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예수 성탄 대축일 메시지
서울대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한복음 1장4절)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성탄의 은총 안에서 참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남북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믿음과 화해를 바탕으로 하루빨리 함께 민족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기를 평화의 하느님께 기도드립니다.
오늘 모든 사람을 비추시는 참 빛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장9절 참조).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환호합니다. 성탄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여리고 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오신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우리와 똑같은 비천한 인간이 되셨습니까?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세주 강생에는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구원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려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성탄은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구원 사업의 시작이며, 모든 사람들을 예외 없이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시는 기쁜 소식입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 생명의 신비를 일깨워주십니다. 생명은 현세적인 차원을 초월해 하느님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 생명은 이 세상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함과 존귀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최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이 됐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이 개발원조수혜국에서 원조공여국으로 지위가 바뀔 정도로 외적인 발전을 거듭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거에 비해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내면의 풍요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물질중심적 삶이 팽배해 다른 모든 가치관이 무력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는 생명경시 풍조는 우리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매년 높은 수치로 증가하는 낙태와 자살률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 또한 핵가족 개념의 확산으로 인구의 절대 수 감소의 위기를 맞아 최근에는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이유와 편의를 위해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효율성을 이유로 더 큰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생명을 쓸모없는 생명, 또는 짐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구정책은 경제 성장을 앞세워 출산억제를 강조하며 낙태를 실질적으로 허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낙태, 안락사, 인간 생명인 배아를 실험 조작하는 행위 등 생명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또 이를 법적으로 합리화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 생명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며 “인간 생명을 공격하는 것은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의 복음] 9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 생명의 문화를 펼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가치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한 인간은 소외될 수밖에 없고 공동체는 갈등과 분열의 장이 되며 생명경시 풍조는 더 확산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은 물질적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향해야 합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삶을 살 때 생명의 문화가 꽃피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사회 지도자들부터 솔선수범하는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입법에 종사하는 분들은 생명에 대한 가치를 바르게 인식하고 더 많은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명 문화 건설을 위해 우리 신앙인부터 가정과 사회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밝고 희망찬 곳이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다시 한 번 기뻐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대전교구
썩는 것을 막고, 삶의 맛을 내는 소금이 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금년에도 우리 가운데 탄생하셨습니다(요한 1,14 참조). 살아계신 사랑의 신비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성탄에 참여하여 똑같은 삶을 살도록 초청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듯이, 우리가 사랑의 삶을 통해 다시 태어나도록 초대하십니다. 성탄의 신비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하며,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필리 2,1-5 참조). 아기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죄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어,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사랑의 신비입니다(히브 4,15 참조). 악에 굴복당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심으로써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로마 12,21 참조). 사랑은 항상 모든 일에서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성탄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과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서 크고 작은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많은 어려움을 대면하면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해결의 길을 찾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 없기에 답답하고 막연하고 외롭기까지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질병과 건강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 특별히 직장을 찾지 못한 젊은이들과 실직한 사람들의 어려움,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음을 봅니다. 이런 처지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인내를 잃도록 만들며, 실망하도록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는 세상이 마치 어둠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행정종합복합도시(세종시)는 국가의 균형발전 정책으로 수도이전, 위헌판결, 수많은 공청회를 거쳐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법에 기초하였습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모든 언론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체가 환영하였고,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수차례에 걸쳐 원안대로 세종시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효율”을 내세우며 준비되지 않은 설익은 제안들을 쏟아 내어 충청권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혼란 속에 빠졌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서로를 믿어주는 “신뢰”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신뢰가 있으면 화목하고, 분위기도 좋으며, 어떤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갑니다. 그러나 신뢰가 없으면 불안하고, 살벌하고, 험악해지고, 결국 더 큰 어려움 속으로 빠져듦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혼돈과 갈등의 원인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신뢰의 부족, 즉 서로간의 불신입니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신뢰”가 효율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효율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못합니다. 신뢰를 바탕으로 최고의 효율이 나옵니다. 신뢰를 깨기는 쉽지만 다시 회복하려면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라.”(마르 9,50)하고 말씀하십니다. 대통령과 정부가 “약속”과 “신뢰”라는 맛을 내야만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불신과 부정이 만연한 이 사회에서 우리의 정직함을 통하여 좀 더 신뢰하는 관계, 신뢰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도록 합시다. 우리가 소금의 역할을 하여 썩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살맛나는 세상을 만듭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대장장이는 쇳덩이를 가지고 원하는 도구를 만들기 위하여 쇠망치로 계속 두들깁니다. 쇳덩이는 불꽃을 튀기면서 얻어맞으며 꼴을 갖추어가기 시작합니다. 쇳덩이를 뜨거운 불 위에 달구어 꺼낸 후에 다시 쇠망치로 힘을 가하여 강하게 두들기기를 거듭하면서 본래 원하고 바라던 도구를 완성합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듯이,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우리들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됩니다(1베드 1,7 참조). 원하는 도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인내하고 단련해 나갈 때 우리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로마 5,4 참조). 믿음과 사랑으로 시작된 희생적인 삶을 이웃에게 선물로 내어줄 때 우리의 이웃도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마리아께서는 “예”라는 대답으로 우리 세상의 문을 하느님께로 열어주셨으며(?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49항 참조), 우리가 기쁨과 희망의 전달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 신뢰를 두고 가까워지도록 도와주시며,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도록 도와주십니다(요한 15,4-9 참조). 믿음과 사랑은 선으로 악을 이기고, 이 시대의 아픔을 겪는 이들에게 영원한 친교와 평화의 씨앗이 자라도록 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천주강생 2009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전교구 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
인천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 14)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절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구세주 예수님의 크신 축복을 기원합니다.
