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하권 8. 행위자의 개념이 구속이 된다.
1. 스리 라만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라마나 마하르쉬"를 가리킵니다.
2. 글 끝머리에서 니사르가다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서 말하고 있다면 틀린 것이고, 상황을 완전히 통찰하면서 정신적인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조언을 하고 있다면 진정한 반응일 수 있어요." 이것은 자발적 언어를 말합니다. 즉..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이 사라진 상태에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보통 무엇을 할 때.. "내가 한다"는 느낌이 있잖아요? 이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나오는 자발적 언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언어란 "내가 말한다" 가 아니고 "저절로 말이 나온다"가 되는 겁니다. 깨달은 이들은 이런 상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사르가다타는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저절로 말이 나와 마치 머리카락이 자라듯이 말야. 머리카락이 자라는 것에 오류가 없고 잘못이 없듯이 내 말도 그래."
아이 앰 댓 하권 8. 행위자의 개념이 구속이 된다.
문: 저희들은 사트야 사이 바바 아쉬람에 잠깐 머무르다 왔습니다. 그리고 티루바님에 있는 스리 라만 아쉬람에서도 두 달 있었습니다. 이제 저희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M: 인도가 뭔가 변화를 준게 있나요?
문: 짐을 던 듯한 느낌입니다. 샤트야 사이 바바께서는 모든 걸 그분에게 맡기고 가능한 바르게 하루하루 그냥 생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른 생활을 하고 나머지는 모두 내게 맡겨라" 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M: 스리 라만 아쉬람에서는 뭘 했어요?
문: 스승께서 주신 만트라를 계속 했습니다. 명상도 좀 했습니다. 생각이나 공부는 많지 않습니다. 저희는 그냥 조용히 있으려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희는 헌신의 길을 가고 있고 철학적으로는 좀 빈곤합니다. 생각할 것은 많지 않아서 그냥 스승을 믿고 저희의 생활을 할 뿐입니다.
M: 헌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일이 잘 될 때만 스승을 믿는 경우가 많아요. 문제가 생기면 실망감을 느끼고 새 스승으로 찾아 나서게 되지요.
문: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런 위험에 대해 주의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좋은 일과 함께 어려움도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다." 라는 생각은 확실히 아주 강력합니다. 어떤 힌두교 승려가 동쪽으로 길을 걷는데 강풍이 불기 시작하자 그 승려는 그냥 몸을 돌리고 서쪽으로 걸어갔답니다. 저희도 그런 식으로 스승에 의해서 주어진 환경에 저희들 자신을 맞추면서 살려고 합니다.
M: 오직 삶만이 있는 것이지 삶을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문: 그 점은 저희도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저희는 그냥 살지를 못하고 우리들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을 하는 것이 저희들에게는 불가피한 습관인 것 같습니다.
M: 선생이 계획을 하든 안하든 삶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자체 속에서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생겨나 그것이 환상 속에 빠지면, 자신이 인생을 지배하고 조절한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삶 자체는 욕망이 없는 것인데 허위의 자아가 즐겁게 계속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자아는 언제나 자신이 지속될 보장을 받는 데만 관심이 있어요. 삶이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자유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들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한, 해탈은 그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무언가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하나의 원인이 되려는 생각이 바로 구속이 되는 것이지요.
문: 행위자와 행해지는 일의 이원성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까?
M: 삶을 무한하고 나누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존재하고 언제나 활동하는 것으로 계속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삶과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이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신의 원래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요.
일단 모든 것이 내면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결국 자기 자신에 의해서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두려움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으면 자신을 육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사회, 국가, 인류, 심지어는 하나님, 또는 절대자 등등의 외적인 것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것들은 모두가 두려움에서 생겨난 도피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자신이 살면서 그 창조, 유지, 파괴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작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받아들일 때 가능합니다.
문: 왜 제 자신을 그처럼 비참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까?
