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조》 2024. 상반기호 평설
'있음'을 향한 주체들의 행렬과 반란
김태경 문학평론가
기억으로의 유입과 '거기'에 대한 기록
기억은 시간을 관통한다. 주체는 기억의 지평에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사건이나 감정을 재편하거나 메스를 들어 선택적으로 삭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기억들은 주체와 지금, 여기를 살아 숨 쉬며 일상에 각인된 채 불멸한다. 기억의 일부는 주체에게 신성시되어 적절한 꾸밈이 덧붙여진 상태로 표출되고, 또 한편에서는 뇌기로 인해 촉발 되는 아픔을 이미지화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활보하며 일시적으로 레테의 강을 건너게 만든다. 양자의 어느 쪽이든 주체는 결국 리얼리티의 발로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기억이라는 시공간을 기록하기 위해 매일같이 시 세계에 발을 들인다.
과거라는 '거기'에 다채로운 모국어가 언어의 본령으로 놓여있다. 가끔 불안의 시선을 드리우기도 하는 기억은 선연하지 않음과 상실로 인한 두려움을 담기도 한다. 김덕남의 「레테강」은 이러한 실체를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몽유의 레테강에 발목이 잠겼는가
암컷에 잡아먹히는 수컷의 사마귀처럼
환상통 오르가즘이 뇌를 집어삼킨다
쪼글해진 기억들이 토막토막 나뒹굴다
해거름 뒤안으로 물동이 내리붓듯
날마다 이름 하나씩 떠내려가고 있다
난파된 기억 찾아 한 울음 엎지르다
의문과 질문 사이 죽지를 파닥여도
온몸의 색과 색들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 김덕남 「레테강」 전문
누군가에게 망각은 의도되지 않은 내몰림이다. 위 시에서 주체는 "몽유의 레테강에 발목이 잠겼"다. 그것은 주체가 기획한 바 없는 당혹스러운 사건이며 정신적 환상통과 흡사하다. 마치, 무언가에게 뇌를 잡아먹힌 것처럼 "날마다 이름 하나씩 떠내려가는 잊혀짐은 주체에게 절망을 남긴다. 치매증을 앓고 있는 사람인 양 '난파된 기억'을 찾다 보면 울음이 엎질러지는 것이다. 주체는 “의문과 질문 사이"에서 "온몸의 색과 색들이 물결치며 흘러"가며 레테강을 건넌다. “토막토막 나뒹"구는 기억은 과거의 '거기'를 장식해야 할 언어를 삭제하고 주체의 일상을 조각내고 있다. 그것은 주체에게 존재성을 위태롭게 하는 문제적 징후가 되고 상실을 동반하는 아픔이 된다. 이처럼 망각은 언어와 세계 사이의 자유로운 틈입을 허용하지 않고, 기억이 증명하는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기억이 주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불꽃이라면, 이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기억의 결정을 걸러내는 것도 주체가 품어야 할 욕망이 될 것이다. 그것은 현재라는 '거기'에서 감지되는 그늘과 긴장을 늦추기 위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몇 밤을 더 밝혀야 옥토로 돌아올까
기진한 저어새는 날개를 접고 만다
긴부리 진창에 박고 가쁜 숨을 내쉰다
질척한 아랫도리 옹골지게 품던 갯벌
그 많던 조개들은 사선을 넘었을까
방조제 경계를 넘어 바닷물이 기웃댄다
만경강 굽이굽이 빼앗긴 들에 자란
소금보다 더 짜디짠 기억을 베어낸다
저 흰옷 날개마저 잃은 한 무리 철새마냥
- 전연희 「새만금에 부치다」 전문
저어새가 걸러내는 “짜디짠 기억”은 현재라는 '거기'에서 자라는 "빼앗긴 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대상에 이입된 고통의 덩어리는 주체가 현실을 바라보며 느끼는 정신적 타격이 응축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위 시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체의 패시미즘pessimism은 새만금 개발로 저어새가 살던 자연환경이 훼손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허탈함에서 비롯된다. '옥토'를 꿈꾸던 저어새는 오래된 기다림에 기진하여 날지 못한 채 "긴 부리 진창에 박고 가쁜 숨을 내쉰다". 저어새가 그리는 '옥토'는 갯벌이 펼쳐지고 조개들이 사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만경강 굽이굽이 빼앗긴 들”이 눈 앞에 펼쳐질 뿐이다. 이때 저어새는 "소금보다 더 짜디짠 기억을 베어"내는 것으로 자기 안의 불꽃을 지킨다. 의도한 망각은 인내와 견딤을 위해 불가피하게 필요한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현재라는 '거기'의 기억이 유지되는 한, 지속적인 망각으로 남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에 위 시의 패시미즘은 더 강렬하게 탄내를 남긴다.
기억을 위시爲始하여 기록하는 행위는 결국 사라지지 않은 기억을 샅샅이 톺아 나가며 살피는 비가시적인 물음에 가깝다. 그래서 주체의 안위는 어떠하단 말인가. 이 기록으로 주체는 미래라는 '거기'에서, 바로 서는 내면세계를 그린다.
다음 생엔 뭐라 해도 선장으로 살아가리
물마루 눈에 담고 파이프 입에 문 채
돌아갈 그곳을 두고
쉼표를 껴안으리!
밀쳐봐도 오는 것은 날것 같은 태풍 너울
경기장에 막 뛰어든 불붙은 선수같이
출구에 닿기 위하여
파도의 등짝을 타리
아주 멀리 다녀와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
지우지 않는 것은 또 하나 나의 기록
등 굽은 저녁을 넘어
작은 돌을 또 쌓으리!
-우아지 「가을 모서리를 펼친다」 전문
기억은 인출을 위한 정신적 기능이다. 주체가 망각의 대열에 줄 서지 않길 바라는 기억을 기억하는 일이다. 위 인용시에서 주체는 가을날의 상념을 미래라는 '거기'에 대한 자신의 바람으로 채우고 있다. 주체는 다음 생에 “물마루 눈에 담고 파이프 입에 문" '선장'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인출한다. 작품에서 '선장'은 "돌아갈 그곳을 두고/ 쉼표 를 껴안'을 여유를 부리면서도, "경기장에 막 뛰어든 불붙은 선수같이" 열정과 패기가 넘친다. “아주 멀리 다녀와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을 만들며 '작은 돌’을 쌓듯이 “또 하나 나의 기록"을 남긴다. 인용시를 이루 는 담백한 언어는 주체에게 안녕을 선사하는 기억이 될 것이다.
이처럼 과거-현재-미래라는 '거기'에 주체의 기억이 지나오는 동안, 기억의 시공간은 그야말로 기억처럼 뒤섞이거나 방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시 세계에 그때의 기억을 기록하는 순간만큼은 주체의 존재성 을 밝히며 자칫 유보될지 모르는 언어가 빛날 수 있도록, 불완전한 음 표들을 체제 속으로 귀속시킨다. 기억이 주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악보 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후략 ......
김태경 약력
2014년 《열린시학》 평론 등단.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평론집 『숲과 기억』, 시집 『액체 괴물의 탄생 』이 있음, 객 동인
- 《부산시조》 2024. 상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