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etry 백장미의 창백 /신미나 JB ・ 7시간 전 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절정이 지나간 백장미는 오래전 옛날을 지나온 얼굴이고
당신은 한 톨의 소금도 집어먹지 않고 싱겁게 웃었습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서운 꽃밭에서 풀어졌습니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속눈썹이 붉은 아이가 검은 입을 크게 벌리며 오고 있습니다 양팔을 벌리며 당신을 데리러 오고 있습니다
- 백장미의 창백,문학동네, 2024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4416763 백장미의 창백 | 신미나 - 교보문고 백장미의 창백 |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인생이라는 신앙, 그 기이하고도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믿는 시 구상문학상 수상 시인 신미나 신작 시집시를 쓸 때는 신미…… product.kyobobook.co.kr [교보문고]
신미나 시인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산문집 『다시 살아주세요』, 시툰 『詩누이』 『서릿길을 셔벗셔벗』 『청소년 마음 시툰: 안녕, 해태』(전 3권)가 있다.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인생이라는 신앙, 그 기이하고도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믿는 시 구상문학상 수상 시인 신미나 신작 시집 시를 쓸 때는 신미나, 그림 그릴 때는 싱고. 경쾌하고 진중하게, 발랄하고 사려 깊게 독자들과 만나온 신미나 시인의 세번째 시집 『백장미의 창백』을 문학동네시인선 221번으로 펴낸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첫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창비, 2014)에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토대 위에 쌓아올린 애잔하고 웅숭깊은 언어의 진수를 선보였으며, 구상문학상을 수상한 두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창비, 2021)를 통해 소외되고 밀려난 존재들을 호명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다독였다.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실과 현실 너머를 엄하게 거두어 더 깊은 곳으로 길을 내길 바”란다는 구상문학상 심사평에 부응하듯,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태어난 언어를 그러모아 인생이라는 신앙을 살뜰히 빚어낸다. 실패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 시의 역할에 낙심하면서도 낭떠러지에 발을 내디디는 심정으로 다음 문장을 써내려간다. 지난 시집 출간 이후 3년간 생애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고 밝힌 시인이 죽음에 대해, 그리하여 삶에 대해 치열하게 묻고 답해온 흔적이 이 한 권의 시집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시인이 고이 접어둔 이야기를 펼치면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이 밀려들 것이다. 절정이 지나간 백장미는 오래전 옛날을 지나온 얼굴이고 당신은 한 톨의 소금도 집어먹지 않고 싱겁게 웃었습니다 투석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무서운 꽃밭에서 풀어졌습니다 장미가 맹렬히 붉기를 거부할 때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질 때 속눈썹이 붉은 아이가 검은 입을 크게 벌리며 오고 있습니다 양팔을 벌리며 당신을 데리러 오고 있습니다 _「백장미의 창백」 전문 이번 시집의 서시이자 표제작인 「백장미의 창백」에서 “절정을 지”난 백장미는 “모든 색에서 멀어져/ 다만 흰빛으로만 희미해”진다. 빨간 장미가 흔히 매혹적인 열정을 상징한다면, 모든 색을 흡수하는 흰빛을 지나 투명하고 창백해진 장미는 어둠을 찢고 나오려는 기미를 내비친다. 두번째 수록작 「검은 바위 물밑에서」에는 “밤의 고요 속에/ 조용히 미쳐가는 눈보라/ 어둠 한가운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이윽고 “도끼를 쥐고” “유리창을 깨뜨”린 채 “아찔하게 빛나는 유리를 밟고 서 있”다. 「선생님 전 상서」에는 선생에게 안녕을 고하고 떠나는 화자가 등장한다. “흔하고 고운 것 보시고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이라는 작별의 말로 미뤄볼 때, 그가 앞으로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기보다 생생하고 참혹한 삶의 현장을 마주하게 되리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나의 형제”(「검은 바위 물밑에서」)라 칭하는 시인은 평온한 어둠을 깨뜨리고, 과거의 가르침에 결별을 선언하며 ‘순수한 창백의 시대’를 맞이하고자 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장은영은 1부의 제목 ‘순수한 창백의 시대’가 “죽음에 대한 감각이 퇴화한 시대, 다시 말해 죽음의 불가해성이 삶의 영역에서 박탈된 시대를 명명한다”고 말하며, “누구에게나 필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보편성이 망각된다면 삶의 유한성도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역설한다. 