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 영암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피해>
1947년 3‧1절 주암집회 발포사건이 발생하고 7월 영암 이봉천 등이 월출산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경찰은 동계마을 냇가 둔치에 주민들을 모은 후 좌익 활동가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17살 청년을 공개 총살한 사건이 있었다.
1948년에는 5‧10선거 도중 죽정마을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이장 최성규가 피살되었는데, 이 사건은 당시 경찰의 총기조작 실수로 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말에는 토벌작전으로 인해 도갑사 주지가 피살되고 서호정 최규태 등의 집이 소각되었다. 여순사건 후 영암지역에는 1개 분대 규모의 14연대 반란 군인들이 월출산유격대에 합류했다고 한다. 이 사건 후 20연대 1개 중대가 영암에 주둔하였다.
전남경찰국 안씨(안남주)에 의하면, 1949년에 경찰 역시 별도로 토벌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남경찰국은 백호대와 흑호대라는 경찰토벌대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영암 금정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9년 4월부터 6월 사이 토벌작전 중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주민 5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같은 시기 거제, 영광에서 토벌작전이 있었다.) 이후 영암 월출산의 빨치산 활동은 1950년 3월 최후의 3명이 사살됨으로서 끝이 났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영암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연행되어 영암읍 마을회관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7월 15일과 22일 두 차례에 걸쳐 집단희생되었는데, 1차 시기에는 10여 대 트럭에 실려 금정면 연소리 덤재로 끌려가 희생되었고, 2차 시기에는 금정면 연보리 차내마을 뒤 야산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한편, 학산지서에 구금 된 주민들은 영암경찰서로 이송할 겨를이 없어 석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영암경찰서는 전남지역의 다른 경찰서와 마찬가지로 7월 23일 목포와 강진으로 후퇴했으며 다음날 인민군이 영암에 진입했다. 한편, 당시 군수 등 영암지역 유지들이 7월 23일 후퇴했으며, 경찰서는 7월 24일 해남과 완도 방면으로 철수했다가 7월 26일 다시 영암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들은 7월 27일 다시 후퇴하였고 이후 인민군이 진입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영암에 진주하자 금정면 국사봉과 장흥 유치계곡에 숨어 지내던 이봉천, 황점택, 최양렬 등이 영암으로 돌아왔으며, 이봉천은 도당으로, 황점택은 군 당위원장, 최양렬은 인민위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영암지역의 인민군 측 인사들은 9월 29일 퇴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9월 30일에는 영암내무서와 덕진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15명이 덕진면 금강리 강정마을 뒷산에서 총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인민군의 기간요원과 남로당 간부들이 금정면 국사봉으로 입산하고 극소수만 남아 뒤처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10월 2일에는 구림을 떠난 민주학도대가 나주 봉황면에서 퇴로가 차단되자 10월 3일 구림으로 되돌아왔다.
국사봉으로 입산하지 못했던 잔존 세력들은 10월 2일과 3일 면사무소, 지서, 수리조합, 학교, 교회까지 불태웠으며, 10월 7일에는 지와목에 있는 김기준 소유의 주막에 기독교인 6명을 포함한 28명을 가두고 불을 질러 살해했다고 한다.
(구림지편찬위원회 지음, 『호남명촌 구림』, 리북, 2006, 372~373쪽) 한편, 이 사건의 발생일이 10월 5일 또는 6일 이라는 주장도 있다. 10월 8일에는 지방좌익의 지시에 따라 서호면 성재리 주민 100여 명이 마을 입구 무덤등으로 집결되었다가 이중 20여 명이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같은 마을 청년들에게 타살당했다. 같은 날 서호면 소산리 우산각에서도 20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 측은 9월 28일 떠났지만, 영암이 수복된 때는 10월 6일 새벽 5시였다고 한다. 이는 『전남경찰사』(1992)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영암경찰서는 복귀하자마자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살해했다.
영암경찰서는 1950년 10월 6일 영암면 농덕리 문남식 등 6명을 총살했으며, 10월 8일에는 영암면 용흥리 탑동마을 주민 10여 명을 총살했다. 이외에도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10월 13일 영암경찰서는 50명의 무장병력과 1,500명의 비무장병력을 공격하여 이중 87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고 한다.(739쪽) 진실화해위원회는 1950년 10월 9일 군서면 해창리에 들어온 경찰이 피신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50여 명의 주민들을 소집한 후 이 중 김재봉 등 3명의 주민을 총살했다고 밝혔다.
<토벌 피해>
1950년 10월 17일에는 ‘구림 첫포위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새벽 3시경 30여 명의 경찰관과 70여 명의 우익단체원으로 구성된 영암경찰서 서남지역 토벌작전부대(경찰기동대)가 영암을 출발하였다. 이들은 새벽 5시경 구림마을에 도착하면서 마주친 주민들을 모두 살해했다.
