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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제4회 서귀포문학작품상 동화 당선작
남극노인성을 찾아서/노수미
“왜 자꾸 따라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획 돌아보았다.
내 뒤를 바짝 쫓아오던 은찬이가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나는 다시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녀석의 발소리가 등 뒤에서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왜 따라오냐고?”
나는 은찬이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헐떡거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내가 올라가고 있는 이 산 그러니까 삼매봉에 계단이 너무 많았던 거다.
‘인터넷에는 금방 올라간다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금방’과 내가 생각한 ‘금방’이 다르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가벼운 산책 코스라고 해서 물도 챙겨오지 않은 게 후회되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확실히 별이 많았다.
‘어떤 게 남극노인성일까?’
나는 고개를 한 바퀴 돌려 별들을 쭉 둘러봤다. 그러다가 은찬이 녀석이랑 눈이 마주쳤다. 은찬이는 뭐가 좋은지 나를 향해 씩 웃었다.
‘에잇! 따라오든가 말든가 나는 몰라.’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가기로 마음먹었다.
휘릭!
풀숲에 있던 뭔가가 바로 내 옆에서 확 날아올랐다.
“엄마야!”
내 입에서 겁에 질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손이 저절로 얼굴을 가렸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지고 말았다.
툭 톡 투둑 톡 톡…….
스마트폰은 나무로 된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내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런 날 깨운 것은 은찬이였다.
“누나! 내가 주워올게.”
은찬이가 나무 계단을 따라 다람쥐처럼 빠르게 내려갔다. 은찬이는 이 산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한참을 굴러떨어지던 내 폰을 은찬이가 낚아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부리나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리고 은찬이의 손에 들린 폰을 뺏듯이 가져왔다. 나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이것저것 눌러보았다.
‘설마!’
그러나 그 설마는 진짜가 되었다. 스마트폰이 그대로 멈춰버린 거다. 나는 황급히 옆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렀다.
‘안 돼!’
버튼을 아무리 꽉 눌러도 스마트폰 화면은 바뀌지 않았다. 완전히 고장 나 버린 거였다.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폰이 고장나다니……. 엄마에게 전화는 어떻게 하지? 엄마랑 아저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까지 왔건만 이젠 모든 게 다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린 거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누나! 괜찮아?”
은찬이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은찬이의 손을 뿌리쳤다.
“만지지 마!”
그러나 은찬이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내 소맷자락을 다시 부여잡았다.
“너 왜 그래?”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은찬이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은찬이 녀석이 쫓아오지만 않았어도 좀 더 빨리 산에 올라갔을 거고, 아까 그 이상한 동물도 만나지 않았을 거였다. 은찬이만 없었다면 스마트폰이 고장 나지도 않았을 거다.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은찬이를 향해 앙칼진 소리를 내뱉었다. 은찬이는 소처럼 커다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미안해.”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누나가 무서울까 봐…….”
은찬이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며 운동화 앞코로 흙바닥을 이리저리 툭툭 쳤다.
그때도 그랬다. 엄마랑 아저씨가 결혼하던 날 말이다.
가족사진을 찍는데 아저씨 옆에 서 있던 은찬이는 빨간 카펫에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툭툭 쳐대기 바빴다.
“신랑 아드님. 잠깐만 가만히 계세요.”
사진사 아줌마가 몇 번이고 주의를 줬건만 은찬이는 발을 가만히 놔두지 못했다.
나는 빨간 구두를 신은 내 발로 은찬이의 발을 꽉 밟아버리고만 싶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결혼식 내내 엄마랑 나를 마뜩잖게 쳐다보는 은찬이 할아버지의 눈길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으니까.
“야! 가만있어.”
나는 작은 흙먼지를 날려대는 은찬이의 발을 내 운동화 바닥 부분으로 꾹 눌렀다. 은찬이의 발이 몇 번 꿈틀대다가 움직이는 걸 멈췄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고는 그대로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밟고 올라왔던 나무 계단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인터넷에서 하도 많이 검색해봐서 그런지 낯설지 않았다. 나무 계단 옆 둥그런 전등도 눈에 익었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스마트폰이 고장 났으니 말짱 헛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올라올 때는 힘이 넘쳤던 두 다리가 어느새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계단을 몇 개 내려갔을 때, 갑자기 등 뒤가 밝아진 느낌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의 손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이었다.
“그거…… 뭐야?”
“내 폰.”
“니 꺼라고?”
“어. 할아버지가 사줬어.”
은색으로 번쩍거리는 스마트폰을 보니 갑자기 입에 침이 고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 영상 통화…… 돼?”
“그럼! 할아버지가 신상으로 사줬어.”
얼핏 봐도 내 것보다 훨씬 비싸 보였다. 나는 은찬이 쪽으로 다가가 별로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진짜야. 할아버지가 비싼 거랬어.”
