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출 수필> 망각이 가져다 준 선물
달포 전에 같은 동 상층부에 사는 ‘C 나탈리아’ 교우님이 멸치액젓 한 병을 선물해 주었다. 친정어머니께서 내리신 것인데 맛이 있을는지 모르겠다며 겸손을 남기고 갔다. 서재에서 나와 "나탈리아씨 고맙습니다" 머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불현듯이 몇 년 전에 담아놓았던 생멸치 액젓 2통이 생각났다. 정년퇴직하기 2년과 1년 전 봄 멸치 성어기에 남해와 기장의 수산업체에 주문하여 담근 ‘생멸치 젓갈’을 택배로 받아 지하에 보관해 둔 것이다.
그 후 나의 신병으로 장기간 병원 생활을 하면서 그 사실을 가맣게 잊고 있었다. 예전같이 가을철에 김장이라도 했더라면 진작 알았을 터인데. 몇 년 전부터 부부 둘만 사는 우리 집도 남들같이 브랜드 상품 시판 김치를 인터넷으로 조금씩 주문하여 먹기 때문에 멸치액젓을 사용할 일이 없었다.
우리 집 창고 열쇠를 찾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내가 찾는 20L들이 흰 원통 생멸치 액젓 두통이 나란히 먼지를 뒤덮어 쓴채 기다리고 있었다. 두통을 앞당겨 ‘상품내용표’를 확인하였다. 통-A는 2017년 4월 20일 남해산, 통-B는 2016년 5월 26일 기장 산으로 기록되어있었다. 내 기억이 맞구나! 만족감과 함께 눈앞이 아찔하였다.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주문한 것인데. 이제 와 생각하니 너무 황당하였다. 분명 주문자는 나일텐데 이 일을 어쩌지?
일단 복잡한 생각을 접고 집으로 올라와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아내도 나처럼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의 오랜 병원 생활 뒷바라지에 지쳐 남모르게 한동안 공황장애를 겪은 아내는 주부답게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아내의 기분에 고무된 나는 바퀴 달린 대형 화분대를 가지고 내려가 생각보다 쉽게 생멸치 액젓 1통을 가지고 와서 뚜껑을 열어보니 내리기 쉽게 곰삭아 있었다.
뭍에서 자란 아내와 섬에서 자란 나는 생멸치 젓갈을 액젓으로 내리는 데 대해 생각과 지혜를 한데 모으기로 의기투합하였다. 어릴 때 생가에서 멸치액젓을 내리던 기억을 떠올려 봤다. 추수를 마친 늦가을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장독간에 담아둔 생멸치 젓갈 단지에서 곰삭을 멸치 젓을 퍼와멸치 액젓을 내렸다. 마당 가에 차려놓은 가마솥 위에 구멍 뚫린 밑바닥을 생솔가지와 짚을 쌓아덮은 찜통을 얹어 액젓을 내리면 곰삭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였다.
그때는 모두 그렇게 살았다. 된장도 간장도 액젓도 모든 장류를 집에서 만들어 먹었다. 그러나, 너나없이 자연 속에서 살았던 아름답던 그 시절을 가고 지금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문제다. 집안에서 액젓 내리기가 두려웠다. 혹시 집 밖을 퍼져나간 멸치액젓 냄새로 이웃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인터넷을 검색하여 우리 집 환경에 맞는 방법을 찾아 보기로 했다.
‘재료가 훌륭하니 액젓 맛은 떼 놓은 당상일 테고. 다음은 도구다. 다행한 것은 액젓 내리는데 필요한 그릇이나 용기도 넉넉하고. 맑은 액젓을 내리기 위해 꼭 필요한 채반도 채반 밑에 깔 한지도 있고. 이렇게 하여 우리 부부는 손발을 맞추어 작업대를 세 곳에 차려 창문을 닫고 액젓 내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액젓 내리기는 생각보다 쉬운 작업이었지만 많은 인내를 요구하였다. 우선 거실 바닥에 액젓이 묻지 않도록 몇 해 전 김장 할 때 썼던 비닐 깔개를 깔고 앉아 그 위에서 일을 벌였다.식초로 소독한 양동이 위에 거름망을 깐 금속제 채반을 올려 액젓 내리기 장치를 설치하였다. 그런 후 곰삭은 액젓을 바가지로 반복해서 퍼 넣었다. 20kg 무게의 액젓을 모두 내리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음 날 아침에 액젓을 내려받은 통을 살펴보니 포도주 색깔의 맑은 멸치액젓이 아내를 감동시켰다. 1.8 리터 용기에 담아보니 5통 넣고 조금 남았다. 거기다 찌꺼기에 물을 넣고 끓어서 내린 액젓이 4통, 모두 9통이나 되었다. 그다음 주에는 이왕 묻힌 김에 나머지 한 통도 가져와 내렸다.
망각의 기억 속에서 찾은 ’생멸치액젓‘ 2통으로 우리 집은 멸치액젓 벼락부자가 되었다. 금전으로 환산하면 노력에 비할 바 없지만, 내 손으로 내린 액젓이라 더욱 소중함을 느꼈다. 아내와 나는 내린 액젓 중에서 한 통을 기억을 되찾게 해준 나탈리아 씨에게 먼저 선물하고 김치냉장고에 보관해둔 나머지는 형제자매들과 나누어 먹기로 하였다. 올 가을에는 우리 집에서 내린 멸치액젓으로 김장을 담그자 의논해 볼 참이다.2023-07-31
첫댓글 우와! 멸치액젓 맛 있는 냄새가 여기까지 솔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