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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猥濫)된 자와 외람(猥濫)되지 않은 자
서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예배를 마치고, 주일에 한 번씩 휴식을 취하는
토요일 오늘은, 다른 날 보다 느긋한 기분으로 종이컵에 가득 채운 원두커피
여섯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둥그런 식탁에 앉아있는 교우들 틈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교우님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노방 전도는 달콤하지도 않고 이 커피 맛처럼 쓰디쓴 맛이 우리를 울릴 거예요!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옛 말씀처럼 쓴맛에서 진실을 찾도록 오늘 일을 위하여 파이팅!”
말을 마치면서도 서영의 가슴속엔 뭉클한 응어리가 꿈틀댐을 직감하면서
오늘 당장 닥쳐올 모든 일에 대하여 걱정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한 팀은 전철역 입구로, 다른 팀은 반대편 출구로, 마지막 팀은 전철역 안으로 배당하여 전도를 시작했다.
“예수님을 아세요?”
쉰은 훨씬 넘었음 직한 허름한 차림의 중년에게 서영은 바짝 다가서며 얼굴에 환한 웃음을 보이면서, 그의 반응을 기다리는 간극에서 어떤 반응에 대한 해답을 찾느라고 분주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전해준 전도지를 아무 말 없이 살피며 읽든 그 남성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너무나 큰 수고를 하시네요!”
“그래요! 우리 인생은 여기서 끝남이 아니고 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될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고 있지만 영원히 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지요!”
“불교에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아름답고 좋은 곳으로 환생한다는 말이 있지
만, 영생과 환생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같은 말로 알고 있는데 뜻은 어느
쪽이 맞는지 저 자신도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면서 살고 있답니다.”
“글쎄요! 영생이란 영이 영원히 사는 건지, 살아있는 동안 맑은 영이 거듭 태어나
새 사람으로 사는 건지 모르겠네요!”
말을 마친 중년의 그 분은 지하철 개찰구를 향해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사라지고
서영은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다.
믿음 생활 20년이 넘도록 충실히 살아왔음을 자신은 믿고 있지만 주변의 시선들은 그렇게 감미로운 눈빛을 보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서영은 항상 불만이고 마음에 상처로 존재하고 있었다.
서영 자신도 영생이란 단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기반이 아직은 미력함 에
바람 속에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그 흔들림을 멈추기 위해 나름의 뼈저린 기도와 수련으로 극복을 염원하고 있지만, 시시각각 변모하는 얄미운 심정의 검은 구름은 나의 유익에 따라 잣대가 옮겨지고, 나쁜 기분을 가슴에 품어 어우르지 못하고 뱉어 버려야 시원함을 느끼는 ‘카다르시즘’의 환자인 것을 서영 자신은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몰아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늘 가슴에 멍으로 남아있다.
20대 후반쯤 됐을 청년 앞에 반갑게 인사하며 건네주는 전도 지를 야멸차게 뿌리치며 “당신이나 천당 가소! 천당 가든 지옥 가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표정으로 봐서 더 이상 대화를 한다면 욕먹고 망신당할 것 같아 서영은 마음을 접고 말았다.
200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전도 지를 나누어 주면서 관찰한 표정들이 어쩌면
같은 표정 하나 없고 제각각 인 반응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늘의 전도는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우리를 만난 사람들이
마음의 동요를 얼마나 일으켰는지는 숙제로 남기고, 수고하신 교우님들의 등을 토닥이면서 노고를 위로하는 빛 바랜 인사로 마무리 지으면서
서영은 홀로 한적한 공원길을 찾아가 간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안고서 꺼질 줄 모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직업을 잃고서 실의에 빠진 남편은 날이면 날마다 술만 퍼 마시고 자포자기 생활
2년이 넘었고, 팔순 시 모는 중풍으로 십 년째 누워 계시고, 대학을 다니던 큰딸
은 학업을 접고 돈을 번다고 유흥가의 품속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방황 중이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약과 절도를 일삼으며 감옥을 들락 이다 학교에서 퇴학 처분 당하고, 이혼한 애들 고모는 아예 보따리 싸서 들어온 지 2년째!
수입원 이라고는 서영 이가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받는 월급 200만원 뿐!
여섯 식구의 생계 비용이 늘 모자라 전전긍긍하면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나마 서영은 이를 악물고 살려고 노력에 노력하고 있지만, 파김치 되어 들어오는 서영을 반기는 것은 용돈 달라는 남편의 술주정에, 늙으신 시 모의 투정 소리, 돈 달라고 손 내미는 아들의 격한 목소리, 며느리 노릇 못한다는 올케의 곱지 않은 눈빛! 거기에 더하여 딸은 돈 많이 받는 곳으로 취직하려면 커미션을 줘야 한다고 뭉텅이 돈을 요구하고……
이럴 때마다 터져 버리는 서영의 가슴은 어느 무엇으로도 제어의 방법이 없어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만다.
가난한 이웃들이 모여 사는 허름한 동네에서 싸우며 다투는 소리가 동네 안에 번지는 일들은 서영의 집이 언제나 일등이고 조용한 날을 세어 보기 힘들 정도여서
다정한 이웃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뒤에서 수군대는 이웃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치미는 울화를 가슴에 묻어 버리곤 한다.
