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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한 인정미로 환기한 시어들
박수림 시집 《북새를 피우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속도로 치자면 느릴 수밖에 없는 것이 시다. 시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존재한다. 애당초 시간에 대한 강박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 제약을 받지 않은 것 같지만. 가장 많은 내, 외부의 영향에 좌우되는 것이 시란 것을 알게 된다. 시인이 느끼고 감당한 만큼의 크기가 시의 깊이로 내면화되면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감동과 울림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매일 와 닿는 일상은 켜켜이 쌓여 밤과 낮의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하루가 해를 거듭하여 몇 년을 훌쩍 넘긴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은 현실적으로 닥쳐오는 불편한 일상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보며 시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박수림 시인은 전형적인 서정 짙은 애수의 시인이다. 인간의 심상에 도사린 슬픔과 환희가 비례하지 않은 것처럼 아무래도 애환이 더 많은 삶이었다는 것을 지금껏 문학을 통해 말해왔다. 기울어진 세상을 기울어지기 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고 삶을 문학으로 실천한 것이다. 네 번째 시집 《북새로 피어나다》의 시편들을 살펴보면서 말하고 싶은 속내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추구하는 궁극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응당 존재해야 할 ‘사랑’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나이 지긋해진 만큼 시속에 함의된 언어의 위중함과 더불어 바라보는 관점은 깊어질 수 밖에 없다. 평범한 어가 지시하는 이면의 다층적 이미지를 간과해선 안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불면의 겨울밤을 걷어두고
삭정이 손짓으로
닳아 가는데
그대의 발길은 느리기만 하다
하얗게 지새운 눈길 위에
나의 기다림은
총총이 지워지고
그대는 여전히 오고 있는가
-<연서> 부분
언뜻 시제의 ‘연서’라는 분위기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보다 누구나 경험한 보편적인 추억을 공감으로 충동하기에 충분하다. 첫 연의 “바람길 따라/ 눈발 날리는데/ 추억 길 따라 그대 오시는가”라고 묻는 화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초조한 심정을 드러낸다. 화자는 기다리는 대상이 꼭 와줬으면 하는 집착에 가깝다. 하지만, 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기다리지만, 아직도 올 기미가 없다는 2연은 조급한 마음을 기색하고 만다. 그런 마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다리는 ‘그대’는 올 기척이 없다는 3연에서 포기하지 못한 화자의 심사만 복잡해졌다. 하지만 화자의 끈질긴 집착인지 보이지 않은 길을 헤집고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는 확신을 주문呪文하듯 “그대는 여전히 오고 있는가”라면서 찾아와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 시에서 보여주는 ‘인내’의 방식은 지금껏 살아온 박수림 시인의 모습일지 모른다. 어차피 사람의 만남과 이별은 정해진 순서가 없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 익숙해진 시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당한 거리감으로 지켜본다. 떠나간 사람이나 왔다가 다시 떠나갈 사람이나 시인은 그것을 애증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슴 속으로 가슴앓이하듯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사람뿐만이 아닌 각박한 현실도 지긋하게 삭히면서 ‘그대’를 기다리듯 관망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독백처럼 입말을 가슴에다 되묻곤 한다.
닿을 듯 말듯
애처로운 거리에서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때론 갈망하는
노을 앉은 바다의
눈빛이 아니고서야
슬픔으로 다그치며
닻을 올리는가 그대여
어쩌다 그대에게 가는 길이
가장 먼 길이 되었을까
-<그대에게 가는 길> 전문
시 속에 대상으로 자리매김한 ‘그대’는 흔한 이성 간의 사랑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번 찾아가도 서해 보령의 낙조나 밀물과 썰물은 다른 모습으로 맞아준다. 물 빠진 대천 해수욕장 해변 모래톱이나 그 발치를 드나드는 연인들의 달콤한 밀어뿐만이 아니다. 시인의 시선에 와닿은 대상은 모두가 유일한 ‘그대’가 된다. 시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세월의 내피 안에 고이 간직한 추억 곳곳마다 ‘그대’는 실재한 존재로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어야만 하는지 모른다. 그런 비의적 은유는 시 <꽃>을 통해 알 수 있다. “길가에 혼자 피어 있는 너를/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수줍은 나를 많이 닮았다/ 풀섶 뒤에 빼꼼이 내민 얼굴/ 붉다 붉다 검붉어 나도 그만 부끄럽다”를 보면 가슴 속 비밀을 안고 있는 대상이 ‘그대’에서 ‘꽃’으로 변주된다. 의아한 것은 ‘그대’에게는 만남에 가까운 거리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에서 ‘꽃’은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볼 정도로 심리적으로 스스럼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인이 바라보는 ‘꽃’은 실재한 과거 속 각별한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길가에 핀 꽃이 수줍듯 숨어 핀다는 동질감을 통해 시인은 과거 자신을 떠올린다. 꽃으로 비롯된 회상은 당당하거나 좀 더 도발적이지 못했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후회하고 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찾아오지 않고 거듭된 후회만 밀물처럼 가슴안을 드나든다. 차라리 잊기라도 한다면 좋겠지만, 그마저 쉽지 않아 평상심을 뒤흔들어놓고 만다. 자신의 마음속의 냉철한 이성으로 촉촉이 젖어 오는 감정을 이길 수는 없다.
