부른 이야기가 전해 온다.그러나 대웅전은 2003년 해체하여 중수하는 과정에서 유형의 아름다움만 잃은 것이 아니라 구전되어 왔던 무형의 아름다운 전설도 잃어버렸다며 율곡사를 아는 이들은 안타까워한다. 율곡사의 괘불탱은 보물 제1316호이다.
가까운 둔철산 자락에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정취암이 있다. 율곡사를 창건한 원효대사와 정취암을 창건한 의상대사는 수시로 왕래하며 수행력을 서로 점검하고 탁마수행(琢磨修行)했다는 일화들이 전해진다. 정수산은 율곡사를 품고 있지만 북쪽의 황매산 자락에는 영암사터가 있고, 남쪽 둔철산에는 정취암이 있다. 산 서쪽 너머에는 경호강이 있어 강을 건너면 지리산이다. 영암사터와 율곡사, 정취암이 경호강 물줄기를 따라 나란히 엮어져 있는 셈이다. 세 절은 모두 역사가 오래됐을 뿐만 아니라 보물급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