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내편181-185.mp3
33. 徐甄이 遯居衿川 鄕曲이러니 慨念前朝之事하고 作詩曰千載神都隔渺茫하니 忠良濟濟佐明王이라 統三爲一功安在오 劫恨前朝業不長이라 臺諫欲罪之어늘 太宗이 變色曰 甄爲高麗之臣하야 作詩思之하니 是亦夷濟之流라 不可罪也니라.
▶讀解: 서견은 금천의 시골로 피해 가서 살았다. 지난 왕조의 일들을 생각하면 비분강개하여 시를 지었다. “천년을 다듬은 신성한 고도가 아득히 멀어졌도다. / 충성스런 신하들이 언제나 밝은 임금을 보좌했더라. /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공은 어디에 있는가! / 고려를 핍박함이 한이라 그 기업 길지는 않으리.” 대간에서 죄를 다스리려고 하자 태종이 낯빛을 바꾸며 말씀하시길 “견은 고려의 신하라 시를 지어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또한 백이숙제와 같은 부류라 죄를 물을 수 없도다.”
※ 字義: ○ 甄:질그릇 견,질그릇장인 진, 살피다
34. 李養中은 廣州人이라 麗末에 任刑曹左參議러니 當革命之初하야 抗不臣之節하고 遁去廣州村庄하야 不受微命하니 太宗이 以龍潛故人으로 看遇甚至하야 特拜漢城尹한데 亦不受하다 太宗이 常 幸廣州하야 召與道舊하니 公이 野服携琴拜謁이어늘 獻壺酒盤魚하고 歡然而罷호대 竟不奪其志라 特官其子以獎之하고 嘗分御羞하야 好問不絶하다.
▶讀解: 이양중은 (경기도) 광주 사람인데 고려 말 형조 좌참의였다. 혁명의 초에 신하가 되지 않은 절의로써 항거했다. 광주(廣州)의 시골 움막으로 들어가 왕명을 받지 않았다. 태종께서 남몰래 고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매우 간절하였다. 특히 한성 윤을 안배하였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태종께서 늘 광주로 행차하시어 옛 친구를 부르면 공은 평상복에 가야금을 든 채 배알하며 막걸리와 물고기 안주를 올렸다. 기쁘게 어울리다가 헤어지지만 끝내 그 뜻을 꺾을 수 없어 특별히 그의 아들에게 관직을 주어 장려하며 늘 음식을 나누어 주고 (나라를 다스리는)좋은 질문을 끊이지 않았다.
●李養中: 高麗末期學者 字는 子精 벼슬은 刑曺參議 高麗가 망하자 棄官하고 南漢山城에 돌아가다. 太宗이 漢城府尹으로 불렀으나 不起
刑曺參議: 刑曹에 屬하는 三品벼슬
革命: 李成桂가 高麗를 넘어뜨리고 李氏王朝를 세움
御羞: 임금이 내려주는 음식
35. 逐睡錄에 曰王氏之亡에 但圃冶二人이 能成大節而不知牧隱之爲人하니 可惜이라 太宗受命之後에 召穡引見하니 穡이 長揖不拜어늘 太宗이 降御榻하야 接以賓禮하고 俄而侍講이 以次列進하고 上이 還陞御榻이어늘 穡이 昻然而起曰老夫無坐次라하고 遂出라하니
▶讀解: 축수록에 왕씨가 망하자 오로지 포은과 야은 두 사람만 큰 절의를 지켰으나 목은의 위인 됨은 알 수 없어 애석하다고 되어 있다. 태종께서 왕위를 이어받은 후에 불러서 알현하게 되었다. 이색이 길게 읍을 하되 절은 하지 않았다. 태종께서 어탑에서 내려와 빈객의 예우로 맞이하며 굽혀서 말씀을 나누시고는 다음 열로 안내한 후 어탑으로 올라갔다. 이색이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노부는 그 자리에 앉지 않겠소.” 끝내 나가버렸다.
36. 新羅加林郡女는 爲素那妻라 夫赴戰에 妻留在其家러니 及那死에 有人弔之한데 妻哭曰亡人常曰大丈夫固當死王事라 豈可死 家人之手乎아 今死乃其志也라하니라. (見東京誌)
▶讀解: 신라 가림군의 딸이 소나의 아내가 되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가고 아내는 집에 남아 있었다. 마침내 소나가 죽었다. 사람들이 문상하러 왔는데 아내가 곡을 하며 말하기를
“고인이 늘 말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나라(王)의 일로 죽을지언정 어찌 집사람의 품에서 죽을 수 있겠느냐고 했는데 지금의 죽음은 그의 뜻이라오.”
● 加林郡: 忠淸南道 夫餘郡에 屬한地名 林川
素那: 新羅때의 武士 白城(今安城)사람 百濟와의 싸움에서 戰死 父는 沈那
亡人: 죽은사람 곧 素那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