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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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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및 경전 이해 스크랩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 신라의 부설거사
향상일로 추천 0 조회 151 16.04.02 08: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ㅡ 태극선법/현동님 글ㅡ

유마거사
비야리대성(臻耶離大城)에는 한 장자(長者)가 있었으니 이름은 유마힐(維摩詰)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 옛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선근(善根)을 깊이 심어 무생인(無生忍)을 얻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변재(辯才)는 걸림이 없고, 신통력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모든 가르침을 완전히 기억하는 힘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자신[無所畏]을 얻어 악마의 재앙을 물리쳤고, 심오한 진리의 문에 들어 깨달음의 기슭에 이르렀으며 모든 방편을 통달하고 있었다. 큰 서원을 성취하여 중생들이 마음 속으로 바라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또한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날카로움과 무딤을 잘 분별하였다.
오래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마음은 원숙하고 맑아 대승의 가르침에 나아갔고 온갖 것을 행함에 있어서는 바르게 생각하고 헤아렸으며 부처님과 같은 위의(威儀)에 주하여 마음의 크기가 큰 바다와 같았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칭찬하고 부처님의 제자와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제도하고자 하는 서원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야리성에 살고 있었다. 무량한 재산으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계를 청정히 받들고 지킴으로써 계를 범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하며 마음을 다듬어 인욕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혔으며, 마음을 다하여 크게 정진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게으름을 바로 잡게 하였다. 마음을 통일하여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이 혼란한 사람들을 이끌고 명확한 지혜로써 지혜가 없는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고 있었다.
그는 재가의 신도이지만 사문(沙門)의 청정한 계율을 받들어 행하고, 비록 세속에 살지만 삼계(三界)에 집착하지 않았다. 처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범행(梵行)을 닦았으며 친척이 있음을 나타내 보이지만 항상 멀리 떨어져있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가장 높은 사람으로서 공양을 받는다. 정법을 굳게 지녀서 어른과 어린이를 가르치고 모든 생업의 경영이 순조로워 비록 세속적인 이익을 얻지만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세간에 다니면서 중생을 이익케 하고 정치와 법률에도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편안케 한다. 강론(講論)하는 곳에 가면 대승의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이끌고, 학교에 가면 학생들을 이끌어 깨우치게 한다. 창녀의 집에 가면 육욕의 잘못을 설하고 술집에 가서도 능히 그 뜻을 세운다.
장자 유마힐은 이와 같이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고 있었으며 그 방편으로 몸에 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병 때문에 국왕대신장자거사바라문과 여러 왕자와 함께 그 나머지 권속 수천 명이 모두 찾아와 문병하였다. 유마힐은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거룩하신 여러분, 이 육신은 덧없고 강하지 못하며 힘도 없으며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빠르게 시들어가는 이 몸은 가히 믿을 것이 못됩니다. 이 몸은 괴로움이며 근심이며 모든 병들이 모여 있는 덩어리입니다. 여러분,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몸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몸은 물거품 같아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이 몸은 불꽃과 같아서 애욕의 갈망으로부터 생깁니다. 이 몸은 파초(芭蕉)와 같아서 속에 굳은 것이 없으며 이 몸은 환상(幻想)과 같아서 미혹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이 몸은 몽환(夢幻)과 같아서 허망한 것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며, 이 몸은 그림자와 같아서 업연(業緣)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몸은 메아리와 같아서 온갖 인연을 따라 생기며, 이 몸은 뜬구름 같아서 곧 변멸(變滅)하고 맙니다. 또한 이 몸은 번개와 같아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하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인 없는 땅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주체가 없으며, 이 몸은 불과 같아서 자아가 없으며, 이 몸은 바람과 같아서 생명으로서의 개체(個體)가 없으며, 이 몸은 물과 같아서 실체로서의 개아(個我)가 없습니다. 이 몸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라 네 가지 구성요소[四大]로 되어 있어 이를 집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몸은 자아[我]와 자아에 소속하는 것[我所]에서 떨어져 있으므로 공(空)한 것입니다. 이 몸은 풀과 나무와 질그릇, 조약돌과 같아서 무지(無知)합니다. 이 몸은 지음이 없으므로 바람의 힘에 따라 흔들립니다. 이 몸은 깨끗하지 아니하여 더러운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거짓인 것입니다. 설사 몸을 씻고 옷을 입으며 밥을 먹는다 하여도 반드시 마멸되고 말 것입니다. 이 몸은 곧 재앙이니 백한 가지의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 몸은 낡은 우물[丘井]과 같아서 늙음에게 쫓기고 있습니다. 이 몸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언젠가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 몸은 독사와 같고 원수, 도둑과 같고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空聚]과 같아서 온갖 요소의 집적[陰]과 그 종류[界]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의지하는 곳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괴로움이며 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부처님의 몸[佛身]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몸은 곧 법신(法身)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는 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법신은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부터 생기고 자(慈)비(悲)희(喜)사(捨)로부터 생기며, 보시하며[布施] 계율을 잘 지키며[持戒], 잘 참고[忍辱] 마음을 온화하게 갖고[柔和] 힘써 수행을 쌓고[勤行] 닦아 나아가며[精進] 마음을 섭수하여 선정(禪定)을 닦는 등 온갖 수행의 완성으로부터 생깁니다. 여러분 부처님의 몸을 얻어 모든 중생의 병을 끊고자 하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장자 유마힐은 모든 문병자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알맞는 가르침을 설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게 하였다.