구세주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기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기 위해, 우리의 병고를 맡아 짊어지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마태 20, 28 참조) 원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덧이 씌워졌던 인간에게 죽음을 없애고, 부활의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에게 큰 기쁨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습니다만 슬프게도, 이 땅에는 새 생명의 탄생이 가져오는 기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최저 출산율이라는 부끄러운 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낙태로 어린 생명의 탄생이 저지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탄생을 기뻐하고 장려하며, 생명 보호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날로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가 분열되어 가고 있는 뼈아픈 현실을 바라봅니다. 이로 인해 좌절하며, 자살하는 사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경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것입니다. 함부로 생명을 해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 1위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타인의 생명도 보호하는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정부와 언론이 경제가 행복의 근본인 것처럼 선전합니다. 그러나 돈만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부당하고 파렴치한 짓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존경 받아서는 안 되며, 그런 부유가 참 행복의 근원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이 경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데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주어진 여건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실업, 가난, 정신적인 좌절, 병고로 인해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요한 3, 16)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더 큰 희망을 주시기 위해 겸손하게 오신 분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고통 중에 있는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을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 2, 6~7)
우리는 이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가 점점 가속되어 가고 있음을 가슴 아파합니다. 이런 때 일수록, 부자는 가난한 자를 위한 도움의 손길을 펴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건강한 자는 병약한 자에 대해, 위로와 사랑이 가득 넘치는 봉사를 하는 데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편 8, 5~6) 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인간의 품위를 드높이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사람이면 누구 이건, 모두 사랑하시며, 그의 품위를 드높이시려고 인간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던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께 나아갈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분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자마다 큰 위로와 희망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원의 영광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1요한4,9-10)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천 교구는 금경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재복음화를 위한 영성센터를 마련하기위해 어려운 가운데 힘을 모으고 있으며, 교구설정 50주년에 맞춰 신자 50만이 되게 하려는 새복음화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50주년에 힘을 모으는 모든 분들에게 축복과 힘을 북돋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사랑과 화해가 넘치고 기쁨이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 12월 성탄절에,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 최기산 보니파시오 주교
수원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생명과 빛으로 오신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하며,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세상에 생명과 빛을 가져다 준 사건 1. 오늘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탄생하셨습니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시대를 넘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아기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구원의 신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입니다(요한 1장 참조). 요한 사도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드러난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된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써, 우리를 주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콜로 2,9).
생명이신 구세주 그리스도 2.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생명은 태초부터 말씀을 통해 존재해 왔습니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으므로 ‘말씀’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셨으며 피조물들은 그분을 통하여 생명력을 갖게 되었습니다(요한 1장 참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자신이 “생명의 빛”(요한 8,12)이며, ‘생명 자체’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요한 11,25). 요한 사도는 그의 첫째 서간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으로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증언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1-2). 예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성부께 생명을 받으신 성자이시며(요한 5,26), 인간을 그 선물에 참여하게 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요한 10,10)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면서 세상에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인간 생명 - 인간의 존엄성 3. 생명의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하느님 모상으로써의 인간의 신원과 소명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에 기인합니다(창세 1,26-27 참조). 그러나 인간의 욕심과 자유의 남용은 오히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저해하고 있고, 정의와 공동선이 결핍된 인간의 탐욕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노동문제와 국민의 인권은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인간 존엄성의 원리가 결핍된 채 추진하는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도시의 재개발 사업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외곽으로 몰아 소외계층을 양산하는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인간 생명까지도 희생시키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우리는 살인, 자살, 안락사,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 줄기세포 연구와 인간 실험, 잉여 수정란의 연구와 폐기, 사형제도 등 인간의 생명권을 거스르는 경향과 사상에 동조하지 말아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인간의 초월적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실현됩니다. 따라서 “사회 전체는 모든 순간마다 사람의 생명이 놓인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옹호하며 증진하여야 합니다”.
