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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시와표현 신인상 당선작] 려원 이도훈
포상기태(胞狀奇胎) 외 4편 / 려원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내게
의사는 올챙이 알 수정이라고 해요.
어릴 적 어느 봄길에서 목이 말라 논두렁 물을 마셨죠. 할머니한테 혼나고 혼나는 일은 꼬물꼬물 꼬리를 키워요. 개울가나 논에서 물을 함부로 마시지 말라던 할머니.
꼬리는 함부로 몸을 흔들어요.
개구리 알이 몸에 들어가면 아기 대신 개구리 알을 낳는다고 해요. 할머니가 태어난 작은 섬마을에는 개구리 알을 낳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해요.
아랫배를 뒤적거리는 의사, 태반만 보이고 아기가 보이지 않아요.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려요 몽글몽글하게 보이는 것이 포도송이 같아요. 아니 개구리 알이어요.
의사의 입속에는 붕대와 메스가 있어요.
포상기태입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개구리 알 임신이에요.
꼬리는 다리 속으로 숨고 다리는 폴짝, 뜀박질 속으로 숨어요.
자궁 안이 아기 대신 작은 개구리 알들로 꽉 차 있어요. 무심결에 마신 꼬리가 다리 속으로 숨고 아기는 이미 물거품처럼 사라졌어요.
*포상기태 : 태반의 영양막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질환.
무화과
무화과가 익을 무렵은
칭얼거리는 계절이에요.
그래서 무화과나무에서 젖 냄새가 나요
우린 젖꼭지 나무라고 불렀지요.
열매를 따자 꼭지에서 울음이 터졌어요.
끈적끈적한 우윳빛 액체가 방울방울 솟아요.
마루에 앉아 동생에게 젖을 물리던
엄마 생각이 나요
말랑말랑한 무화과를 부드럽게 한입 물었죠.
칭얼거리고 싶었죠.
열매 안에 숨은 꽃
달달함이 입안에서 뛰어놀고 있어요.
엄마 살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모두 틈의 냄새들이에요.
틈틈이 틈을 먹고 자라서
과일 안을 붉은 꽃술이 꽉 채웠어요.
無花果라고요?
꽃을 따라왔다가
혼자 남겨지는 열매가 있다지만
끝까지 남아서
열매를 토닥거리는 꽃인걸요.
바지락 끓이는 여자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여자는 바지락을 씻어요.
조개들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어요.
더 이상 밀물이 들지 않는 해안도 있다고
중얼거리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려요
결막염 걸린 눈은 수평선에 걸린 노을처럼 붉어요.
조바심이 서서히 끊어 오르기 시작해요
거품을 뱉어낸 조개들이
입을 벌리고 부글부글 소리를 내요
밸브를 잠그고 깨소금을 뿌려요
아뿔싸, 국물을 떠올린 숟가락에
가슴에서 부글부글 올라온 눈물이 뚝 떨어져요
손끝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뚝 뚝 바닥으로 이중 점프를 해요
짠물을 목구멍으로 흘려보내요
반지 자국은 조각칼로 파낸 판화처럼
약지 손가락에 깊게 새겨져 있어요.
어느 물때도 다 자국이 남아요.
그녀는 식탁에 앉아 조갯살을 발라내요
떨어지지 않는 살점은 찢어져요
방문을 열지 않는 아이처럼
열리지 않는 조개는 불안해요.
알맹이를 내놓은 껍질들을 땅에 버려요
식탁 위 이혼서류가
바지락 국물에 젖어가고 있어요.
썰물은 잘 찢어져요
해안선은 두 세계가 찢어진 곳이에요.
서류는 이미 만조로 깊고 외딴 섬처럼
서명란의 빈칸이 둥둥 떠다녀요.
달팽이
마을의 우물 속엔
파란 햇살이 들어있었다
이끼 낀 돌멩이 하나
느릿느릿 기어오르고 있었다.
