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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햇빛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낭만파
2월도 이젠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뒤 돌아보면 올 겨울 산행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산에 올랐으며 특히 임진년 들어서는 해발 1000고지급 산들을
수 없이 올랐던 것 같다.
제주 한라산, 무주 적상산, 장성 축령산, 담양 금성산성, 지리산 천왕봉, 무등산 탑봉, 지리산 만복대, 지리산1박2일 일출산행,
무주 덕유산, 고흥 거금도 적대봉, 임실 오봉산, 화순 모후산으로 이어진 12번의 올 겨울 산행중 1000고지급이 6개며,
눈을 맞으며 걸었던 것이 5회였고, 나머지도 잔설이 호복하게 쌓인 눈길을 거닐어 유난히 눈과 인연이 많은 겨울산행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 거창 우두산으로의 산행은 두터운 겨울옷을 입은 산들을 한꺼플씩 벗겨내는 봄의 입김으로
우두산을 먼 발치에서 봐도 이제는 눈과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오늘 25일 토요일 산행은 원래 예정에 없었다.
다음날인 26일 거창 수도산으로 출발하는 광주원산우회의 산행을 준비하고 있는데 목요일에서야 광주 다정산악회에 다니는 친구가
펑크난 한 자리를 채워 주라는 전화를 받고 흔쾌히 약속을 해 버린 우정의 산행이 되고 말았다.
비록 오늘과 내일 연 이틀 거창의 유명한 1000고지급 산들을 올라서야 하는 수고를 더하게 되었지만 모처럼 토요산행에 또 친구들을
꼬드기고 그렇게 9명이 유쾌하게 함께 나서는 산행이 되었다.
우두산(牛頭山)은 말 그대로 소머리 산이다.
산 꼭대기가 소머리를 닮았다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이 산만한 경치가 세상에 없다". 하여
이백의 시구인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별유'를 빌려 별유산으로도 불리웠고,
돌이 무더기로 많다고 하여 돌부리산 이라고도 한다.
백두대간인 대덕산 삼도봉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치고 내려가는 수도지맥길의 명산인 우두산.
1000미터급 산만도 20여개가 넘는 경남거창의 소금강(小金剛)인 우두산은 한국의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혀주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수려한 산이며 이런 명산들을 보듬고 있는 거창군은 행복한 곳이 분명하다.
(10:25)광주를 출발한 버스가 88고속도로를 시원히 내달려 가조IC로 진입한다.
들머리인 가조면 수월리 고견사 입구 대형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1000고지급에 천년사찰을 끼고 의상대사가 참선을 한 의상봉이 있는 우두산은 명산임은 분명하건만
겨울이 막바지로 치닫는 2월 마지막 토요일이다 보니 눈이 많이 내린 강원도로 모두들 달려 갔나보다.
강원도엔 폭설이 내린다고 하니 오늘 선자령 산행에 나선 빛토 회원들은 올 겨울내내 맞은 눈보다 더 많은 눈을
맞으며 행복한 눈꽃산행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여기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늘 산행 개념도다.
산장앞을 출발하여 용소폭포를 지나 마당재로 올라서서 우두산 상봉에 오른다.
상봉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의상봉에 오른 다음 고견사를 들러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코스이며
조금 빨리 걷는다면 고견사를 들르지 않고 의상봉 지나 장군봉으로 내려서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면 된다.
약 10km에 소요시간은 5시간이며 출발예상 시간은 10시 30분. 하산예상 시간은 15시 30분이다.
들머리인 주차장이 해발고도 500여미터로 감사하게도 절반을 탕감받는 혜택을 누리는 산..
1000고지급 산 이지만 40분이면 800고지인 마당재에 오르니 기쁘지 아니 한가..
1편은 거창 별유산(우두산)은 산이 아닌 신선들의 작품 전시장.
2편은 (사찰여행)의상대사가 참선지로 삼은 의상봉과 천년고찰 고견사로 나누어 기록한다.
할머니 몇분이 나물류를 팔고 있는 교견산장앞을 지나면 고견사로 올라가는길과 마장재로 올라가는 길이 나뉜다.
고견사를 거쳐 의상봉으로 올라 마장재로 내려와도 되나 오늘은 마장재에서 부터 의상봉까지 이어지는 멋들어진 암릉길을
오르고자 우측 마장재로 난 낙엽이 수북히 쌓인 길로 들어선다. 좌측길은 하산할때 내려올 길이고...
500여미터를 더 가면 우두산 상봉으로 바로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온다...
마장재를 거치지 않고 우두산과 의상봉을 거쳐 고견사로 내려온다면 이 길로 올라가면 되겠다.