방거사
거사의 이름은 蘊이요, 자는 道玄이니 襄陽사람으로서 아버지는 衡陽 에서 太守의 벼슬을 하였다. 잠시 성남에서 살 때 수행할 암자는 가택 서쪽에다 세우고 수년 뒤에 는 전 가족이 득도하니 지금의 悟空庵이 이것이요, 후에 암자의 아래 에 있는 옛 집을 희사하니 지금의 能仁寺가 이것이다. 唐나라 貞元年에 數萬마의 많은 보배를 배에 싣고 가서 洞庭湘右라는 江 中流에 모두 버렸다. 그로부터 삶은 오직 한 장의 나뭇잎 같은 생애였다. 거사에게는 처와 일남일녀가 있었는데 대나무 그릇을 만들어 시중에 팔아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 정원 년에는 선종과 율종이 크게 성하고 조사의 가르침이 서 로 융성하여 그 빛은 사방에 뻗쳤으며 생활 속에 다 들어가 있었다. 거사는 먼저 石頭 스님에게 參學하고 지난날의 경지를 몰록 밝게 하 고 馬組스님을 알현한 후에는 本 心에 계합하니 일마다 깊게 통하고 도 에 계합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妙德과 변재가 대단하고 문자의 眞詮마저 갖추어 합치하고 있었으며 그 후 각처를 찾아다니면서 지극한 이치를 겨루었다. 元和 초년에 그는 襄陽에 살면서 암굴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그때 태수인 于公적은 두루 살펴 민요를 수집하고 있었는데 거사의 글을 읽고 더욱 흠모하는 생각이 더했다. 그래서 기회를 보아 몸소 나아가 알현하고 보니 옛친우와 같았다. 그리하여 정분이 깊이 계합하고 또한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거사가 入滅하려 할 때 딸 靈照에게 말하기를

모든 것이 幻化며 無實이니 네가 하기에 따라 인연한 바이니
잠깐 나가서 해의 높이를 보고 한낮이 되거든 알려다오.

영조는 문밖에 나아가 급히 말하되

벌써 한낮인 데다 日蝕입니다.
잠깐 나와서 보십시오.

거사가

설마 그럴 리가

하고 말하니 영조가

그러합니다.