이 날 최초 희생자는 박명재 등 2명으로서 이들은 당시 야경을 서던 중이었다. 모두 척살 당했다. 신근정사거리와 동계 법수골에서도 야경을 서던 주민 5명이 사살 당했다. 토벌대는 이후 마을을 포위한 뒤 사냥하듯이 주민들을 사살했다. 이로 인해 군서면 동구림리, 서구림리, 도갑리 마을 주민 96명(또는 78명, 진실화해위원회는 44명을 확인함)이 학살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1사단이 영암에서 토벌작전을 했던 때가 10월 30일이었으므로 이 사건 발생 당시의 경찰은 11사단의 지휘를 받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했다.
1950년 10월 18일 경찰토벌대가 삼호면에 진입했다. 이들은 삼호면 삼호리와 용앙리에 진입하면서 총을 쏘았으며, 이 소리를 들은 주민 70여 명이 피신했으나 은신처에서 발각되어 솟대봉 등에서 총살당했다.
영암 주민들이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해병대 2대대의 토벌작전에 의해 살해당한 사례가 『한국전쟁사 4』에서 확인된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해병대가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을 연행하거나 학살했는데, 당시 살해당한 주민들을 “지방 적색분자”라고 묘사하고 있어 희생자가 민간인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주요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0월 23일 해병대 2개 소대가 영암에 출동하여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들의 진입을 목격한 주민들은 국사봉 등 산악지대로 피신했는데, 이를 예상하고 매복해 있던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8명이 죽고, 49명이 잡혔는데, 『한국전쟁사 4』에는 이 사건의 희생자들을 적과 포로라고 적고 있다.
10월 30일에는 삼망면(존재하지 않는 면임)에 출동하여 작전한 결과 주민 다수를 사살하고 59명을 사로잡았다. 이 책에는 적 다수를 사살하고, 지방적색분자 59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거두었다고 적고 있다.
11월 8일에는 6중대가 영암에 도착하여 국사봉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으며 11월 12일부터 국사봉을 공격하여 10여 명을 연행했다.
11월 12일에는 군서면 동구림리ㆍ도갑리 주민 6명이 월출산 도갑사 부근에서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도갑리 주민들은 ‘구림첫포위사건’때 마을에 남아 있던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사살된 사건을 알고 있으므로 총소리가 나자 골짜기로 피난을 나갔다. 바위 틈, 골짜기마다 사람들이 머리만 안 보이게 숨었는데 경찰이 ‘이놈 나와라’ 하고 소리 질렀다.
경찰이 주민들을 평평한 곳에 모아놓고 ‘왜 도망갔냐’며 주민들을 구타하였다. 이만석과 최덕례는 죽정마을 뒷산 ‘성기골’ 주변에서 10m 간격을 두고 군경에게 사살되었고 이들의 시신은 나란히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 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대 적 동향 일일보고서」에는 “1950년 11월 11일 오전 1시 경찰 2개 소대가 군서면 도갑사 부근에서 병력미상의 적과 교전하여 빨갱이 13명을 죽이고 엽총 1개, 탄약 상당량, 공비문서 몇 건을 노획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50년 12월 5일에는 군서면 서구림리 주민 박남철 등 6명이 백암동 마을에 들어 온 경찰에게 사살되었거나 구타로 사망했다. 김사현이 이들 형제가 사살된 곳과 50m 떨어진 곳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사살되었고 나락을 지고 가던 오병환도 마을에서 붙잡혀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총성이 울리고 난 뒤 경찰은 2~3명씩 짝을 지어 백암동 마을을 수색하여 주민 30여 명을 마을 앞에 집합시켰다. 경찰은 이중 서구림 신흥 마을 조영우를 사살하였다. 경찰은 모여 있던 주민 중에서 노인은 돌려보내고 신현소, 박소동 등 젊은 사람들을 추려내어 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박소동은 경찰서에서 구타ㆍ고문 끝에 연행 이틀 만에 사망하였다. 그날 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신현소는 “영암경찰서로 끌려가 1주일가량 빨갱이와 손잡았냐며 고문ㆍ구타를 당했다. 한 것이 없었지만 너무 매를 맞아 도로를 파괴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3개월 수감되었다가 나왔다. 경찰서에서 이상옥 형사를 포함해 경찰 2~3명이 교대로 조사했는데 사과나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증언했다.
1950년 12월 9일에는 삼호면 산호리 김재심이 부역혐의를 받아 용앙리 ‘샘건너마을’ 야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당시 경찰은 모가두에 주둔하고 있었고 김재심은 이 곳에서 500m 떨어진 용앙리 ‘샘건너마을’ 들판에서 사살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금정면 주민 180여 명이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며 진입하던 해병대의 토벌작전에 의해 집단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영암면에서는 1950년 12월 20일 영암면 한대리 주민 20여 명이 마을에서 소개당한 후 토벌경찰에게 희생되었다.