(10:53)마장재로 오르는 중턱쯤에는 새벽에 눈비비고 일어난
토끼가 세수하러 왔다가 맑은 물빛에 망설이더니 결국 물만
먹고가는 깊은 산속 옹달샘이 있고, 거기서 여름철 폭우때에는
그 자체가 계곡이 되어버리는, 통 돌 투성이 조그만 협곡을
따라 15분정도 오르면 마당재에 도착한다.
(11:05)주차장에서 마당재까지는 오르기에 편안한 흙길을 따라
1.6km에 40분이면 오를 수 있다.
마당재(810m)에서 우측으로 비계산까지 2.8km는 훗날을
기약하고, 좌측으로 난 능선길을 따라 우두산 정상인 상봉까지
2km에 이르는 길은 사나이의 힘을 느끼게 하는 암릉 능선길로
지금부터 쭉 따라가 본다.
10여분동안 편안한 소나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좌우로 펼쳐지는 바위들의 아름다운 모습과
그들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드는 시간을 갖는다.
산에 오면 난 항상 바위들의 모습에 넋을 잃는다.
태초에 지구가 형성될 무렵부터 있었을 이 바위들은
영겁의 세월동안 바람이 어루 만지고 빗물이 쓰다 듬으며
온갖 형태의 자연이 예술적인 힘을 합쳐 만든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자그마한 수석에는 자연이 담겨 있다고 하지만
깊은 산속에 있는 바위에는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신비가
담겨있다고 할 것이며 그것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이 인간들에게 남기는 메세지를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또 신들끼리 자신이 빚어 놓은 작품을 놓고 경연을 벌이는
경연장이기도 하다.
감히 인간이 신들의 작품을 명명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모습으로 나만의 이름을 붙혀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써온 산행기는 물론이고 앞으로 쓸 산행기에도
깊은 산속 바위들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모두 찾아내어
그들의 언어를 세상밖으로 드러내는 일은 계속 될 것이다.
제단이 놓여있는 바위. 입석대.
쌍둥이 처럼 생긴.. 두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듯한..
통천문같이 생긴.. 무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지금 보이는 이 거대한 암벽이 쌀굴앞에 우뚝 솟은 십이지신상석이라고 한다.
그 쌀굴을 의상봉에서 고견사로 하산하면서 찾으려 했으나 길을 잘못들면서 찾지 못하여 또 훗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의상대사가 참선할 때 하루 두사람분의 쌀이 나왔다는 쌀굴은 아래 사진에 있는 이정표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1.5km구간 중
고견사입구로 나뉘는 이정표 못 가서 있다고 한다.)
이런 바위들이 상봉까지 가는 길목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런 바위들이 모여 봉우리를 이루고 그 봉우리들은
마치 소금강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산 전체가 거대한 암벽덩어리로 되어 있어 암릉길을 걸으며
일주일 동안 짊어진 삶의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리고,
회색빛에 익숙했던 눈에는 자연이 주는 오만가지의 색감으로
풍요로운 창조를 일으키게 한다.
(11:40)고개삼거리.
마당재에서 고개 삼거리까지 800미터를 오는데
30분이 걸릴 정도로 바위들은 합창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좌우로 시원스럽게 조망되는 우두산자락의 크고 작은
암릉에도 감탄사가 그칠줄 모르지만 그 암릉을 직접 타고
넘어가는 스릴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가 있다.
뒤 돌아보면 병풍처럼 들어선 857봉 산자락이 공룡처럼 드러누워 있고.
앞을 보면 기묘한 바위들을 타며 스릴 넘치는 산행을 즐기는 산님들이 보이고...
등로는 따로 있지만 이렇게 암릉을 넘어가도 길은 연결되니 얼마나 즐거운가.
친구는 릿지화를 신고 있어 바위에 착착 들러 붙는 재미라도 있겠지만 입을 벌리고 혀를 쏙 내밀어
강력본드로 임시처방한 내 등산화로도 충분히 즐길수 있는 암릉구간이다.
(내가 신고 있는 등산화가 딱 1년만에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기 시작해서 본드 수선으로 그 질긴 생명을 이어오고 있다.
L사의 고어등산화를 사 신은지 일년 조금 넘었지만 아직 밑창이나 외관은 전혀 이상이 없는 관계로 등산화 수선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ㅎ)
발 하나 포도시 올릴 공간만 나오면 찰싹 달라 붙어 이동하고 짧은 보폭으로 뜀뛰기도 하지만,
여성이나 어린이, 노약자 분들과 비나 눈이 와서 미끄러운 상황이면 절대로 이 암릉길을 가서는 안된다.
옆으로 오르기 편한 등산로가 별도로 있으므로 꼭 그길로 가길 바란다.
거대한 남근석도 있고..
