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68
ㅡ 신라의 전성기 2 ㅡ
(법흥왕 편)
신라는 삼국 중 건국은 가장 먼저 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여러 면에서 삼국 중 가장 더디게 발전했다.
그러나 그런 신라도 최고전성기에 들어 서는데 그 시기가 바로 '지증왕'으로 부터 시작하여 '법흥왕' '진흥왕' 시절이 최고조에 이른다.
법흥왕, 진흥왕은 우리가 학창 시절부터 너무 익히 들었던 이름 이다. 국사시험에도 단골로 출제 된다.
'법흥왕'(514~540 재위)은 신라 제23대 왕이다. 신라 발전과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여러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또한 법흥왕은 고대국가로서 신라가 체계화되는 시발점을 만든 왕으로 신라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이다.
법흥왕은 부친 지증왕에 이어서 삼국 간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 섰던 6세기 초반 짧은 평화기간 동안 강도 높은 내정개혁과 국력 증대, 왕권강화, <탁기탄과 금관가야 , 탁순국> 등 신라와 인접한 가야국가들을 병탄하고, 우산국 정벌 등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최고전성기 토대를 닦았다.
법흥왕 조카인 진흥왕의 폭발적인 영토확장도 이 때 쌓아둔 국력이 배경이 되었다
법흥왕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증왕 과 함께 내정개혁으로 신라 향후 400년을 결정지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임금 중 한 명 이기도 하다.
사실, 신라는 법흥왕이 531년에 귀족대표로 있던 이찬 '철부' 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 했는데, 귀족대표를 상대등에 임명한 것은 곧 귀족을 관료제 체계에 포함시켰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법흥왕 이전까지는 왕이라도 귀족과 공동 하교를 내릴 정도로 신라 6부 중 하나인 '탁부' 지도자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법흥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이후로는 모든 당대 기록에서도 오로지 왕의 명령으로만 표현되게 된다.
반면 숭유억불 시대인 조선시대 때는 고구려 '소수림왕',
백제 '침류왕'과 함께 불교를 들여와 삼한을 어지럽힌 불교 삼총사라고 악평을 받기도 했다.
또한 법흥왕은 군사력을 담당하는 전문부서인 '병부'를 설치한다
이는 그 전까지는 왕실과 유력자 들이 사병 비슷하게 사유하고 있던 병사를 이제는 국가차원에 소속시켜 다룬다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법흥왕 시절부터 신라라는 나라가 점차 조직적으로 변해 간다.
그럼 법흥왕의 업적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1. 불교 공인(527년)
법흥왕은 신라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도입했다. 법흥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다.
이 과정에서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불교가 왕실과 귀족 사회에 뿌리내리게 되었다.
527년, 이차돈이 처형될 때 그의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우리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나온다. 이 기적은 왕과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불교를 신성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이는 법흥왕과 이차돈이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여 공인하려하자 귀족들 반대가 너무 거세어졌다. 이에 이차돈이 자청하여 자기가 순교하겠다 한다. 법흥왕은 처음에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이차돈 고집이 너무 셌고, 자기가 죽으면 목에서 흰피가 나올 것이라며 그 걸 보면 귀족들도 반대하지 못 할거라 해서 법흥왕도 어쩔 수 없이 이차돈 말에 따른다. 그리고 진짜 이차돈 목에서 흰피가 솟구쳤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삼국사기 정사에도 기록되어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이차돈 순교는 신라 불교 초석이 되었고, 이차돈 희생은 단순한 종교적 사건을 넘어 신라가 사상적 통합과 왕권강화,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법흥왕은 신라 토착종교와 관련된 7개 성지를 밀어 버리고 절을 짓는 국책 사업을 벌였는데, 이 중 유명한 절들이 흥륜사, 분황사, 사천왕사, 불국사이다.
당연히 귀족들 반대도 심했고 짓던 절을 때려부쉈다가 다시 짓는 등의 진통을 겪었으나, 법흥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신라는 이후 100년도 안 되어 놀랄만한 불교 국가로 변신했으며, 7세기에 활동하게 되는 고승만 해도 <원효, 의상, 대안, 명랑> 등 수두룩하니 많다.
2. 율령 반포(520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율령'(법률과 제도)을 정비하고 반포했다. 사실 율령은 지증왕 시절부터 준비되어 왔다.
이로써 신라사회 통치규범이 체계화되었고, 왕권강화와 행정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3. 관등제와 골품제 정비
'17관등제'를 마련해 신라 관리 체계를 정비했다.
'골품제'를 통해 귀족들 신분을 규정하고, 관직 승진한계를 명확히 했다. 이로써 중앙집권 체제 기반이 마련되었다.
4. 건원(建元) 연호 사용
법흥왕은 신라 최초로 독자적인 연호인 '건원'을 사용했다. 이는 신라가 독립 국가로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5. 영토 확장
법흥왕 아버지 '지증왕' 13년에 <독도는 우리 땅>에 나오는 신라장군 '이사부'를 파견해 우산국(현재 울릉도)을 복속했고, 법흥왕은 완전정복하여 병합했다.
이에 신라는 동해 해상권을 장악 이후 삼국통일 과정에서도 중요한 해상로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우산국 병합은 신라의 대외팽창 전략과 해상진출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우산국은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포함된 지역으로 알려져, 이 병합사건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역사적 근거로 종종 언급된다.
532년에는 금관국(금관가야) '구형왕'이 <왕비와 큰 아들 김세종, 둘째 아들 김무덕, 막내 아들 김무력>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 구형왕이 항복해오자 법흥왕은 금관국을 정식으로 합병하여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해 낙동강 유역을 확보 하였다. 비교적 평화적으로 금관국을 흡수하면서 얻은 법흥왕 또 다른 이득은 인재이다. 구형왕 장남인 김세종과 막내아들인 김무력은 진흥왕 시대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였으며 김무력의 첫째 손자는 그 유명한 '김유신'장군이고 둘째 손자인 '김흠순'도 신라의 뛰어난 장군 으로 활약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금관국'뿐만 아니라 '탁순국'과 '탁기탄' 까지 항복을 법흥왕 때 받아낸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신라와 인접한 가야권 동쪽 몇몇 나라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나머지 가야 소국들은 대체로 친(親) 백제 성향으로 기울었다.
법흥왕 영토확장은 신라 국력 강화를 의미하며, 나중에 삼국통일 기반을 다지는데 큰 공헌을 한다.
가야국들 완전한 병합은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를 크게 꺾은 후인 진흥왕 시대에 완료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흥왕은 재위 27년 승하해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현재 법흥왕릉 남쪽에는 애공사지 삼층석탑이 있어 법흥왕릉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진흥왕 시대가 계속됩니다.
ㅡ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