라고 말했다.
거사가 일어나 창가에 갔다.
그러자 영조가 아버지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던
자리에 올라가 가부좌하고 곧 열반에 들었다.
거사는 돌아서서 그것을 보자 웃으며

내 딸 녀석 빨리도 앞질러 가는 구나.

하고는 나무를 ?어서 다비를 하였다.
칠일이 지나서 우공이 문안을 왔다.
거사는 우공의 무릎에 손을 얹고 잠시 돌아보며 말하기를

다만 원컨대 있는 바 모두 공하니 삼가 없는 바 모두가 있다고 말라.
잘 계시오 세상살이는 다 메아리와 그림자 같은 것이니

하고 말을 마치자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몸은 단정히 앉아 思索한 것 같았다.
그러자 우공은 빨리 붙들려 했으나 이미 열반에 들었었다. 바람은 大澤에 거칠게 불어 대는데 하늘에 피리 소리는 고요히 들려 달은 희미하게 창가에 비치는데 얼굴의 화색은 변하지 않았다. 시체를 태워 강이나 호수에 버리라는 유언에 따라 陳儀事를 갖추어 如法이 茶毘에 붙이게 되었다.
한편 곧 使人을 보내어 처자에게 알리니 妻는 소식을 듣고 가로되

이 어리석은 딸과 無知한 늙은이가 알리지도 않고
가버렸으니 이 어찌 가히 참겠는가.

하고 아들에게 알리려 가니 화전을 일구고 있는 것을 보고 가로되

龐公과 더불어 靈照가 가 버렸다.

고 말하니 아들은 호미를 놓고

애 !

하고 조금 있다가 선 채로 열반에 드니 母 는 말하되

어리석은 아들아 어리석음이 어찌 이다지도 한결 같은고

하고 또한 화장하니 사람들은 모두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그 妻는 마을의 집집을 두루 돌면서 작별을 告하고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로부터 어디로 갔는지 아는 자가 없었다.
巨士는 늘 말하되

아들이 있지만 결혼하지 않고 딸이 있어도 시집가지 않았으며
온 집안이 단란하여 無生話를 했다.

그 밖의 현묘한 말과 道를 읊은 詩頌이 세간에 전해져 있으나 자못 많이 흐트러져서 이번에 우선 듣고, 알고 있는 것만을 하나로 묶어 편집하여 길이 장래를 보아 후학에게 격려하는데 쓰여지고자 한 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居士는 유마의 後身이라 하니 아마 그대로 일 것이다.


부설거사(浮雪居士)

○ 본명 : 진광세 (陳光世)
○ 법명 : 부설 (浮雪)
○ 출생지 :신라(新羅) 수도(首都) 경주 성내(慶州 鐵內)

(1) 어린시절

부설(浮雪)은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시대에 찬란했던 문화의 중심지인 신라의 수도 경주 성내에서 진씨댁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의 이름은 진광세(陳光世)이며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한 재질에 용모가 비범하여 그 부모가 기뻐함은 물론이요, 동네 사람들에게 까지 귀여움을 한몸에 받아 가며 곱게 자라나 진씨댁(陳氏宅)에 큰 인물이 났다고 칭송이 자자하였다.
부설은 글을 배을 때도 한 번 배운것은 다시 묻는 일이 없고, 오히려 배우지 않은 것도 복습하듯 깨우쳐 나갔다. 또한 아이들끼리 놀 때도 아이 놀이가 아니고 어른들이 노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서쪽을 향하여 몇 시간씩 있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 밑에 혼자 앉아 있기도 하며, 중을 만나면 기꺼워하고 살생하는 것을 보면 비웃고 하더니, 20세가 되던 해에 홀연히 집을 등지고 출가(出家)할 결심을 하고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를 찾아가 중생이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길을 안내 받고 원정스님께 출가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원정스님께 돌아가 몸을 의지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되어 승려로서 지켜야 할 모든 행동규범을 익혀 광세(光世)란 이름을 버리고 법명(法名)을 받으니 부설(浮雪)이란 호(號)로 비구(比쵸)가 되었다.

