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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 선운사
2026년 09월 19일(토요일)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 189개의 승려 생활시설과 89개의 작은 절 그리고 144개의 굴(암)을 거느리던 호남 제일의 사찰입니다.
577년(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외에 신라 진흥왕 창건설, 신라 의운화상 창건설이 전해지지만 주로 조선 후기의 설화 기록으로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1354년(공민왕 3)에 효정이 중수하고, 1472년(성종 3)부터 10여 년 동안 행호선사 극유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의 후원으로 크게 중창하여 경내의 건물이 189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거의 타버렸는데, 1613년(광해군 5) 태수 송석조(宋碩祚)가 일관·원준과 함께 재건을 시작하여 1619년 완성했으며, 그뒤 근대까지 여러 차례 중수되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보물, 1963년 지정)·영산전·명부전·만세루(보물, 2021년 지정)·산신각·천왕문·대방·요사 등이 있습니다. 절에 전하는 금동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1963년 지정)·동불암마애불상·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석탑(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73 지정)·범종(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1973년 지정)과 중종과 부도 및 탑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습니다.
부속암자는 현재 4곳만 남아 있지만 19세기 전반에는 50여 개나 되었으며,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 동백나무숲 등의 명소가 있습니다.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선운사 일주문
도솔산선운사(兜率山禪雲寺) 편액
선운사 일주문에 걸려있는 선운사 편액의 관지(款識)를 보면 무자맹동 일동 김충현 (戊子孟冬 一中 金忠顯 1921~2006)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즉, 1948년 음력 10월에 일중 김충현이 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꽃무릇(상사화)
부도밭
부도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백파율사(1767~1852)비입니다. 원형은 박물관에 있고 이곳에 있는 것은 모조비입니다. 이 비가 유명한 것은 비명(碑銘)이 조선시대의 대명필가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필적이기 때문입니다.
좌측 선운사, 우측 석상암
만세루, 대웅보전
만세루 (보물 제2065호)
고창 선운사 만세루는 대웅보전 앞에 세워진 누각으로 예불과 설법 및 법회를 하는 공간으로 쓰였습니다.
정면 9칸, 측면 2칸 규모의 ㅡ(일)자집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 누각 중에 규모가 가장 큽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누각은 조선 광해군 12년(1620) 2층 이상의 대양루로 지어졌으나, 1751년 불타서 영조 28년(1752)에 단층인 만세루를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누각은 일반적인 누각 모습이 아닌 평면이 넓고 높이가 낮은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단순한 구조에 웅장한 모습이지만, 뼈대를 이룬 나무들 가운데에는 다듬지 않거나 기둥 위아래에 다른 것을 이어 사용한 것도 있습니다. 특히 마룻보 가운데 하나는 두 갈래로 갈라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그 끝에 용머리를 조각해서 자연미를 살렸습니다. 이처럼 만세루는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과 이를 극복한 장인들의 슬기로운 건축 솜씨가 돋보입니다.
길이 27m, 너비 11.8m인 석조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 강당(講堂) 건물로 기둥높이는 3.9m이며, 귀기둥은 특히 비대한 자연목을 껍질만 벗기고 다듬지 않은 채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만세루(萬歲樓) 편액
만세루에 걸려 있는 편액
종량 중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특이한 기법도 발휘되어 있어 주목되는데 용이 귀엽고 앙증맞습니다.
구시포(구유)
대웅보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배롱나무
수륙무차평등대재
수륙무차평등대재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현재의 대웅전은 정유재란 때 거의 불에 탄 것을 광해군 때인 1610년대에 다시 건축한 모습이며 그 뒤로도 수차례 수리하였습니다.
선운사 대웅전은 비교적 높은 석축 위에 세웠고 정면이 측면에 비해 2배 이상 큽니다. 기둥의 일부는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여 자연미가 느껴집니다. 전체적으로 외관은 장중하며 안쪽은 단청 벽화가 매우 아름답고 새련된 모습입니다. 천장의 수많은 용들이 구름 속에 몸을 감추고서 선운사를 수호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섬세하고 화려합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목조건축로 다포 형식이지만 맞배 지붕을 얹은 조선 중기의 건물입니다.
측면에 공포가 없는 대신 기둥 2개를 높이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
광해군 6년(1614) 원준이란 분의 글씨로 석봉체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대웅전의 편액 중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소조 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752호)
일반적으로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부처를 모시는 보살을 두는데, 선운사 대웅전은 비로자나불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인 아미타여래불과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모든 부처의 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인 비로자나불과 석가불을 일체로 보는 사상적 배경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운사 대웅보전 비로자나불상 좌우 두 불상에 대해서는 조상(造像) 기록이 발견되기 전에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1998년 비로자나불상 대좌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약사불과 아미타불로 확인되었습니다. 선운사 비로자나 삼불상 뒤에는 후불도로 탱화 대신 1844년에 그려진 벽화가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벽화는 설법도인데 중앙 비로자나불, 향우 약사불, 향좌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모습입니다.
