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뒤
제3회 작품상
윤병화
태풍이 지나간 뒤, 며칠 만에 다시 산에 올랐다.
이 숲길은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쓰러진 나무와 부러진 가지들이 길을 막았다. 먼 데서 바라볼 땐 그렇게까지 느껴지지 않더니만, 가까이 들어와 보니 이번 태풍 루사의 위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실감케 했다. 정말이지 마음 아픈 일이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특히 나무가 많이 쓰러진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낙엽이 쌓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토질土質 좋은 땅이었다. 나무들이 자라기엔 더없이 좋은 땅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땅에서 무성하게 자랐던 나무들이 대개가 쓰러져 있거나, 기울어지거나, 부러져 있었 던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안쓰러운 마음에 확인하듯 만져도 보고, 또 걱 정도 해보면서 잠시 숲속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곳 같은 사면斜面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나무들은 전혀 쓰러져 있지를 않았다. 나는 이상하다 싶어 또다시 그리로 가보았다. 그 지역은 조금 전 그곳과는 달리 돌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바위들도 더러 섞여 있는 척박한 땅이었다. 나무가 자라기엔 그리 적당한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에도 나무들은 어렵사리 자리하고 있었다. 단단한 땅속 깊이 뿌리를 박아 넣고 나는 이렇게 건재하다는 듯이 꼿꼿이 서 있었다.
아! 나는 그제야 나의 의문을 풀었다. 푹신하니 흙 좋은 곳의 나무들은 웃자라다 보니, 무게의 중심이 그 위쪽에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비가 많이 내리다 보니 지반地盤도 약해져 그렇게 쓰러지게 되었던 것이리라. 그런 반면 땅이 단단한 척박한 곳에서 모질게 자란 나무들은 뿌리 그 자체가 발달돼 있었을 뿐 아니라, 안정되게도 무게의 중심이 그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반 자체도 단단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나무를 지탱시켜 준 결과로 작용하였으리라. 나는 그런 작은 깨우침에 스스로 감탄하며, ‘결국 어렵게 자란 나무가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다. 어려움이 있은 연후에야, 진정 그 대상에 대한 강인함과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리라. 추사秋史는 세한도歲寒圖에서 공자님의 말을 인용 하여,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들의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와 연관 지어 ‘颱風然後 知松栢之深根(태풍연후 지송백지심근) ― 태풍이 지난 뒤에야 뿌리 깊은 소나무들을 알게 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 았다. 물론 사람 사는 이치도 그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숲을 걸어 나왔다.
마침 내려다보이는 먼 바다 위 은은한 노을빛 하늘이 더없이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나는 얼마쯤 내려오다가 다시 그 지역을 돌아다보았다. 척박한 돌땅에 뿌리를 박는 것으로써 살아남은 푸른 소나무들이 꼿꼿한 자세로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 광포狂暴한 태풍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나무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최고의 찬사와 더불어 격려의 눈 길을 보냈다. 너희들은 끝내 산을 지켰고, 그렇게 남은 너희들이 씨 뿌려 또다시 옛 같은 산으로 만들어 가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