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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동양사상
1. 사상을 담는 그릇 - 종교
사상이라고 하면 언 듯 쉽게 그 의미를 말로써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그나마 구체화 시킬 수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종교를 들 수 있겠다. 각 종교에는 그 종교가 발생한 곳에 따른 지역적인 사상적 특성이 강하게 들어있다. 동양에서 발생한 유교, 불교, 도교에는 동양특유의 내면을 중시하는 사상이 담겨져 있고, 서양에서 발생한 기독교에는 동양과는 달리 외형을 중시하는 사상이 담겨져 있다. 비단 위의 예 뿐만이 아니라 많은 측면에서 동양과 서양이 추구하는 사상적인 면은 상이함이 있다.
그럼 지금부터 사상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종교를 살펴봄으로써 동양에서 추구하는 각각의 가치를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동양의 종교에 담긴 사상
1) 유교
동양 특유의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을 지배했던 유교적 사고방식은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을 억제하고 멀리하면서 인격과 형식, 규범 등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던 사상이다.
유교는 그 근본적인 기본토대를 ‘인(仁)’ 으로 꼽고 있는 사상이다.
인(仁)
2) 법가(法家)
법가의 사상은 부유한 국가와 강력한 군대(富國强兵)를 건설하기 위하여 일체의 헤게모니를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통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권력헤게모니에 의하여 자본헤게모니(귀족계급)를 소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귀족계급의 독립성은 부국강병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법을 수단으로 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법가사상에서 기본적인 수단인 법은 도덕적 종교적 규범으로서의 법이 아니다. 그것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합리적으로 도출된 규칙이었다. 법이 도덕적 종교적으로 정당한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고 법의 본질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법의 집합표상은 동서양 어느 시대의 역사에서도 없는 독특한 것이다. 법가사상의 핵심은 권력과 법에 의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권력과 법에 의하여 신분계급체제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법가에게 있어서 인간은 오직 당근과 채찍에 의하여 지배되는 존재였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기적 존재였다. 이러한 점에서 법가의 인간관은 오늘날의 인간관과 거의 동일하다. 다만 법가는 당근보다는 채찍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였다.
. 왜냐하면 당근은 한번 제공되면 다 음에는 더 많은 당근이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기존의 관습과 집합표상은 합리적 목적(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슴없이 타파되어야 하고, 사회적 연대는 권력에 대한 복종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에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을 법 앞에 서는 (무서워 벌벌 떠는) 단독자(單獨者)로 만들어야 권력은 안전해지고 나라는 부유해지고 강력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하여 법가는 합리적이고 세밀하게 규정되고 엄격하게 집행되는 법에 의한 권력적 규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유가에서 바라본 생명의 가치>
서론 - 서양철학과 유교
근대이후 세계철학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서양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철저하게 이분법을 중심으로 흐르는 서양철학은 주체와 객체를 완전하게 분리함으로써 주체(자신)를 객체 보다 한 차원 위의 것으로 올려놓음으로써 인간이 다른 생명들이나 심지어는 자신 외의 다른 인간을 이용하는 것까지 조장하고 있다.
4) <불가에서 바라본 생명의 가치>
불교에서의 생명존중사상
자연 속에서 인간은 생태계의 한 종에 불과한데도 인간 이외의 동물이나 식물을 지배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해 왔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고, 그래서 새로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인 덕목으로 뭇 생명을 인간과 평등하게 생각하는 환경윤리가 중요하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 평등성에 관하여 상당한 논란이 있다.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면 바이러스의 목숨과 사람의 목숨이 동등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냐, 과연 그럴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정도다. 인간 중심으로 사고되어서는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동물과 인간이 똑같이 평등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살생(不殺生) 계율을 오계의 첫 번째로 내세우고 있으며 만물의 평등성을 주장하고 있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 살생을 금하는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제 1계(戒)로 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명을 끊는 것은 업(業)을 무겁게 하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업을 지고서는 도(道)에 들어갈 수 없다.
