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과
정현수
무엇이든 내 행동이나 생각이 범위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보폭이 크든, 작든, 오롯한 나만의 걸음걸이로 자유롭게 걷고 싶다. 내가 느꼈던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다반사에 그걸 지켜야 하는 도리와 의무에 얽매이거나 굴레에 갇혀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어설픈 삶을 살다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나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남들 보기에는 볼썽사나운 푸념이나 넋두리, 혹은 위선으로 보이지 않을까? 아찔하다. 그것들은 내가 진정 추구하는 자유로운 내 마지막 본디의 모습을 멀리하는 바보스러움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제 자꾸 생각이 나고 눈에 밟히는 모든 의식 속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냥 격의 없이 차별도, 조건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런 환경이나 생활 속에서 견디어내며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어지간히 나이를 먹고 이젠 살 날보다도 죽을 날이 더 가까워져 도리 없이 그날을 기다려야만 하는 뚱딴지같은 무지렁이가 됐다. 그러나 목숨의 좌지우지는 하늘의 뜻이고 그동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은 어느 정도의 윤곽 안에서 희미하거나(하고자 하는 기대) 또 애매하게(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할 일) 남겨져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자유 의지 안에서 그 무엇인가를 꾸준히 해야만 한다.
겨울의 내 거처 실내 온도는 발이 시릴 정도의 찬 공기에 싸여 늘 싸늘하다. 추위를 덜 타는 것도 있고, 기름값도 아껴야 하는 것도 있지만 따뜻하게 있으면 눕고만 싶어 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게으름 때문이다. 늦은 아침 8 시에 일어나는 창문 밖 잿빛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하얀 눈을 흘릴 것 같은 인정머리란 쥐 뿔도 없는 듯, 한 겨울의 추위를 느끼게 하는 우중충한 날씨다. 건너 북 쪽 산비탈은 첫눈이 올 때부터 한 번도 녹지 않은 듯, 을씨년스러운 하얀 벼랑이 그대로 드러난 삭막함이다. 그 밑, 이어진 벌판에 한 여름부터 그대로 서 있는 옥수수 대는 추위를 못 이겨 축 늘어져 있다. 내 집 건너 도랑가 벌거벗은 죽은 감나무는 추위에 새카맣게 타들어가 주위 작은 대추나무들과 함께 도깨비놀음하듯 흉한 모습으로 춤추고 있는 듯하다. 뻘쭘하게 서있는 전봇대 위 까치는 남겨놓지 않은 그의 먹이를 찾아 매일 허둥대지만, 그 까치밥은 애당초 냉랭한 인심에 씨를 말린 듯 보이지 않고 처량한 울음소리만 공허한 창공에 흩날린다. 기별 없는 반가운 손님은 아무 소식 없이 아득한데……
아 참! 까치 이야기를 하니 지난가을의 이곳 동물의 왕국 생존 법칙이 생각난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까마귀와 까치, 사촌지간의 애잔한 우애 관계를 확인한 것이다. 작은 개울 건너 이 씨네 밭에 까치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이때 고양이가 '세렝게티'의 표범이 톰슨 가젤 사냥하듯 조용히 살살 기어가 덮치려 할 때 죽은 감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가 고양이를, 독수리가 여우 낚아채듯 위협해 까치의 위험을 모면케 한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몸을 사리지 않았던 까마귀의 동지적 보호 본능은 숭고하다 못해 경이로웠다. 그 행위는 익숙하고 길들여진 일상의 여유로움이 아니더라도 서로의 착한 본성으로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는 애틋한 본능이 아닌가? 생명을 존중하고 가치를 공유하자는 자기희생적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음악을 켜 논다. 구입한지 십 년도 훨씬 넘은 스피커에서 그런대로 들어줄 만한 묵직한 소리가 아직도 잘 나온다. 만일 이 소리가 없었다면 내 삶은 얼마나 공허했을까? 일상에서 나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 소리는 나의 유일한 삶의 위안이다. 그 감성 깊고 서정적 소리는 항상 내 가까이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안타까운 아쉬움으로 내 맘 깊숙이 흘러 들어와 내 상처에 남겨져 때론 비통에, 언제는 낭만에, 또 아쉬움에 빠지게 한다. 라흐마니노프든, 쇼팽이든, 바흐든, 그들의 감성과 서정이 내 몸을 감쌀 때 나는 비로소 아직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쁨으로 다가와 하찮은 욕심들을 버리게 하고 오로지 내 일에만 집중하게 한다. 고독을 잊게 하니 몰아치는 울부짖음도 없다. 그저 감성과 서정의 소리만 들리는 순수한 시간이 된다.