우물의 수위(水位)를 갉아먹는
파란 털이 뒤덮인
연체동물이 있었다.
그것은 시간의 척도
가뭄과 메아리와
우물의 수원지(水源池)
돌멩이는 우물을 기어올라
우물 밖의
축축한 마을이 되려고 했다.
이끼 꽃이 피고
우리는 그 꽃을
달팽이의 눈이라 불렀다.
우물들은 모두 자웅동체(雌雄同體)
장마를 산란하기도 한다.
내 어릴 적 어느 날
달팽이는 기어이 우물 밖으로 기어 나오고
마른 바닥으로 고양이와
흐린 달이 빠졌다.
그리고 뼈만 남아있었다.
몽골리즘
*
겨울방학이 끝나고 고등학교 입시시험 삼 교시 나는 시험 감독을 위해 교실에 서 있었다. 책상에 앉아있는 아이가 쳐다보았다. 어리둥절한 지문(誌文)들이 찡그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넝쿨이 있고 넝쿨에서 계절도 없이 예쁜 꽃이 피고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모두가 닮으려 모여든 얼굴, 붉고 작은 입술 사이에서 아이의 말이 새어 나왔다.
언니, 언니
꽃말이었다.
*
어느 토요일 오후 원통 터미널에서 혀를 입에 말아 넣기 벅찬 듯 조갯살처럼 밖으로 내민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중학생 덩치에 서 있는 갓난아이.
과자를 사 주었는데
종일 터미널만 맴돈다는 아이는
서울행 버스를 탄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인종과 상관없이 몽골인을 닮았다는 얼굴, 서양에서는 이 증세를 몽골리즘이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려원_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전 원통고등학교 국어교사. 전 아동복지시설 주말프로그램 문학강사.전 꿈다락토요문화학교 문학강사. 현 탁틴학원 국어 논술 전문연구소 원장
서류가방과 이별하다 외 4편 / 이도훈
비트겐슈타인과 쉼보르스카를 읽으려다
오랜 친구 샘소나이트를 떠나보냈다
언젠가 야수로 돌변한 가방이야기를 읽은 적은 있지만
그가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한 회전하는 2호선 전철을 갈아타고 있을 때
한 손에 매달려 종일 따라다니고 있는
또 누군가의 시집을 바라보며
그에게도 잠깐이나마 쉴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
나도 잠깐 어디에 기댔으면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말 없는 내 친구도 좀 쉬게 하려던 때였다
원래 가방들은 내성적인 사각이라
묵묵히 한 줄의 이빨들을 열수도 있겠지만
수정하려고 인쇄해 놓은 궤양의 흔적을 보고
내가 시인인 줄 알려줄 테고
수첩 속 일과표는 내가 어디쯤 있을지 말해주겠지만
웬걸 이리 많이 먹어치웠냐고 타박도 하겠지만
낡고 허름한 겨울 같아서
곳곳에 하얀 가시가 도사리고 있고
만질 때마다 타다만 재가 묻어나 아무도
내 가방을 열어보지 않을 것
그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젯밤 시작노트를 꺼내 논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는 모르겠고
가끔 터진 실밥을 태우는
불 고문을 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더는 짐꾼 노릇을 안 해도 돼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선반 위에서나 분실물센터 창고에서
곰곰이 긴 시간을 취할 수 있어 참 다행이란 생각이지만
뻣뻣한 손때가 손끝에서 너무 가볍고
떠나간 역할을 위해
몇 개의 손을 더 구입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너무도 사소한 별에서 산다
집으로 돌아가는 8차선 도로에
은하수가 흐른다
이 시간 지구는 발장단도 못 되는 발끝의 속도로
돌다 서다를 반복하고
지구의 어딘가에 있긴 있는 집과
이 막막한 정체의 거리는 또 얼마일까
모든 집들은 흐르는 중이고
흘러가는 집을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
멈출 수 없는 별이 더 밝게 달린다
내어준 꼬리를 밟고
더 긴 꼬리를 내어주는 이어달리기
모래였는지 바람의 차선이었는지