둘째, 일체중생은 다 업에 인해 윤회하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다.
셋째, 소중한 연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다. 혹 개미가 부처를 만나 우연한 인연으로 그 제도를 받을 훌륭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 생명을 해친다면 그러한 연을 없애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넷째, 불교에서는 인간만이 아니라 일체중생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해탈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일체중생을 종교적 의의가 있는 존재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결국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는 견해를 성립시킨다.
다섯 번째, 그것은 일체 중생에 대한 자비(慈悲)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는 정법(正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나 자연 자체가 온갖 생명들의 처소요, 거주지이며 동시에 자연 자체가 또한 총체적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곧 살생죄(殺生罪)를 범하는 것이 된다.
대살차니건자경은 다음과 같이 자연의 파괴가 살생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5) 공자사상(논어)
공자는 기원전 552년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라고 분류되는 중국의 혼란기였다. 춘추라는 시대는 공자가 집필하였다는 『춘추』라는 책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시기적으로 기원전 722년에 시작해 481년에 끝나는 242년에 걸친 시기이다. 주왕조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제후국들이 발호 하던 시기였다. 당시의 중국의 실상을 이해하려면 당시뿐만 아니라 주나라의 정치제도를 알 필요가 있다. 공자가 끊임없이 추구했던 것 중의 하나가 주에로의 회귀였기 때문이다. 주의 통치 제도는 봉건제였다. 주의 봉건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서양의 봉건제도와 구분된다. 주왕과 제후와의 관계라는 측면을 볼 때 주왕이 제후에게 영토를 상으로 하사하고 제후는 주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점등은 서양의 봉건제도와 같지만 왕과 제후가 봉건적인 주종 관계에 의해서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왕과 제후가 같은 희성의 씨족에 속해 있어서 본가와 분가의 관계에 있으므로, 주 왕조는 동성의 제후국과 이 본가-분가의 관계, 즉 종법 관계에 의해 결합되고 이 종법 관계에 의해 제후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주대의 각 제후국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 국가의 형태이다. 이는 마치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도시와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는 제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 제사를 주관하는 씨족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이들이 성장하여 후에는 귀족 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속에서 제후는 다시 대부에게 자신의 봉토를 재분봉하였고 대부 중에서 관료로서 제후를 보좌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을 경이라고 하였다. 초기에는 경과 대부는 받은 봉토인 채읍에 대해 경제적 수입만을 취할 뿐이었는데 점차 경과 대부의 세력이 커지면서 채읍은 독립성을 띠게 되어 제후의 봉토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주대의 종법을 바탕으로한 봉건제도는 서양의 봉건제화 하려고 하게 되었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이러한 때였다. 고래의 통치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제후국간의 또는 대부간의 내란이 그치지 않았던 시기에 공자가 태어나서 살아갔던 것이다.
Ⅱ. 논어의 정의
중국의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공자란 사람이 있었다. 공자가 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각종 서적을 정리했던 그런 교수이자 학자였다손 치더라도 그가 생전에 스스로 저술한 책은 한 권도 없었다. 지금부터 소개하고 해설하려는 소위 공자의 언행록(言行錄)이라는 《논어論語》도 공자가 생전에 편찬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나 제자의 제자의 제자가 공자가 죽은 뒤 그를 위해 편찬했던 것이다. 그의 언행은 <논어(論語)>를 통해서 전해지고,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자료도 <논어>밖에 없으며 이는 제자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지 공자 자신의 저술은 아니다.
오경(五經)을 편찬하였다고 전하나, 이는 교육목적에 따라서 <시경(詩經)>, <서경(書經)>등의 고전을 정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經)'이라는 글자는 '漢'때에 붙은 것이다. 공자가 살았을 때는 단지 '시(時)','서(書)'라고 불렀다. 여기서 《論語》의 論이란 글자가 바로 「편찬했다, 편집했다」라는 뜻이고, 語란 바로 말씀의 뜻이므로 이 두말을 합쳐 이야기하면 <말씀을 편찬한 것>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이란 것은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공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가 공자 생전의 말씀과 행동을 회고하거나 기록함에 있어서 사실무근한 사실을 기재할 확률이 많아지게 된다. 특히 이런 일은 시대가 뒤로 흐를수록 더욱 심해진다.