늦은 밤 술 취한 네 목소리가
만년필의 흘림체가 되어
한 문장 이어가는데 한 시간이 같이 간다
가다 흘리고 되짚어 맞추어서
고비를 넘기고 달아주는 한마디
그 말이 하고 싶어 목젖 흔드는 너와
그 말을 담으려고 밑줄 긋는 내가
한밤을 붙잡고 추억을 곱 씹는다
-<한 문장> 전문
“늦은 밤 술 취한 네 목소리”를 통한 성량의 질감은 정보의 정확성보다는 오히려 감성적인 혼란을 부추기고 만다. 시인은 충동된 기분을 모으기 위해 만년필을 들었지만, 이미 전이된 술기운에 마비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끝내 무너지고야 마는 시 <한 문장>에서 온통 문장을 휘저어 놓고 만다. 인간적인 고뇌가 근원이라면 범속한 일상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시제로 가리키는 부분은 아니라는 것이고 ‘한 문장’으로만 볼 수 없어 전체를 추인하고 있다. 시의 제목 아래 이미 팔 행으로 전개되는 서사를 상당한 과거까지로 거슬러 유추토록 한다. 여기에서 구분해야 할 것은 ‘술 취한 목소리’로 시작된 시의 주체는 감당하지 못한 화자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로 인해 이어지는 문장 속에서 만감이 교차하며 나타나는 언어의 집약이 좀체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유로 전해오는 충동이 바로 시적 형용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한 문장’이란 시는 술기운으로 전해오는 이성과의 밀담을 전제해야 상상할 수 있다. 그 이성의 통화음으로 비롯되어 발현된 시적 형상화의 과정으로 결국은 시 창작의 고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습작 노트인 셈이다. 적적한 밤은 사람을 더 외롭게 한다. 아무리 마음을 추스려도 다잡아 줄 수 없는 그리움은 겨울밤을 곤혹스럽게 한다.
고요를 흔든 낙엽 위로 물방울들 아슬하게 구르고 눈부신 아침 햇살에 '첫'자 붙은 빛 반사가 또한 나를 흔든다
오래된 시집 한 권을 펼친다
어느 페이지인가
그곳은 폭설로 길이 막혀 있다
첫눈은 생각을 버리고 오는것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뜬 눈으로 지샌다는 것은 일각의 기다림 그가 오겠다
사각사각 꿈길이라도 더 할 나위 없겠다
-<첫눈> 부분
<첫눈>이 오기까지는 봄을 통과해야만 한다. 자연 생태계가 탄생과 죽음으로 끝을 보듯 봄으로 시작된 계절은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선다. 그 여정도 사뭇 사람의 생로병사와 다르지 않다. 박수림 시인의 시집 속에 그런 계절 변화를 포착하여 이룬 시편들이 당시의 심정을 증언하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람과 계절은 분리할 수 없듯 필연적 관계 속에서 변화와 진전을 반복한다. 번번이 잊을 만하면 톡톡 건들어 감성을 자극하는 봄꽃은 물론이고 작렬하는 땡볕 아래서 힘들다고 고개를 저어본 적 없는 삶이다. 이어 선들바람 타고 건너오는 가을인가 싶었는데, 서릿발을 뿌리더니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첫눈’이 내렸다. 