먼 길을 가는 끝없는 낙타행렬을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꽁무니에서 공전하는 별들
접촉사고로 부서진 별에서 두 사람이 내리고
견인차가 역주행으로 달려오고
창문을 내리고 물끄러미 구경하는
별의 운전자들
한 무리의 별이 고가를 오르고
또 다른 무리가 그 밑을 돌아나간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숨겨진 낙원이 있을까
너무도 사소한 별들에 끼여
어디로 가야 빠를까 갈림길에 선
급하게 끼어드는 별 하나
질서정연한 귀가와 출근의 은하수에 섞여
이탈하지 않는 한 점이 되기를 바라며
광속으로 전송되어온 문자 하나를 열고 있다
인류의 생존을 위하여
서기 2018년 인간 저항군의 리더 존 코너는 기계군단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 중이다 빛을 잃어버린 시커먼 하늘과 거리는 포성과 화염뿐 어깨에 멘 총이 시름시름 처진다 온몸에서 검은 그을림이 새어나오고 발가락은 감각이 없다 그의 눈에서 살기가 느껴질 때 난 TV를 끄고 집을 나와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인류의 생존이 걸린 이 시점에
거리는 깨끗하고 포성도 화염도 총을 멘 사람도 없다 나는 날아드는 서류를 피해 자리에 앉았다 책상은 살벌한 천연색 포스트잇이 점령한 지 이미 오래 빈틈을 찾아 몇 개를 더 붙였다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린 잔인한 일격이었다 밤늦게 쉬어 빠진 목을 비틀어 가래를 뱉는다 지쳐 곯아떨어진 가방을 끌고 차에 오른다 머리카락은 너덜너덜 진저리를 친다
나는 인조인간이 분명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주머니 속 구겨진 영수증과 책상 위 고지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통장의 잔액에서 뺄셈을 하며 나는 어떤 유형의 인조인간일까 생각한다 결국 이 뺄셈이 언젠가는 인류를 멸망시키겠지
이제 몇 년 남지 않았다 가방 대신 총을 메고 파멸이 난무하는 어느 황폐한 도시에서 기계군단과 혈전을 벌여야 하는 날들에서 격렬한 하루를 뺀다
하루를 시작하는 명상
기억은 잃어버린 다리처럼 저렸다 멍하게 앉아있는 이 명상은 어느 악몽의 뒤끝일까 문 밖에선 칼춤이 벌어졌다 춤사위에서 뛰쳐나온 칼날이 사방으로 박히며 그릇들을 들볶아댄다 칼날이 묻은 아침은 껄끄럽게 입안을 들쑤실 것이다
옷을 추슬러 거실로 나온다 잠이 덜 깬 옷자락은 길게 미끄럼을 탔다 소파에 앉으면 싸늘하게 목덜미를 겨눈 시간의 칼날 얼른 목을 서둘지 않으면 싹둑 잘리리라 아침을 맴도는 입김은 짙은 안개가 되어 발목까지 쌓였다 안개는 부두를 숨기고 있었다
출항을 준비하는 배는 출렁거렸다 부두를 떠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이다 선장은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 중, 뱃머리에서 피운 담배 연기가 길게 침묵한다 그 끝자락에서 뛰어노는 햇살만이 해맑다 빡빡하게 조인 주머니 단추를 풀면 닳아빠진 수첩 하나가 기웃, 고개를 내민다
수첩을 넘기기가 두렵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 오늘 해야 할 일들, 빼곡히 꽂힌 칼을 하나씩 뽑아본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늘 낯설다 배 밑바닥에서 토해내는 헐벗은 엔진 소리를 장단으로 구두는 한동안 견딜 것이다 도로는 파도보다 빠르게 달려왔다 해탈한 듯 따라 웃는 하루가 시작된다
숨은그림찾기
사람들은 모른다
언제부터 저 구석들이 꾸역꾸역 살이 올랐는지
숨은 그림들이 구석을 먹어 치우는지
구석이 그림들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지
어색한 회색 다리 위에서
구름에 칼집을 내면 쏟아지는 빗줄기들
가느다란 꼬챙이를 하늘에 꽂으면
햇살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 햇살을 감고
가냘픈 희망이 칭칭 감긴다
먼 산을 뒤로하고 하얗고 파란 투명판을
옆구리에 끼워나가면 산은 지워지고
살진 구석들이 꿈틀거리며 그린 감청색 유화
얼룩덜룩 알록달록
