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ooribugo.co.kr/funeral/view/42597?ngt=1&mn_idx=263567&midx=263567
한글학자 강상원박사 별세
한글학자 강상원 박사
강상원(姜相源) 박사(博士) (1938.12.10~ )(本名 姜平洙)
훈민정음학자, 동양철학자, 서양철학자, 사학자
1. 약 력
1938 충남 천안출생
1963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
1963. 8. 31. 공군소위임관
1967. 8. 공군전역
1989. 9. 1. 뉴욕 시립대학교(석사학위)
1994. 3. 동국대학교(철학박사학위, 원효 대사의 중도사상연구)
2. 경 력
주한 미국대사관 근무(1969-1971)
뉴욕 평생대학-학장 및 뉴욕 TV 영어강사
콜롬비아대학 교수
1993~1998. 전 중앙승가대학/한국불교대학/동국대학교 강사
2000. 5. 대한불교현수복지 재단 부설 한국 세종한림원 창설
2003. 4 한국세종한림원 학회장
현 경주박물관대학- 초청강사
3. 저 서
천축실담 상형문자주석( 2001.12.3.)
한글 고어사전채담어 주석(2002.6.14)
왕손정통언어실담어 복원 주석(2003.4.25)
훈민정음28자어원적신해석(2005.4.28)
한자는 동이족 문자 주석(2007.2.20)
세종대왕창제 훈민정음
주역 혜각존자 신미대사(主役 慧覺尊者 信眉大師)(2008.9.27)
우리말 불휘(根) 실담어어원대사전
법화경 영역
금강경 영역
4. 주요논문
소끄라데스 국가론, 플라톤 교육론(석사논문)
노자의 도덕관/ 스피노자 도덕적 자유/ 니체의 신론/외 다수.
귀 천
천 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슬프고 가슴이 미어집니다.
우리 박사님은 다 이루고 가셨습니다.
더 여한이 없을 것이니 이제 저 하늘에서 큰 별이 되어 한민족사에 영원히 밝게 비추어 지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도 밤이 오면 시들고
날으는 새도 해가지면 한몸 쉴 곳으로 날아듭니다.
뉘라서 다 이루지 못하고 떠나는 아쉬움이 없을까 싶어도
우리 박사님은 그 동안 요양을 하시면서 마음을 다스렸고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아쉬움도 미련도 다 한 줌 재로만 남게 되니 그 이름자만이라도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기를 두손 모우고 삼가 기원합니다.
2012년 12월 29일
박 민우
합장하며 애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강태사님을 위해 열심히 일해주시고 도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저는 뭐라도 해야겠기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평소에도 여러분을 언급하셨는데
라상욱 피디님
이병국 사장님
정말 정말 미안합니다.
강태사님께 그렇게 열심히 순정을 바치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가셨으니 정말로 그 아쉬움을 어떻게 말로 다하겠습니까?
한때 열심히 일해주시고 보람도 없이 바램도 없이 멀어지신 선생님께 박사님을 대신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돈황문명학술원 연구원 박민우
10여년을 유투브 동영상을 제작하시고 최근에 박사님 곁을 훌쩍 떠나신 박인수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원래는 제가 일찍 올라가서 직접 뵙고 인사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저는 대구에서 글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오랫 동안 박사님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깊은 헌신으로 노력하셨는데 박사님에 건강이 악화 되면서 많이도 섭섭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속상했던 것은 다 잊으시고 박사님을 용서해 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선생님에 유투브 활동으로 박사님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바 그 공적이 적지 않으니 박사님께서도 박인수 선생에 공을 높이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잘해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도 많이 후회하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천축실담상형문자주석' 이라는 책을 처음 구경한 것은 1994년도 였을 것이다.
그 때 서울에서 고구려뿌리역사 강연회가 열렸을 때 이른 봄이엇다.
나는 율곤 선생님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율곤 선생님께서 책을 한 권 보여 주셨다.
'천축실담상형문자주석' 이라는 전과 만한 책이 눈앞에 들어 왔다.
저자는 강상원 동양철학 박사 . LA버클리대학 교수그런 약력이었으며 책을 펼쳐 보는 순간 율곤 선생님께서 강상원박사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셨다.
우리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상고시대 우리말하고 거의 같으며 거의 변화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데 그 음운학에 대한 연구서가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 그렇카카이
거시기 머시기하면서 몇 구절 얘를 들어서 소개했다.