죽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신미나의 시는 죽음이 삶에 요청하는 바에 귀 기울이겠다는 의지이다. 붙잡아! 흩어지는 단어를 도망쳐! 정돈되려는 말로부터 단어를 쥐고, 한 번에 올라타 죽음을 경험했니? 몸속의 실핏줄 하나가 기타의 현처럼 징, 울리는 것을 나는 통과했어 정확히 느꼈지 의미를 버리고 감각을 믿는다면 (...) 언어로는 부족했어요 한달음에 달려가기까지는 눈물은 그만합시다 실패한 비유를 비웃으며 송전탑과 전선을 원숭이처럼 타넘는 해골의 웃음소리 _「어느 날, 죽음이」 부분 17년의 시력을 거치며 오랜 시간 언어의 영토에 머물러온 시인은 가장 먼저 자신의 언어에 죽음을 선고한다. 깊은 어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해골”은 ‘나’의 귓가에 “아끼는 걸 잘도 숨겨두는구나/ 오늘밤,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걸 가져갈” 것이라고 속삭인다. 시인에게 그것은 필시 평생 부려온 언어인바, 그는 “정돈되려는 말로부터” “도망”치고, “흩어지는 단어를” “붙잡”으며 자신을 “통과”하는 “죽음을 경험”한다. 그렇게 신미나는 “언어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비유로서의 광수 아버지」) 쓰는 행위를 통해 감각의 주체로 거듭난다. 「탕후루를 탕후루라고 말할 때」에서 ‘샤즈샤시’라는 조어를 통해 어금니에 찐득하게 달라붙은 설탕을 씹는 모양을 표현한다. 「댐 옆의 붉은 다리를 건너자」에서는 ‘之乙之乙’이라는 한자를 통해 뱀이 하늘을 기어가는 모양을 표현한다. 언어의 의미보다는 어감이 주는 재미나 시각적 효과에 방점을 둔 것이다.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는 언어를 해체하는 시도는 인간의 언어 바깥에 놓인 낯선 종(種)의 출현으로 자연스레 귀결한다. 신미나는 그의 첫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에서 이미 ‘싱고’라는 조어를 탄생시킨 바 있다. 수록작 「싱고」에 따르면, ‘싱고’는 시인이 스스로를 칭하는 또다른 이름인 동시에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때로는 어떤 기분을 뜻하고, 때로는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이 되며,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나는 낯선 존재들은 이번 시집에 한층 다채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신 누구세요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 그래요, 아가 이 소라로 무슨 노래를 들려줄까요? 등에 산호가 돋고 앵무새의 부리처럼 코가 구부러지고 잇몸에서 암모나이트가 돋는 낯선 종(種)의 노래를? _「뿔」 부분 “네발로 기며 침을 흘”리는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 ‘엄마’에게 화자는 “낯선 종(種)의 노래를” 들려주고자 한다. 생명의 빛이 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난생처음/ 뿔소라를 보고” 신기해하는 ‘아기’이자 “변이”된 존재로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엄마에게 낯선 종으로서 새로운 탄생을 부여하는 것 같다. 또다른 시 「풀」에서는 토끼처럼 귀가 크고, 코끼리처럼 코가 긴 존재 “코끼”를 떠올린다. “토끼는 귀가 크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고/ 말하려다/ 코끼!라고” 잘못 내뱉은 화자가 뒤이어 “지구 바깥에” “진짜 코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장면은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해온 언어를 의심하고 다르게 사용하는 일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리란 기대를 품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시집에 웃는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시에 등장하는 낯선 존재들은 “싱겁게 웃”(「백장미의 창백」)고, “뾰족하게 웃”(「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고, “하늘 보며 웃”(「귀로(歸路)」)고, “눈물나게 웃”(「커튼콜」)는다. “걀걀걀 웃”(「화부산(花浮山), 아기자기 오컬트」)고, “희희희 웃”(「꼭두전」)고, 그야말로 “당나귀처럼 이상하게 웃”(「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는다. 이 웃음들은 시의 맥락에 따라 자조와 풍자, 또는 해학과 유머를 두루 품고 있지만, 결국에는 “세상은 신비롭고 귀엽고 웃긴 비유”(「혁수는 기담이라 말하고 문채는 서정이라 말한다」)라는 시인의 다감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듯하다. 4부에 수록된 장시 「꼭두전」은 이 시집에 수록된 마흔 다섯 편의 시에 등장하는 산목숨과 죽은목숨, 인간과 동물, 우리가 아는 세계 너머 낯설고 기이한 존재 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의 장을 마련한다. 언어를 빼앗으러 왔던 죽음 이후의 존재들에게 이번에는 인간의 언어로 푸짐한 잔칫상을 차려 대접한다. 총 6악장으로 구성된 시의 후반부에 이르면 신의 의심과 인간의 믿음, 그 경계가 허물어지며 그 언어조차 무용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홀린 듯이 죽음에 몰입했던 시간은 이 지난한 삶의 끝에 구원이 있을지에 대한 물음이었을까. 