부설은 일심(一心)으로 인내하는 사찰(寺刹)생활과 부처의 모습을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하여 염불하고 불경을 읽는 등 수도생활에 정진하여 경서를 연구하는 정통 학문인 경학(經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날마다 그의 명성은 높아지게 되었으며 경서에 밝고 글을 잘 짓는 덕이 높은 스님들까지도 부설을 가리켜서 불법의 상량감(練樣材)이라 하여 존경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에 부설을 흠모하는 자가 많았는데 그 가운데 영희(靈熙), 영조(露照)가 불도를 위한 동반자로 흠모 공경하여 따라다녔다.

부설은 영희, 영조와 더불어 서로 법우(法友)로서 굳게 맹세를 하였다. 그 후 그들은 법왕봉(法王峰)이란 산아래 묘적암(妙寂庵)이라는 불도를 닦을 조그만 절을 세우고 영희, 영조가 부설스님을 공경하며 절(寺中)살림의 고난을 극복하고 모든 어려움과 온갖 모독, 그리고 번뇌를 참고 원한을 일으키지 않는 수행(修行)을 하면서 혹은 소나무의 꽃 가루를 먹고 물을 마시면서 불법을 들으며 진리를 깨달아 사무치는 기쁨을 맛봄을 즐거움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다스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고통을 이겨 나갔다.

이와 같이 불법의 진리를 깨닫고자 정진(精進)의 나날을 지내고 있던중 정월 십오일(正月 十五日) 묘적암에서의 안거를 마치고, 춘삼월(春三月) 호시절을 당하여 오대산(五臺山)이 문수(文殊)보살 상주도장(常住道場)으로 이름난 곳임을 알고 세 사람은 문수보살을 찾아 뵙고 불법에서의 심오한 묘법(妙法)을 얻고자 낮이면 걸어가고 밤이면 나무 밑이나 헛간 등 아무데서나 눈을 붙이며 여러 날을 걸망을 지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오대산을 향하여 올라갔다. 그리하여 두능(株陵=萬頃) 백연지(白連池=능제방죽)라는 곳(현 김제군 성덕면 묘라리)에 당도했는데, 날이 저물고 장마라도 지는 듯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만행(萬行)을 耉고자 하여도 밤을.쉬어서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집 저 집으로 쉬어 갈 곳을 찾는데 동네 사람이 구무원(仇無罵)의 집으로 가서 쉬기를 청하란고 일러 주기에 찾아가 하룻밤 쉬어 가기를 청하니 주인이 쾌 히 승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하룻밤을 자고 가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2) 묘화와 부설파의 연분(緣分)

이 무렵 (백제 의자왕 10년경) 김제군 성덕면 묘화리(金堤郡 聖德面妙載里=지금의 妙羅里)에는 성은 구씨(仇氏)요, 이름은 무원(無駑)이라는 불교(佛敎)신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늦은 나이에 딸 하나를 얻었으니 무남독녀(無男獨女) 외동딸이었다. 귀여운 자손으로 태어나 이름은 묘화(妙花)라고 하였는데, 꿈에 연꽃을 보고 잉태하여 태어난 딸로 태몽 때문에 묘화(妙范)라 이름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무남독녀 묘화는 말을 못하는 천성(天性)의 벙어리였다.
이로 인하여 구씨(仇氏) 내외는 그를 몹시 한스럽게 생각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 소녀가 부처님 곁에 피었던 금단의 꽃인 연꽃을 꺾은 죄 값으로 이승의 벙어리가 되어 추방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묘화는 자랄수록 얼굴은 백옥 같고 자태는 연꽃 같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인근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비록 말은 못하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착한 마음씨를 가진 선녀(仙女) 같은 묘화를 본 총각들은 앞을 다투어 청혼하였으나 묘화는 모두 거절하였다.