춥고 적막했던 지난밤의 외로운 내 맘을, 따뜻한 햇볕이 창가로 오롯이 스며들어 나와 작업실을 데운다. 해는 여기 내 집 건너 남동쪽에 산이 있어 지금은 8 시 20 분쯤 떠오른다. 이제는 겨울이 짧아져가 해가 조금씩 더 동쪽으로 움직여 일찍 뜨겠지만 한 겨울에는 거의 9 시에 뜰 때도 있다. 자연히 내 일상도 바뀌게 되어 8 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맞이한다. 간단한 스트레칭 후 새로 끓인 커피를 마시며 미룬 설거지나 이것저것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잠잘 때 생각나 메모해놨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음악과 함께 꿀 맛 같은 즐거움을 준다. 창가에 햇빛이 들어오는 독서용 작은 책상에서(다른 것은 버리고 분리된 컴퓨터 책상) 읽히는 책들은 게으른 정신 습관을 일깨우며 메마른 정서를 다독이는, 더없이 달콤하게 녹아드는 이상적 사탕이다. 책을 읽는 그 정서는 그저 조용하게 나에게 스미듯 다가와 책 속의 내용을 오롯하게 느끼게 하며 차분한 분위기에 빠지게 한다. 삶에서 안달복달했던 지난날의 생각과 모습들을 잊게 하는 알토란 같은 시간이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책을 읽다 말고 하염없이 고적한 창밖을 바라보기도 한다. 지나간 나날들을 회상하며 커피와 음악에 취해 낭만에 젖기도 한다. 아직은 내가 하느님에게 축복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아침 밥을 안 먹는 습관은 아마 군 제대 후부터 지금까지 죽 이어져 왔다. 그래서 정확하게 12 시면 아침 겸 점심밥을 먹는다. 이곳 오지에도 생필품과 식품을 파는 1 톤 트럭의 차가 거의 매일 들어온다. 나는 면 요리를 좋아하고 그걸 즐겨 먹는다. 오랫동안 라면을 먹어왔지만 여기로 이사 와서부터 트럭에서 파는 칼국수를 알고 그걸로 거의 점심을 때우는 편이다. 국수 한 덩이에 천 원이지만 아주 내겐 딱이다. 한 번 맹물에 삶은 국수를 멸치와 다시다, 다진 마늘을 넣고 끓여 만든 육수(많은 양을 끓여 한 번 먹을 분량으로 냉동실에 저장)에 다시 국수를 넣고 끓인 후 양파와 파, 매운 고추를 종종 썰어 넣고 거기에 가끔(매일은 아니고) 삶은 돼지고기 편육을 얹어 먹는 맛이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일품(一品) 요리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가난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형편 따라왔고 이제는 되도록 먹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어떨 때는 보기 좋고 맛있는 성찬(盛饌)이 놓인 한식 요리가 그리울 때가 있다.
점심 후 본격적인 내 작업 시간이다. 등받이 각도가 잘 조절되는 쓸만한 인조 가죽 좌식 의자가 있고 좌식 책상 위에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있다. 데스크톱에는 10 년 전 1 차 귀촌 때 수만리에서 산 5.1 채널의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 우포와 함께 일곱 개의 컴포넌트가 잘 융합되어 아직도 내 맘에 드는 소리를 쉼 없이 내 보내고 있다. 거기에서 들려 나오는 중 저음의 작은 소리까지 잡아내는 울림은 과히 대단하고, 아직은 멀쩡하고 쓸만해서(나한테는 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 과외 돈이 안 들어 아주 정말 다행이다. 내 맘에 드는 소리와 함께 글 쓰는 시간은 하루 일과 중 가장 보람되고, 나한테는 더 미룰 수 없는 군기가 바짝 잡힌 듯, 의식이 더 깨어 있는 시간이다. 요즈음은 주로 나만 볼 수 있는 중편이 될 수도 있는 단편 한 편을 쓰고 있다. 간간이 시와 수필도 쓰고 있지만 거의 소설에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처음 쓰는 거라 조금은 황설(荒說)이지만 객쩍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앞뒤 구성이 맞게끔 고치고 또 고쳐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단편은 일곱이나 되는 손 아래 누이가 있는 작은댁으로 양자 들어간 허황된 촌부의 이야기인데 솔직히 나는 이게 기대가 된다. 글을 쓰다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가끔 잠이 들 때도 있고 멍하니 음악에 취해 허공을 보며 멍 때릴 때도 있지만, 좌우간 글을 쓰며 보내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보람되고 귀중한 시간이다.