보이기도 하고 가린 것도 같은
희멀건 투명판을 떼어내면
고가 위로 보였던 산마루
벌겋게 익은 하루를 삼켜버리고
저 몸속엔 해가 몇 개나 들어있을까
지워져 간 산등성은 누가 다시 그려줄까
숨은 그림 속 노을을
아이들은 기억할 수 있을까
가림 막에 그려진 풍경들에도 꽃피는 봄
그렇다면 곧 다가올 여름은 또 어떤 것들의 가림막일까
저 빌딩들은 노을은 화단들은
무엇들을 가리며 펼쳐져 있는 것일까
이도훈_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현 영재리더학원장
심사평 / 여성성의 위기와 일상성의 허무
제5회 신인상 당선작으로 려원의 「포상기태」 외 4편과 이도훈의 「서류가방과 이별하다」 외 4편을 선정하였다. 여느 응모 시기보다 많은 작품들이 투고된 이번 심사는 워낙 우수한 작품들이 많아서 당선작을 선정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섬세한 예심과 엄정한 본심을 통과한 위 두 분의 작품은 서로 상이한 맥락에서 한국시단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려원의 작품들은 여성성의 위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표제시 「포상기태」는 일명 ‘개구리알 수정’으로 불리는 포상기태를 소재로 삼고 있다. 비정상적인 임신으로 인하여 태아를 잃게 되는 포상기태의 병적 징후는 여성성의 생물학적 위기와 이어진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고통과 환멸의 과정을 특유의 기지와 재치로 희화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바지락 끓이는 여자」에서 이혼서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바지락을 씻는 여자의 모습은 여성성의 존재론적 위기를 보여주지만 이러한 위기가 바지락 국물에 젖어가고 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독특한 시선에 믿음이 갔다. “마루에 앉아 동생에게 젖을 물리던 / 엄마 생각”(「무화과」) 속에 깃든 모성의 지향성은 려원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축이 될 것이다.
이도훈의 작품들은 일상성의 허무와 그 극복의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표제시 「서류가방과 이별하다」는 잃어버린 가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시인이 느끼는 가방의 아우라는 가방 자체에 있기보다는 가방 속에 깃든 시인의 환유에 연결된다. 누군가의 시집, 궤양의 흔적, 시작노트 등은 가방의 아우라를 현현시키는 주요한 이미지들이다. 이 아우라는 허무를 보여주는 동시에 허무를 승화시킨다. 「너무도 사소한 별에서 산다」에서 “모든 집들은 흐르는 중이고 / 흘러가는 집을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고 한 것이나 「하루를 시작하는 명상」에서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늘 낯설다”고 한 것에서 보이듯, 허무는 항상 내면의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이러한 허무를 극복한 곳에서 “해탈한 듯 따라 웃는 하루”를 발견하는 것은 이도훈 시의 미덕일 것이다.
위기와 허무에 깃든 열렬한 시정신을 함의한 두 신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시인의 운명과 선택에 관하여 생각해본다. 두 시인은 사각의 연옥에 깃든 고난의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 과정이 운명에 가깝든 선택에 가깝든 간에 이제는 오직 시의 성전을 향해 정진할 일만 남았다. 치열한 시정신을 통해 뚜렷한 개성을 지닌 시인으로 대승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공광규 권현형 김종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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