묘화의 나이 20세가 되던 어느 날 봄이 되었다. 먹적삼을 입고 걸망을 짊어진 수도스님 세 분이 경문을 외우면서 이 마을에 당도하여 구무원의 집에 이르렀다. 이들은 부설(浮雪) 영희(靈熙), 영조(靈照)라는 수도자(修道者)들이었다.
구무원(仇無罵)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덕망이 높고 인심이 후하기로 소문이 나있어 수행승(修行僧)을 만나면 크게 환영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쉬어 가게 하였다. 세 분 스님을 영접하여 사랑채에 모시고 중생이 불법에 들어가는 길에 대한 이야기며, 도를 닦던 덕담과 불교의 이치를 가르치는 설법을 듣기 소원하던 차에 세 수도승을 일시에 대면하게 되었으니 기쁨으로 음식물 대접하고 구무원과 세 수도승이 통성명을 하고 여러 날 걸어 강원도 오대산까지 가게 된 이야기며 법담으로 밤이 깊어만 갔다.

그 날 밤 구무원(仇無鷺)의 안채에서는 큰 경사가 났다. 요조숙녀로 곱게 자랐으면서도 말을 못하던 묘화(妙花)가 느닷없이 말문이 터져 말을 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온 집안은 물론 마을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입을 모아 찬사를 아끼지 아니했다.
묘화는 말하기를 부설(浮雪) 스님과 소녀(少女)는 전생(前生)에도 인연(因緣)이 있었고, 금생(今生)에도 인연이 있으니 인과(鬪課)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라 하면서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을 이제야 만났으니 죽기를 맹세하고 부설스님을 남편으로 섬기겠다고 한바탕 이야기를 늘어놓자, 부모는 20여 년이란 세월을 말을 못하다가 말문이 터지게 된 것도 대견하지만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말함에는 입만 딱 벌리고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더더욱 전생, 금생, 후생에서의 삼생연분(三生緣分)을 만났으니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묘화(妙花)에게 감히 간섭하여 말릴 수조차 없었다. 부설(浮雪) 스님도 자작자수(自作自受=자기가 저지른 죄로 자기가 그 罪果를 받음)와 인(圈)으로 하여금 과(果)가 따르는 법이며 자기를 만나기 위하여 생후 20년 간을 말을 안 했던 묘화(妙花)를 차마 어찌 할 수 없어서 두 불도의 길동무를작별하니 영희(靈熙), 영조(靈照) 두 스님은 오대산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가고 부설(浮雪) 스님은 거사라 자칭하고 묘화의 집에 머무르기로 하고, 묘화와 부설 .두 사람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흔례식을 올렸다.
그 후 두 사람은 바로 이웃 마을인 고현리(古縣里=속칭 부서울) 월미산 아래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고현리는 옛 현청 소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백제시대에 무근촌현(武斤村縣)이라 칭하였고 신라시대에 와서 무읍(武邑)으로 개칭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부윤현으로 또 다시 개칭되면서 만경현에 예속되었다가 폐현이 된 곳이다.