“그래 너희들이 내 입장이 돼 봐라.”
“그래도 나는 친척이나 이웃에게 손 벌리지 않고,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이 악물고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많건 작건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가는 너희들이 무슨 걱정 근심이 있겠냐!”
“나도 한때는 너희들처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거든?”
“너희 남편들도 건강하지만 내 남편도 너희들 남편 못지않게 건강하 단다,”
“하지만 작으나 많으나 너희 남편들은 직장이 있어서 벌어다 주는 돈이 있으니까
그런대로 행복을 느끼고 살아가겠지만 나는 너희들과 사정이 달라!”
“나는 건강한 남편에 건장한 딸과 아들이 있어!”
“생활에 한 푼의 보탬이 없는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내 가냘픈 어깨에 있지!”
“나는 내 뼈가 부서져도 내 가족만큼은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나날을 피곤함에 지친 몸으로 뛰고 있어!”
“식구들이 바보나 불구자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어!”
“집에서 큰 소리 나오는 거 당연한 일 아니겠어?”
자문자답의 넋두리는 집 식구들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뛰고 있는데 집구석 들어오면 모든 식구가
내가 돈으로 보이나 봐!”
“나는 너무 화가 치미는 거야!”
“그래 너는 건장한 몸으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술이나 퍼 마시고”
“네 아들딸 무엇이 모자라 저렇게 살고 있니?”
“우리 식구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내 모습에서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싶은데?”
“ 내 몸을 팔아서라도 식구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애들의 엄마로서 그 짓만큼은 차마 유혹을 몇 번이나 뿌리치고,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라는 자긍심으로 지금껏 버텨 왔어!”
“내가 무엇을 잘못 했는데?”
몸매와 얼굴이 예쁜 서영은 사내들의 유혹을 늘 당하곤 하지만 야멸차게 뿌리치며 끈질긴 생의 연속을 이어오고 있었다.
희뿌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대 없이 자문자답 몇 시간을 헤매면서도 해답은 찾을 길 없고, 이럴 때마다 민숙 언니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남과 남으로 만나 이십 년을 지나면서 아직도 그의 진정한 속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의 사는 모습도 나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아니 나보다도 더 가난에 찌들어 사는 삶이었지만 밝은 미소와 상냥한 말씨, 사랑 가득 담긴 그의 초롱 한 눈빛만 봐도 무조건 좋기만 한 언니!
쓰러질 듯 방치해둔 허름한 창고를 빌려 방 한 칸 꾸미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막노동 일이 없으면 재활용품 모으러 다니는 부지런한 그의 생활 모습에서 언제나 서영은 힘과 용기를 얻곤 한다.
소낙비라도 내릴 때면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좋지 못한 환경 속에서 험한 일 하며 모질게 살아가는 언니의 모습 속에서 고풍스럽고 잔잔한 미소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그래 언니를 만나러 가자!”
“이 답답한 심정 마음껏 풀어놓고 어깨에 기대 실컷 울기나 하자!”
서영은 버스를 타고 시간 반 가는 동안 차창에 비치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 속에 어느새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있었다.
도시의 가장 변두리인 이곳은 아직도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시원한 바람이 서영의 옷깃을 파고들며 머리를 헝클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도보로 이십 분 정도 걸어야 민숙 언니네 집이 보이고
그 집까지 가는 데는 십오 분 정도 더 걸어야 야트막한 언덕 위에 초라한
창고 건물에 도착하게 된다.
집 주위 울타리는 물론 대문조차 없는 황량한 창고 주변에는 자랄 대로 자란 잡초가 울타리를 대신하고, 비스듬히 누워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창고 문 옆에
사람 하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을 열면 컴컴한 어둠 사이로 민숙 언니의 보금자리가 나타난다.
서영을 반기는 강아지 한 마리가 어디선가 쫓아와 캉캉 짖어대는 것 빼고는
기척 없는 창고 속에서 서영은 언니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니! 서영이 왔어요!”
“언니!”
“언니!”
몇 번이나 불렀으나 대답이 없다가 숨 넘어갈 듯 탁한 할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뉘시오?”
움직이는 기척 소리가 들린 지 꽤 시간이 흘러서 ‘기억’ 자 보다 더 굽어 ‘디귿’ 처럼 구부러지신 할머니가 힘겹게 걸어오고 계셨다.
“어머님! 서영이 왔어요!”
“오랜만에 뵙게 되네요. 어머님”
“뉘시라고?”
“응? 서영이?”
“서영 이가 여기를 어쩐 일이야?”
2년 전 민숙 언니의 환갑날 다녀가곤 처음이었다.
그 흔한 핸드폰마저 민숙 언니는 없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오거나, 어쩌다
민숙 언니가 찾아주지 않는다면 생사조차 알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핸드폰 요금은 서영이가 부담할 테니 하나 놓자고 말할 때마다 거절하면서 늘 같은 대답만 할 뿐이다.
“서영이 맘은 고맙지만 필요 가치가 없는 물건 에다 왜 네 신세를 얹고 살아!”