각도만 조금 눕히면 육십령에서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대포바위가 될 것인데,
불끈 힘자랑 하고 있는 것이 아마도 가조면에 있는 미녀산을 임신시켜 버리지 않았나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아마도 이 위치면 미녀산과 마주 보고 있지 않을까 ?)
길가에서 또 나를 유혹하는 바위를 만나고...
우두산 너머 의상봉과 그 너머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암릉길이 또 나를 유혹한다.
나무깍는 끌로 바위를 깍아버린 듯한 바위.. 그리고 또다른 쌍둥이 바위.
거창 우두산 흔들바위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아기 바위.
온갖 형태의 바위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봉우리는 937봉.
(12:13)
937봉을 넘으면 천인단애의 암벽이 위용을 자랑하고...
두손으로 감싼 불씨모양의 바위가 우릴 반긴다.
어찌보면 꽃잎 모양 같기도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할 무렵엔 조망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으나 산을 오르면서 점점 늘어나는 운무가 우리들의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하지만 이미 마당재에 올라섰을 무렵부터 시야에서
거창의 1000고지급 산들이 몽땅 사라져 버려 우리가 내일 가야할
수도지맥의 명산들이 죄다 지우개로 지워져 버렸다.
하물며 눈앞에 보여야 할 가야산도 안 보이니...
내일도 이정도면 거창의 명산들을 차례로 둘러보는
이 소중한 기회에 조망이라는 가슴이 확 트이는 단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 겁난다.
산에 오면 가끔 앞뒤가 꽉 막혀 아무것도 안보이거나,
아니면 지금 있는 산은 잘 보이나 다른 산은 안보이기도 하고,
거침없이 달리는 시선이 하늘금과 맞닿는 호사를 누리는 날도
있으며, 잔설로 산의 등근육과 두툼한 갈빗살 근육이 선명하게
보이는 날은 초라한 내 자신의 몸뚱아리를 숨기기에도 바쁘다.
오늘 별유산(우두산)은 자신만 봐 달라는 듯...
앞 뒤의 산들은 거의 보이지 않아 차분히 산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토치카에서 나온 대포인가? 아니며 쑥 내민 자라 목인가?..
그 옆엔 목탁같기도 하고...하지만 이 봉우리를 전체로 보면 소머리를 닮았다고 하니 잘 살펴보기를...
(12:27도착)
지도에는 상봉 바로 아래 헬기장으로 나와 있는데
관리가 안되서 그런지 잡풀과 잡목이 우거진
십수명이 모여 점심먹기 좋은 공터가 나오고..
여기서 도시락을 까먹고 출발한다.(12:27~13:00)
(13:00출발)
마장재에서 상봉앞 공터까지는 1.7km거리지만
1시간 20분이나 걸린다.
바위를 어루만지며 타고 기어올라 가다보니
꽤 시간이 많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여기지는 것은
마당재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 방심해서도 안되는 암릉길이지만 또 너무 멋지다고
넋을 놓아서도 안된다..그만큼 이 길은 본다는 것으로도
감사해야할 환상적인 산길이다..
마치 신전의 기둥처럼, 보는 것 자체로 경외감이 드는 바위를 지나..
긴 뿌리를 뱀처럼 늘어뜨려 바위에 뿌리박고 누운 소나무의 질긴 생명력에 감탄하다보니..
(13:15)바로 우두산 정상이다.
수도지맥은 여기서 의상봉으로 흐르지 않고
정상표지석 뒤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난다.
가야산 국립공원을 지나다 보니 마령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비지정등산로로 출입통제구역이다.
출입통제구역으로 계속 걸어가면 우리가 내일 가는
수도산, 양각산, 휜대미산이 나온다.
우두산의 높이는 1,046m이다.
모두 9개의 봉우리로 이루어 졌으며 주봉은 상봉(上峰)이고
옛날에는 별유산(別有山)이라고도 불렀다.
신라의 고승 의상과 원효, 그리고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곳곳에 남아있는 우두산...
오늘은 우두산 마당재에서 우두산 상봉까지 남성미 넘치는
스릴있는 암릉길에서 소금강(小金剛)을 느껴보았다.
암릉길의 즐거움을 나눈 친구들과 기쁨도 같이 나누고...
같이 걸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니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마당재까지 1.6km를 40분 걸려 도착하였고,
마당재에서 우두산 상봉까지 2km는 점심시간 제외하고 1시간 40여분 걸렸다.
거칠것 없는 조망과 소금강이라 불리는 우두산의 절경을 실컷 구경하면서 주차장에서 상봉까지 온다면
3.6km를 2시간 20분이면 올 수 있겠다. (점심시간 포함하면 넉넉하게 약3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나 우두산 정상부터 의상봉까지는 마땅히 앉아서 점심먹을 공간이 없기에 가급적이면 상봉 300m 못가 있는 공터에서
점심을 해결하면 될 것 같다.