구설거사(浮雪居士)와 묘화부인(妙花婦人)은 어느덧 일남(一男) 일녀(-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등운(登雲)이요, 딸은 월명(月明)이었다.
남매가 성장하자 거사(居士)는 병(病)이 있다는 거짓 핑계로 서해(西海) 백강변(白江邊)에 초려(草麗=초가집)를 지으니 이 곳이 망해사(望海寺)이다. 부설은 이 곳에서 석가세존이 6년동안 한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고 불경을 외웠음과 달마대사(達磨大師)가 9년동안이나 벽을 바라보고 앉아 참선했음을 본받아 심공을 잠수하던 중 어느 날 옛날 친우(親友)인 영희(靈熙), 영조(靈照) 두 대사(大師)가 참례를 마치고 두능 (杜陵=지금의 만경) 해안에 자리잡은 망해사를 찾아와 희롱적인 태도를 보이자 부설(浮雪)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3인의 공부의 서투름과 의숙함을 시험하여 보자"면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은 낙수병(諾水添) 3개를 처마에 높이 매어 달고 세 사람이 지팡이로 일시에 때리자고 하니 두 대사(영희, 영조)가 이에 응락하고 낙수병을 때리니 두 개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쏟아져 버렸다. 그러나, 부설거사가 때린 병은 깨어졌으나 물은 처마에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또 부설거사와결혼한 구묘화(仇妙花)는 환하게 밝은 대낮에 바람과 구름으로 조화를 부려 때 아닌 비와 눈을 내리게 하였고, 그 비 한 방울이나 눈 한 조각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신통한 도술을 보였다고 한다.
이 때 부설거사는 두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광독로(靈光獨露) 형탈근진(適脫根塵) 체로진상(體露眞常) 불구생멸(不拘生滅) 환신수생멸천유자(幻身隋生滅遷流者)
사병지파쇄(似擺之破碎) 진성본영명상주자(眞性本靈明常住者) 여수지현공(如水之縣空) 공등편참지식(公等遍參知識)
구력총임(久歷叢林) 기불섭생멸위진상(豈不攝生滅爲眞常) 공환화수법성호(空幻化守法性乎) 욕험내업자유불자유(欲驗來業自由不自由)
편지상심평등불평등(便知常心平等不平等) 금기불연(今旣不然) 낭일반수지게(錐日返水之戒) 안재(安在) 쌍행지서(蠻行之誓) 막이 (辣矣)」

(주(讀)∼신령스러운 빛이 홀로 나타나니 뿌리와 티끌을 멀리 벗어버리고 몸에 본성의 진상이 삶과 죽음을 따라서 옮겨 흐르는 것은 병이 깨어져 부서지는 것과 같으며 진성은 본래 신통하고 영묘하여 밝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은 물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들이 두루 높은 지식있는 이를 찾아 보았고 오랫동안 총림(叢林=사찰)에서 세월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생(生)과 멸(滅)을 자비심으로 돌보고 보호하며 진상(眞常)을 삼고 환화(幻化)를 공(空)으로 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본성을 지키지 못하는가. 다가오는 업(業)에 자유가 없음을 증험하고자 하니 상심(常心)이 평등(準等)한가 평등(平等)하지 못한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미 그러하지 못하니 지난 날의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자는 경계는 어디로 갔다는 것이며 함께하라는 맹세는 아득히 멀구나‥‥‥)

이러한 부설거사의 언행에 영희, 영조 두 대사는 부설 앞에 예배하고 모든 망혹(妄惑)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 타고난 본성을 깨달았음을 흠모하고 법설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 후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은 등운(登雲)과 월명(月明) 두 자녀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게 하고 두 자녀를 위하여 지금의 변산(邊山)에 있는 등운암(登雲庵)과 월명암(月明庵)을 지었으니. 부설과 묘화의 유적(遺蹟)이라 하겠다.

그리고 현재 성덕면(聖德面)의 고현리(古縣里=부서울) 마을과 묘화리(妙范里)는 옛날 부설거사와 묘화부인으로 인하여 불러진 마을 이름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부설거사는 거사가 창건하였다는 인적이 뜸한 소암(小庵) 망해사(望海寺)에서 임종하면서 읊은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목무소견무분별(目無所見無分別)
이청무성절시비(耳聽無聲絶是非)
분별시비도방하(分別是非都故下)
단관심불자귀의(但看心佛自歸依)」

「주(註)∼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에 소리없는 소식 들으니 시비가 끊인다.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고, 단지 마음의 부처를 보았으니 심물에 돌아가 의지하겠노라.」

이 외에도 부설거사에 관한 시 몇 수를 소개한다.