“야! 누가 여덟 살 한테 비싼 폰을 사주냐? 너희 할아버지가 아무리 돈이 많…….”
나는 순간 손바닥으로 내 입을 막았다. 은찬이의 할아버지가 부자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걸 은찬이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은찬이도 엄마가 돈 때문에 아저씨랑 결혼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낯선 할아버지가 엄마가 일하는 조명 가게를 찾아왔을 때, 나는 학원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학원이 끝나면 가게에서 숙제하다가 엄마랑 같이 집에 가는 게 내 일과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가게 안 공기가 이상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벌을 받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엄마였다. 엄마의 얼굴은 귀 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나는 엄마 바로 앞 의자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흘끗 봤다. 할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린 채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나는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 그 할아버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얼굴에 인상을 팍 쓴 채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물었다.
“네가 그 애냐?”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양손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때였다.
아저씨 그러니까 조명 가게 사장님이 헐레벌떡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여기는 어쩐 일로……?”
할아버지는 아저씨를 보더니 그대로 일어섰다. 그리고 아저씨랑 같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할아버지가 커다란 망고 농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윤미 이모한테 전해 들었다.
“언니! 우리 사장님 아버지가 그렇게 부자라면서요. 언니가 그런 부잣집으로 시집가다니……. 완전 팔자 폈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해.”
엄마는 윤미 이모한테 전구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나 엄마 얼굴은 불 꺼진 방안처럼 어둡기만 했다.
“영상 통화되는지 한번 보자.”
나는 은찬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진짜 된다니까. 아빠랑 맨날 얼굴 보면서 전화하는걸.”
은찬이를 향해 다가가던 내 발이 흠칫 멈췄다. 아저씨랑 같이 산 지 일 년쯤 되었지만 나는 아저씨가 은찬이랑 영상 통화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제 통화하는데?”
“밤에.”
“밤?”
“어. 아빠 퇴근하고 나면.”
나는 이 늦은 밤에 은찬이가 깨어 있던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조명 가게는 아홉 시에 문을 닫는다. 아저씨가 뒷정리하고 집에 오면 열 시가 넘는다. 그때는 이미 내가 자고 있어서 은찬이가 아저씨랑 영상 통화하는 걸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다.
그나저나 은찬이는 이렇게 늦게 자도 되는 걸까? 할아버지는 일찍 주무시던데…….
나는 은찬이네 집을 다시 떠올려봤다. 그 집은 은찬이랑 할아버지랑 둘이 사는 집이다. 나는 그제부터 그 집에서 묵고 있다. 보호자 없이 비행기를 타는 ‘비동반 소아 서비스’로 나 혼자 제주도에 온 것이다. 물론 내 목적은 남극노인성을 보기 위해서다.
나는 별을 볼 수 있는 시간을 조사해서 오늘 밤을 디데이로 정했다. 그리고 밤 열 시가 되자 현관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온 거다. 물론 은찬이가 마당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치 내가 몰래 빠져나갈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은찬이가 내 옆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큰 소리로“누나! 어디가?”라고 물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깰까 봐 그대로 골목길로 내달렸다. 제주도 집들은 대문이 없어서 도망가기 좋았다. 그러나 붙잡히기도 좋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은찬이가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누나! 어디가?”라고 자꾸 물어봤으니 말이다. 나는 스마트폰 지도 앱이 알려주는 데로 달렸다. 그 결과 이 산 중턱까지 헉헉대며 올라온 것이다.
나는 은찬이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그리고 아무 버튼이나 눌러봤다. 선명한 화면이 내 꺼랑은 확연히 달랐다.
“나 이것 좀 빌려줘.”
말은 부탁이었으나 목소리는 내 귀에도 협박처럼 들렸다. 만약 빌려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은찬이는 씩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도 데려가.”
“어딜?”
“누나 가는데.”
“나 꼭대기까지 갈 거야. 여기 끝에 정자 있다며. 거기 가는 거야. 넌 힘들어서 못가.”
“그럼 나도 안 빌려줄 거야.”
은찬이가 내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얼른 위쪽으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은찬이가 내 손에서 폰을 뺏으려고 하자, 내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내 몸은 머리가 시키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내가 도망을 간 것이다.
“누나! 같이 가!”
은찬이의 고함이 저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긴 다리로 계단을 두 개씩 밟으며 오르기 시작했다. 은찬이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은찬이는 분명히 자기 할아버지한테 말할 거고 그러면 할아버지가 엄마를 더 미워할 테니까. 나는 정신없이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때였다.
“으앗!”
은찬이 목소리였다. 순간 내 다리가 저절로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은찬이가 저 아래쪽에서 바닥에 엎드린 채 누워있었다. 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은. 찬. 아.”
나는 한 글자씩 천천히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녀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괜…… 찮…… 아? 일어나…… 봐.”