생명의 터전인 세상: 자연환경 4.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후손들에게 자원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의 탐욕은 자연환경까지도 심각히 훼손하여, 그로인해 머지않은 장래에 닥칠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보존하고 가꾸어야 할 생명의 보고(寶庫)인 자연환경이 ‘수질개선과 물 부족 해소, 경제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인위적이고 급속한 난개발로 위협을 받으면서 많은 이들의 우려를 낳으며 심각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상의 진정한 발전은 물질을 넘어선 보편적 인류애와 인간 전체 발전의 추구에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창조된 세상을 품에 안으신 그 사랑처럼, 창조된 인간이 사랑으로 세상을 발전시켜야 하느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모든 참 생명이 영원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 -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있는 ‘창조와 인간 번영의 최고의 보고(寶庫)’ 5. “성부와 일체이신 아드님께서 가정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구세주이신 ‘한 아기의 탄생’은 출생의 완전한 의미를 밝혀주는 것으로, 메시아의 탄생에 따르는 기쁨은 모든 아기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느끼는 기쁨의 토대이며 그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혼인과 부부애는 그 성격상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합니다. 과연 자녀는 혼인의 가장 큰 선물이며, 부모의 행복을 위해서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날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은 극복해야 할 중대한 사회적 문제입니다. ‘인간 생명을 전달할 중대한 임무는 부부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협조자로 들어 높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함에 때로는 적지 않은 어려움과 걱정이 따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부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고, 나아가 인류의 번영과 희망을 향한 위대한 사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가정의 부부는 세례 때에 그리스도교적 생활에로 불린 성소가 혼인성사로 축성됨으로써 명백해지고 더욱 확고해졌으므로, 굳센 믿음과 밝은 희망을 갖고 맡겨진 일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다가올 세상의 주인공인 자녀(청소년)들에게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생명윤리의 가치를 잘 전달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생명을 나누는 삶 - ‘한마음 운동’ 6.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강생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참 생명으로 오셨음을 묵상하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시대의 요청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가정과 사회 안에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인간의 존엄을 의식하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터전인 자연과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매일의 삶 속에서 복음적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이 세상에 확산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수원교구에서 벌이고 있는 ‘한마음 운동’은 수원교구민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통로 중 하나입니다. 수원교구민은 지난 대림시기에 실시했던 ‘아프리카와 제 3세계를 지원하기 위한 생명기금 모금’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즐거운 불편 24운동’에 참여해 주셨습니다. 더불어 매년 사순시기에 실시하는 ‘생명 나눔’을 위한 헌혈운동과 장기?조직 기증운동에도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생명을 살리는 삶 -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이들 7. 교회는 기쁨과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며 이웃과 사회 안에서 생명의 복음을 살고 나누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특히 ‘생명의 복음’은 복음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우리는 이 복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새해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서 ‘복음적 사랑’으로 우리의 손길을 바라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갖고 눈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이웃에 사는 독거노인, 장애인, 고민 중에 일탈하거나 방학 중에 끼니를 걱정하는 청소년들, 교정의 대상이 되는 이들, 이방인처럼 살아가며 상처를 받는 이주 노동자들, 북한에서 온 새터민들 모두는 우리가 섬기고 사랑해야 할 형제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강생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새 생명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이 사회의 생명 경시 풍조를 극복하여 새로운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은 “희망과 위로의 표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순례하는 백성, 생명의 백성이며 생명을 위한 백성인 우리에게 아드님을 통하여 희망을 주실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09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수원교구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1) 성탄 밤미사 <예물기도>, 성탄 낮미사 <본기도> 참조.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생명의 복음> 29항 참조. 3) 간추린 사회교리 132항 참조. 4) <생명의 복음> 81항. 5) 교황 베네틱토 16세 회칙, <진리안의 사랑> 50항 참조. 6) 같은 책, 18항 참조. 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정교서> 2항 참조. 8) 같은 책, 같은 곳. 9) <생명의 복음> 1항 참조. 10) 사목헌장 50항 참조. 11)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 생명>, 1항 참조. 12) 같은 책 25항 참조. 13) <생명의 복음> 1항 참조. 14) 교회헌장 68항.
원주교구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가 2,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주는 기쁨과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성탄절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 1,14)라는 지난 사목교서 주제 성구의 바로 그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더불어’ 사셨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기뻐하고, 아무리 감사해도 모자랄 놀라운 사건입니다.
큰 기쁨으로 성탄 사건을 되짚어 봅니다. 즉 저 높으신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를 유다 땅 ‘베들레헴’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마태 2,1 루가 2,4). ‘베들레헴’은 우리말로 ‘빵집’이나 ‘떡집’이라고 번역됩니다. 또한 성경은 태어난 아기가 누여진 자리는 ‘구유’였다고 이야기합니다(루가 2,7). ‘구유’란 ‘말이나 소의 밥그릇’입니다. ‘빵집’이라고 불리어지는 작은 마을을 선택하시어 가축의 ‘밥그릇’에 오셨음은 예수님께서 ‘빵으로’, ‘밥으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밥을 먹고 사람이 힘을 내어 하루를 살아가듯이, 힘들고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밥이 되어주시려고, 힘이 되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밥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밥으로 오셨다’는 것은 그분의 삶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됩니다. 공생활 중에 예수님은 모여든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요한 6,41) 이렇듯 당신 생을 통하여 당신 스스로를 빵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만찬 석상에서도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내 몸이다”, “내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몸’과 ‘피’를 “먹어라”, “마셔라”라고 하십니다.(마태 26,26-30). 당신이 우리의 양식으로 오신 분이라고 당신 생명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당신이 생명을 내어주는 밥이심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십니다.
‘밥을 먹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밥으로 오신 그분을 모신다는 것은 ‘그분에게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양식으로 모시는 만큼 그분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미사는 바로 그 힘의 근원인 그분을 나누어 먹는 잔치인 것이며,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크리스마스’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미사’는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대입니다. 경제위기는 아직 채 가시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국론분열이 일고 있고, 서민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져만 갑니다. 생명보다는 죽음을 선택하는 문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희망이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건만 쉽게 좌절하고, 쉽게 절망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밥으로’ 오십니다. 당신을 ‘먹고, 마시어’ 힘을 내라 하십니다. 당신으로 힘을 내어 살아가라 하십니다. 당신에게서 희망을 얻고 포기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당신처럼 밥이 되어 주라 하십니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아울러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여관에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가 2,7)
바로 이것입니다. 비어 있는 자리에 예수님은 오십니다. 이미 차 있는 여관에는 그분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밥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을 우리의 양식으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희망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분이 오실 자리를 비워두어야 합니다.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더욱 더 자신의 것만 챙기려고 합니다. 내어줄 줄 모르고 쌓으려고만 합니다. 내 것만 가득하다면 남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곳에는 그분이 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비워야 합니다. 오시는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오시어 우리의 밥이 되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시며,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밥이 되어 오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다른 이에게 밥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교우 여러분, 그 마음과 삶에 감사를 드리며 뜨거운 격려를 드립니다.
아울러 이 어려운 시기에 맞이하는 올해의 성탄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기쁨이 되기를 기도하며, 여러분 모두에게 평화를 빕니다.