■ 團 浮 詩 - 浮雪居士 -

妻子眷屬森如竹 金銀玉帛積如丘
臨終獨自弧魂逝 思量也是虛浮浮
朝朝役役紅塵路 爵位朧高已白頭
閻王不伯佩金魚 思量也是虛浮浮

사랑하는 처자권속 빽택히 둘러 있고,
金銀玉帛 보배들이 山같이 쌓였어도,
죽을 땐 다 버리고 외론 넋만 돌아가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 없을레.
날마다 번거로이 世上事에 바쁘고,
벼슬이 드높아도 人生 한번 늙어지면,
紫金魚袋 두려찮고 闖羅王이 오라시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 없을레.

錦心繡ㅁ風雷崙 千首詩經萬戶侯
增長多生人我本 思量也是虛浮浮
假使說法如雲雨 感得天德石點頭
乾慧未能免生死 恩量也是虛浮浮
비단결같은 고운 생각, 천등 번개 몰아치는 말 솜씨와
一千首의 誇支章에 萬戶侯의 높은 벼슬
人我의 迷妄만이 多生토록 더욱 느니,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 없을레 .
부처님의 法을 說해 恩澤이 단비같고,
하늘꽃이 쏟아지고 돌도 머릴 끄덕여도,
實劾없는 智慧로서 生死超脫 못하면은
생각하면 모든 것이 부질 없을레.

■ 八 竹 請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粥粥飯領生比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侍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이런대로 저런대로 되어 가는대로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이런대로 살고
옳으면 을고 그르면 그르고 저런대로.보고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정 물건 사고 파는 것은 시세대로
세상만사 내맘대로 되지 않아도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보네.

■繼 吟

共把寂空雙去法 同捷雲鶴一間庵
已知不二歸無二 誰問前三與後三
閑看庭中范艶艶 任聆窓外鳥哺晴
能令直入如來地 何用區區久歷參

그대와 함쩨 적적한 蹇으로 법을 삼아서
구름과 학을 데불고서 함께 지냈네.
미 둘이 아닌 것이 둘이랄 것조차 없음인 줄 알았으니
前三三 徨三三을 누구와 함께 논할건가?
한가히 뜨락을 바라보니 꽃은 한창 피어 웃고
무심히 창가에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었노라
곧장 여래지를 찾아 들 수 있올진대
어찌 구구하게 오랜 세월 참구하랴?

■和 韻

悟從平等行無等 覺契無緣度有緣
處世任眞心廣矣 건家成道體脾然
圖珠握掌丹靑別 明鏡當臺胡漢縣
認得色聲無臺碍 不須山谷坐長連

깨달음은 평등하게 깨닫고, 수행은 더할 .나위 없이 행하고
깨달음은 인연없는 데에 계합하고 제도는 인연있는 데서
할지로다.
진리에 몸을 맡기고 처세하니,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집에 머물며 도를 이루니 몸이 실팍하는도다.
등근 구슬을 손에 쥐니, 붉고 푸른 빛을 분별하고
밝은 거을 앞에 나서 서니, 진(眞)과 가(假)가 뚜렷하도다.
色과 聲에 걸릴 것이 바이 없으니,
굳이 깊은 산골에서 오래 앉을 것이 없을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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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거사...진리는 말로 하는게 아니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을

               병 얻어서 그것을 보여주고 스스로 고침으로서

               삶의 진정성(=진상)과 해탈을  언어가 아닌 몸으로 설법 하여서 병거사라 함.

                (부처와 동시대, 부처만큼 깨달음을 얻은  인류의 스승으로

                       1).대승불교=화엄사상=대동세상.(교리 측면에서)

                        2).선불교 강조.

 

소동파도 동파거사라는 호를 지음. 불교의 선시에 조예가 깊고,

불교에서 깨달음을 시(詩)로 표현하는데, 선종에선 선시로 ㅡ 왕유가 처음 ㅡ

(소동파가  왕유의 시와 그림을 화중유시,시중유화로 표현함으로서 시서화 일치론이 탄생.)

소동파는 불교적 입장인 왕유와 달리 성리학적 입장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시인 설리시(說理詩)를 짓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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