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의 칼빈
그 다음에 택함을 입은 사람은 더욱 비천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는 너무도 볼품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 사업의 동료들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에게마저도 냉담한 취급을 받았다. 파렐도 거절을 당한 그 성읍에서 그런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가장 강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도 피해 갈 수밖에 없었던 그 성읍에서 용기로나 경험으로나 빈약한 그와 같은 인물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7, 25).
프로멘트(Froment)는 교사로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아이들은 집에서 다시 이야기하였다. 얼마 후 학부형들이 성경의 강해(講解)를 들으러 오게 되었는데 열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로 교실이 마침내 차고 넘쳤다. 신약 성경과 전도용 소책자들이 많이 배부되었으며, 그것들은 새 교리를 공공연하게 들으러 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다. 얼마 후에 그 전도자 역시 피해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있었다. 개혁 사업의 씨는 뿌려졌고, 계속해서 튼튼하게 확장되어 갔다. 전도자들은 돌아왔으며,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개신교의 사업은 마침내 제네바에서 견고해졌다.
제네바가 이미 개혁 사업을 선언한 후에야 칼빈은 각처로 유랑하여 여러 가지 경험을 겪고 그 성읍에 들어왔다. 그는 자기가 출생한 고향을 마지막으로 방문하고 바젤(Basel)로 가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가는 직로가 카알 5세의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불가불 제네바를 거쳐서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문은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파렐은 인정하였다. 비록 제네바가 개혁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그 곳에는 아직도 성취되어야 할 큰 사업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며 단체적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중생(重生)의 사업은 회의의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과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네바의 주민들은 로마교의 권력에서는 벗어났지만 로마교의 통치 하에 만연되어 있는 악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곳에 복음의 순결한 원칙을 확립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시는 직위를 훌륭하게 감당하는 일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파렐은 칼빈이 그 사업을 위하여 자기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청년 전도자에게 그 곳에 머물러 일하라고 정중히 간청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사양하였다. 겁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는 용감하고 독립심이 강하고 과격한 성질을 가진 제네바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였다. 천성적으로 연구에 몰두하기를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건강도 좋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는 글로써 개혁 사업에 최선껏 봉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은 나머지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인쇄물을 통하여 교회를 가르치고 세워 나가고자 희망하였다. 그러나 파렐의 엄숙한 권고는 하늘에서 온 소명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는 감히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자기를 붙들고 자기가 피하여 가려는 그 장소에 억지로 주저앉게 한 것”(D’Aubigne, b.9, ch.17)처럼 느꼈다고 말하였다.
음험한 “제수이트”들의 책동
이때에 개혁 사업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법왕은 제네바에 대하여 파문의 선고를 내렸고, 강국들은 제네바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흔히 왕들과 황제들까지도 강제로 굴복시키던 그 강력한 교직 정치를 이 작은 도시가 어찌 능히 대항할 수 있으며, 그것이 세상을 정복한 큰 군대들을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모든 그리스도교국에서 개신교는 흉악한 원수들에게 위협을 당하였다. 개혁 사업의 최초의 승리는 지나갔다. 로마교는 개혁 사업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새 세력들을 구축하였다. 이때에 법왕교의 투사들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무법하고, 강력한 제수이트당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혈연적 관계와 인간적 사리도 무시하고, 인정의 요구와 이성(理性)과 양심에도 무감각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배척해 버리고, 규율과 유대 관계도 무시하고, 오직 저들의 규칙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만 진력하였다(부록 17 참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쓰고 고난을 참게하고, 추위와 주림과 수고와 빈곤도 겁내지 않게 하고, 고문대와 감옥과 화형주 앞에서도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 세력을 대항하기 위하여 제수이트당은 그 추종자들에게 광신을 불러일으켜서 온갖 위험들을 견딜 수 있게 하고, 각종 기만의 무기들로 진리의 세력을 반대하게 하였다. 그들은 아무리 큰 죄라도 범할 수 있었고, 아무리 저급한 거짓도 행할 수 있었고, 어떤 가장(假裝)도 어려움 없이 꾸밀 수 있었다. 항구적인 빈곤과 검소한 생활을 맹세하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부와 권력을 얻고, 개신교를 전복시키고, 법왕의 최상권을 재기시키는 데 있었다.