가야할 의상봉(1,038m)을 바라본다.
의상봉은 우두산의 제2봉으로 상봉(1,046m)보다 약간 낮지만 우두산의 주봉 취급을 받는다.
겨울의 끝무렵 소리없이 봄은 우리곁에 다가섰다.
이젠 차를 타면서도 창문을 열어놓고 타는 시간이 길어 졌으며 웃장안에 걸려있던 봄,가을 점퍼의 먼지를 털어내고
햇빛에 비춰줘야 하는 3월이 다가오고 있다.
봄마중을 가며 뒤 돌아 보니 올 겨울 산행은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주 산에 올랐으며 해발 1000고지급 산들을
제집 드나들 듯이 수도 없이 올랐던 것 같다.
제주 한라산, 무주 적상산, 장성 축령산, 담양 금성산성, 지리산 천왕봉, 무등산 탑봉, 지리산 만복대, 지리산1박2일 일출산행,
무주 덕유산, 고흥 거금도 적대봉, 임실 오봉산, 화순 모후산, 거창 별유산으로 이어진 13번의 올 겨울 산행중 1000고지급이 7개며,
눈을 맞으며 걸었던 것이 5회였고, 나머지도 잔설이 호복하게 쌓인 눈길을 거닐어 유난히 눈과 인연이 많은 겨울산행이 되었다.
26일 일요일에 올랐던 거창 수도산과 양각산 흰대미산까지 더하면 이번 겨울엔 모두 16개의 산에 올랐고 그 중 10개의 1000고지급
에 올라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만 기록적인 산행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 거창 별유산으로의 산행은 두터운 겨울옷을 껴입은 산에게서 봄의 입김으로 옷을 한꺼플씩 벗겨내는
봄맞이 산행이 되어 이제는 겨울과도 작별을 고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우두산(牛頭山)은 말 그대로 소머리 산이다.
산 꼭대기가 소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 도화유수(桃花流水)를 본 후
"이 산만한 경치가 세상에 없다".라고 말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별유'를 빌려 별유산으로도 불리웠고,
백두대간인 대덕산 삼도봉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치고 내려가는 수도지맥길의 명산인 우두산은 정상인 상봉보다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과거와 현세에서 참선한 곳이란 뜻으로 이름을 붙힌 의상봉이 더 유명하다.
그리고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천년고찰 우두산 고견사와 고은 최치원이 심어 놓았다는 고견사 은행나무.
그 세 인물의 전설이 깃든 우두산 의상봉과 고견사로 가는 길은 상당히 쉽고 빠르다.
88고속도로 가조IC에서 가조면 소재지를 지나 들머리인 우두산 고견사(古見寺) 주차장까지는 약 4km에 5분이면 간다.
(1편에서 받아서)
(13:15)우두산 정상에서 되돌아 본 지나온 길이다.
이쪽에서 보니 별유산은 평범한 육산으로 보여
오히려 뒤에 보이는 비계산이 더 웅장하게 보인다.
의상대사는 왜 의상봉보다 높은 상봉을 놔두고
오르기도 힘든 의상봉에 올라 참선을 하였을까?
원효대사는 왜 이 산에 고견사를 세웠을까?
일단 600미터 남은 의상봉에 오르면서
그 숙제를 풀어 보기로 한다.
정상표지석에서 인증샷을 찍은 친구들을 보내고
5분정도를 더 기다리는 데도 뒤 쳐진 친구들이 안 온다.
정상인증샷을 일부는 찍어주고 일부는 안 찍었는데 왜 안오지?
한참을 기달려도 안오길레 터벅터벅 의상봉까지 내려가니
부리나케 울리는 전화벨소리...
상봉에서 오기를 기다렸던 친구들은 우회로로 돌아 의상봉에
막 오르려는 참이라고 한다.(켁~~~)
그렇다면 점심을 먹던 공터에서 우두산 정상을 거치지 않고
의상봉으로 돌아가는 우회길이 있다는 것인데 확인은 하지 못했다.
공터에 있던 이정표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던데...
설마 그 길은 아닐 것이고 상봉으로 오르는 300미터 길 풀섶에
숨은 우회로가 있지 싶다.
위의 우측 사진은 정상석뒤로 난 마령으로 올라가는
수도지맥길로 지금은 출입통제지역이다.
좌측 사진은 정상에 우뚝 솟은 봉우리 암벽에 [국립공원구역]
이라고 새겨놓은 흔적이다.
아마 가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1972년 무렵.
공원지역임을 표시하기가 가장 쉬운 암벽에 글씨 새기기....
정하고 망치만 가지고 올라가면 되던 시절의 암울한 유산이다.
요즘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상황이 그땐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낀다.