M: 지금 선생은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봐요. 그런 것들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부주의 때문에 자신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관심이 그런 구속을 없애 줍니다. 사람들은 많은 일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제일 뻔한 일들이 제일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나는 정말 태어났는가?" "난 정말 이렇고 이러한 걸까?" "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 알고 있는 걸까?" "나의 부모는 누구일까?" "부모들이 날 만든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창조한 것일까?" "내가 내 자신에 관해서 듣고 있는 모든 말들을 믿어야 하는건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등등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세요. 지금까지 두 분은 스스로 감옥을 만드느라고 많은 정열을 쏟았습니다. 이제 한번 그 감옥을 무너뜨리는 데에 그 만큼의 정성을 쏟아보세요. 사실이지, 무너뜨린다는 것은 쉽습니다.
왜냐하면 허위의 것들은 발견이 되기만 하면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모든 것이 "내가 있음"이라는 생각에 달려 있어요. 그걸 한번 철저히 살펴봐요. 모든 문제의 뿌리에 그것이 있고 그것이 바로 일종의 피부처럼 사람들과 진리사이를 갈라 놓고 있는 겁니다.
진실은 피부의 안에도 밖에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꼭 그 피부 자체가 실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내가있음" 이라는 생각은 선생들과 함께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생각이 없었더라도 아주 잘 살 수 있었을 거에요.
그 관념은 육신과 자신을 동일시 하다보니까 나중에 생겨난 겁니다. 그것이 있지도 않은 분리라는 환상을 낳아서 사람들을 자기 자신의 세계속에 이방인으로 만들고, 세계가 생소하고 절대적인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어요.
"내가 있음" 이라는 감각이 없는 평화와 행복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내가 있음"이라는 감각이 돌아오면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문: 나라는 감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M: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 "나" 라는 느낌을 다루어 봐야 합니다. 뚜렷하게 보이고 완전히 이해될 때까지, 움직이고 멈추는 모든 순간에.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언제 그치고 무엇을 그것이 원하며 어떻게 그것이 얻어지는지를 지켜보세요.
결국에 있어서 그 연원이 어떻고 특징이 어떻든간에 모든 요가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즉 기대하고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따로 존재한다는 의식은 하나의 무의미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분리시켜 놓았기 때문인데 이제 사람들은 이 소외감으로부터의 탈출을 구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날 순 없어요. 다만 그것을 더 키우지 않고 정지시킬 수 있을 뿐이지요.
"내가 있음" 이 계속 버티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허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일부러 지속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어요. 왜냐? 진실은 자신이 파괴될 수 없고 형태와 표현이 파괴되는 것과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내가 있음" 이라는 감각은 순간 순간 다시 형성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노력이 쓸모가 없어요. 이것의 유일한 해결책은"내가 이러저러한 사람이다" 라는 분리감을 영원히 해체시키는 것밖에 없어요. 있음이라는 것은 여전히 남지만 "자기가 있음"이라는 것은 남을 수가 없어요.
문: 저는 확실한 영적인 야망을 몇 가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성공시키기 위해서 제가 일을 해야 합니까?
M: 야망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영적일 수가 없어요. 모든 야망은"내가 있음"을 위한 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진보하고 싶으면 개인적으로 뭔가를 이룬다고 하는 모든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소위 요가 수행자들의 온갖 야망들은 안 될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얻으려는 욕망쯤이야 개인적으로 영원한 축복을 갈구하는 데에 비하면 순수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 이에요. 마음은 일종의 사기꾼이라 그것이 경건해 보일수록 배신은 훨씬 심각합니다.
문: 사람들이 선생님께 찾아와서는 세속적인 여러 문제들을 가지고 도움을 청할 때가 아주 많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아시는가요?
M: 그냥 그때 그때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말해줄 뿐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는데에 표준화된 절차 같은 건 없어요.
문: 선생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게 와서 도움을 구할 때 제 충고가 바르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확신할 수 있습니까?
M: 자신이 어떤 상태 속에 있고 어떤 수준에서 말을 하는지 관찰을 해봐요. 마음에서 말하고 있다면 틀린 것이고, 상황을 완전히 통찰하면서 정신적인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조언을 하고 있다면 진정한 반응일 수 있어요.
중요한 요점은 선생과 선생의 앞에 있는 사람, 둘 다가 그냥 몸뚱아리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각이 맑고 깊으면 실수는 적어지는 법이지요.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