2009년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김지석 야고보 주교
의정부교구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외양간으로 다시 모입시다. 성모님, 성 요셉 그리고 순박한 목동들과 함께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묵상 합시다.
성 가정의 시작은 로마 황제의 호구 조사령이라는 하나의 시련으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성 요셉님, 투덜거림이나 원망의 소리 한 마디 없이 어떻게 이토록 묵묵할 수 있습니까?
성모님께서는 만삭의 몸으로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고통의 여행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해산을 한 곳은 현대식 장비를 갖춘 병실도 따스한 안방도 아니었고 산 짐승들의 외양간이었습니다.
성모님, 그때 가브리엘 천사께 무어라고 외치셨으며, 하느님께 무슨 기도를 하셨나요? 성 요셉님, 그때 성모 마리아님을 어떻게 위로해 드리셨나요?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 얼마나 추우십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 가운데 오시는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세요. 갓난이 예수님, 유다인의 율법대로 할례도 받으셔야 하고, 맏아들이시기에 성전에서 봉헌도 되셔야 하고, 머지않아 국경을 넘어 피난도 가셔야 하고……, 주님께서는 세속의 법이나 유다인의 율법이나 묵묵히 다 따르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그 흔한 시위나 데모를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기 예수님, 베들레헴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그 인생을 오늘의 우리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이 많이 도와주세요. 아멘.
천주교 의정부교구 교구장 이한택 요셉 주교
대구대교구
주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천사들이 주님의 성탄을 목자들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2,10) 주님의 오심이 큰 기쁨이라 했습니다. 이 기쁨은 우리만의 기쁨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쁨' 이기도 합니다.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주님의 오심이 우리에게도 하느님에게도 큰 기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프랑스 대통령을 지냈던 미테랑이란 사람이 죽기 직전에 피에르 신부님(Henri Antoine Groues. 1912-2007. 세계적인 빈민구호 단체 '엠마우스' 설립.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1위로 뽑히는 신부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정말 신(神)이 존재할까요?" 피에르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프랑스와, 뭐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을 하나? 언젠가 자네가 가난한 이에게 가진 것을 다 주고 돌아 설 때 자네 마음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게. 그 바보 같은 짓을 하고도 자네 마음이 기뻤다는 게 그 증거라네." "가난한 이에게 가진 것을 다 주고 돌아 설 때, 그 바보 같은 짓을 하고도 마음에 가득 찼던 기쁨." 이 기쁨이 하느님의 기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난한 우리들을 천국의 축복과 기쁨으로 인도하시고자,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신 하느님, 당신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립2,6-7) 이 바보 같은 짓을 하고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하셨던 '하느님의 기쁨'. 이런 하느님의 기쁨이 바로 성탄의 기쁨일 것입니다. 오늘 이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느님의 기쁨에 화답하여 기쁨으로 노래합니다. 가난한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시고자 오신 예수님. 절망에 무릎시린 우리에게 희망의 손길이 되시고자 오신 예수님. 시련과 아픔의 한숨으로 꺼져 내리는 삶 앞에 '괜찮아!' 하시며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으시는 예수님, 하느님의 기쁨이신 예수님!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 이 기쁨을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탄의 기쁨과 은총이 교우 여러분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성탄의 축복을 전합니다.
2009년 예수성탄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 교구장 직무대행 조환길 타대오 주교
부산교구
성탄을 맞이하여
성탄을 맞이하여 모든 교우님들께 주님의 평화와 사랑을 기원합니다.
우리가 해마다 기원하고 축복하는 인사입니다만 이 말은 올해도 여전히 필요한 바람입니다 : 평화와 사랑이 있는 삶, 평화와 사랑이 있는 가정,
평화와 사랑이 울려퍼지는 사회.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평화와 사랑이 증진되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경제가 성장하여 외적인 ‘부’는 많아졌으나 내적인 빈곤을 겪는 사회가 된다면, 더 큰 목표인 ‘사랑과 평화’가 위협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난을 극복하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은 박수 받아 마땅합니다. 동시에 희생과 사랑의 정신, 올바른 가치관, 민주적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사회의 발전과 국가의 발전을 ‘물량적 발전’으로만 한정시킬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이런 저런 위기적 경제상황을 겪으면서 경제적 구조의 진단과 아울러 우리 삶의 방식과 가치관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소비와 소유를 삶의 중요한 동력으로 하고 있는 이 시대는 ‘욕망과 탐욕’을 늘 감추고 있습니다. 그 결과 ‘소비하는 능력’과 ‘존재하는 능력’을 동일시함으로써 외형주의, 물신주의의 폐해를 겪게 되고,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진정한 평화 속에 머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절의 메시지인 ‘하느님의 화려한 궁전의 길이 아닌 조용한 마굿간에서의 사랑의 길’을 더욱 되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즈음 성탄의 이러한 의미를 되새겨 각자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헌신’의 정신이 탄생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부산교구 교구장 황철수 바오로 주교
청주교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구세주의 성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한없는 위로와 기쁨, 그리고 희망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마음 깊이 경배 드리며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2.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태 1,23). 지금 성탄 구유에 누워계시는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이시오, 구세주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가장 위대한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포대기에 싸인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 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예수님의 성탄은 분명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확실히 나타났으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내어주심으로써 그 사랑이 입증되었습니다(1요한 3,16; 4,9-10).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는 우리는 늘 기뻐할 수 있으며,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언제나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4. 사실, 우리의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질병과 소외, 가족 간의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 이웃과의 관계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도 ‘양극화 현상’과 ‘용산참사’, ‘세종시 문제’와 ‘4대강 살리기’ 등의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고뇌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의 뿌리에는 인간의 존재보다 물질을 우선으로 여기는 소유욕과,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보다 쾌락과 권력을 우선으로 하는 인간의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남이야 어떻든 상관없다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리하여 재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반목하고 형제가 서로 법정에 서기도 합니다. 경제적 이득만 있다면 법을 어기거나 윤리조차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지역경제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국민이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 ‘집단이기주의’가 만연되어 갈등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탄을 통하여 자기 비움과 내어줌이야말로 참 삶의 길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5.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의 삶을 촉구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라고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5-7) 또한 요한 1서는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경축하는 우리가 가야할 길은 재물이나 쾌락, 권력을 우선으로 여기는 물질주의도 아니요, 이기주의도 아닙니다.
