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이재진 교수의 글을 fb에서 한 컷으로 옮겨왔습니다. ㅡ
안톤 체호프와 스타니슬라프스키
체호프의 작품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1896년 페테스부르크에서 체호프의 >갈매기<가 무대에 올랐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악의로 가득한 극장의 분위기는 어찌 폭발할지 모를 정도였다. 작가는 시골별장으로 도망친다. 그해 스타니슬라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현대연극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마이닝거 궁중극단(Meininger Hoftheater)이 내세운 연극변혁에 고무되어, 1887년 아마추어 연극인 앙트완느(André Antoine)는 자유극장(The`atre libre)을 파리에 설립하였다. 무대예술은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이 아니고 사실을 밝히기 위한 예술’(naturalism)이라며 검열을 피해 사회비판적 작품 (입센이나 하우프트만)을 공연하고자 선언한 것이다. 앙트완느를 모델로 하여 1889 베를린에 ”프라이에 뷔네“, 모스크바에는 1889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예술가극장“이 창립되었다. 연극사에서 19세기말처럼 모든 사회적 어려움을, 희망이나 고통까지도 온통 연극에 매달려 그 속에서 해결점을 찾으려고 시도하던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늦게나마 그 대열에 끼게 되어 (서울 프라이에 뷔네. 1967) 자랑스럽고 한편 책임을 크게 느낀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예술가극장’은 체호프의 작품을 모두 무대에 올린다. 배우들의 연기법을 새롭게 개혁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명작가 체호프의 작품이 제격이었다. 무엇보다 마이닝거 궁중극장이 내세운 개혁의 핵심은 바로 ”스타중심 무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1898년 단첸코(Nemirowitsch-Dantschenko)가 무대에 올린 >갈매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작가의 역을 (Trigorin) 맡는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순회공연으로 체호프의 작품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연출덕분에 세계적인 극작가로 부상한 것이다. 체호프의 수용에는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역할이 컸지만 동시에 많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체호프는 >갈매기<를 희극이라고 강조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감성에 빠진 센티멘털한 비극으로 만들었다. 작중인물들은 과거를 되돌아보며 감상에 젖는다.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세 자매< 공연을 보며 관객들은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다. 이를 본 체호프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당신이 내 작품을 보고 무척 울었다지요. 당신뿐이 아닐 겁니다. 그러라고 내가 그 작품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신파조로 만든 것은 스타니슬라프스키 입니다. 나의 의도는 아주 다릅니다.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둘러봐라, 당신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단조롭고 지루하게 살아가는지! ” 체호프는 작품주제에 관해 물어보거나 어느 특별한 장면에 대해 물어보면 작품 속에 다 들어 있다며 답변을 피하곤 했다.
1901년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의 >세 자매<를 연출했다.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체호프의 드라마에 들어있는 현대적 감각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희극성과 비극성 사이의, 초현실성과 그로테스크 사이의 틈바구니를 연출자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벚꽃동산<을 연출하면서 스타니슬라프스키는 철저하게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잘라냈다. 체호프의 드라마는 그러므로 작가의 의도나 현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연출자의 손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 셈이다. 체호프는 감상적 연극을 몰아내기 위해 일생동안 무단히도 투쟁했다. 자신의 드라마는 희극 내지 아니면 희비극이라고 늘 강조했다. >세 자매<의 낭독모임에 자리를 같이한 체호프는 여러 번 항의했다. 감상적이고 비극적인 어두운 품이 아니라 “나는 밝은 작품을 썼습니다.”
(체호프의 작품이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우리나라 무대에 오른다. 나는 러시아 문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일반독자나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기회 있을 때마다 이미 여기저기 이런 글을 기고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