의상봉(義湘峰 1,038m)은 수도지맥의 명산이자 거창의 명산 우두산(牛頭山)의 아홉 봉우리 중의 하나이지만
상봉(上峰 1,046m)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어 우두산의 주봉 노릇을 한다.
가야국이 거창땅에 대가야국을 세워 주인노릇을 할때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으로 칭하고 거창을 중심으로
거창가야국을 세워 나라를 지배하다가,
백제와 아라와 대가야의 연합군에 토벌되어 영일만을 거쳐
일본으로 탈출한 가야인 소잔명존은 일본서기의 천조대신
아마테라스(세오녀)와 소잔명존(연오랑)의 천손강림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 우리역사의 비밀 참고
이렇게 가야인이 세운 일본 왕실에 관한 전설과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과거세에 이어 현재세에서
참선(參禪)한 곳이라는 뜻에서 의상대사 이름을 빌려 산 이름으로
삼은 산이고, 이백이 노래한 속세를 떠나 별유천지비인간
(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할 만큼 경치가 빼어난 돌부리 산 의상봉과
고견사로 별유산(우두산) 산행에 이어 계속 여행을 한다.
우두산 정상인 상봉바위에 새겨진 아픈 상처를 위로하고...
의상봉으로 가는 능선길에 내려서면서 우두산 정상을 뒤 돌아 본다.
여기서 보니 소머리하고는 거리가 좀 있다. 그냥 편안한 육산정도의 이미지로 보이지만
반대편 마당재쪽에서 보면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건장한 사나이를 보는 것 같다.
소머리가 가장 잘보이는 곳은 고견사주차장쪽이라고 하니 잘 살펴보자.
의상봉위 천인단애 절벽위에 홀연히 선 저 사람은 지금 무엇을 생각할까..
예전엔 의상봉으로 오르는 길에 계단이 없어 암벽사이로 어렵게 올랐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암벽등반을 주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오름을 허락한 의상봉에 언제부터인지
일반 산님들이 오르기 시작하고, 결국 각종 안전사고가 끊이지 않아 약10여년 전에 거창군에서
의상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놨다고 한다.
결국 신라시대의 고승인 의상대사는 별유산의 주봉인 상봉을 마다하고 매일 이 봉우리를 오르는 고행을 통해
육신의 고달픔을 알고 의상봉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참선을 하며 인간세계의 번뇌를 깨달았던 것이다.
의상봉으로 올라가는 길 안부에 우두산 상봉을 거치지 않고 올 수 있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고견사로 이어지며 중간에 우두산 정상옆 공터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우측 사진에 있는 좌우측 고견사길은 어디로 가든 고견사로 간다. 사진에서 보면 정반대로 내려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의상봉을 크게 원을 그리며 하산 하다보면 만나는 지점이 나온다.
우리는 의상봉에 올랐다가 쌀굴이 있다는 좌측 고견사길로 내려설 예정이다.
계단간격이 너무 높아 다리가 찢어질 것 같다.
오르기에고 빡센 계단209개를 올라서야만 갈 수 있는 참선의 봉우리 의상봉.
몇번을 쉬어가며 혀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올때 쯤 이면 도착하는 의상봉 봉우리까지 오르는 길은
계단길임에도 이렇게 힘드는데, 계단도 없던 그 옛날 의상대사는 매일 매일 이 봉우리를 오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상에는 의상봉이라는 표지석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바위틈에 빼꼼히 얼굴을 내민 소나무 한 그루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의상대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남 양산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엄종을 개창한 승려로
신라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입적하였다.
성은 김씨로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서 계림부(鷄林府) 사람이다.
의상대사는 19세 때 황복사에서 출가하였으며, 8살 연상인 원효(元曉)대사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중 깊은 동굴에서 자다가 원효는 해골수로 갈증을 풀다가 돈오불(頓悟佛)
하여 신라로 다시 돌아가 대중불교를 일으키고, 의상만 중국으로가 요동(遼東)에서
고구려 군에게 붙잡혀 정탐자로 오인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그 후 661년(문무왕 1)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다시 중국유학을 감행하여
후일 중국 화엄종조(華嚴宗祖)가 되었던 현수법장(賢首法藏)과 함께 지엄으로부터
8년 동안 화엄을 공부하여 『화엄경』의 법계원융(法界圓融)의 묘지(妙旨)를 전수받아
화엄의 초조(初祖)로 이름을 올렸다.
670년(문무왕 10)에 환국하여 676년(문무왕 16)에 문무왕의 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일승화엄종(一乘華嚴宗)을 개창(開倉)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많은 화엄종장(華嚴宗匠)을 배출하였는데, 3천 명의 제자가 있었다.