그때 우리말 산스크리트에 대해 처음 듣는 나로서는 신비하기만 했고 무엇보다 비싼 책 가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30만원이라는 거금이었으니 어떤 열정을 가진 사람도 선듯 책을 구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강상원박사님에 자신감과 확신에 대해 매우 존경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날 고구려뿌리역사 강연회에 약 15분간 연설을 하셨는데 또렸한 목소리에 우리말의 어원이 산스크리트 사전에 그대로 박혀 있다는 말씀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사업에 실패하고 백수에 무일푼이라 그런 책을 구하기는 어려웠고 한 동안 잊고 지냈다.
2011년 9월 10일(음력 8월 13일) 율곤 이중재선생께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
그후로 나는 제자분들 중에 어느 누가 율곤 선생님에 업적을 이어 나갈지를 기대하며 한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런 기색도 없고 또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잇단 슬픔을 가슴에 묻고 거의 10여 년을 쓰오던 칼럼을 정리해 책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에는 율곤 선생님에 글을 많이 인용하며 그 업적을 빛내야 겠다는 마음이었으나 차차 글이 완성되어 가면서 입장이 바뀌게 되었다.
나는 나 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글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후 더 열심히 공부하며 '환단원류사'를 집필하기에 이르렀다.
글이 완성 되어 갈 무렵 2012년 즈음
인터넷 홈페이지 '동이문화원'이 생기고 강상원박사님 유투브 동영상이 등장했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강상원박사님에 강의 영상이 나오는데 정말 깜짝 놀라며 내심으로 매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인가!
나에 글은 더욱 빛을 발하였으며 또한 강상원박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어원에 관해 집중하다보니 '환단원류사'를 집필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환단원류사가 완성되기 직전
나는 그 반쯤 되는 분량을 박사님께 우편으로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엉뚱하게도
자네가 말한 '무대륙의 비밀' 그 책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박사님은 처치워드에 대해 알고나서 매우 큰 깨달음과 충격을 받았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치워드 원본을 복사하고 제 2권 '칠드런 옵 더 무'까지 원본과 번역본을 박사님께 보냈다.
그 이후 가끔 전화를 드렸고 박사님에 저서도 모두 구입하였다.
꽤나 많은 돈이 지출되었지만 반복되는 같은 문장에 실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보석을 캐내는 일이라 생각하며 한번도 구입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박사님이 범어대사전을 내실 때 즈음 거의 2억이라는 전 재산을 출판에 쏟아부어 잔고가 부족했던 것인가 여기 저기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출판비를 보태라고 전화를 했던가 보다.
나는 전화도 안 왔는데 알아서 책 구입 비용을 미리 낸다고 하면서 100만원을 송금했었다.
이때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것 같다.
주위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박사님은 신경이 날카로와 지시고 가끔 화를 자주 내기도 했다.
박사님이 쓰러지시기 전에 이미 전조 증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 아니면 현실이 사람을 그렇게 몰고 간 것인지 ...
출판에 대한 압박감과 내 인생에 마지막 역작을 완성해야 겠다는 사명감과 이것이 마지막 일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그렇게 죽음의 문턱으로 몰고 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날 박사님이 쓰러지셨는데 구안와사에 뇌졸중에 머리까지 부딪혀서 큰 일이 터져 버렸다.
그때 박인수 선생께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병문안은 가보지 못했다.
면회 금지였기 때문이다.
가끔 들려오는 소식에 많이 호전되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박사님은 퇴원하셨다
구안와사는 돌아왔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력으로 병원 계단을 오르내리며 열심히 재활 운동한 결과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겨우 움직이는 왼팔을 자유롭게 했고 결국 오른 팔은 마비인 채로 치료를 마치고 통원으로 바꾸고 집으로 오셨다.
그후로는 왼팔로 타자를 치시며 하루 종일 책과 저서에 몰두하셨다.
그리고 미출간 저서 '만해 뱃사공' 과 제목도 없는 저서 가칭 '강태사 일기' 두 권을 남기고 영면에 드셨다.
중간 중간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습니다.
이제 시간이 다 되어 다음 기회에 박사님 전기에 필적할 기록을 다시 쓰겠습니다.
2022년 12월 29일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48]
감사합니다.
카카오환단원류사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