해마다 내리는 ‘첫눈’을 보며 그 어디엔가 있을 추억에 꼬투리를 잡히고 말았다. <첫눈>의 시 속에 감춰진 소중한 추억의 연관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시인은 문장 속에서도 분명하게 ‘나’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필 잠이 든 시간에 내린 눈이었을까? 수없이 망설이다 연인을 찾아왔지만, 어쩔 수 없이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간 것만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그런 흔적은 추녀 끝으로 녹아내리는 물방울 소리로도 기척인가 싶어 위안을 삼아 본다. 내린 눈이 군데군데 남아 번민했을 밤의 흔적들을 ‘그리움’처럼 남겨놓았다. 무슨 미련인지 모르겠지만, “고요를 흔든 낙엽 위로 물방울들 아슬하게 구르고 눈부신 아침 햇살에 '첫'자 붙은 빛 반사가 또한 나를 흔든다”는 시인의 마음은 몹시 부양되어있다. 지난 시간 속에 잊어진 “오래된 시집 한 권을 펼친다/ 어느 페이지인가/ 그곳은 폭설로 길이 막혀 있다/ 첫눈은 생각을 버리고 오는 것”을 생각하며 첫눈을 밟고 찾아와 줄 시인의 가슴 안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소환한다. 누구나 여운처럼 길게 드리운 가슴속에 ‘그리움’으로 각인한 ‘사랑’ 하나쯤 없을까 싶지만, 박수림 시인이 그토록 그리워하는 대상은 여전히 궁금증을 더하고 있다. 나이 들어 헛헛해지는 시간을 비집고 오는 애저녁 풍경은 전통적인 서정시의 대상이고 고요로 깊어지는 적막은 감정 반응을 무한자극한다.
어스름 해질녘
그리움 서성이더니
노을 앞세우고
당신 오시네요
왼 종일
봉우리 진 마음
한 겹 한 겹
펴다 보니
붉은 꽃 한 송이
활짝 핍디다
꽃불 밝힌 줄
어찌 아시고
노을길 잊지 않고
오셨는지요
-<꽃불> 전문
‘꽃불’이란 시적 형용은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꽃불’은 그런 직접적인 형용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사모하거나 연모하는 대상을 은밀하게 내포한다. 이어 ‘그리움’이란 심리적 반응은 점점 확장하여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해질녘’ 풍경으로 점화된다. ‘노을’이란 시간을 통해 극대화된 감각의 집적은 ‘당신’이란 존재성으로 부각된다. ‘당신’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간절함은 “봉우리 진 마음/ 한 겹 한 겹/ 펴다 보니/ 붉은 꽃 한 송이/ 활짝 핍디다”라고 시적인 주체에게 현재까지의 경과를 전언적인 의미로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첫 연에서 ‘오시네요’와 마지막 연의 ‘오셨는지요’라는 시제의 미완성은 ‘그리움’이란 밀도를 극대화해준다. 자연을 풍경화하고 그 안에서 부재한 심리적 공허감을 서정적인 자아로 공감해가는 반복성을 보여준다. 박수림 시인만의 시적 변별성으로 돋보이는 시 유형은 이미 앞서 발간된 시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이력을 알려면 과거로 눈을 돌리게 된다. 더욱이 최근작으로 다가오는 네 번째 시집에 대한 이해를 위해 어쩔 수 없다. 그런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난 시집에 올린 박철영의 해설 중 부분을 인용해보려 한다.