그들의 단체에 속한 당원의 입장에 설 때에, 그들은 거룩한 의복을 입었고, 그들은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면서 병자와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세상을 버렸노라고 공언하였고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외모로는 아무런 흠도 없이 보이는 그들이 때때로 가장 죄악적이요, 치명적인 목적을 감추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킨다는 것이 그 단체의 근본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하여 거짓말, 도적질, 거짓 증거, 암살 같은 것도 그것이 교회를 이롭게 하는 일일 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되었다. 제수이트 당원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장하여 나라의 공직자들이 되고 왕의 고문관들의 지위에도 올라가서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정탐꾼 노릇을 하기 위하여 남의 종도 되었다. 그들은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대학들과 평민들을 위한 학교들을 세워서 개신교도들의 자녀들로 하여금 법왕교의 의례(儀禮)를 지키도록 하였다. 외관상으로 화려하고 찬란해 보이는 로마교의 의식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하게 만들고 상상력을 현혹시켰다. 그러므로 조상들이 수고하고 피 흘려 얻은 자유를 그 자녀들은 배반하였다. 제수이트당은 급격히 온 유럽에 퍼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법왕교의 부흥이 뒤따랐다.
개혁 운동 사상에 있어서의 칼빈의 위치
그들에게 더욱 큰 권력을 주기 위하여 종교 재판소를 다시 세우라는 교서가 내렸다(부록 18 참조). 일반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국가들에서까지도 부당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서운 재판소가 법왕교의 위정자들로 말미암아 설치되고, 백주에는 너무 무서워서 차마 볼 수 없는 고문이 아무도 볼 수 없는 옥중에서 반복하여 감행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 순결하고 고상한 사람들, 가장 지성적이고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사들, 부지런하고 애국적인 시민들, 탁월한 학자들, 천재적인 예술가들, 기술 있는 직공들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교는 종교개혁의 빛을 꺼버리고, 인류에게서 성경을 빼앗고,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책들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께서 루터를 이어서 일으켜 주신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개신교는 전복되지 아니하였다. 개신교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비천하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要塞)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승리를 얻은 나라들은 멸망을 도모하고 있는 강한 원수들에게 둘려 있는 작은 도시 제네바, 당시에 가장 크고 부요하였던 스페인의 학정에 항거하고 있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메마른 스위스 등이었다. 칼빈은 약 30년간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거기서 처음에는 성경상 원칙을 고수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온 유럽에 종교개혁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공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행위와 그의 가르침에는 그릇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계에 필요한 진리를 공포하고, 법왕교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서 개신교의 원칙을 지탱하고, 로마교의 교리에서 자라난 교만과 부패 대신에 단순하고 순결한 생명을 개혁 교회에 부식시켜 주는 도구가 되었다. 제네바에서부터 출판물들과 교사들이 개신교의 교리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나갔다. 거기에서 각국의 핍박자들은 교훈과 권면과 격려를 기대하였다. 칼빈의 시(市) 제네바는 쫓겨 다니던 서유럽의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된 무서운 폭풍을 피하여 망명자들은 제네바를 찾아왔다. 굶주리고, 상처받고, 집과 친족을 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영접을 받고 친절한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안식처를 발견한 그들은 그들의 기능과 학식과 신앙을 활용함으로 그 도시를 복되게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던 많은 사람들은 로마교의 학정을 저항하기 위하여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의 위대한 개혁자 존 녹스, 영국의 많은 청교도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은 모두 암흑한 본국들을 밝히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을 들고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