나는 아직 건강한 편이다. 언제 부터인가? 제일 먼저 떠 올린 생각은 모든 면에서 남에게 부담이 안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담이 된다면 아마 그것 같이 근천스러운 짖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잘것없는 만신창이가 된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때는 이미 늦는다. 사소한 그 무엇이라도 부담이 된다면 내가 얼마나 바보스럽고 혐오스러울까? 몸이 약해 골골하다가 병원에 입원해 혹 누구에게 부담이 된다면 나는 아마 못 견뎌 내 스스로 어떻게 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혼자되는 그날부터 담배도 끊어버리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습관은 지금도 이어 저 운동 시간은 규칙적이다. 한 주에 4번 이상은 꼭 하는 편이고, 웬만하면 오후 5 시 즈음부터는 근력 운동을 시작한다. 하나씩 사 모은 운동기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젠 운동을 삼일 이상 쉬면 오히려 온몸에서 찌뿌둥하다는 기별이 온다. 나는 운동을 게을리해 기력이 떨어져 아무 짓도 못하고 인생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그 이상 나 자신을 처참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 이상 실패하지 않는, 그런대로 죽을 때까지 체험이 되는 그런 내 남은 인생을 살고 싶을 뿐이다.
나는 밥심으로 살고 있는 것 같다. 6 시 반에 먹는 저녁은 허기가 저 있어 되도록 많이 먹는다. 그러니 아마 탄수화물 중독에 걸린 듯 항상 그 체중이다. 다른 것도 먹으면 좋으련만 딱히 먹을 게 마땅치 않다. 수년 전까지 몸의 균형을 위해 먹었던 단백질 위주의 식사가 그립지만, 지금은 잡곡밥 속의 당이 더 땅기는 것 같다. 하나 이제는 모든 것을 비우고 간소화하는 걸 생활화하듯 체중도 조금 더 줄여야 한다. 식사 후 바로 저녁 유산소 걷기 운동이다. 4,50 분 동안 마을 한갓진 곳을 왔다 갔다 하는 빠르게 걷기 운동은 여러모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운동으로 몸이 아직은 가뿐한 느낌도 주지만 걸으면서 밤 하늘의 별이나 달을 보면서 시를 꽤 지은 것 같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호젓이 걸을 때 떠오르는 시상(詩想)이 나로서는 또 한 편의 즐거움이다. 잡생각을 물 말아 버리고 어둠과 함께하는 침묵으로 한 발 한 발 나아감은 나에겐 진정 참 삶이 되고 그것은 뿌듯한 축복의 시간이다.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고독을 즐기며 나와 더 가까이함은, 더 나은 순간순간을 맛보는 뜻깊은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것에 귀 기울이는 것, 그것은 나 자신 내면 깊숙이 꽉꽉 차 있던 오만과 욕심을, 그리고 지나 간 쓰라림의 세월을 잊어버리는 새로움이다. 시공간(時空間)을 넘어 또 다른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샤워를 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tv에 집중하지 아니한 채 글을 쓰거나 주로 쓴 글을 수정하는 작업을 한다. 그러면서 뉴스도 보고 가끔 흥미 있는 연속극도 보며 세상 돌아가는 모습들에 접한다.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 시간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사랑도 보며 처절한 배신도 보고, 또 호의도 보며 매몰찬 멸시도 본다. 정의는 멀리 있고 불의가 판치는 것도 보여 화가 날 때도 있다. 믿음도 있고 불신도 가까이에 있어 안타깝다. 하나하나가 다 어우러져 있는 작은 세상인데……
이곳에서의 글쓰기에 장단점이 한 가지씩이 있다. 장점은 소설 쓰기에는 더 없는 조용한 장소다. 단점인 수필 쓰기에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어 일상 일어나는 에피소드나 소재거리가 별로라 항상 부족을 느끼는 곳이다. 겨울이라 동네 사람들도 화롯불이 좋아 집에서 나오지 않고 군고구마나 밤을 구워 먹는 듯 모두들 방콕이기 때문이다.
11 시 반쯤, 내가 유일하게 포근함을 느끼는 시간, 저녁 독서 시간이자 따뜻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자는 시간이다. 반 시간 전부터 데워 놓은 전기장판은 '아! 따뜻해'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올 정도로 포근하고 따뜻한 잠자리다. 종일 싸늘했던 공간에서 있다가 따뜻한 이불속으로 들어가 엎어져서 책을 보는, 행복하고 그윽하며 훈훈한 시간이다. 포근하고 따뜻함 속에서 낮보다 더 조용한 한 밤에 '윤동주'나 '예이츠'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나의 시 창작의 음률이 들려오는 듯하다. 밖에선 간간이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2 시쯤, 나는 다음 날에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며 어두움 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저 평범하고 모나지 않는 것, 한 겨울 화롯불 속의 군고구마가 익어가고 모두 둘러앉아 정이 오가며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따뜻하고 여유로움이 있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인데 아쉽게도 지금 내 곁엔 아무도 없다.
2015.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