“박수림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꽃잎 하나 터질 모양이다》와 두 번째 시집 《당신을 바라보는 거리》에서의 느낌보다 인식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첫 시집 속 <다보도>의 “아무도 머물러 주지 않는 밤/ 등대 불빛에 꿈틀대는/ 불임의 여자 너를 안는 건 비릿한 바다/ 흔들릴 수 없는 맺음이여.” 에서는 사람에 대한 애착과 욕망을 놓지 못한다. 또한, <고드름>에서는 “오류가 잦아 금세 잊고 잊혀져가는/ 뜨거운 가슴을 상실한 메모리의 일부/ 내 삶은 날마다 수척해져 가고/ 뿌리 없는 그 자리에 나는/ 날마다 새로운 음모를 꾸민다.”며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첫 시집에서는 사람에 대한 강한 집착이 사랑으로 나타난다면, 두 번째 시집에서는 자신의 살아온 세월만큼 순탄치 않은 삶이 주조를 이룬다. 여성으로서 고유한 성性을 지켜가기 위한 오기가 강한 자존감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것들 모두가 알고 보면 세 번째 시집 《네 전부가 내 사랑이다》까지 건너오기 위한 징검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건널 때마다 시인이기에 앞서 인간으로서 많은 고통이 있었음을 알게 해 준다. 어차피 우리의 삶에서 쓸모없는 시간은 절대 없다. 헛 살아온 것처럼 느껴진 세월마저 자신의 진정한 삶의 부분으로 본다면 박수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삶이 무릇 깊어지면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박수림 시인의 시가 요즘 그렇다. 그토록 자신을 짓누르던 등짐을 하나둘씩 내려놓기를 작정한다. 내려놓아야 가볍고 헐거워져야 신명 나는 법이다. 최근의 시를 들여다보면 많은 의미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성숙한 고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것들이 아무나 견뎌내는 고통은 아니다. 어차피 스스로 씌운 굴레였기에 그 굴레를 벗겨내는 것도 시인의 몫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은 처절한 자기반성과 후회가 따른 고통을 요구한다. 그쯤 되면 단물이 다 빠져 맛을 알 수 없는 풍선껌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씹으면 끝없이 단물에 길들여진 혀를 자극한다. 박수림 시인의 시는 삼켜도 단물이 입안에서 맴도는 유년의 마술 같은 풍선껌 같다. 부풀어져 풍선이 되는 시를 입안에다 넣고 팽팽하도록 바람을 불어넣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작은 입보다 몇 배는 부풀어지는 풍선껌이지만,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터지고야 마는 풍선일 수밖에 없다. 터져야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세상이다. 세상을 향해 톡톡 터지는 소리가 시다. 최상위 문학이라는 시는 어쩌면 인식된 세계를 내면화한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주술적 행위일 수 있다. 그래서 박수림 시인의 시는 전통적 시의 속성을 자연스럽게 이어오고 있다. 서정성이 강한 시를 통해 김소월의 진달래에서처럼 떠나는 정인情人에게 기다림의 비원悲怨을 퍼붓거나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다가왔던 것들을 오롯하게 다 놓아주되 그리움과 기다림이 온존溫存한다. 기다림의 미학은 매번 단절되지 않으면서 감상에 치우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의 본원인 서정에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서 박수림의 시에는 증오나 원망이 스며들 여지가 없다. 이제 다시 네 번째 시집 속의 시편을 봐야 할 때다.
고백도 못 했는데
가슴앓이 제대로 못 해봤는데
어쩌자고 후두둑 떨어지는가 고운
꽃잎아
바람든 가슴이야 비우면 된다지만
깊어진 그리움은 어쩌라고
눈길도 주기 전에 떠나는가 미운
꽃잎아
발등으로 떨어지는 눈물쯤이야
툭툭 털어 잊으면 그만이지만
생생한 기억 속의 그대는 사랑이었네
가련한 꽃잎아
-<낙화> 전문
“고백도 못 했는데/ 가슴앓이 제대로 못 해봤는데/ 어쩌자고 후두둑 떨어지는가 고운/ 꽃잎아”라고 속내를 말해 버린다. 박수림 시인의 시적 전경은 풍경이고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성을 인간적인 동질감으로 바라본다. 이번 시에서도 볼 수 있듯 풍경으로 들어가 주체적인 자아를 이입하여 일체화된 인식으로 바라본다. 사유에서 비롯된 문장이 아닌 모든 감각적 체험을 통해 추수한 시적 언어임을 방증해준다. 자연적 현상으로 떨어지는 꽃잎을 인간적인 지점으로 유인하여 서정성을 환기해간다. 나이 들어 지극해진 감각은 더 예민해져 온몸이 공명통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사사로운 것에 대한 비움에서 가능한 것이고 삶에 대한 반응으로 이뤄온 성찰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물로 다가오는 대상이 죄다 시적 반응이 될 수 없다. 박수림 시인도 그런 것을 잘 알기에 철저한 취사取捨를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별로 인해 대상에 대한 연민과 흩어지는 시간 속을 벗어난 인정에 대한 그리움은 사뭇 클 수밖에 없다. ‘그리움’이나 ‘상처’는 사랑이 남긴 후유증으로 이종 세트여서 쌍생아처럼 쉽게 분리될 수 없다. 부득불 갈라섰다 해도 애증으로 뒤틀려버린 관계지만, 평생 가슴 언저리를 쿡쿡 찌르듯 한 통증으로 남는다. 박수림 시인의 가슴 속도 그와 다르지 않다. 자기 스스로 ‘그리움’에 대한 대상을 품어 안고 무병巫病처럼 고통을 앓고 살아야 한다.