6.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자신을 비우고 내어주는 삶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섬기고 가족과 이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랑의 길입니다(마태 22,34-40). 사실, 예수님은 그 사랑의 길을 가셨고, 특히 질병과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베푼 것이 곧 당신에게 베푼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보잘것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마태 25,31-46). 금년 초,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을 지켜보며 비우고 내어주는 사랑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마음 깊이 공감하였습니다. 지금도 추기경님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장기기증운동’은 우리 사회를 풍요롭고 훈훈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7.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각자와 가정에 함께 계시고, 우리 사회에 함께 계시며,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이토록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성탄을 경축하는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으로 가정과 사회를 밝히며, 특히 고통 받는 이웃에게 다가가 사랑으로 함께 함으로써 이 땅에 사랑의 등불을 밝히는 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리며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교구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에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이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2009년 12월 25일 천주교 청주교구 교구장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오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다” (루카 2,11)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놀랍고 감사롭고 기쁨 가득 찬 사건을 경축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끝없이 낮추시어 유한하고 나약한 한낱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때문에 어두움과 불행에 갇혀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 성탄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로서 참으로 위대한 사건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으로 인류와 세계의 역사 흐름이 바뀌었고 새 세상이 우리 앞에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구세주께 관한 기사를 중심으로 성탄에 담긴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과 구원의지를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어둠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 9,1)
빛은 우주 만물이 존재하기 위해 필수불가결의 요소입니다. 빛이 있어 어두움이 극복되고, 빛이 있어 비로소 생명이 시작되며 지속가능합니다. 유사 이래 인류가 공통으로 겪는 마음의 어두움과 불행도 극복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빛이 필요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구세주의 강생 훨씬 이전에 예언자 이사야의 입을 빌려 어두움과 불행에 갇혀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큰 빛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빛이 오면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이사 65,17) 라는 말씀대로 유구한 인류 역사 안에 얼룩져왔던 비극과 불행이 치유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빛이신 구세주께서 탄생하심으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며,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모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6.7) 라는 예언대로 인류와 모든 나라가 서로 적대감을 버리고 화평한 세상을 이루는 시대가 오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인류가 그렇게도 애타게 고대하던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구세주께서는 분명 큰 빛이십니다.
“…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루카 2,7)
사람이 되시어 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한없이 높고 위대하신 그분께서는 낮고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방을 얻지 못해 결국 마구간에서 첫 아들을 낳아 구유에 뉘게 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깊이 묵상해보면 하느님의 생각은 엄청난 가치와 존엄을 지닙니다. 세상의 선량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은 세상에서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로 항상 뒷전으로 밀리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해 세속은 예나 지금이나 힘의 논리로 전개되고 있어 그로인해 많은 이들이 가난과 소외의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한 모순된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역설적이게도 가난과 낮아짐의 원리를 선택하십니다. 또한 원죄의 뿌리가 하느님께 불순종한 교만에 있었다면 그것을 치유하는 비결 역시 겸손과 순종의 낮아짐임을 성탄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구세주 예수님의 전 생애를 보면 병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을 우선으로 따뜻하게 대하셨음이 드러납니다.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만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부유하고 권력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마음이 병들어 불행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도 구원의 품안에 안겨야 합니다. 구세주께서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가난과 낮아짐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분의 한없는 낮아짐으로 인해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외면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구원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종국에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더할 수 없이 가난하고 비천하고 낮은 자세로 막을 내립니다. 시종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의 길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부담이 되고 짐이 되어 거부와 기피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5.11)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필경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했듯 십자가와 순교의 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도되는 사람들은 그분 뜻을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따릅니다. 거기서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루카 2,14) 허락되는 참 평화도 누립니다.
“ …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라는 철학의 대원칙이 있습니다. 관찰해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치고 선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물 중에서도 사람은 ‘하느님 모습을 닮은’(창세 1,26) 아주 고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원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그 고귀한 품위를 상실했고 불행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된 인류를 도저히 그냥 버려두실 수 없으셨습니다. 결국 하느님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까지 사람 머리로는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습니다.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존재로, 전능하신 분이 약하디 약한 아기 모습으로,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이사 55,9) 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구세주의 강생으로 인류에게 결정적 구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 이상 죄악과 불행의 늪에서 신음하지 않게 되었고 그 누구도 영원한 생명의 대열에서 제외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기쁨도 이 기쁨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성탄은 천국과 이 세상을 이어놓은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구원이란 낱말은 간단한 것이지만 그 말 안에 내포된 내용들은 우리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되지 않을 만큼 놀랍고 풍요로운 것입니다. 성령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을 통해서만 알아들을 수 있는 무한히 값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눈앞에 현실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수도자, 성직자 여러분!