“언니가 동생 보고 싶으면 찾아가고 서영이가 언니 보고 싶으면 오면 되지!”
재작년에 왔을 때의 일이다.
언니와 이런저런 얘기 하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 낯 모르는 건장한 청년 두 사람과 예쁜 아가씨가 민숙 언니 집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언니를 보면서
“어느 분이 민숙 씨냐”고 물었다.
“제가 민숙인데요!”
“어디서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나요?”
“예, 우리는 동사무소 직원입니다”
“이곳 통장님께서 극빈자 가정으로 신청하셔서 확인 차 들렸습니다”
“주민등록상에는 두 분밖에 계시지 않는군요!”
“주민등록에 등재되지 않은 가족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어머님과 저 이렇게 두 식구뿐인데요!”
그들 눈에도 극빈으로 살고 있음이 확연 하여 이것저것 물을 것도 없어
“얼마 되지 않는 돈 이지만 정부에서 생계비가 지급됩니다”
“생활에 보탬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말을 마치고 나가는 동 직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민숙 언니의 표정이 감사한 마음보다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선생님들 잠깐 시간 좀 주시겠어요?”
“선생님들께 보여드릴 것이 있는데……”
의아한 그들은 나가다 말고 돌아서며 물었다.
“뭐를 보여 주시 게요?”
민숙 언니는 웃으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을 보여 드리지요!”
쓰러질 듯 비스듬히 누워있는 문을 들어 올려 열어놓으니 그제야 어둡던 창고 안이 좀 밝게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널찍한 창고 안에는 쓰레기 하치장처럼 어지러웠다.
맨 뒷면에는 빈 박스와 신문과 종이류, 유리병과 플라스틱 병들이
오른쪽 벽면에는 각종 철물이 종류마다 나란히 정돈되어 있었다.
“이것들이 모두 내 돈 이랍니다”
“댁들 눈에는 우습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것들은 내 삶에 동반자요
더없이 절친한 친구들이랍니다”
“일이 없을 때나 일하는 중에라도 이것들이 눈에 띄면 불쌍해서 차마 버려두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와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얘들 과의 이별은 언제나 겨울인데 그때마다 아쉬움이 가슴에 남습니다”
“이별 선물로 어떤 애는 곰국을 다른 애는 고기를, 딴 애는 땔감을 선물한답니다”
“얘네들이 추운 겨울을 편히 나도록 도와주곤 하지요!”
이렇게 설명하는 민숙 언니의 눈가에 맺히는 투명한 이슬은 이들과의 이별이 정말 서러운 듯 서영의 마음속을 후비고 지나갔다.
“선생님들 제가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에 가감 없이 받아 주세요!”
“저는 지금 무지 행복하거든요?”
“혹여 저한테 주시는 정부의 보조금 저보다 몇 배 불행한 이들에게 줄 수는 없는지요!”
“정부의 호의는 감사히 받겠으나 보조금만큼은 아직 제가 받아서는 안 될 것 같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생활 전반을 보조금에 기대어 살다 보면 제가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퇴색해지고 삶을 누리는 진정한 기쁨조차 누릴 수 없겠지요!”
“아직은 육체가 건강하고 어디든 가는 곳마다 나를 부르는 친구들이 널려 있는 한 그들과 두꺼운 정감 차마 뿌리칠 수 없네요!”
조용히 듣고 있던 서영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언니가 정신 나간 사람 아니면 큰 바보다.”
“나의 경우 차라리 식구 모두 불구자라도 됐으면 보조금이라도 수령하여 이토록 심적 갈등이 없을 텐데……”
이렇게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주는 떡도 마다하는 사람은 바보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잠겼다.
“그랬구나! 이 바보 언니에게서 그 마음을 읽기 위한 내 노력은 나도 바보가 되는 것 아니겠나!”
2년 전 지난 일을 회상하는 동안 어느새 해는 서산에 기울고 태양 빛 사이로 뛰노는 하루살이 무리가 하루가 짧다고 시위를 하는 듯 현란한 춤사위로 정열의 불태움을 보는 동안, 어디서 들음 직한 목소리의 가락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오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언니의 체취가 코를 자극할 때, 서영은 벌떡 일어나 언니의 마중을 서둘러 나섰다.
굽은 길을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 멀리 언니의 모습이 보이고, 자그만 체구에 자기보다 큰 플라스틱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오는 언니의 모습이 왜 그리 처량해 보였던지, 뛰면서도 한없이 가여워 자신의 신세는 벌써 잊은 지 오래고 언니 생의 포로가 되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언니…..
있는 목소리 다해 소리치는 서영의 목소리가 초목 사이 사이를 맴돌고 공허한 창공으로 날갯짓하며 나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헤 벌린 입 다물지 못하고 사랑하는 동생 서영이가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오다가다 지나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 기분에 취해 흥얼거리면서 오고 있었다.
“언니!”
스치는 곁길에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려는 찰나 서영은 서운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언니를 불렀다.
“이게 누구야!”
“서영이 네가 여기를 언제 온 거야?”
“어젯밤 꿈속에서 너를 봤는데 설마 지금도 꿈속은 아니겠지?”