선운사 비로자나 삼불상의 크기는 어떤가? 비로자나불상은 295cm, 약사불상은 256.5cm, 아미타불상은 266cm입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상은 3m에 가깝고 좌우 불상은 약간 작게 표현해 시선이 본존불로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 석가불상이 550cm이며, 부여 무량사 아미타불상이 522cm, 보은 법주사 비로자나불상이 509cm이니 이들 상보다는 작은 편입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합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1614년에 중건한 17세기 건축입니다. 1633년에 흙으로 조성한 약사불, 비로자나불, 아미타불의 소조삼존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삼존불의 존명은 비로자나불 대좌 밑면의 묵서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 세 불상은 모두 2.5m가 넘는 대형 불상입니다.
불상을 제작한 화원은 당대에 이름을 떨치던 조각승 무염 스님이었습니다. 후불벽화는 세 부처님의 대형 불상에 짝 맞춰 각각 독립된 화면으로 그렸습니다.
향좌측부터 아미타여래설법도-비로자나불삼존벽화-약사여래설법도의 형식으로 펼쳤습니다. 벽화 크기는 동쪽의 약사여래도가 472×318㎝, 중앙의 비로자나불도가 476×430㎝, 서쪽의 아미타불도가 495×320㎝다. 중앙의 비로자나불벽화가 가장 큽니다.
비로자나불
선운사 비로자나삼불상은 머리 중앙에 반달 모습을 한 중앙계주가 있고 정상에도 둥근 정상 계주가 표현됐습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상은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은 변형 우견편단을 했고, 좌우 두 불상은 두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의 착의법을 하고 있습니다. 본존불이 우견편단을 하고 좌우 협시불이 통견의 착의법을 한 것은 조선후기 삼불상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두 검지를 세워 오른손 검지를 왼손 검지로 감싼 권인을 하고 있습니다. 약사불은 왼손을 들고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들어 서로 대칭적인 수인을 하고 있는데 이 역시 17세기 삼존불의 특징입니다. 세 불상 모두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데 부은 것처럼 표현한 두 눈은 논산 쌍계사 삼세불상처럼 애처롭게 중생을 바라보고 있는 듯합니다.
고창 선운사 비로자나삼불상은 김제 귀신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 삼불상과 매우 비슷합니다. 연화장세계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동방 만월세계의 약사불,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함께 조성해 조선후기 불교신앙의 형태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웅보전의 주존불인 중앙의 비로자나불과 1688년(숙종 14년)에 조성한 '비로자나불회도'의 후불탱입니다.
비로자나불회도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상단에 사천왕이 배치되었습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가진 비로자나불은 쌍꺼풀진 눈과 내려온 눈썹이 특징적입니다.
색조는 적색, 녹새, 흰색이 주조색이며,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습니다.
비로자나불벽화의 화기에는 제작 연도와 ‘연화질(緣化秩)’을 통해 증명, 화주, 화원 명단 등을 기록했고, 아미타여래설법도와 약사여래설법도의 화기에는 ‘시주질(施主秩)’을 통해 시주자 명단을 밝혔습니다.
화기의 ‘연화질’은 불사에 인연이 된 사람들의 명단 목록을 말하고, ‘시주질’은 불사에 재물 등을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을 말한다. ‘질(秩)’은 차례, 또는 목록의 의미입니다.
약사여래불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모셔진 약사불과 1688년(숙종 14년)에 조성한 후불탱 '약사회상도'입니다. 약사불회도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상단에 2보살과 4제자가 배치되었습니다. 약사삼존도 비로자나삼존과 같이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오른쪽에 모셔진 아미타불과 1688년(숙종 14년)에 조성한 후불탱인 '아미타회상도'입니다. 아미타불회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2보살과 2제자, 팔부중 가운데 2위가 배치되었습니다.
색조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녹색 계열과 흰색 등이 많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푸른 느낌이 많이 돕니다.
선운사 대웅보전 후불벽화 속 협시보살
벽화마다 부처님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이 화면의 중심을 이룹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네 분씩 대칭 구도로 배치했습니다. 벽화마다 9분이 등장합니다. 벽화별 존상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향좌측(서) 아미타불설법도: 대세지보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보살 2, 가섭, 아난, 팔부신중 2.
△중앙 비로자나불삼존도: 보현보살-비로자나불-문수보살, 가섭, 아난, 사천왕.
△향우측(동) 약사불설법도: 월광보살-약사여래-일광보살, 보살 2, 제자 4.
세 폭의 벽화는 구성에서 같은 구도와 인물 배치를 했습니다. 화면의 중심부 전면에 부처님을 압도적으로 크게 그린 후 남은 여백 좌우와 상단에 꼭 필요한 성중들로만 부처님을 원형으로 빙 둘러싸는 배치 구도로 통일했습니다.
이 전체 구성에서 특별한 점은 문수, 보현 두 보살의 신광에 있습니다. 다른 보살에는 둥근 두광만 있을 뿐 몸에서 발광하는 신광은 없습니다. 신광은 부처님의 32상 80종호의 하나로 특별한 위신력입니다.