오늘 기쁨 가득 찬 성탄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한없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이 풍성히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다가오는 새해에는 강생하신 우리 주님의 생애, 곧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심으로써 순교의 원형이 되신 주님을 더욱 충실히 따르기 위해 함께 기도와 힘과 마음을 모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구는 “순교 영성으로 세상의 복음화를!”이란 주제로 2010년도 사목지침을 세웠습니다.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진실하게 따르기 위해 순교 영성이 특히 이 시대에 절실함은 모두 공감하는 바입니다. 힘들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여 주십니다. 금년 한해 본당과 교구 신앙 공동체를 위해 쏟아 부으신 기도와 헌신에 감사드리며 다시금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는”(시편 96,11) 성탄을 경축 드립니다.
2009년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천주교 마산교구 교구장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
안동교구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예수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된다.’고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임금’(이사 9,5)으로 특별히 우리에게 ‘평화의 선물’을 가지고 오십니다. 이 ‘평화의 선물’은 오늘도 예수님께서 몸소 ‘평화의 임금’으로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심으로써 우리 각자에게 베풀어지는 구원의 선물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평화가 간절히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유례없는 범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각박해졌습니다.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문마저 닫아버림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머물 자리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을 등지며 살아가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나누고 섬기며 서로를 위해 주어야 한다는 아주 평범한 삶의 진리마저 저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한 사회의 각종 양극화 현상은 위험 수위에 이르렀고 이는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과 폭력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함께 저지르고 있는 죄, 지금 우리가 함께 범하고 있는 세상의 죄가 아닐까 성찰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해 주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를 구해주시고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가장 깊고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던’(요한1,1) 그분께서 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가 2,12) 라며 천사가 우리에게 알려준 대로 그렇게 연약하고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조차 없는 무기력한 한 아기의 모습이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자리가 됩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 많은 비천한 인간이 구세주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자리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자리가 바로 죄 많은 우리 인간이 다시 태어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태어나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서 태어나는’ 평화와 구원의 은총이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로써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그렇습니다! 성 레오 대 교황님의 말씀대로 “주님의 탄일은 평화의 탄일입니다.”(레오 대종, 성탄 강론 6) 하늘과 땅이 하나 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되며,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선포되는 날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주님 성탄의 은총으로 성령 안에서 주님의 평화를 이루는 도구로 거듭나는 날입니다. 주님 성탄의 날에 ‘평화의 임금’으로 새롭게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꺼이 영접하고 특별히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경배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적개심을 없애고’(에페 2,16 참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주님의 평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면서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포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성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님 평화의 도구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넘을 수도 건널 수도 없었던 장벽을 허물면서 서로 만나기 힘든 양쪽을 하나로 모으고 화해시키는 평화를 이룩하시고 선포하시기 위하여(에페 2,15-17 참조)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이 평화를 이루고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움과 다툼, 분열과 거짓, 의혹과 절망, 슬픔과 어둠이 있는 곳에 사랑과 용서, 일치와 진리, 믿음과 희망, 빛과 기쁨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성탄의 신비는 부요한 자가 먼저 나누고 윗사람이 먼저 섬기는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의 표징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알아보고 주님을 만나는 일이 우리가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만나는 이웃이나 가족들 중에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억울한 이들, 외로운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임을 알아보고 그들을 주님 모시듯 섬깁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 성탄의 고마운 은총과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이 특별히 함께 하는 가족과 이웃에게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 어서 오소서!
천주교 안동교구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광주대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 때문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축복이 이 성탄과 새해에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매년 2000여 년 전에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탄생을 경축합니다. 우리가 어떤 날을 기념하고 축제를 지내는 이유는, 어떤 사실이나 사건의 의미를 되새기고 잊지 않음으로써 서로의 친교와 유대를 강화하고 화합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제는, 참 삶의 빛이요 길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 인류를 초대하여 용서와 자유를 얻게 함으로써, 새 희망으로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축원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성탄은 죽음의 문화 속에 사로 잡혀 있는 인류에게 참 생명과 빛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느님이 ‘하느님’이시기를 포기하고 죽을 인생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탄은 신화(神話)에 불과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이 놀라운 계획을 이렇게 탄복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이는 이사야 예언서에 이미 암시되어 있으며(63,7-8; 25,6-10 참조), 히브리서 저자 역시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 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히브 2,10-12)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눈높이 사랑’을 하고자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같은 처지에 내려오시어,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우리는 감히 하느님의 동기(同氣)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 그러나 세상은 하느님의 이 ‘눈높이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치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자기 본 모습을 거부하였듯이(창세 1,26-27; 2,7; 2,15-17; 3,1-6 참조)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죽음의 문화, 불의와 부정이 지배하는 사회, 어둠이 드리워진 인류사회는 밝은 빛을 피하게 마련입니다. 어둠이 깔린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구세주의 탄생을 거부하는 세상의 모습을 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3-16).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라고 천명하셨지만,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인 악마의 하수인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합니다(창세 3,1-6; 요한 8,37-59 참조).
● 그렇지만 어둠의 세력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구약의 현자들 역시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나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지혜 7,30-8,1)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당신 작품(에페 2,10 참조)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요한 3,16-17)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이 놀라운 역사적 사건은 곧 ‘사람’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통로’이며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임을 깨닫게 합니다(요한 14,6 참조).
2. 구세주의 성탄은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계시입니다.
● 예수 성탄을 복음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6-7). 세상은 구세주를 맞이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강생하신 구세주는 사람들 가운데 오셨지만, 그분을 받아 주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늘도 현실에만 집착하여 권력과 재력에 삶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구세주 성탄의 신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구세주 성탄을 맨 먼저 맞아들인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자기 삶에 충실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그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8-16).