언니는 보통 사람들보다 입이 커서 이름보다 입 큰 여자라면 더 잘 아는,
그래서 입 큰 여자로 통한다.
그 큰 입 다물지 못하고 벌릴 대로 벌린, 백합보다 더 탐스러운 웃음꽃을 보면서
서영은 측은하고 가여운 언니 모습에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언니 이 함지박은 뭐요?”
“홀몸으로 다니기도 힘든데 이건 뭐 하러 가지고 다녀?
“이리 줘요 내가 가지고 갈게“
언니 특유의 잔잔한 미소가 온 얼굴에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서영아 이 함지박은 내가 외출할 때마다 꼭 같이 다니는 단짝 이야!”
“얘가 없으면 기운이 없어!”
“때로는 채소에 때로는 지저분한 모든 것 얘가 다 담고 같이 오지!”
“사랑스러운 내 친구들, 남들은 지저분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들을
얘는 싫은 내색 한 번도 안 하고 모두 다 담아 같이 온단다!”
함지박을 받아 들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나 서영은 살펴보았다.
달랑 플라스틱 병 다섯 개와 콜라 캔 일곱 개 맥주 캔 열 개 신문 뭉치 두 개!
서영은 앞서 걸으면서 뒤에 오는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구질구질하게 이런 것 모아서 얼마나 도움이 돼요?”
언니 특유의 흐흠 소리가 먼저 들렸다.
흐흠의 뜻은 너는 모를 것이라는 뜻이 함축된 웃음 소리다.
“서영아! 얘네들은 너무나 정직하고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 애들이란다”
“인간들이 내용물 다 빨아먹고 아무 데나 버려져서 외롭게 지내든 애들이야!”
“그렇지만 얘네들은 원망도 저주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의리를 지키지”
민숙 언니는 집에 오자마자 옷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창고 뒤편 밭으로 달려갔다 서영도 따라가 보았다.
제법 작지 않은 밭에는 여러 가지 채소가 소담하게 자라고 있었다.
“서영아! 오늘 저녁 반찬은 상추쌈 하고 열무 겉절이란다”
먹음직한 채소를 듬뿍 뽑아서 다듬기 시작했다.
몸은 늙었으나 손의 움직임만은 옛날 그대로 전혀 녹슬지 않고 그대로다.
탐스러운 풋고추 여남은 이렇게 저녁 찬거리가 마련되어 둥그런 두레 반에
올려지고 어머님과 셋이서 맛있는 저녁을 끝내고 서영은 언니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여름의 접경을 노크하는 유월 해 질 녘의 시원한 바람이 두 여인의 옷과 머리를 어루만지고 서쪽 산에 반쯤 걸린 태양은 빛을 잃어가고 있었고 어스름한 산밑 어둠이 서영의 마음을 어둡게 색칠해 놓았다.
베어버린 고목 그루터기에 둘은 나란히 앉았다.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 안주라곤 마른 멸치 열 댓 개, 먹다 남은 풋고추와 된장 종지 하나!
민숙은 잔에다 소주를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키고 마른 멸치를 한 개 집어 우물거리면서 서영에게 말했다.
“서영이는 예수를 믿으니까 술은 안 하지?”
“아니지 믿기 전서부터 넌 술을 안 하니까 권하지도 않겠다!”
술을 못 하는 서영임을 아는 민숙은 그래도 배려하는 마음에서 서영 몫으로 잔 한 개 더 준비해온 것이다.
“언니는 말이다. 술을 많이는 못 하지만 가장 힘들고 괴롭거나 기쁜 일이 있을 때
이렇게 한잔한 단다!”
“목줄을 타고 넘어가는 쓰디쓴 이것이, 몸속에 가득 찬 슬픔과 분노와 희열을
씻어 내리는 짜릿짜릿한 느낌이 창자를 타고 내려갈 때 모든 잡다한 감정들이 씻겨지고 말거든!”
고왔던 언니의 얼굴엔 어느새 주름투성이가 되고 듬성듬성 검은 버섯이 보이고 있었다.
언니 어깨에 기대어 푸념 깨나 쏟으면서 펑펑 울기로 작정하고 왔건만, 언제나 그랬듯 언니만 보면 자신의 신세는 언니에 비하면 몇 배나 나음을 직감할 때 그 참을 수 없었던 슬픔은 연민으로 변하고 언니의 온화한 모습에 동화되곤 한다.
“서영이 요즘 생활의 재미는 어때?”
툭 한마디 던지는 언니의 질문 속엔 여러 뜻이 함축된 질문이란 걸 서영은 알고 있었다.
괴롭고 참기 힘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언니를 찾는다는 것을 언니도 알고 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한 던지는 안부의 질문이 서영의 가슴속을 어둠으로 물들여 놓았다.
“서영아! 오늘은 네 얘기 듣기 전에 언니 얘기를 할까 해!”
“아직까지 너에게 하지 못했던 언니의 추억 얘기가 될 거야!”
깊은 한숨 속에서 또박또박 언니의 얘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언니는 말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 얼굴도 몰라”
“언젠가 네가 언니 친척들에 관한 물음에 언니가 얼버무리고 말았었지?
