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광무 1년)에 창건한 와룡산 유하사는 창건부터 현재까지의 연혁을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최초 창건한 월선보살의 초기 건립과정이며,두 번째 단계는 무심(無心)대사의 포교활동시기이고, 세 번째 단계는 1969년 무심대사의 뒤를 이은 묘행(妙行)스님의 중흥기로 나눌 수 있다.
무심대사는 월선 보살의 영향을 받아 1925년 출가했고 1950년대에 유하사를 중건하고 포교활동에 나섰으나 1960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 후 유하사는 사세가 급격히 쇠락해 폐사의 위기에 직면하던 중 1969년 지금의 주지인 묘행스님이 부임해 종단에 등록시키고 평생을 바쳐 인근의 농지를 사들여 경내지로 탈바꿈시키고 대웅전과 선원, 약왕보살상과 요사채, 금강문 등을 건립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15명의 비구니스님들이 거처하며 수행하고 있다.
유하사 안내석
유하사 석종형 부도인 무심대선사 부도와 부도비, 유하사 창건주월선보살기념비
유하사 법기헌
절 밖에 홀로 세워진 법기헌은 주심포 익공계 양식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당시 무심대사가 이 곳에 거처하면서 기도와 포교를 아울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는 1960년도에 봉안했다는 사자를 타고 있는 지혜의 화신 문수보살도가 모셔져 있다. 그러나 법기헌이므로 법기보살도가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 법기보살이란 금강산에 거주하고 있다는 보살로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마다 머무르고 있는 보살들의 우두머리이다.‘소품반야바라밀다경’에는 금강산의 중향성(衆香城)에 머문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금강산에는 실제로 법기보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법기헌의 편액 옆에는 1934년 이수학(李洙學)이 지은 ‘법기헌기(法起軒記)’가 걸려 있다.
유하사 금강문
유하사 석조 약왕보살 입상
유하사 요사채
유하사 대웅전
유하사 대웅전 벽화
유하사 대웅전 꽃문살
유하사 대웅전내
유하사 대웅전에서 바라다본 전경
유하사 용화전
정면 5칸 측면 2칸의 용화전은 1897년 창건 당시에 월선 보살이 건립한 전각이다. 팔작지붕에 사모기둥을 가지고 있는 인법당 형식의 이 법당은 이 곳에서 거처하며 기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어 왔으나, 대웅전의 건립으로 주전각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됐다.
그러나 용화전은 100년이 넘는 건물임에도 아직도 건재하며 당시에 세운 전각들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외벽의 시원하고 넓은 공간에는 1960년대 그려진 팔상성도와 비천상, 청룡/황룡도, 화훼도가 고풍스러운 색감으로 눈길을 잡기에 충분하다.
내부에는 본존불로 석조미륵여래입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당시 무심스님이 충청도 계룡산 모사찰에서 이운해온 불상이라고 한다. 수인은 두손이 가슴 께에서 아래 위로 맞대어 있는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을 하고 있는 것이 독특하다.
좌측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보셔져 있는데 아미타불은 1954년경에 목불로 조성했으며 좌우의 관음/지장보살상은 1970년대 석고로 조성해 놓았다. 또한 우측 맨 끝지점에는 1983년 지불로 조성한 산신상이 봉안돼 있다.
불화로는 미륵여래입상 후면에 문수보살탱 또는 미륵후불탱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모셔져 있다. 아미타삼존불 후면에는 아미타후불탱이 자리해 있으며 우측으로 칠성탱과 신중탱이 차례로 모셔져 있는데 모두 1968년 봉래(逢萊)스님과 처사 김영욱(金永旭)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또 1970년대 조성한 지장탱과 조성연대를 알 수 없는 색바랜 산신탱이 본존불 우측으로 차례로 모셔져 있다.
유화사 용화전
유화사 용화전내 탱화
유하사 석조여래입상
유하사 용화전내 산신상과 산신탱
유하사 용화전내 지장탱
유하사 찾아가는 길
유하사로 찾아가려면 먼저 서안동IC를 빠져나와 안동시내로 들어가 청도 방면 35번 국도로 와룡면 방면으로 계속 직진한다. 와룡면 면사무소와 와룡농협 앞 에 유하사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이는데 태백 가는 도로로 직진하지 말고 다리 쪽으로 우회전해 919번 국도를 이용해 약 2km 정도 직진한다. 그러면 왼쪽에 ‘살앞’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이 지점에서 우회전해 마을로 들어가면 유하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