특히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
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은 화엄대덕(華嚴大德)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의상대사가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공산(현 대구광역시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현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華嚴寺), 강주(현 경상남도 합천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현 충청남도 공주시) 보원사(普願寺), 계룡산(현 대전광역시) 갑사(甲寺), 계람산 삭주(현 강원도 춘천시) 화산사(華山寺),
양주(현 경상남도 양산시)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현 전라북도
전주시) 국신사(國神寺), 갱유한주(현 서울특별시) 부악산 청담사(淸潭寺) 등으로 일명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 하며 고려 숙종때
국사 칭호를 추증받았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화엄일승법계도(일명 법성게)는 의상대사가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한다.
(출처 : 디지털 양산문화대전과 여러 문헌에서 간략함)
의상봉에서 바라본 지남산과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암릉길에서도 별유가 보이고...
걸어온 길과 비계산 방향. 그리고 고견사로 이어지는 계곡에서도 별유가 보인다.
의상봉에서 바라본 고견사 방향.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 의상봉에서 바라본 별유산.
이백이 노래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시귀대로 이 산만한 경치가 세상에 없다.
산이름이 달리 별유산이 아니다. 의상대사는 의상봉에 앉아 참선하면서 별유산을 이런 모습을 바라보고
후대에 이름을 떨칠 이백의 시귀에 영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을까?
아마 이백보다 먼저 별유산을 보면서 대 자연속에 인간이란 한 줌의 먼지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의상봉 중턱에 왠 맷돌?
마치 방석처럼 동그랗고 넓적한 돌이 신라시대로 돌아간 듯 하다.
나도 이 돌위에 앉아 뭇인간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세상을 굽어 볼까나..
의상봉에서 내려서서 좌측 장군봉쪽으로 난 고견사길 대신 우측으로 100m가 더 긴 고견사길로 내려선다.
의상대사가 참선할때 하루에 두사람분의 쌀이 나왔다는 쌀굴을 찾기 위함이다.
의상봉 안부에 있는 지도상에는 고견사로 내려서는 길 암릉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나 사실은
마당재에서 우두산 상봉으로 가다보면 있는 공터에서 주차장으로 빠지는 길목에 있다고 한다.
그 쌀굴을 찾기위해 고견사길로 내려섰으나 찾지 못하고 쌀굴로 가는 갈림길에서 다시 의상봉으로
500미터 올라가야 쌀굴을 찾을 수 있지만 주차장쪽으로 하염없이 내려가고 말았다.
중간에 암자 터인지 오래된 터가 있고 굴같이 생긴 흔적이 있어 주변을 ?어 보았지만 깨진 그릇 조각 하나 없다.
조릿대 사이 숲길엔 오래된 낙엽이 나 뒹굴고 부드러운 흙길에서는 풋풋한 향이 풍겨 오른다.
언제 누가 세웠을까..정성스럽고 가지런하게 쌓아 올린 돌탑에서 탑지기의 소원이 묻어난다.
의상봉 아래 안부에서 향기로운 길을 따라 700여 미터 내려오면 첫 이정표가 나오고
여기서 친구들은 둘로 나뉘어 나와 몇몇은 쌀굴을 찾아서 좌측으로 가고, 또 다른 친구들은 고견사를 탐방하기로 하고
각자 임무를 나누어 탐방에 나선다.
쌀굴탐방조는 첫 이정표에서 쌀굴방향으로 20여미터 가면
나오는 두번째 이정표에서 쌀굴의 흔적을 놓치고 만다.
의상봉 방향으로 다시 500미터를 올라가야 되나?
아니면 주차장 방향으로 500미터를 내려가야 되나..
올라가기는 어려워도 내려가기는 쉽다.
못찾으면 다음에 한번 더 오는 수 밖에..
그렇게 당위성을 부여하니 마음이 편하다.
결국 이정표에서 사라져 버린 쌀굴의 흔적을 쉽고 편하게
아래쪽에서 찾고자 했으나. 주차장 방향으로 900미터를
더 내려가며 아무리 찾아봐도 쌀굴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좌측 사진처럼 생긴 굴이다..사진출처:울산 즐거운 산행 까페)
이런 계곡길과 나란히 걸으며 계속 좌측을 보고 내려 왔지만 결국 못찾고...
이렇게 세번째 이정표에서 기겁을 하고 만다.
쌀굴 여기서 내가 내려온 방향으로 600미터....(허거덕~~~)
나는 왜 못 봤지?
고견사의 3가지 볼거리로 고견사 폭포와 고견사 은행나무,
의상대사의 쌀굴이라고 해 놓고 정작 변변한 이정표나
쌀굴 푯말 하나 안 세워서 지나치게 만들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쌀굴은 우두산 상봉근처 공터에서
별유샘을 지나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길에 있으며
두번째 이정표에서 의상봉쪽으로 500미터를 올라가야
나오며 공터에서는 주차장쪽으로 1.2km내려오면 있는 것으로
나온다.
