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아 나선다.
가을이 손짓해 나선다.
단풍이 추위에 으스러지기 전에
가야산 실루엣 훌훌 벗어버리기 전에 나선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가야산이다.
추억이 그리워 ‘만물상' 방향 택하는데,
깔딱고개 겁먹은 여인네들 ‘용기골’로 향하네.
호흡이 가파르면 ‘포켓쉼터’ 쉬어라 해도,
“10분간 휴식이 100세까지 간다”며
‘심장안전쉼터’가 잡아도
아서라, 뿌리치고 오르네.
예전에 쉬지 않던 산마루다.
먼 산 아지랑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다양한 형상들이 날 반긴다.
못 봤던 바위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냥 봐도 공룡이다.
바윗돌의 아름다운 참모습 볼 수 있는 늦가을이 좋다.
한참 전 추월한 여인, 공룡에 넋 빠진 날 앞지른다.
많은 추억 쌓여 있는 만물상 탐방로.
죽을힘 다해 올랐던 친구가 그립네.
곳곳에 숨어 있는 우정의 발자취,
10분 오르고 30분 쉬었었지.
가득 담은 친구 배낭을 비웠던 구석진 자리.
먹고 마셔도 줄지 않아 아무나 부여잡고 쥐어주었던 곳.
오늘도 최고의 명당자리다.
정상을 병풍 삼아 누운 바위에 앉아 가부좌 틀고 생각에 잠긴다.
할 것 많은 세상, 덧없이 흐르는 세월,
남은 세월 건강을 부탁드립니다.
또 추월했던 그 여인이 지나간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 놀이 하는 것 같다.
나를 붙잡았던 투구바위 포토죤엔 두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쌍둥이 같은데 한 그루가 생을 마감했다.
生과 死, 삶과 죽음이 공존해 있는 모습에 마음이 싸하다.
산자락에서 왔던 곳 뒤돌아보니 색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윗돌들이 뭉쳐 묵언수행하는 스님이 되었다.
너무 신기해 한참을 보다가 너무 빼닮아 나도 모르게 합장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참으로 신기하다. 또 그 여인을 만났으니.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만든다는데.
인연인가 하여 붙잡고 싶지만,
용기 없어 빠른 걸음으로 벗어난다.
‘서성재’가 날 부른다.
도란도란 웃음소리 갈잎 흔든다.
아름다움으로 피어나지 못하고 말라 버린 나뭇잎,
올겨울 얼마나 추위에 떨까?
4년 전 친구가 포기하려 했던 장소다.
다리에 쥐나고 급기야 호흡곤란까지 왔던 곳.
119에 구조요청까지 생각했던 곳.
갈잎이 전해주는 웃음소리 듣고 힘을 냈던 곳.
용기내어 일어선 친구가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세월아 네월아, 1분 가고 10분 쉬었었다.
그렇게 고난의 행군으로 ‘서성재’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1010m 고지 밟았다며 눈물 흘렸던 곳.
주차장에서 만난 낮선 이방인들로 소란스럽다.
곁에 앉아 밀감과 사탕으로 당을 보충한다.
다수가 둘러앉은 가운데 보따리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 완주 기념 축하 시루떡입니다”.
“오늘 세 명이 완주 하거던요”.
토끼와 거북이 경주 종착지다.
광주분들과 담소를 나누는 중,
먼발치 거북이님이 들어 오신다.
정상에서 먹게 될 영광의 떡을 기대하면서 일어섰다.
길가의 조릿대 파란 하늘 같아 손으로 훌쳐본다.
바윗길만 올라 가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나무는 훌훌 옷을 벗어 던지고,
겨울을 모르는 조릿대 훈풍에 사각사각 노래하니.
가을은 허무한 건지, 풍요로운 건지 모르겠다.
닫혔던 땀구멍이 다시 열린다.
가파른 철계단을 오르는데 땀이 비 오듯 한다.
지쳐간다. 다리엔 힘이 풀리고, 스틱에 의존한 손목은 고달프다.
한땀한땀 여인의 손놀림 생각하며 조심스레 계단을 오른다.
숨은 턱 밑까지 차 호흡도 쉽지 않다.
급기야 철계단 중간에 잠시 멈춘다.
여태껏 가야산 철계단에서 쉬지 않았다.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올봄엔 이러지 않았는데.
하지만 아직도 마지막 깔딱고개가 남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오른다.
자꾸 몸이 앞 계단에 닫을 듯 수구러진다.
힘이 부친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이 너무나 부럽다.
마음까지 허물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지, 다시 운동에 몰두해야 할 것 같다.
칠불봉 정상에서 만세를 불렀다.
해 냈다는 자부심과 다시 없을 자괴감 떨쳐버리기 위해.
100대 명산 완등자들이 온다.
그런데 떡이 보이지 않는다.
30분 이상 기다려도 오지 않아,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산한다.
시루떡에 목멘 두 분을 만났다.
기진맥진 바위에 몸 기대다가 풀석 주저앉아 버린다.
“등에 지고 가지 왜 그렇게 작대기로 꽂아 오르세요‘
”고사 지낼건데 뭉게지면 안되잖아요. 곱게 가져가야지요’
11월 날씨가 아니다.
산 정상에 부는 바람은 반 팔로 맞아도 시원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기분은 아무 곳이나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만인지상의 기분이 이럴까?
일인지하의 기분이 이럴까?
내려보니 천하가 내 것 같고, 올려보니 허상이다.
“인생칠십 고래희”. 세월을 느껴야 할 나이다.
백세시대에 칠순은 경로당의 막내지만,
사랑과 도전, 그리고 건강엔 아직 청춘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스팩터클한 빠알간 단풍을 찾는다.
예전에 찬란하게 빛나던 단풍이 그립다.
이곳이 단풍 터널이었는데.
빛바랜 나뭇잎을 보니 맥빠진 인생을 본 듯 마음이 아프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그래도 몇 그루의 단풍이 마음을 달래준다.
붉은 단풍, 노랑 단풍, 그 속에 생강나무가 햇살에 우아하다.
“와~ 살아서 왔네, 축하해”라며 친구와 감격의 포옹을 나누었던 탐방로 입구다.
한 시간이면 족한 하산인데, 그땐 왜 그리 힘들었는지.
찌뿌둥한 몸 추스르려고 사우나하러 갔다.
약탕에 누워 밖을 내다보니 화려한 단풍이 미소 짖고,
천장에 가야산 사진이 하루를 생각하게 한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만물상의 고귀함과 정상 정복의 환희, 가을의 정취를 한껏 누린 하루였다.
가야산 사진에 무언가 그려진다.
겨울에 찍은 사진 속 바위들의 모습이 고매하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스케치하니 ‘대세지보살’이 아닌가.
머리의 천관까지 모두 닮았다.
오늘은 새로운 세상을 본 멋진 하루였다.
거북이과 산행도 하고, 백악기도 갔다 왔다.
100대 명산 완등자도 만났고, 스님과 대세지보살도 뵈었다.
환희로 가득찬 심장이 터질듯해 차창열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긴다.
구름 없는 가을 하늘이 아쉽긴 해도, 새파란 하늘과 내 마음은 동색이어라.
스치는 만추의 산을 보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가던 세월이 뒤돌아보며, 천천히 오라며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