목포지구 해군 G2 영암파견대 소속으로 영암지역에서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진씨(진성근)는 “소탕작전, 포위작전을 할 경우 피난민들이 군경을 보고 도망가면 무조건 쏘아버렸다.”라고 증언했다.
1951년에 접어들어서도 국군과 경찰의 토벌작전은 계속되었고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도 줄어들지 않았다. 영암경찰서 군서지서는 1951년 1월 2일 군서면 동구림리와 도갑리 주민 12명을 배바위 옆에서 총살했다.
1951년 1월 2일 군서면 신기마을 출신인 신중현 중위가 동구림 및 도갑리 주민 13명을 주암마을 굴찰에서 사살했다.
신중현 중위는 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경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인민군 점령시기에 가족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분주소원이었던 동계리 최씨, 서호정 조씨를 심문하고 13명을 연행하여 군 트럭에 싣고 해창지서로 향하던 중 주암마을 인근 굴창에 밀어 넣고 사살한 것이라고 한다. 신중위는 당시 사병 2명과 함께 들어왔으며 분주소원 최씨와 조씨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51년 1월 19일에는 군서면 동구림리 조여순과 딸, 최규관, 오광례, 이정동 등 일가족 5명이 경찰에 의해 덕진면 영보리 방공호로 끌려가서 사살되었다. 당시 시신이 몇 백구가 있었다고 하나 이들이 누구였는지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았다.
1951년 2월 28일에는 군서면 서구림리 서호정마을 주민 10여 명이 연행당한 후 영암면 ‘세실마을’에서 총살당했다.
사건 당일 강오연은 집에 들이닥친 경찰 2명에 의해 군서지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다음날 저녁밥을 가지고 간 가족들에게 영암경찰서로 넘어 갔다고 했으나 영암면 세실마을에서 10여 구의 시신과 함께 총살당한 채 발견되었다. 강오연의 아들 조수현은 1949년 3월 반란군과 연락했다고 하여 경찰에 죽임을 당했는데 그 모친도 전쟁이 난 뒤에 경찰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금정면에서는 1951년 3월 3일 금정면 연보리 김동두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토벌작전에 의해 영암경찰서로 연행된 후 희생되었다.
군서지서는 1951년 3월 20일경에도 도갑리 죽정마을 박찬일을 연행하여 조사하다가 지서 부근에서 총살했다. 군서면 수복 당시 구림마을에서는 1950년 10월 17일 ‘구림첫포위 사건’과 1950년 11월 12일 ‘도갑산 사건‘ 등 군경의 토벌작전 과정에서 주민 다수가 사망하게 되자 더 이상의 주민 희생을 막기 위해 마을 유지가 앞장서 영암경찰서에 자수자를 선처하도록 주선하였고 주민 대다수가 영암경찰서에 가서 크고 작건 간에 인민군점령기 부역에 대해 자수를 하였다고 한다.
1951년 3월 23일 영암경찰서로 연행되었던 군서면 서구림리 신흥마을 최두호와 최선호가 어디선가 희생되었다. 1951년 4월 21일 군서지서는 도갑리 평리마을 박승만을 연행하여 며칠 동안 조사하던 중 동호리 지남마을 뒷산에서 총살했다.
영암에서는 경찰이 해병대와 합동작전을 했다. 영암경찰서 기동대 소속 의경이었던 김씨(김남태)에 의하면, 1951년 봄에 국사봉에서 5~6개 군 합동작전을 며칠간 여러 번 했는데 당시 피난민들이 많았으며, 이들 민간인을 사로잡아서 영암경찰서로 데리고 와 인계했다고 한다.
영암경찰서 최삼인 부대 소속 의경이었던 최씨(최점열)에 의하면, 1951년 봄 국사봉에서 며칠간 7개 군경 합동작전이 있었다고 한다. 유치장이 작아 서남리 소방대 창고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선별했는데, 양민은 풀어주고 그 외는 몇 명씩 공동묘지로 데려가 죽였다. 기동대가 출동하면 경찰서로 데리고 올 필요 없이 현장에서 죽였으며 특별한 경우만 데려다 취조했다고 한다.
영암 국사봉 토벌작전에 참가했던 영암경찰서 근무자 조씨(조규복)에 의하면, 국사봉의 피난민들은 부역자였으며 사람을 죽이더라도 “적이 도주하므로 정지를 명했으나 계속하여 도주하므로 부득이 발사하여 즉사하였다”라고 보고하면 그만이었다고 한다. 영양경찰서 ‘금오대’ 대장이었던 정씨(정국채) 역시 작전 중 도망가는 사람이 발견되면 공비로 보고 사살했다고 한다.
이상 영암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