세 폭의 삼불벽화는 저마다의 시주자에 의해 조성됐습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벽화는 고창 마명에 사는 오경장이라는 사람이 장수와 부귀, 다남자 득남을 발원하는 단독 시주로 마련됐습니다. 향좌측의 아미타여래설법도는 고창의 관직에 있는 사람과 그 부인 등 민간인 중심의 시주로 이뤄졌고, 향우측의 약사여래설법도의 시주자는 성찬‧경찰 등 20명의 이름이 모두 두 자인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주자들은 비구의 노소와 시주의 대소를 떠나 불사 인연에 참여한 모든 사람이 천수와 복을 누리다가 죽으면 연화대에 올라 극락왕생하기를 발원하고 있습니다.
신중탱
대웅보전 신중탱화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을 묘사한 불화입니다. 신중탱화이 호법신들은 우리나라 재래의 신들이 많은데, 이는 재래 토속신앙의 불교적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백의수월관음도
대웅보전 내부 후불벽 뒷면에는 중앙에 백의수월관음도와 좌·우측에 나라연금강역사와 밀적금강역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관음전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최근에 조성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과 천수천안관세음 탱화, 그리고 1991년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있습니다.
전에 모셨던 지장보살상(보물 제279호)은 지장보궁에 봉안되어 있습니다.
다른 전각과 달리 툇마루가 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 편액
지수 이학용(止修 李學庸 1916~2007)이라는 분의 글씨로 근래에 쓴 글씨입니다.
천수관음보살상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은 수많은 손과 눈으로 무한한 자비를 베풉니다.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관세음보살의 대자대비가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된 보살로서 대표적인 관세음보살의 화신입니다.
천은 광대무변함을 나타내고 천수상은 보통 42개의 손과 27개의 얼굴을 지닌 형상인데, 42개의 손 가운데 합장한 손을 제외한 40개의 손에는 저마다 소지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950여 개의 손은 광배 상태의 작은 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지장보궁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에 풍판이 있는 건물입니다.
지장보궁은 돌아가신 조상이나 지인의 넋을 기리고,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곳입니다.
명부전도 같은 의미의 공간입니다.
지장보궁(地藏寶宮) 편액
금동지장보살좌상
이 지장보살상은 도솔암의 금동지장보살상과 함께 그 예가 드문 지장보살좌상의 하나로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15세기 무렵 보살상의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면서, 당시 지장 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작품입니다.
청동 재질의 표면에 도금을 한 높이 1m의 이 금동지장보살상은 머리에는 마치 모자와 같은 두건을 쓰고 있으며, 이마에 두른 굵고 좁은 띠가 귀를 덮고 배에 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두건을 쓴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도상적 특징으로 현재 남아 있는 고려불화에서 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금동지장보살좌상 (보물 제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청동표면에 금칠을 한 지장보살상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고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를 말합니다.
이 불상은 일제 강점기에 도난을 당하게 되는데, 불상의 영험함으로 인해 다시 선운사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도난당한 지장보살상은 불상 주인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 " 나는 본래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 달라" 라고 하였으나 불상의 주인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점차 가세가 기울고 병도 들게 되자 불상 주인은 불상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하기에 이릅니다. 그 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도 같은 일이 반복되자 마지막으로 불상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고창 경찰서에 신고하고 반환함으로써 선운사 지장보살은 도난당한 지 2년 만에 선운사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1938년 11월 반환 당시를 기념하는 사진도 있답니다.
동상실
동상실(東上室) 편액
능인각
능인각(能仁閣) 편액
종무소
천왕문
동방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으로 항상 손에는 비파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남장증장천왕은 불자들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시켜 주며, 들고 있는 금강검으로 불자들의 남아있는 번뇌를 끊어 지혜가 생기게 합니다.
다문천왕
지국천왕
서방광목천왕은 크게 부릅뜬 눈으로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나쁜 것을 물리치기 위해 손에 용과 여의주를 쥐고 있습니다. 여의주는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 용을 보내 비를 뿌리는 등의 벌을 주기도 합니다.
북방다문천왕은 사천왕 중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고 불자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신입니다. 한 손에는 보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보당을 들고 있습니다. 보탑은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인간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보당은 부처님의 가사를 뜻하는 것으로 이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증장천왕
광목천왕
천왕문
도솔산 선운사(兜率山 禪雲寺) 천왕문(天王門) 편액
선운사(禪雲寺) 편액
아래 "선운사(禪雲寺)" 편액은 효봉 여태명(曉峯 余泰明, 1956~ )의 글씨고, 편액 좌측에 정유추일(丁酉秋日)로 보아 2017년 제작된 근래의 작품입니다.
천왕문(天王門) 편액
선운사 천왕문에는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가 쓴 '천왕문'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의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원교(圓嶠), 1755년(영조 31)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으로 큰아버지 진유(眞儒)가 처벌될 때 이에 연좌, 회령(會寧)에 유배되었으나 학문으로써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자 다시 진도(珍島)로 옮겨져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정제두(鄭齊斗)에게서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令翊)에게 전수하였으며, 원교체(圓嶠體)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고, 조선의 서예중흥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저서로 "동국악부(東國樂府, 원교집선(圓嶠集選), 원교서결(圓嶠書訣)" 등이 있고, 글씨에 "영의정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등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