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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19세기말, 20세기초 찍은 젊은 무녀.
조선시대 무당은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여 배후에서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고종비 명성왕후 민 씨(1851~1895)는 병적으로 무속에 집착했다. 1882년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에 친정집이 풍비박산 나고 그녀도 반란군을 피해 궁녀복장을 한채 충주까지 도망간다. 민 씨 일가가 비밀리에 청나라와 접촉해 청군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하면서 명성황후는 다시 대궐로 돌아온다.
한말 3대 문장가이자 우국지사인 황현(1855~1910)의<매천야록>에 의하면, 피란 기간 중 명성왕후는 용하다는 젊은 무녀 얘기를 듣고 그녀를 불렀다. 무당이 환궁할 날을 맞히자 서울로 데려와 진령군(眞靈君)에 봉하고 수시로 점을 치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관우를 모시는 사당 중 하나인 서울 동묘.
관우을 모시는 무당 진령군의 요청으로 명성황후는 명륜동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북묘'를 세웠다.
<매천야록>은 "벼슬이 무당한테서 나오니 고관들이 몰렸다. 무당은 무뢰배 이유인이 귀신을 부릴 줄 안다며 민비에게 아뢰어 양주목사를 하사했다"고 개탄했다.
원나라는 해마다 많은 수의 공녀를 우리나라에서 뽑아갔다. 기황후 역시 공녀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에 올랐고 결국 황제(소종)의 어머니가 됐다. 중국에 끌려간 우리나라 여성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원나라를 초원으로 쫓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명나라도 초기에는 원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에서 여인을 뽑아갔다. 조선 중종 때 서얼출신 학자 어숙권이 쓴 <패관잡기>에 따르면,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2~1424)는 태종 8년(1408) 사신을 보내 권 씨, 임 씨, 이 씨, 여 씨, 최 씨 등 조선 여인 다섯 명을 선발해 후궁으로 데려갔다.
영락제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의 넷째 아들로, 형인 2대 건문제를 쫓아내고 3대 황제에 오른 인물이다. 영락제는 스스로 정비인 마황후의 아들이라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친모가 고려 출신의 공비라는 설이 파다했다.
영락제 그래서 여러 명의 우리나라 사람을 후궁으로 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다섯 명의 조선 여인 중 권 씨를 특별히 총애해 현인비(顯仁妃)에 제수했고 나머지는 미인(美人), 소용(昭容) 등에 임명했으며 그녀들의 아버지와 오빠 등 가족들에게도 벼슬을 내렸다.
명 성조 영락제(明成祖 永樂帝)
권 씨도 기황후처럼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 씨가 영락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권 씨를 시기했다. 여 씨는 태종 11년(1411) 조선의 내시 김득(金得), 김량(金良)과 명나라 내시 두 명을 끌어들여 권 씨가 마시는 차에 비상을 넣어 죽게 했다.
권 씨를 각별히 아꼈던 황제가 이같은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분노했다. 가담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고 모두 처형했다. 황제는 모든 일을 꾸민 여 씨를 달군 쇠로 한 달 동안 지져서 죽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동유(1744~1808)가 쓴 <주영편>도 동일한 이야기를 전한다. <주영편>에 의하면, 당태종(영락제의 묘호)의 후궁 현비 권 씨는 미인이기도 했지만 재주도 남달랐다. 여성이었지만 시도 잘 지었고 퉁소까지 잘 불어 영락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것이다.
이같은 사례를 보더라도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여인들을 미인으로 여겼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
1763)의 <성호사설>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이에 따르면, 청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을 때 부녀자 한 명이 누각에서 발을 걷고 얼굴을 내밀어 사신 일행을 구경했다.
청나라 사신은 여인을 얼굴을 본 뒤 "조선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참으로 그렇구나"라고 감탄했다. 이 일은 사대부들 사이에서 비웃음거리가 됐다.
<성호사설>은 "여자가 담장 위에 얼굴을 내밀 때(墻上), 말을 타고 있을 때(馬上), 누각 위에 있을 때(樓上), 여행 중에 있을 때(旅中), 술에 취했을 때(醉中), 밝은 태양 아래 있을 때(日中), 달빛 아래 있을 때(月下), 촛불 아래 있을 때(燭下), 발 아래 있을 때(簾下) 아름답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고 소개한 뒤 "청나라 사신이 목격한 여성이 누각 위에 있는 데다 심지어 발 아래 있었으니 더욱 예뻐 보였던 것"이라고 풀이했다.
우리나라 인물과 중국여인의 인연도 고전에서 종종 다룬다. 조선 태조 때 정2품 참찬문하부사를 지낸 조반(1341~
1401)은 중국 여성과의 애잔한 러브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그는 조선 개국 초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
조반은 고모가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부인이어서 어릴 때부터 고모 집에서 성장했다. 개혁을 추진하던 탈탈이 탄핵받아 유배지에서 처형되면서 조반의 운명도 바뀐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몰래 고려로 도망쳐야 했다.
그에게는 중국에서 교제하던 미모의 여성이 있었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에 따르면, 조반은 이 여인을 데리고 가려 했지만 하인이 "숨어서 달아나야 하는 판국에 사람들 눈에 띄는 미인과 동행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극구 말렸다.
조반은 누각에서 이별을 전하고 길을 떠났지만 여인 생각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인에게 아무래도 여인을 데려가야겠다면서 하인에게 누각에 가보라 지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여인은 이미 누각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뒤였다.
하인은 여인의 팔찌를 빼 조반에게 전하니 통곡하면서 혼절했다. 조반은 본국에 돌아와 아내를 얻어 대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다.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 공훈 있는 재상에 이르렀다. 공은 그 미인을 오히려 종신토록 생각하여 기일을 만나기만 하면 늘 눈물을 흘리며 제사 지냈다고 <청파극담>은 전한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병무상서(병조판서)를 지냈던 석성(1538~1599)의 류 씨 부인도 홍순언이라는 조선인 역관과 깊은 인연을 갖고있다.
이긍익(1736~1806)의 역사서 <연려실기술>,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조선 말기의 문신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등 다수의 고전에 류 씨 부인과 홍순언의 일화를 소개한다.
이들 책에 따르면, 젊은 시절 홍순언은 베이징에서 한 술집을 들렀다. 미모의 여성을 보고 주인에게 불러 달라고 했지만 이 여인은 난데없이 소복차림으로 들어왔다.
홍순언이 놀라 연유를 묻자 여인은 "저희 아버지는 절강 출신으로 이곳에서 질병을 얻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셨다. 고향에다 장사를 지내고 싶지만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부득이 몸을 팔아 장례비를 대려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여인은 300금이 필요하다고 했고 의기 충만했던 홍순언은 곧장 전대를 풀어 돈을 건넸다. 기대치도 못한 일에 여인이 "이름이라도 알게 해 달라"고 간청하는데도 기어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다가 성만 가르쳐 주고 술집을 나왔다.
이 여인이 후일 석성의 두 번 째 부인이 되는 류 씨이다. 류 씨는 홍 역관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후일 남편의 주선으로 재회의 기회를 갖는다. 류 씨는 남편에게 말해 조선의 숙원인 종계변무(宗系辨誣)사건을 해결해 준다.
대명회전 등 명나라의 국가 공식 기록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돼 있어 이를 바로 잡아달라고 요청한 일이 종계변무이다. 홍순언은 그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 당릉군(唐陵君)에 봉해졌다.
뿐만 아니라 류 씨는 명나라가 지원군을 조선에 파병하는 데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된다. 한 역관의 취중 호기가 일국의 운명을 결정 지었던 것이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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