더구나 제자들마다 들은 바나 생각하는 바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으므로 서로 중복되거나 혹은 모순되는 기록이 있게 된다. 또 여기다 성인(聖人)에 대한 존경심 또는 숭배심리가 가미되다 보면 제자들 이란게 덧붙이는 일을 자연스럽게 행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원래에 없던 언행에 희한한 내용들이 덧붙여지게 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는 실상 공자의 제자들에 의해 부단히 수정되고 보완되고 첨삭된 것으로 연구에 의하면 공자가 죽은지 100여년 후에 편찬된 공자의 이야기 모음집이 바로 이 《논어》다. 《論語》는 공자 일생의 언론 및 행위의 총 기록이다. 《論語》의 대부분은 짧으면서도 의미가 유장한 문답체인데, 간혹 서사적인 글도 보인다. 《論語》는 모두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제목을 보자면, 학이(學而), 위정(爲政), 팔일(八佾), 이인(里仁), 공야장(公冶長), 옹야(雍也), 술이(述而), 태백(泰伯), 자한(子罕), 향당(鄕黨), 선진(先進), 안연(顔淵), 자로(子路), 헌문(憲問), 위령공(衛靈公), 계씨(季氏), 양화(陽貨), 미자(微子), 자장(子張), 요왈(堯曰).... 이렇게 모두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Ⅲ. 논어의 내용
<논어>란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사는 이치나 교육, 문화, 정치 등에 관해 논의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모두 20편의 글로 이루
6) 맹자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으로 나누어진다.성선설은인심이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요청으로서본성이선한것이라고주장하고,그렇게 함으로서 모든 사람의도덕에 대한의욕을조장하려고하였다.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하여본래의 그 선성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다음도덕교육을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불인한군주는쫓아내어야한다는주장도했다.
성선설(맹자)
맹자는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 외에 일종의 사회의식(옳고 그른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여 맹자가 양지(사람이 생각하지않아도 잘알수있는것)와 양능(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것)을 선의 전부라 본 것은 아니다. 맹자가 성선을 주장하였던 것은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러한 것이 권선하여 선을 이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7)순자의 사상
순자가 살던 시대는 혈연에 기반을 둔 주대(주대)의 종법적 봉건질서가 거의 해체단계에 들어서고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과 사상적 통일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전국시대 최말기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어가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실력자들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실력위주의 사회적 변동은 서인(서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가능케 했다. 능력지상주의와 출세주의의 풍조는 사회전반에 걸친 신분상승요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신분상승심리의 만연과 학문몰두의 풍조는 경전지민(경전지민)의 최대확보가 중요한 군주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해 요소가 되었다. 순자는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에 비해 여러 사상을 비교, 검토하여 각각의 장단점을 잘 살려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순자가 제자백가 사상가들 가운데 비교적 후기의 사상가라는 점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히 다른 제자백가들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각 사상의 장점을 모두 포괄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어간 중국 고대 철학의 집대성자라 불릴만 한 사상가이다.