너에게 밝히기 거북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언니의 아픈 과거를 되돌리기 싫어서
너에게 답변 하지 못했던 거야!”
“너무 어렸을 때는 언니도 어떻게 생명을 부지했는지 도 모르지!”
“언니가 일곱 살 때였어!”
“아니 내 나이도 정확히 몰라 고아원의 기록이 일곱 살 이라고 적혀 있음에 그런 가부다 알고 있을 뿐이지!”
못된 사내아이 때문에 견디기 힘들어 보육원을 도망쳐 나왔지!
“거리를 방황하고 다니다 어느덧 어둠이 오기 시작했어!”
“갈 곳은 없고 어둠은 깔리고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는 고프고 다니다 다니다
지쳐서 어느 골목에 쓰러져 있었던 거야!”
“정신이 들어 눈을 떠 보니 휘황찬란한 불빛과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방안의 고급스러운 풍광에 나는 놀란 토끼가 됐었지!”
언니는 잔에다 소주를 넘치도록 부어서 단숨에 들이키고 풋고추를 어적어적 먹는
그 모습 속에서 서영은 처음으로 언니의 절망적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동네마다 쓰레기를 수거하시는 그 고마우신 분이 나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간호
를 하셨던 거야!
“생각해 봐 옛 이나 지금이나 미화원 아저씨의 집안이 호화롭게 살 리는 없겠지”
“그런데 가정집이란 곳은 그곳이 난생처음 이었으니까 그렇게나 화려하고 멋있
게 보였어!”
언니의 얘기를 들으면서 서영은 자신이 자라온 모든 환경의 호화로움을 되돌려
생각했다.
삼대 째 아이가 없던 집안에 서영의 탄생으로 집안 모두의 깊은 사랑 속에서
자라온 서영 이었기에 하고 싶은 모든 것, 갖고 싶은 모든 것 서영의 말이 떨어
지기 무섭게 일사천리로 해결되고 너무나도 곱게 자라온 서영에게는 고아란 말이
쉽사리 이해되 지도 않았고 고아의 슬픈 일생을 알아보지도 못했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 그 아저씨가 보육원에 찾아가서 나를 자기 딸로 입적 시켰어!”
“두 부부 사이엔 애가 없었거든.”
“그 집에서 초등학교 졸업했을 때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아주머니는 나를
아는 사람한테 보내주고 아주머니는 소식도 모르게 어디로 가셨어!”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많게는 몇 년 적게는 며칠 떠돌기
시작했어!”
“발길로 차이고 따귀 맞는 것은 일상의 반복이었고 뼈가 부서지도록 힘들여서 일
하고 나면 칭찬은 커녕 욕 바가지 물바가지 맞기 일쑤였지!”
“주인집 아들들의 괴벽스러운 성희롱의 노리갯 감으로 시달리기도 했어!”
언니의 슬픈 음성이 밤하늘 별들 사이사이 구슬프게 번지고 흐르는 두 줄기
눈물에 별빛이 곱게 스미고 있었다.
“언니는 말이야 그때부터 생각을 많이 했어!”
“내가 한 일에 무엇이 잘못됐을까?”
“지나온 하루를 꼼꼼히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
“야단맞지 않으려면 매 맞지 않으려면 밥 굶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주인들 맘에
들도록 해야 하니까!”
“뭐든 시키는 대로 정말 부지런히 일했지!”
“나이가 차차 들면서 모든 시키는 일 외에 일거리를 찾아서 하기 시작했어!”
“할 일이 없으면 닦은 방이나 마루를 또다시 닦았고 깨끗한 마당을 또 쓸었지!”
“나를 먹여주고 잠재워주는 주인집 사람들이 욕하고 책망해도 내보내지 않는 그 고마운 마음에서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보은의 힘이 솟았던 거야!”
짙게 깔린 어둠 속에 잔잔한 밤하늘의 별빛들이 두 가련한 여인들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고 길게 토하는 여인들의 한숨 소리가 적막을 타고 흐른다.
“스무 살 때였나 옆방 세 들어 사는 노총각이 나를 신부로 맞고 싶다고 주인집 아주머니한테 간청했대!”
“ 어느 날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그 총각한테 시집을 가라는 거야!”
“뒷조사 해 봤는데 사람 착하고 돈도 제법 모아놓고 착실한 총각 이래!”
한가지 흠이라면 너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거야!”
“네가 이렇게 남의 집으로만 떠돌아다닐 게 아니라 착한 사람 있을 때 결혼해서 네 가정도 꾸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거야!”
“평소에도 그 총각이 싫지는 않았기에 허락하고 말았지!”
“경상도 어느 벽촌에 어머님이 한 분 계신다는 것 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다 전세방을 구해서 입던 옷 싸 들고 그 총각과 신접살림을 차렸지!”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밥은 굶지 않았고, 태어나 처음으로 남자의 애틋한 사랑 받고 사는 생활이 정말 꿈만 같았어!
“육 개월을 둘이 살다가 시골 어머님을 모시고 살자는 신랑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여 세 식구가 같이 살게 되었지!”
