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정의 <야뇨증을 보이는 해바라기> / 이상윤
침상 모퉁이에
거기까지 현실인 모퉁이에 기대어
빤질빤질한 구름의 순도를 생각한다
그 순간 나는, 모가지가 긴 얼룩을 훔쳐 달 수 있다
해 뜨고 바람이 부는 오늘은
구름에 닿기엔 너무 맑은 날씨, 가늘고 긴
수분함유율 70% 흐르고 싶은 몸이 쏠리는 물냄새
불가능은 없다 물론, 실현 가능한 연금술도
구름판을 밟고 뛰어올랐지만
끝내 구름에 코가 걸린 클레오파트라
삶은 달걀에 얼굴을 그릴 동안(해바라기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목이다)
구름 아래, 침대 모서리에서
수분함유율 70%의 얼룩이 펼쳐놓는
클레오파트라를 엿본다
어느 모가지들을 붙든 세계인지
새카만 씨앗들은
-2015년『문예바다』봄호
[단평]
지난 계절의 시 중에 임재정 시인의 '야뇨증을 보이는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만의 포즈가 있을 것이다. 독자의 이해를 구하려 한다면 독자주의적 작품일 것이고, 작가의 창작적 관점에 가치를 둔다면 작가주의적 작품일 것이다.
임재정 시인의 시들은 늘 그렇듯 독자주의보다는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복고적 양식으로서의 순수 서정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들을 접할 땐, 우선 시제의 상징성과 작품에 대한 시인의 개인적 주관성을 탐색하게 된다. 물론 탐색이 해결해주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런데도 더듬어보려는 것은 나름 작품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야뇨증'이란 무엇일까? 의학용어로 '애노증'이라고도 하는데 이 증세는 방광조절 능력이 완성되는 나이를 지나서 본의 아니게 소변을 배출하는 현상을 말한다고 한다. 보통의 경우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 소변이 무의식적으로 배출되는 상태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치료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야뇨증을 말할 때는 5살 이상의 나이에서 비뇨기에 특별한 이상이 없고 낮에는 소변을 잘 가리다가 밤에만 오줌을 싸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정신적 스트레스나 심리적 갈등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야뇨증을 보이는 해바라기, 라는 작품에서 왜 시인은 야뇨증의 주체를 해바라기로 설정했을까? 해바라기는 여기서 누구를 투영한 것일까? 그래서 시인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너무 광의적 확장은 삼가고, 일단 해바라기를 단순한 객관적상관물이 아닌 화자, 더 나아가 시인 자신으로 세워두고 접근해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시인이 야뇨증을 보인다는 말인데, 위에서 언급한 야뇨증에 대한 원인에 비춰보자면 시인이 정신적 스트레스나 심리적 갈등에 억눌려 있다는 의미를 포함하게 된다. 시인은 1연에서 "침상 모퉁이에/ 거기까지가 현실인 모퉁이에 기대어", "구름 아래, 침대모서리에서"처럼 모퉁이나 모서리 같은 극단적인 포지션을 작품 속에서 반복하여 노출시킨다. 모퉁이나 모서리란 3면이 허방과 접해 있는 위태한 상황을 말하거나, 물리적 충돌에서 가장 다치기 쉬운 지점을 의미한다. 이 지점이 시인이 탈피하거나 극복하고 싶은 불편함일 것이다.
"수분 함유율 70%", "수분함유율 70%의 얼룩이 펼쳐놓은"이란 부분도 들춰봐야 할 부분이다. 인간은 70%가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수분함유율 70% 흐르고 싶은 몸이 쏠리고 싶은 물 냄새"이란 표현을 뒤집어보면 100%의 완전한 상태에서 30%가 충족되지 못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애초에 100%를 채우기 위해 부족한 30%를 갈구하는 존재, 다시 말해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불편함을 끌고 가야 하는 결핍된 존재라는 것이다. 야뇨증과 태양을 갈구하는 해바라기를 하나의 의미망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건 그래서 가능하다. 야뇨증이라는 것이 부지불식간에 흘린 것이 아니라, 애초에 30% 누수된 상태로 설정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야뇨증이라는 것이 태생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원죄인 것이다.
시인은 "구름판을 밟고 뛰어올랐지만 끝내 구름에 코가 걸린 클레오파트라"에서 처럼 30% 수분을 채우기 위해 구름판을 밟고 올랐지만, 구름에 코가 걸리듯 한계를 극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 노력의 한계성에 결국 좌절하는 인간 군상의 상징으로서 클레오파트라를 내밀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현대인들의 현주소를 수소문할 수 있지않을까 싶다. 마치 다시 굴러 떨어질 돌을 밀고 오르는 시치푸스처럼 삶이라는 것이 부조리 그 자체임을 말해주고 있는 바로 그 지점. 여기서 우리는
임재정 시인이 해바라기를 야뇨증의 주체로 왜 설정하였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태양을 따르다 저녁이 되면 고개를 숙이고 다시 또 해가 뜨면 그 해를 쫓는 반복된 부조리한 삶의 연속에 해바라기만큼 어울리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야뇨증을 보이는 해바라기'라는 이 시제가 곧 시인의 현재의 다른 이름일거라는 막돼먹은 결론을 내려 본다.
<이상윤>. 2013년『시산맥』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