나는 더듬거리며 계속 은찬이를 불렀다. 그러나 은찬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떡해!”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은찬이가 크게 다친 게 분명했다. 내 심장이 어마어마하게 쿵쾅대기 시작했다.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렸다. 은찬이가 정신을 완전히 잃은 게 아닐까? 아니면 더 나쁜 일이? 내 머릿속에는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도였다.
“아빠! 제발 은찬이를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빠!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시죠? 은찬이를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은찬이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미끄러지다시피 하며 내려간 후 은찬이를 세차게 흔들어댔다.
“은찬아! 은찬아!”
그때였다. 바닥에 고개를 묻고 있던 은찬이가 얼굴을 슬쩍 들었다.
“누나.”
은찬이가 흙 묻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앞니 빠진 녀석의 얼굴이 이보다 더 반가운 적이 있었던가! 나는 손으로 심장을 쓸어내렸다.
“너 죽을래? 지금 장난친 거지!”
은찬이는 절대 아니라는 듯 옆에 있는 나무를 가리켰다.
“진짜로 넘어졌다고.”
은찬이가 가리킨 것은 땅 위로 드러나 있는 나무뿌리였다. 그곳에 발이 끼어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거다. 나는 은찬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은찬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대고 누워버렸다. 나무들 사이로 검은 밤하늘과 별들이 살짝 보였다. 좀 전에 뛰어 올라올 때는 잘 몰랐는데 공기가 상당히 찼다.
나는 그제야 얇은 옷을 입은 은찬이가 걱정되었다. 녀석은 마당에 있다가 나를 쫓아온 거라 얇은 조끼 차림이었다. 나는 패딩을 벗어서 은찬이에게 건넸다.
“입어.”
“누나는?”
“나는 안 추워. 서울이 여기보다 훨씬 춥잖아. 나는 거기에 길들어져 있어서 괜찮아.”
은찬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패딩의 지퍼를 잠가주고 모자까지 씌워주었다.
“너는 그냥 내려가.”
“싫어. 나도 누나 따라갈래.”
은찬이가 또다시 억지를 부렸다.
“왜 자꾸 따라오는데?”
나는 은찬이에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누나랑…… 친해지고 싶으니까.”
은찬이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누나가 우리 집에 온다고 해서 나랑 할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아? 우리가 맨날 맨날 청소도 하고, 누나가 잠잘 방 보일러도 며칠 전부터 틀어놨단 말이야. 그런데 누나는 스마트폰만 보면서 노트에 뭘 적기만 하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은찬이의 입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은찬이는 나를 진짜 누나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가 잘 모르나 본데 너희 할아버지는 나 싫어해.”
나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엄마에게도 아저씨에게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날 볼 때마다 무서운 얼굴로 이렇게 노려봐.”
나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이마에 주름을 잔뜩 지게 했다.
“아! 그거! 우리 할아버지는 맨날 그래. 눈이 안 좋아서 사람 얼굴이 잘 안 보인대. 내가 안경 쓰라고 백번도 더 말했거든. 그런데 귀찮대.”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할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봤던 게 눈 때문이라고? 은찬이의 커다란 두 눈은 그게 사실이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갑자기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진짜?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
“어. 돌봄 교실 애들이 맨날 물어봐. 너희 할아버지 화났냐고?”
은찬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내 등에 몸을 기댔다.
“그런데 누나! 나 힘들어. 업고 가”
은찬이가 갑자기 내 목에 손을 감더니 등에 털썩 올라탔다.
“야! 내려와.”
“싫어. 나 다리 아파서 못 가. 저기만 올라가면 정자니까 누나가 업고 가.”
은찬이가 손가락을 들어 조금 위쪽을 가리켰다. 저만큼만 올라가면 된다고? 다 왔다는 생각에 갑자기 없던 기운이 솟구쳤다.
나는 은찬이가 떨어지지 않게 양손으로 녀석의 다리를 잘 받친 후에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몸뚱이가 무거워졌는데도 이상할 만큼 올라가는 게 힘들지 않았다. 은찬이는 내 등에 업혀서는 조잘조잘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말 중에 내 가슴에 ‘콕’하고 박히는 말이 있었다. 바로 ‘누나랑 같이 살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소용돌이가 되어 내 가슴속을 한바탕 휘저었다.
“다 왔다!”
은찬이가 갑자기 내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사진으로만 봤던 정자가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걸 보니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우와! 도착!”
은찬이가 팔을 쭉 뻗어서 만세를 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야?”
“별 보러.”
“별? 별은 왜?”
“어. 그게…….”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댔다. 은찬이의 말처럼 할아버지가 나랑 엄마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면……? 그럼 사실대로 말해도 될까?
“남극노인성이라는 별이 있거든. 그거 보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산대.”