얘기의 빈도가 길수록 언니는 가끔 감정이 복받혀 목울대의 떨림에서 나오는 쉰 듯한 음성이 들리고, 술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마시고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어적어적 먹으면서 반짝이는 별들을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시모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이 그렇게 행복하고 감사할 수가 없었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가 생겼고 사랑하는 남편과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것 만으로도 매일 즐거운 꿈속을 헤매는 일상이었지!”
“시어머님께 들은 얘기였는데 시어머님이 결혼해서 삼 개월 만에 육이오전쟁이 터지고 남편이 북으로 납치되어 아직 생사의 소식조차 모르고 산다며 눈물 흘리시는 애처로운 모습을 볼 때마다 언니는 가슴이 무척 아팠단다!”
“남편도 아버지의 모습조차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나 지금껏 어머님과 단둘이 모진 고생 다 했다니 이 또한 불쌍한 내 남편이었지!”
“꿈 같은 세월 속에 질투의 여신이 찾아 들었어!”
“결혼생활 2년여 정말 행복했던 나의 삶이 하루아침에 파괴되고 정신 차릴 여유도 없이 몸과 마음은 깊은 구렁 속에 빠져 삶의 의미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지!”
“난생처음 사랑이란 것 경험하고 남의 사랑 듬뿍 받아본 나로서는 믿기지 않은 현실에 정신 차릴 수 없었어!”
“운전에 경험이 적은 남편이 면허증도 없이 같이 일하는 동료의 차를 몰고 가다가 잘못해서 낭떠러지기로 차와 함께 굴러서 그 자리에서 죽은 거야!”
“내 뱃속엔 우리들의 사랑의 씨앗이 곱게 싹이 터 자라고 있었어!”
언니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 양 볼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랬었구나! 그렇게 아픈 과거 때문에 지나온 일들의 얘기는 아예 입 밖에도 내놓 질 않았구나!
그렇게나 아픈 과거가 있었으면서도 맑은 웃음과 밝은 표정이 믿기지 않게 신기하기만 했다.
“그 일의 충격으로 배 속의 아이는 유산이 되고 나는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지!”
“시어머님의 극진한 간호도 소용이 없었고 남편의 그 사랑 찾아 머나먼 들판에서 헤매 고만 있었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 어!”
“문득 머리를 스치는 강렬한 빛과 함께 시어머님을 생각했어!”
“그렇지! 과부 아닌 과부로 일생을 사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생각하며 사셨던 어머님의 지금 마음이 어떠실까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에 이렇게 누워서 간호 받는 나 보다 오히려 간호 받으셔야 할 분은 어머님이 아니겠나!”
마지막 남은 소주 반 잔을 아쉬운 듯 목 속으로 넘기는 언니의 모습에서 조용한 슬픔의 바람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 남편이 어머님을 나에게 맡기고 떠났구나! 내가 아니면 누가 어머님을 돌볼 사람 있겠나!”
“그때부터 내 아픔 모두를 털어버리고 어머님과 살아가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기 시작했지!”
“처음에는 식당 그릇 설거지로 시작하여 자그마한 공장의 직공으로, 길가에서 좌판 놓고 과일과 생선도 팔아보고 막노동도 하면서 10여 년을 보내는 동안 악착같이 모은 돈이 좀 있었지!”
“10년 만에 내 집을 장만하고 어머님과 새집으로 이사하던 날 정말 하늘을 날아
오를 것 같이 행복했어”
“달동네에 있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방이 네 칸이나 있었고 앞마당 옆엔 자그만
텃밭도 있어서 채소도 심을 수 있었어!”
“형부가 있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생각하니 한없이 눈물이 나왔어!”
“아는 사람들이 그 집은 무허가 건물이라 언제 헐릴지 모르니 사지 말라고 알려
줬으나 내가 가진 돈으로는 다른 데 가서는 집을 살 수 없기에 충고도 듣지 않고
샀던 거야!”
“어머님과 같이 방 한 칸에서 생활하고 나머지 세 칸은 월세를 줬지!”
“월세의 수입으로 두 식구 먹고 살만했어”
“내가 나가서 버는 돈은 모두 저축 했지!”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 어.”
“통장에는 꽤 많은 돈이 쌓이고 쌓인 돈 만큼 마음도 그렇게 행복했었지!”
“이웃에 사는 언니뻘 되는 분과 친하게 10여 년을 살면서 정이 두터워졌고
또 그 부부가 인간미가 넘쳐흘러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었어!”
“어느 날 언니는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나를 찾아와 하소연하기 시작했어!
“은행의 담보로 배 한 척을 구입해서 지금껏 살아왔는데 돌풍에 휘말린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부들 한 사람도 다친 데 없고 무사하다는 거야!”
“배가 파손됐으니 조업을 할 수 없고 은행에 납부할 돈을 내지 못해 결국 은행에서 집을 압류 했다는 거야”
“그 언니는 나 보고 돈을 부탁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처참함을 하소연했겠지!”
“언니가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 단다”
“병아리 같은 자녀들 네 명이나 있는데 그들의 생계를 책임질 부모가 이토록 구렁에 빠졌으면 그 어린 자녀들은 어디로 내몰릴 것인가!”