시인은 언젠가 그 답을 구하기를 바라며 그저 눈앞에 “딱 한 걸음만큼”의 낭떠러지가 솟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한 발씩 딛는다는 감각을 믿어야 했습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딱 한 걸음만큼 솟는 낭떠러지 누군가는 그것을 희망이라 불렀습니다 _「폭우 속으로」 부분 출판사 서평 ■ 신미나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3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한 권의 시집을 묶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을 텐데도, 이번 시집을 읽으며 선생님께서 한 시절을 건너왔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세번째 시집을 출간하는 소회가 어떠신가요? 등단한 지 17년이 되었네요. 지금껏 7년에 한 권씩 두 권의 시집을 냈는데요. 이 시집을 묶으면서 보낸 3년은 뭐랄까. 제 인생에서 가장 밀도 높은 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 부침이 많았고요. 그 어느 때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치밀하게 질문했던 시기였어요. 편집자님께 삼교지를 보내고 나서, ‘재밌네. 실컷 헤맸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놀랐는데요. 패자의 해방감이랄까요. 시와 질기게 붙고, 흠씬 두들겨 맞고 나가떨어진 뒤의 후련함이랄지...... 그런 게 있었어요. 시를 쓰면서 ‘어떤 성과를 바라거나, 겨루는 마음에서 이제 좀 가볍고 싶다’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묵묵히 쓸 수 있는 시를 쓰자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시원한 감정이 들었던 시집은 처음입니다. Q2. 이번 시집의 제목은 ‘백장미의 창백’입니다. 첫번째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와 두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이후 처음으로 명사구 제목을 시도하셨어요. 「백장미의 창백」은 이번 시집의 서시이자 표제시이기도 한데요. 이 제목이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시는지 여쭈고 싶어요. ‘순백’이 순수를 추구하는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창백’은 핏기 없이 푸른 기가 도는 ‘불길한 징조’나 ‘태어나려는 예감’과도 같아요.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지만, 글쎄요. 세상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요? 아름다워서 슬프고, 이해할 수 없어서 무서운 신비로 일렁여요. 가까운 예를 들면, 얼마 전에 산책하다가 겪은 일인데요. 근방에서 매미가 귀가 찢어질 듯이 우는 거예요. 나무를 올려다보니 귀여운 새가 앉아 있었어요. 새가 매미의 몸통을 쪼고 있더군요. 매미가 울면 위치가 파악되어 천적에게 들키기 쉬울 텐데요. 그런데도 매미는 맹렬하게 울어요. 이를 자연의 순환이라 이름 붙이는 것이, 기이하고 묘한 질서 같아요. 만약 ‘순백’의 시를 쓴다면 귀여운 새를 노래하는 시를 썼겠죠. 하지만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매미는 죽고 껍질이 하얗게 말라가도 그 울음을 추모하는 일에 ‘창백’이라는 단어를 붙인다면 어떨까요. Q3. 삶과 죽음에 대한 시편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삶과 죽음이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고, 시의 화자는 그러한 두 세계를 잇는 매개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순리에 대해 평소에 품고 계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아버지와 반려묘의 임종을 지켰던 순간이 떠오르네요. 눈꺼풀을 내려주던 순간. 차가워진 이마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던 기억이 생생해요. 장례를 치르고 어떤 날은 무궁화를 보며 걸었고, 어떤 날은 땡볕에 말라 죽은 지렁이를 보며 걸었어요. 홀린 듯이 죽음에 대해 몰입했던 시간이었어요. 그간 목도했던 사회적 참사도 그 어느 때보다 뼈아픈 질문으로 다가왔어요. ‘삶의 끝은 정말 아무것도 없나?’라는 질문을 쥐고, 싸우듯이 답을 구하고 싶었어요. 누군가는 샤먼과 문학, 사람들 사이에 인생의 답이 있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저는 아직 찾지 못했어요. 죽음은 완벽한 단독자가 되는 일이니까요. 연결되었던 세계의 끈이 툭 끊어지는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엉성하더라도 그 매듭을 잇는 일을 시로써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 일이 조금이나마 망자들을 덜 외롭게 하고, 무릎이 꺾인 채 살아가는 이들을 부축하는 일이라면요. Q4. “언어의 안팎을 뒤집어 다시”(「비유로서의 광수 아버지」) 쓰겠다는 대목에서 언어의 한계에 갇히지 않는 시인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언어를 의심하면서도 언어에 기대어 쓴, 그리하여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시들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언어야말로 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잖아요.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 정치 수단으로 폭력을 강화하거나, 다른 종을 지배하죠. 