2. 순자(荀子)의 생애순자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순자는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전국 시대 후기 사람이다. 대체로 기원전 298년 무렵 태어나서 238년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이고 순(荀)자가 손(孫)자와 비슷해서 경이라는 벼슬한 사람의 존칭으로 손경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순자는 50세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전혀 없으며, 다만 역사서 사기에서 50세
8) 한비자의 법가 사상
순자가 살던 시대는 혈연에 기반을 둔 주대(주대)의 종법적 봉건질서가 거의 해체단계에 들어서고 새로운 정치질서의 확립과 사상적 통일을 시대정신으로 하는 전국시대 최말기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진나라에 의한 통일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어가던 때였다. 이 시기에는 실력자들이 등장하여 실제 정치를 담당하는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실력위주의 사회적 변동은 서인(서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가능케 했다. 능력지상주의와 출세주의의 풍조는 사회전반에 걸친 신분상승요구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신분상승심리의 만연과 학문몰두의 풍조는 경전지민(경전지민)의 최대확보가 중요한 군주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위해 요소가 되었다. 순자는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에 비해 여러 사상을 비교, 검토하여 각각의 장단점을 잘 살려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간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는 순자가 제자백가 사상가들 가운데 비교적 후기의 사상가라는 점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단순히 다른 제자백가들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각 사상의 장점을 모두 포괄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만들어간 중국 고대 철학의 집대성자라 불릴만 한 사상가이다.
2. 순자(荀子)의 생애순자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순자는 지금으로부터 2,300여 년 전 중국 전국 시대 후기 사람이다. 대체로 기원전 298년 무렵 태어나서 238년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순자의 이름은 황()이고 순(荀)자가 손(孫)자와 비슷해서 경이라는 벼슬한 사람의 존칭으로 손경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 순자는 50세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전혀 없으며, 다만 역사서 사기에서 50세
II.서양사상
1) 기독교 사상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종교로서 초시에 유럽의 역사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으나 후에 많은 비유럽 국가의 역사와도 많은 관련을 맺게 되었다. 종종 상호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수많은 교의 교회, 종파로 분화되어 있으며, 크게는 로만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와 개신교로 분리된다. 기독교에서는 구원 관념이 중심 사상이며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 의례에서 중심인물이 된다.
기독교는 본래 유대교의 한 종파로서 발전하였지만 다양한 민족적 계급적 배경에서 기독교는 점진적으로 세계 종교로 되어 갔다. 17세기와 20세기의 자연과학과 생물 과학의 엄청난 성공은 세계에 대한 낡은 성서적 이해와 과학이 양립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으며 그에 따라 교회는 과학에 대해서 그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선견지명이 있는 신학자들은 기독교 교리와 과학간의 대화를 도모하여 ‘근대주의’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고 있다.
2) 아리스토 텔레스 사상
아리스토텔레스가 마케도니아 필립왕의 아들 알렉산더가 열세 살 때 그의 교육을 담당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될 때까지 교육을 담당했으며 알렉산더는 즉위 후에 수많은 원정을 통해 알렉산더대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13년 동안 전례 없는 거대한 왕국의 통치자의 위치에 있었다. 알렉산더대왕은 `내 아버지 필립에게는 생명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올바로 사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을 감사드린다.` 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에서 우리는 서양의 철학사에 길이 남을 만큼 방대하고 다양한 지식의 소유자인 동시에 뛰어난 철학적 사유의 기반을 마련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란 옳고 참된 삶, 즉 훌륭한 삶의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을 찾는 데 있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사상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그의 실천 철학적 사유의 내용을 탐구해야한다.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칼키디케 반도 북동해안에 위치한 스타게이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궁전의 의사로서 아뮌타스 2세의 시의였을 뿐만 아니라 의학과 자연과학에 관한 저술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안의 관례에 따라 해부학 실습을 하고 부친의 일을 도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철학 속에 자연과학,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표출되고 있는 것과 또한 그의 철학사상 자체가 구체적 현실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유년시절의 주변 환경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소년시절 아버지를 여윈 뒤 친척에 의해 양육되었다.
18세가 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이 설립한 아케데미아에 들어가 플라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년 동안 배우며 연구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플라톤으로부터 사상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타고난 근면함과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플라톤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난 능력은 점차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입장을 형성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그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스승 플라톤과 견해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세상을 떠난 뒤 아카데미아의 학풍이 수리철학적 경향으로 바뀌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나 소아시아 연안에 위치한 앗소스로 가서 아카데미아 분교를 창설하여 3년간 강의하였다. 그 뒤에 그는 레스보스 섬으로 갔는데 그의 생물학적 연구의 대부분은 앗소스와 레스보스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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