“언니는 말이다 내 부모 아무도 모르지만, 어찌됐건 나를 낳아 버렸을 때는 그만큼 충분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해!”
눈물을 훔치는 작은 수건은 어둠 속에서 보더라도 그렇게 깨끗해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언니는 즐겨 찾고 애용하고 계셨다.
“언니 내가 그동안 모아둔 돈이 조금 있어요!”
“보탬이 된다면 도와 드리고 싶어요!”
그 언니의 말씀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답답한 심정을 정 깊은 이웃과 함께 나누다 보면 누적된 모든 불만이 조금은 평안을 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얘기 했을 뿐이란다.
선뜻 빌려 달란 말도 못 하고 한숨만 쉬면서 그 마음 감사히 받겠다고 내 손을 꼬옥 잡으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거야!
은행에 저축한 돈 사백만 원을 찾아 언니를 줬지!
“언니 이 돈으론 모자라겠지만 보탬이 된다면 유용하게 쓰세요!
미안해서 받지 못하는 언니 손에 쥐여 주면서 말했지!
“나는 집세만 받아도 두 식구 먹고 살 수 있어요!”
“이 돈은 언니 형편이 피면 그때 주시면 되고요!”
“그 시절 그 돈이라면 작은 돈이 아니었거든.”
“그때 살던 무허가 판잣집 한 채는 살 수 있는 돈이었어!”
“그 돈으로 이웃 언니는 위기를 모면하고 그럭저럭 이년을 살다가, 무허가 집 철거 예고 장이 왔어!”
“온 동네가 난리가 났지!”
“몇 푼 안 되는 보상비로는 전세방 구입하기도 힘들었으니까!”
“아무튼 이웃 언니와 그렇게 서로 헤어지고서 연락 두절이 됐지!”
“우리 두 식구도 정든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서 10년이 넘도록 모두 잊은 채 살았어!”
“돈을 꼭 받겠다고 생각해서 빌려준 것은 아니었으니까 금새 잊고 말았어!”
“무엇을 해서라도 우리 두 식구 밥은 굶지 않고 살고 있었지!”
“어느 날인가 일 갔다가 집에 오니 어머님께서 편지를 주시면서 그전에 같은 동네 살던 애기 엄마가 찾아왔다는 거야!”
“얼른 생각이 나질 않아 누구인가 생각하면서 편지를 받아보니 세상에! 이웃에 살던 그 언니였어!”
“나를 찾느라고 무던히도 헤맸던 거야!”
“반가움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그 언니는 울기 시작하는 거야!”
“당장 만나자고 보채는 그 언니를 내가 쉬는 날을 택해서 만나자고 했지!”
“며칠 후 우리는 정확히 십오 년 만에 다시 상봉한 거야!”
그때 재회의 기쁨을 상기하듯 언니의 얼굴에 피는 환한 미소가 서영의 가슴을 흔들어놓고, 야화의 수련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 둘은 그동안 못한 얘기꽃 피우며 기쁨을 나누었지!”
“무허가 촌이 헐리고 이웃에서 세를 살다가 일년도 못 돼서
속초로 이사를 했다는 거야!”
“애들 교육 문제도 있어 망설였지만 그땐 이것저것 살필 경황이 아니라서
우선 먹고 살기에는 바닷가가 일거리도 있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뿐이라
낯선 곳으로 무작정 이사를 했대!”
“이제는 생활의 기틀이 어느 만치 잡히고 아이들도 장성하고 큰 아들놈은 아버지 하는 일에 같이 힘 보태고 있고 결혼도 했대!”
“그러면서 그전에 빌렸던 돈 돌려줘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이면서 가져간 돈의 갑절을 주는 거야!”
“나는 한사코 거절 하면서 그 돈은 받으려고 언니한테 준 것보다는 내가 그때는 좀 여유가 있어서 준 것뿐이고, 지금도 이 돈 없어도 먹고 살기 걱정 없으니
언니 형편이 좀 나아지도록 유용하게 쓰시라고 했더니,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이제는 나 보다 동생이 더 가난하니까 나도 여유가 있으니 이 돈은 내가 주는 걸로 생각하면 내 맘도 기쁘겠 다고 두 손 꼭 잡고 흐느끼고 있었어!”
“언니와 이렇게 기쁜 해후를 하는 동안 시간은 멈추질 않고 흘러 어둠이 물들기 시작했지!”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져 집에 와서 그날 저녁엔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언니가 돌려준 그 돈을 옆에 놓고 많은 생각을 했지!”
“그 옛날 보육원에 있을 때 곱살스럽던 문숙 이와 울보 영자 생각, 나를 그토록 못살게 굴었던 창수 생각 걔네 들도 나처럼 부모가 버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먹고 싶었던 과자도 맘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지난 일들이 가슴을 찢는 거야!
“이 돈은 아예 내 돈이 아니란 결론을 얻었어!”
“일이 없는 날 나는 그 돈을 가지고 내가 있던 보육원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고맙겠다고 그 돈 전부를 기탁하고 나오는 기분이 꼭 우리 엄마를 만난 듯 기쁨에 벅찼어!”