하루를 잘 태우고 돌아가는 붉은 꽃밭이다
빈틈없이 메꾸어 놓은 편지의 꾹꾹 눌러 쓴 마지막 구절이다
묵정밭 풀숲에서 일어난 투쟁을 긋고 간 자국이다
할아버지의 지게 위에서 맴돌던 잠자리떼의 예언이다
어머니의 굽은 등을 지나
애써 외면하며 돌아서 울던 충혈된 눈빛
이 땅의 자식들이 토해놓은 연민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다
한 생을 뜨겁게 잘 살다가는 당신이다
메마른 나에게 오아시스로 돌아올 사랑이다
-<북새로 피어나다> 전문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감각의 촉수는 시적 지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것의 종착점은 알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앞으로 지루하게 끌고 갈 수밖에 없는 가혹성을 안고 있다. 그것을 거부하면 온몸이 쑤셔 더한 고통이 될 뿐이다. 시는 몸으로 쓰는 것이어야 하고 필수 코스처럼 사물(현상)을 통한 비밀을 전언해야 하는 유일한 문장인 것이다. “하루를 잘 태우고 돌아가는 붉은 꽃밭이다/ 빈틈없이 메꾸어 놓은 편지의 꾹꾹 눌러 쓴 마지막 구절이다”처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풍경을 통해 치열한 반성과 성찰을 다짐한다.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의 소멸을 보면서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이 시 <북새로 피어나다>에서 박수림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유전적 관계인을 소환하여 현재의 시간으로 부활한 ‘북새’와의 인연성을 강화하려 한다. 온전한 하루의 시간은 먼 과거 속 할아버지의 존재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물림한 험난한 삶을 감당해야 했던 “어머니의 굽은 등을 지나/ 애써 외면하며 돌아서 울던 충혈된 눈빛/ 이 땅의 자식들이 토해놓은 연민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다”라며 비의를 풀어 놓는다. 북새(노을)로 피어나는 것은 결국 내재한 시간의 연속성을 추인하고 언젠가 다가올 ‘사랑’까지를 염원한다. 박수림 시인이 갈망하는 비원悲願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대 자연이 하루를 기점으로 반복해서 피워내는 북새처럼 인간의 삶도 항상 재현되는 것임을 박수림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오후엔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아
버스를 타고 또 버스를 갈아타고
대천 해수욕장
어제도 오늘도 같은 자리
파도가 당기는 힘의 이끌림인가
발걸음 가는 대로 커피숍 이 층 또는
바닷가 끄트머리 바위 모퉁이에 앉아
다보도 안면도 원산도 삽시도 호도
섬들의 이름을 건드려 본다
바람은 외진 바위틈으로
남몰래 내동댕이치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라떼 속으로 피어오르는 꽃의 향연
이거면 됐지 당신에게 가까이 스며드는 시간
노을로 활짝 지는 것
너도 꽃이다
-<노을, 너도 꽃> 전문
홀연히 찾아간 보령 근경의 대천 해수욕장은 밤과 낮이 다르고 밤의 시간마다 달라지는 풍광을 해변으로 드러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떠나간 그곳을 박수림 시인이 찾아간 것이다.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서해 먼바다를 건너온 짠 내 품은 물비린내가 코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선을 자극하지 않는 바다 원경은 “다보도 안면도 원산도 삽시도 호도”를 자연스럽게 품어준다. 그 섬 어딘가를 핥고 가는 ‘노을’ “바람은 외진 바위틈으로/ 남몰래 내동댕이치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라떼 속으로 피어오르는 꽃의 향연/ 이거면 됐지 당신에게 가까이 스며드는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의 소멸은 시지프스가 일상처럼 고통을 받아들이듯 아무렇지 않게 반복될 것이다. 세상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어머니라는 모성을 통해 유전적인 형질을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어머니가 뿌려준 ‘씨앗들’을 가슴안에 품고 성장한 박수림 시인이다. 그런 사유의 지향을 <씨앗들>이란 시를 통해 상상력를 확장해간다. 