●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면서 자신의 계획과 능력만을 신뢰하며 오늘의 성공과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구세주의 성탄 신비는 감추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세주의 성탄은 인간의 상상과 예측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이며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요한 9,39) 합니다(이사 61,1-3; 29,17-20; 30,18-22; 마태 11,2-6 참조).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1코린 2,8).
● 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구세주의 성탄을 기념하고 경축합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빛과 어둠의 갈등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 예나 지금이나 빛을 거부하고 빛을 가리며 기득권을 확고히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빛의 자녀로서 살려면 진실하고 진리의 빛 아래 걸어야 합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간곡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어둠의 세력을 극복하고 죽음의 문화를 벗어나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저 2000년 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실 때처럼.
3. 그리스도인은 성모 마리아를 본받음으로써 확실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경위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1-38). 이 순간에 영원하신 말씀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말씀을 잉태하신 분은 구세주의 모친이 되십니다. 이 모친은 당신이 낳은 말씀 곧 예수와 평생을 함께 하며 구세주의 세상 구원을 위한 길에 동참하십니다. 이 구원의 역사를 마르코 복음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하느님 말씀을 지닌 이 구원의 모자(母子)는 “아버지, …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하신 외아드님과 함께 자신을 바치시며,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심으로써(요한 19,25-30 참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를 이루고 동시에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여러분,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통해서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로마 8,9-15; 콜로 1,15-20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라고 기도하며 매사에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참 의미가 있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탓하지 말고 어두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 곧 양심을 지닐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인간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사신 길을 깊이 묵상합시다. 하느님의 옛 백성들이 기대하고 희망하듯 구세주는 위엄을 갖추고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러 오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사람의 돌봄을 필요로 하는 갓난아기로 태어나시어 ‘눈높이 사랑’의 표징이 되시고, 생명을 키우는 그릇인 구유에 누우시어 ‘밥’의 표징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은 실제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어 묻히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표징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의 여정’을 교회가 영원히 기념하도록 신앙의 유산인 성체성사를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신비체인 교회는 성체성사로 형성되고 연명하며 살아갑니다(교황 요한바오로 2세). 그래서 구세주의 성탄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오늘, 우리 교회는 세 대의 미사를(밤미사, 목동미사, 낮미사) 봉헌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이 놀라운 구세사가 축복이 되고 희망이 되며 참 삶의 길로 초대되는 기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은 생명의 빛입니다.”
2009년 성탄절에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
전주교구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0-12.)
성탄이 되어 구유장식 앞에 서면, 우리는 이 말씀을 눈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 거기 걸려 있는 데도, 사람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오늘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옛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목동들처럼, 오늘도 온갖 어려움을 안고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그 짐을 가벼운 듯 짊어지고 큰 보람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을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신 형제자매 여러분! 너무나 뜻밖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욱 가까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영혼 속 깊이에, 그리고 가정과 하시는 일에도 들어오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삶이 아무리 겨울처럼 스산하고 추워보여도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오시는 그분 덕택에 늘 따뜻하고 넉넉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일 년 동안 우리는 나라에서 특히 잘 알려졌던 분들이 세상을 떠나시는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이 선종하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중 매체를 통해서 잘 알려졌던 여러 분들은 뜻하지 않게 삶을 마치셨습니다. 이런 일을 접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겉보기와는 달리 얼마나 무겁고 삭막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권력자는 법도 절차도 건너 뛴 채 수천만, 수억 년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놓은 산하를 파헤치고, 여유 있는 계층은 이웃의 손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을 점점 더 외면하고, 배운 사람들은 그 머리를 공익 대신 자신만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굴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십니다. 그분은 맨 끝자리를 차지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으려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자, 재력가, 지식인들은 한 때 반짝하고 자리를 떴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언제나처럼 서러운 사람,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사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세상은, 우리 모두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 분을 찾고 이분에게서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찾기 전에 그분이 먼저 오시어 우리의 마음 문 앞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들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묵시 3,20).
천주교 전주교구 교구장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제주교구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모조리 화염에 싸여 불꽃의 먹이가 됩니다.’ (이사야 9, 1-4) 이 예언자의 말씀이 선포된 지 수천 년이 지났으나, 오늘도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멍에와 장대와 몽둥이와 군화가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합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용산참사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수십 년 생업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을 단 하루 만에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용산만이 아니라 전국 이백여 곳에서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공동체의 이익은 외면한 채 오로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재개발 사업들이 무분별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서울 마포구 용강동 시민아파트 강제철거가 실시되면서 그곳 주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세계 제일의 개발붐을 일으키고 있는 중국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달 쓰촨성 청두시의 재개발 지역에서 포크레인과 망치로 강제철거를 수행하던 철거반원들 앞에 ‘탕푸전’이라는 주민이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저항하였지만 막아내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 분신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인간을 희생시키는 비인간적인 정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국가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재개발 정책을 밀어붙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천억, 수조 원대의 막대한 부가가치를 소수의 토지 및 가옥 소유주와 건설회사에 돌아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이미 오랜 세월을 두고 형성되고 성숙된 지역 공동체의 친교와 연대라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정신적, 문화적 가치가 말살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올해 발표하신 회칙 ?진리안의 사랑?에서 “한 인간 전체와 모든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발전은 참된 발전이 아닙니다.”(18항)라고 밝히며 발전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간추린 사회 교리>에서 교회는 “사회집단 등을 빈곤으로 내몰면서 인간을 희생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 부의 성장과 공평한 분배에 대한 도덕적 요구는 인간과 사회 전체에 연대라는 근본 덕목을 실천하도록 고무하여야 한다.”(332항) 라고 가르칩니다.