창고 문 옆 희미한 등불 사이로 모여드는 불나방들의 작열하는 몸짓이 두 여인의 마음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먼 곳에서 찾아온 기적 소리 타고 착잡한 슬픔이 두 여인을 더듬고 있었다.
“언니는 말이야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모진 아픔과 고행을 비관하거나 슬픔에 싸일 때마다 이것들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내 몫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날이 몹시 추우면 봄을 기다리며 살았고, 비 오고 바람 몹시 불면 쾌청한 날을 기다렸지!”
“죽지 못해 산다고 흔히들 얘기 하지만, 그 삶 속엔 꿈과 희망이 빠졌기 때문이라 생각해!”
“그것이 없다면 삶의 가치가 없겠고 살아갈 힘과 용기가 바닥이 나겠지!”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이루어진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기다리며 사는 그 시간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니까 말이야!”
“끼니가 어려울 땐 며칠 굶는 사람들을 생각했고 외로움에 울고 싶을 땐 옆에 계신 시어머님이 계시기에 행복했지!”
“서영이 너의 괴로움 언니가 알고 있어!”
“너의 가족들 너를 의지하고 너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 거!”
“우리 서영인 몸을 도끼 삼아 죽을 둥 살 둥 모르게 뛰는 그 피곤함!”
“그 고달픈 삶 속에서 즐거움을 찾기는 너무 힘이 들겠지!”
“그런데 힘든 이 일들이 정상적인 가정으로 곧 돌아올 거란 소망의 끈을 쥐고
있다면 능히 그 바람 속에서 힘이 솟을 거야!”
언덕 아래에서 자동차의 불빛이 이곳을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두 여인은 의아해서 얼굴만 서로 쳐다보며 말없이 그것을 보고 있었다.
“누구지?”
민숙 언니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자동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마당에 들어온 차에서 건장한 사내가 한 손에 보따리를 들고 내리고 있었다.
“오? 통장님께서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나요?”
민숙 언니는 황급히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예 아주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가까이 오자마자 보따리를 풀면서
“손님이 오셨군요?”
“아주머니 여기 캔 맥주 좀 사 왔는데 드시면서 말씀드릴게요!”
종종 통장님이 노인들의 안녕을 확인 차 방문한다고 언니가 귀띔해 줬다.
“낮엔 아주머니가 일 나가기 때문에 저녁에 찾아 뵙네요!”
“우리 구청에서 효부 상으로 아주머니를 추천하셨어요!”
“다음 주 화요일 날 시상식이 있으니 꼭 참석 하시란 연락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민숙 언니는 황당한 모습으로 손사래를 저으며
“효부는 무슨….”
“오히려 제가 어머님 신세를 지고 많은 사랑과 기쁨을 받고 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끼니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하는 죄송 함이 산 같은데 효부라니 가당치 않네요!”
“어머님이 아직 곁에 계셨기 때문에 제가 이토록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데
상은 어머님께서 받으셔야 하는데 그런 상은 없나요?”
웃으면서 말하는 언니의 모습에서, 싫지 않은 기쁨이 엿보이고 정성 다해 모시던 그 모습들이 서영의 추억 속에서 예쁜 카네이션이 짙게 피고 있었다.
늦봄의 어둠이 짙게 깔린 지도 꽤 오래되고 시계는 어느새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님이 가고 난 뒤 먹다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는 민숙 언니를 보면서
욕심 없는 아름답고 착한 마음에 감동하면서 많은 회한에 잠겼다.
그랬었구나! 나는 아직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식구들만 원망하고 희망의 끈을 놓고 생각지도 못하고 살고 있었구나!
어차피 내가 져야 할 짐인데 피하기만 하려고 발버둥 쳐온 시간 속에서, 불만만 키워 오고 불행의 늪 속에 빠져 있었구나!
가슴속에 맺혀있던 불만의 덩어리가 눈물로 흘러나와 볼을 타고 줄줄 흐르고 있었다.
“서영아!”
다정하게 불러주는 언니의 음성이 가슴속 깊은 계곡을 타고 청량한 감로수가 흐르는 듯 맑고 신선하게 들렸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도 심지가 없다면 그 주위를 밝힐 수 없듯, 우리의 꿈과 소망은 촛불의 심지와 같다고 생각해!” 얼마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 하겠지!
“메주는 속이 새까맣게 썩어야 진정한 장맛이 나듯, 그 모진 생의 어려움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썩어 숙성되면 인생의 고운 향기가 번지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
서영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물의 원천이 흙탕물이면 흐르는 물도 맑은 물이 될 수 없고, 꽃도 좋은 향기 생성하면 풍기는 향도 아름답고 나쁜 향기 만들면 그 향이 역겹 듯, 행과 불행도 내가 선택해야 함을 생각 하면서, 뒤에서 수군대던 이웃들의 목소리를 떠 올리면서,
나에게서 풍기는 믿음의 향이 곱고 사랑 넘치는 향이 아니었고, 추하고 역겨운 향만 발산하고 다니면서도 웃으며 곱게 봐 주기를 바란 바보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