고견사로 이어지는 모노레일이 보인다.
산 아래 고견사 주차장에서 고견사까지 올라가는
부식및 소모품 운반용 모노레일로 2001년 불신도에 의해
시주되어 지어진 것이다.
사람이 타는지 안타는지는 확인을 안 해 보았으나
분명 한라산 모노레일과 비슷하게 생겼다.
지주대를 만져보고 흔들어 보니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정도면 사람이 모노로더를 타고 올라가도 끄덕 없을 듯..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모노레일로는 물건뿐만 아니라
불자님들도 타고 절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모노레일을
설치할 수 있건만 화순 모후산에서는 그 소모품 운반과
강우레이더 관측소 직원들 출퇴근용 모노레일을 깐다고
산 정상까지 능선길을 온통 파헤쳐 도로를 만들고 말아
시대에 역행하는 탁상행정의 표본이 되고 말았다.
모노레일을 깔기 위해 최소한 기존에 깔린 모노레일의 현황이나
자연파괴에 대한 청문회나 보고서는 만들고 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 시설물이 항구적인 시설물은 되지 못할 것이다.
기계란 무릇 어느정도 시기가 지나면 녹이 슬고 내구성이 없어져서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든다고 했겠지만 어차피 그것도 기계인 이상
사용연수는 정해져 있다.
중간에 보수해 가며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모노레일로도
얼마든지 장기간 사용할 수 있으며 또 하나의 볼거리도 제공하여
보기만 해도 모후산의 그것과 비교하면 열이 받는다.
우두산 고견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견암, 견암사, 견암선사로도 불리웠으며,
신라 문무왕 7년(서기 667년) 의상, 원효스님이 창건한 견암사에 뿌리를 두고, 전설 속 덕유산 해인터에 이어
두 번째 해인터로서 해인사 창건주 순응, 이정스님이 신라 애장왕 때 창건하였고 중창주 희랑대사가 머물다간 곳이며
고운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담겨져 있는 곳이다.
고견사에는 세 가지 자랑거리와 세 가지 볼거리가 있는데, 조선조 인조 때(1630년) 만들어진 동종과 고려시대 석불,
숙종이 원효대사를 기려 내린 강생원의 운영당(雲影堂)현판 이렇게 세 가지가 자랑거리고, 높이 30m나 되는 고견사 폭포,
최치원 선생이 심었다 하는 은행나무, 의상대사가 수도할 때 하루에 두 사람분의 쌀을 얻었다 하는 쌀굴이 세 가지 볼거리라 한다.
그 밖의 신라시대 절을 지을 때 축조된 석축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하며 의상봉에 안긴 절의 전경이 매우 빼어나 거창의 가장 아름다운
절로 손꼽힌다.
신기하게도 일주문에 금강역사가 세워져 있다.
보통의 사찰엔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별도로 세워져 있으며 사천왕문에는 동 지국천왕, 남 증장천왕, 서 광목천왕, 북 다문천왕이
있으나, 고견사에는 사천왕문 대신 일주문안에 금강문을 같이 두어 금강역사를 배치 하였다.따로 있지 않고 일주문에 금강역사를
세워 놓았다.
사찰의 왼쪽으로 손에 금강저(金剛杵)라는 무기를 든 밀적금강이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나라연금강이 서 있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이 고견사에서 수도하며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다.
지난 2000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최치원이 신라말기 사람이므로
대략 1,1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8m에 둘레가 6m가 넘는다.
신라말 천재 경륜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최치원이 당나라에서의 고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막상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골품제에 의한 신분의 장벽으로 앞길을 가로 막았던 좌절과 분노를 삭이고자 비교적 젊은 나이였지만 자신의 은둔지로
가야산을 택한 것은 시대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니 의상대사가 그랬던 것 처럼 대자연앞에 너무나 초라한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어진 갓과 신발만 남겨놓고 산으로 홀연히 사라져 100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천년고찰 고견사도 민족상잔의 아픔을 비켜서지 못했다.
6.25동란으로 폐허가 되 버린 고견사를 1987년 대웅전 불사를 시작으로 2001년까지 15년에 걸쳐
종각, 약사전, 요사채, 나한전, 천성문 중건에 이르기 까지 대 불사가 이루어 졌다.
도로가 없어 모든 자재를 사람이 직접 날랐으며 특히 대웅전 대들보는 20명이 목도로 운반하였고,
500관이 넘는 대범종은 15일간 2km를 밧줄로 잡아 당겨 옮겼다고 한다.
그 불사를 일으킨 배익천 선생의 공적비다.
다른 사찰과 달리 등산로는 절의 일주문을 들어선 내내 절을 관통하며 지나간다.