우리는 언어를 고도화된 문명의 도구처럼 사용하지만, 역으로 인간이 다른 종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요.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자생하는 생물이야말로 고등 생물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도 해봅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인과를 홀딱 뒤집어보고 싶었어요. 지금껏 언어로 대상을 이용해온 것, 비유하거나 은유하는 인간의 말로부터 탈주하고 싶었거든요. 인간의 ‘말’이 중심인 세계를 회전시켜 경계 없는 세계를 재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장은영 평론가님이 ‘말을 모르는 너에게’라는 해설 제목을 붙여주셨을 때, 고마웠습니다. 언어 안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지만요. Q5. 수록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시가 있으실까요? 그 이유도 듣고 싶습니다. 4부에 실린 장시 「꼭두전」입니다. 정신이 마구 달려가고, 손이 허겁지겁 따라가는 시를 쓸 때가 있어요. 그런 경험은 드물게 오는데요. 한달음에 휘몰아치듯 신나게 썼어요. 다 쓰고 나니, ‘시가 예상치 못한 곳에 나를 부려놨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인식 밖의 영역, 비이성적이라고 선을 그은 정황이나 인물을 시 안으로 데려오는 경험도 신비로웠고요. 퍽 재밌었습니다. 우리가 명확하다고 믿는 인식 안쪽의 세계는 과연 공고할까요? 저는 무의식의 무궁한 의심 속에서도 시가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호명되지 못한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을 시 안으로 불러들여, 한판 놀게 하고 싶었어요. 언어로 한 상, 진설을 차려서요. 거기에 윤리적 당위나 인간의 도덕성을 강요하는 시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 것은 정치가 할 일이죠. 시는 오히려 ‘자연’에 가까운 얼굴 아닐까요. 책 속으로 우리가 나눈 시간은 뜨거운 모래 속에 발을 묻고 서 있습니다 석유가 타는 바다에서 물고기가 종양을 달고 유영하는 물속에서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 아래 백사장에 꽂힌 초 촛불이 휩니다 _「스콜」 부분 운명이 알코올 솜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때부터 어린 여자들이 사라졌어요 신이 공들여 조각하다 말고 고속도로 갓길에 깨뜨려버린 토르소 빛나는 파편을 주우려다 손가락을 베였죠 그게 인생인 줄 몰랐어요 _「채석장의 손」 전문 주머니 속에는 시를 쓴 종이가 있는데 언니들을 슬프게 만드는 시가 있는데 여름휴가는 짧고 동생이 시를 써서 언니들은 기쁘다 말하고 시를 쓰면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 같아 언니들을 시로 써도 될까 사탕수수밭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을 미래, 미래, 미래로 물결쳐오는 문장들을 (…) 새들이 한꺼번에 수풀에서 솟구칠 때 바람 주머니는 고요히 부풀고 뭔가 시작되려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내게 일러주지 않았지 아무도 _「바람 주머니가 부풀 때」 부분 죽음은 서두르지 않네 삶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지 꼼짝없이 그림자와 일치하는 것 빛이 아니라면 누가 그림자를 벨 수 있겠어? _「어느 날, 죽음이」 부분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오래 보는 사람이었지 계단 위에서 계단 아래를 거기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들어가 자라 한꺼번에 살아버리려는 듯이 긴 한숨을 쉬었지 죽어버려야겠다 너도 죽을 거야 그 말을 하고는 당나귀처럼 이상하게 웃었네 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당신은 알 수 없는 사람 새끼를 낳자마자 물어 죽인 개를 이해했지 _「나의 음산하고 야성적인」 부분 그는 고백했습니다 가장 나다운 목소리를 찾기 위해 평생 자신의 그림자를 미행했노라고 어둠 속에서 불안을 심지처럼 세우느라 나는 슬픈 사람이 되었어요 무너져내리는 촛농을 쌓느라 과거를 다 썼습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_「에코」 부분 겉과 속이 같다는 건 천국의 마음입니까? 지옥에 가까운 믿음입니까? 믿고 싶은 대로 사람들은 저마다 신을 빚었습니다 성자는 사람들을 피해 동굴로 들어가버렸고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신을 인정받고 싶어서 다시 성자를 찾았습니다 (...) 나와라! 나와라! 사람들이 손뼉 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던 나뭇가지로 횃불을 만들었습니다 나와라! 나오라니까! 화가 나서 동굴 안으로 불을 던졌습니다 연기 속에서 성자가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돌아왔다! 그가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서 돌아왔다고 _「순수주의자」 부분 죽은듯이 살았던 날도 노래하는 기쁨 있으니 폭탄이 터지는 곳에서 꽹과리를 쳐라 탱크에 포도 넝쿨을 감고 주단을 펼쳐 십만 평 노을에 깔고 하늘에 불을 놓는다 올라간다 마지막 불꽃 금방 태어난 실뱀처럼 수은 한 줄기 하늘로 올라간다 물이 온다 물이 서서 온다 모두가 물이 된다 _「꼭두전」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