사람의 개체가 모두 씨앗과 같아서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내재한 삶을 보편성으로 전환하는 과거의 시간을 현재화하고 있을 뿐이다. 집을 나서 “씨앗들의 발걸음이 바람열차에 오른다”는 시점은 청춘기의 호시절이라고 볼 수 있다. 들뜬 마음을 안고 출발한 청춘기의 시절을 보낸 뒤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긴 여행을 하고 온 시인도 “마른 가슴으로 돌아와/ 내 씨앗들 보낼 준비 서두르는 중”이라고 말한다. 초심으로 떠난 여행의 들뜬 마음은 다 사라져버렸고 고달팠던 기억만 남았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달픈 피로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마음 먹고 찾아간 고향의 산도 그렇고 바다도 더는 낭만적인 풍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제 찾아간 시인의 고향도 많이 변해버려 타향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도 고향의 산천을 보며 자란 박수림 시인의 마음 가득한 인정이란 것을 ‘씨앗’처럼 뿌려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엄마로부터 보고 배운 학습행위인 것이다. ‘씨앗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는 버리고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는 것의 인지상정임을 말해준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지치고 피로해진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사를 꾸미다>란 말의 이면에 깔린 의도가 재밌다. 안면도 ‘꽃지’에 멋있게 꾸며놓은 수선화 군락지를 보러 가던 중 있었던 이야기가 주조를 이룬다. 본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들뜬 마음에 사람들과 “중간 어귀쯤에서 산낙지 멍게 해삼과 바꿔먹고” 놀기에 바빴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닷가의 풍경으로 아름답다는 ‘꽃지’에 그 많은 수선화는 안중에도 없다, 하루 동안의 짧은 여정에서 몇 번의 일탈을 더 한 뒤 황당하게도 동네 돌담 아래에 수줍게 핀 수선화만 보고 만 것이다. ‘모사를 꿈꾸다’의 모사는 소소한 일탈이지만, 몸과 마음이 즐거웠다면 좋은 것이다. 결국 그런 행동을 유발한 동인動因도 알고 보면 유년기 즐거운 추억의 반복이라는 것을 시인은 말해준다. 아버지의 신발과 바꿔먹었던 옛 추억 놀이를 통해 한때나마 잊어버린 동심을 회복해간다. 박수림 시인의 시적 지향과 문학 자장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주변과 일상에서 일어난 사건을 시적 상관성으로 바라보고 있다. 간간이 노출되는 ‘사랑’과 ‘그리움’이란 시어도 단순한 이성간의 밀도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 저변에는 생명의 속곳을 들여다보려는 진정한 자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입추> 전반에 흐르고 있는 시적 정서는 앞서 말한 시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박수림 시인의 시의 방향성은 사물을 인간적인 관계로 편입해서 바라본다. ‘입추’라는 절기가 내포한 의미는 단순한 가을 초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사람도 나이 들어 자꾸만 뒤로 밀리다 보면 자신이 가을 끝물쯤 와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가 온다. 꽃이 피고 진 뒤 한여름 땡볕을 물고 늘어져 한 해의 결실을 보여줄 때이다. 여유로운 시간의 일상이 초가을 이미지로 극대화해 “바람잡이 놀이에 빠진 잠자리를/ 새끼 고양이가 온 종일 따라붙고/ 진돗개는 낮잠으로 늘어져/ 대빗자루로 엉덩이 맞는 꿈 꾸는지/ 깜짝깜짝 놀래는 몸짓 한다”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가로운 고향 집의 목가적인 이미지를 고조시킨다. “며칠째 뽕나무가 내 생각 속에서/ 머무르는 일이 잦아졌다”는 박수림 시인의 시 문장 속 이미지는 따스한 감성과 인정미에 있다. 마음마저 시골스런 데다 순박한 시어들이 시 전편을 관류하고 있다. 한동안의 고즈녘한 응시를 통해 다가오는 시적 사유를 벼리기 위해 박수림 시인은 조만간 ‘바람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