보통의 사찰이 등산객들의 방문을 경계하여 등산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에 비하면
보견사는 절의 안 마당으로 가는 길을 등산객들과 공유하고 있어 자유롭게 드나들며 고견사를 둘러 보라는 의미도 있겠다.
선방으로 쓰이는 듯..
감로수 청정한 물빛은 혹여라도 먼지라도 앉을레라 지붕을 씌워 놓았다.
별 의미 없는 이름들이 암벽에 조각되어 있어 그 의미가 궁금해 지고.
석굴에서 바라보는 고견사 모습이 반지르 하게 보이는 것이 좀 낯설어 보이고.
대웅전 뒤 약사전으로 올라가면 암벽을 파서 조각해 놓은 석불이 있다.
이 석불의 조성시기는 아마 불사를 일으킨 최근인듯...
약사전은 보통의 사찰에서 삼성각이나 삼신각이 있는 위치에 세워졌다. .
요사채로 쓰이는 듯
대웅전 뒷 산자락엔 이끼낀 오래된 탑이 서 있고...
경남 유형문화재 제263호로 지정된 고견사 석불...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의 머리는 민머리에 상투모양이 뚜렸하고 얼굴의 윤곽은 있되 눈, 코, 입 등이 희미하게 보이고
늘어진 귀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이 석불을 밖에서 안보이게 하려고 은행나무가 그 키 높이를 맞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범종각엔 산사의 새벽을 깨우고 우두산의 아침을 맞을 범종이 외로이 달려 있고.
보물 제1700호로 승격 지정된 가조 고견사 동종(銅鐘)은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1630년(인조 8년)에 견암사 동종으로 제작된 것이다. 고견사 동종은 전체 높이가 97.2cm이고
입지름이 59.7cm로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그 규모가 큰 편으로 하단부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고견사 동종의 명문은 조선후기 일반적인 동종과 다르게 사찰의 연혁, 동종 제작에 소요된 실제기간, 제작에 들어간
물품 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기문(記文) 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 다른 동종과 틀리다고 한다.
전면,측면 각 3칸인 팔작지붕 구조의 대웅전
법당엔 아미타불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협시불로 모셔있다.
해우소 건물..
고견사주차장에서 고견사까지 약 2km에 이르는 길을 불자님들이 시주 물품을 싣고 편하게 올 수 있는 모노레일...
그 모노레일은 불기2545년(2001년)에 차원도 이외자 부부에 의해 시주되어 10년 이상 고견사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고견사를 나와 주차장까지 내려오면서 고견사 모노레일과 같이
화순 모후산 모노레일 설치공사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내려간다. 말에 의하면 이렇게 보여도 걱정없다고 한다.
고견사 폭포. 높이가 30m에 이르는 거대한 폭포로 견암폭포라고도 한다.
갈수기라 물흐름은 시원치 않지만 강수량이 풍부할 때면 물떨어지는 소리가 십리밖까지 들릴 듯 하다.
위에서 쳐다보는 데도 주변의 풍광에 압도되어 내려가 보지 않을 수가 없다.
1백자 높이(30m)에서 떨어지는 고견사 폭포 아래 담긴 물은 낙화담(落花潭)으로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고 하늘에서 칠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던 곳이라는 전설도 있다.
해인사 용소와 서로 연결되어 있어 명주실 몇타래를 풀어도 끝이 없이 들어간다고 한다.
미인 양씨(梁氏)가 순절한 곳으로 전한다.
각종 산나물과 약초말린 것 등을 작은 함지에 이고 와서 파는 어머니들의 얼굴에서
신뢰의 주름진 미소는 분명 우두산의 산세 때문일 것이다.
산행 후에 가조면 소재지에 있는 백두산천지 온천에서 피로를 푼다.
88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교통불편지에서 벗어났고 최근 가조 나들목이 생기면서
폭발적으로 온천여행객이 늘었다고 한다. 강알칼리성 온천으로 원탕은 26.5도이며 10도 정도 더 데워 온천수를 공급한다.
현재는‘백두산 천지 온천’만이 영업중이고 탕이 매우 넓고 노천탕과 수영장등이 있으며 노천탕에서 바라보는 미년산이 압권이다.
온천목욕비는 5,000원이며 25명이상 단체는 20%할인하여 4,000원으로 낙안온천과 같이 온천물이 미끌미끌하여 기분이 매우 좋다.
뒷풀이가 끝나고 화목난로용 장작패기에 열중인 친구에게서 무한한 힘을 느낀다..
다 그것이 의상대사와 원효대사 그리고 최치원의 손길이 닿은 우두산 산행때문인지 친구는 아는가?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
천미터가 넘고 거리가 좀 멀리 있는것 같은데.......................
당일로 다녀오기엔 쪼매 멀고 높다. 근데 산은 참 이뿌네 재미있을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