최근 지역 사회의 민의에 가장 예민하고 겸손해야 할 제주도의회에서 민의를 무시하고 해군기지를 유치하기 위한 ‘절대보존지역 변경동의안’을 변칙 통과시키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행위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해군기지 유치가 제주도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엇이 참된 발전인가를 올바로 분별하지 못한 참으로 근시안적인 판단입니다. 눈앞에 던져진 불과 1조 원의 미끼에 현혹되어 미래에 수백조 원을 들여도 회복할 수 없는 제주만의 세계자연유산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수 만 명의 4.3 희생자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겨우 얻어낸 ‘세계 평화의 섬’이라는 정신적 유산을 그들과 함께 땅속 깊숙이 파묻어버리는 일입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 평화를 증진하게 할 수 있는 동북아의 완충지대를 세계열강의 군비경쟁의 첨단기지로 탈바꿈하는 냉전시대의 군사적 발상입니다. 또한 녹색 성장을 부르짖는 정부가 어떻게 예로부터 제주에서 물과 땅이 제일 수려하여 ‘일강정’이라고 불리던 곳에,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천연기념물들 서식지에 콩크리트를 산더미처럼 부어서 생태계의 보고를 쓸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훼손된 자연생태계는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소수 사람의 얼마 안 되는 이익 때문에 제주 전체가 갖는 엄청난 자연적, 정신적 가치를 모두 허물어버리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오만이요, 탐욕입니다.
우리 죄악의 뿌리는 오만과 탐욕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얼마든지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는데도 굳이 하느님께서 금하신 과일이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 그것을 따먹고야 마는 죄의 여정을 출발하였습니다. 벽돌과 역청을 발명하여 도시를 건설할 재능을 얻은 인간들은 성읍을 세우는데 멈추지 않고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온 땅에 날리려는 탐욕과 오만의 질주를 계속 하다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이 탐욕과 오만으로부터 구원해 내시기 위하여 당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피 2, 6-8)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은 끊임없이 오만과 탐욕에 시달려 온 인류를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당신이 먼저 비움과 낮춤을 보여주신 구원의 신비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도 오만과 탐욕이 세상을 지배하며 우리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 살아가는 우리도 베틀레헴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보잘것없는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말구유에 누워계신 갓난아기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우리들의 오만과 탐욕을 벗어던지십시다! 그리고 이 세상의 발전을 주도하고 책임진 이들이 오만과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9년 주님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강우일 베드로 주교
군종교구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
친애하는 국군 장병들과 군종 교구민 여러분,
오늘도 차가운 날씨 속에서 묵묵히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전후방 곳곳의 모든 장병과 가족 여러분들에게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오늘 성탄의 기쁨은 우리들만의 기쁨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의 기쁨이며, 특별히 절망과 어두움 속에 사는 이에게는 더욱 큰 기쁨입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는 ‘희망과 기쁨의 선포’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졌던 베들레헴 고을의 기쁜 소식이 다시금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11)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았던 불안과 어두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고, 또 많은 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북한의 핵 문제로 한반도의 미래는 불안하고, 젊은이들은 직장을 얻기가 힘들어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뿐 아니라 국가의 장래가 달린 중대한 문제들을 다루는 정치권의 모습은 미더워 보이지 않습니다. 또 우리 주변에는 소년 ? 소녀 가장, 독거노인, 노숙자 등 생활의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있는 생명과 윤리 도덕에 관련된 문제들, 즉 저 출산, 아동 성범죄, 살인, 이혼, 자살, 상도덕의 부패는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우리 내면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그리스도께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38)는 주님의 말씀도 우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고,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서도 사랑의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주변의 어두움을 한탄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구체적으로 빛과 사랑이 되는 일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기뻐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수백 번 탄생하신다고 해도 바로 내 안에서 탄생하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며, 예수님이 수천 번 오신다 해도 내가 그분 때문에 변화되지 않는다면 주님 강생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축하하면서 나 자신의 새로운 변화를 다짐해야 합니다.
주님의 길을 닦으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왔습니다. 그중에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루카 3,10) 세례자 요한이 대답하였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이것은 구원자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내 안에서의 참된 주님의 탄생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새로운 변화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금년도 성탄을 지내며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구 설정 20주년을 맞이한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커다란 선물을 주셨습니다. 올해 우리들이 봉헌한 연무대 성당을 비롯하여 공군 훈련소인 교육사 성당과 해병대 훈련소 성당, 그 밖에도 여러 개의 성당들이 그 선물입니다. 이제 선물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선물을 주신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노력의 표시로 우리 교구 공동체의 내년도 삶의 방향인 사목 목표를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의 예물로 바치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고 주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 선택하여 바치는 예물은 ‘기도하며 봉사하자.’입니다.
그동안 우리 군종교구의 많은 본당에서 기도를 실천하며 살아왔고 봉사도 하였습니다. 특히 전후방 곳곳에서 조용히 펼치는 봉사 활동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양로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 몸으로 봉사하는 병사들이 있는가 하면, 독거노인이나 소년 ? 소녀 가장을 돌보아 주는 공동체들도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정과 음식을 나누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는 본당들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한 군중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들은 답을 이미 실천하고 있는 신자들과 본당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조용히 움직이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들은 이제 힘차게 번져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커다란 움직임들이 있을 때 우리 군종교구는 영적으로 큰 성장을 가져 올 것입니다.
친애하는 군종교구 사제, 수도자 그리고 교구민 여러분,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줍니다. 기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하는 우리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께서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청하며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시다.
2009년 예수 성탄 대축일 천주교 군종교구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