“우와! 나 그거 예전에 할아버지랑 보러 왔었는데. 에이! 뭐야. 할아버지한테 얘기해서 차 타고 같이 왔으면 됐잖아. 그러면 힘도 안 들고 이렇게 춥지도 않았을 거야.”
은찬이가 투덜댔다.
“할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별 보러 가자고 하면 할아버지가 엄마를 더 싫어하게 될까 봐 말을 못 했어.”
“별 보는 거랑 아줌마가 무슨 상관인데?”
“어…… 그게 있잖아…… 우리 엄마가……좀……아파.”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가 아빠랑 같은 병에 걸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항암치료 예약을 하고 엄마가 머리를 빡빡 깎던 날, 나는 집에 가는 내내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가 죽지 않도록 하겠다고.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검색하던 나는 남극노인성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귀포에서만 보인다는 무병장수의 별말이다. 서귀포는 아저씨의 아들 은찬이와 은찬이의 할아버지가 사는 곳이었다. 나는 “겨울 방학 동안 서귀포 구경을 하고 싶다.”며 아저씨를 졸라댔고, 결국 제주도에 오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누나! 저거야. 저게 남극노인성이야.”
은찬이의 말에 나는 얼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은찬이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정말 그곳에 환하게 빛나는 별이 하나 있었다. 그 별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밝았다.
나는 은찬이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저씨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아저씨는 안 자고 있었는지 금방 전화를 받았다.
“그래. 은찬아!”
“아저씨. 저 지수예요.”
“지수?”
나는 아저씨가 놀랄까 봐 얼른 사정을 설명했다.
“제 폰이 고장나서 은찬이 것을 잠깐 빌렸어요.”
“아. 그래.”
아저씨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났다.
“아저씨. 엄마 자요?”
“아니. 지금 드라마 보고 있어. 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그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 남자 배우가 나온다고 지금 침 흘리면서 넋 놓고 보고 있다.”
전화기 너머로 “내가 언제 침 흘렸다고 그래? 이건 감동의 눈물이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엄마 상태가 좋은 것 같았다.
“아저씨. 제가 영상 통화로 다시 전화할게요.”
나는 바로 전화를 끊고는 다시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한 번밖에 가지 않았는데 엄마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며칠 전보다 붓기가 좀 빠진 것 같았다.
“지수야! 거기 밖이야? 깜깜하네.”
“엄마! 내가 지금 별 보여줄게. 엄마 이 별 꼭 봐야 해!”
“무슨 별인데?”
“남극노인성이라고 이거 보면 안 아프고 오래오래 산대. 엄마. 이 별 꼭 봐야 해.”
나는 화면 전환을 눌렀다. 내 얼굴을 비추던 카메라 화면이 밤하늘로 바뀌었다.
“엄마! 저기 바다 위에 반짝거리는 별 보여? 엄마. 저거야. 저거 봤어?”
엄마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이 없었다.
“아줌마! 저거 꼭 보세요. 누나가 할아버지한테 말도 안 하고 엄청 힘들게 여기까지 왔어요.”
은찬이가 스마트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은찬아! 너도 같이 있는 거야?”
아저씨가 화면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그건 말하면 안 되지!”
나는 은찬이를 향해 몸을 틀었다.
“왜? 아빠랑 아줌마도 알아야지. 우린 가족이잖아. 서로 걱정해주는 가. 족.”
은찬이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강한 눈빛을 쏘아댔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엄마 목소리는 많이 떨었다. 그리고 울음기도 조금 섞여 있었다.
“고맙다. 우리 딸. 진짜 고마워. 그런데 싸우지는 말고. 너희들 싸울 때마다 말리려면 내가 아주 오래 살아야겠다.”
엄마가 활짝 웃자 하얀 이가 보였다. 엄마가 아프고 난 후, 이렇게 편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나는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녀석들! 거기가 어디라고 이 밤에 너희끼리만 거길 올라간 거야!”
화면에서 잠깐 사라졌던 아저씨가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삼매봉 근처에 사는 친구한테 전화했더니 너희들 데리러 간단다. 차로 올라가니까 오 분 후면 도착한대. 어디 가지 말고 정자에 있어.”
아저씨 말에 은찬이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할아버지한테 혼나는 상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다. 엄마가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엄마랑 아저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 말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엄마 그리고 아저씨. 우리 제주도로 이사가요.”
화면 속 엄마와 아저씨는 놀랐는지 눈이 커다래졌다.
“지수야! 네가 이사가는 것 싫다고 했잖아. 며칠 동안 펑펑 울면서. 기억 안 나?”
엄마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리고 제가 찾아봤더니 남극노인성을 세 번 보면 백 살까지 산대요. 밤에 산에 올라가는 거 너무 힘들어서 다음에는 못 올 것 같아요. 그리고 엄마가 직접 봐야 더 효과가 있잖아요.”
나는 괜히 남극노인성 핑계를 댔다.
“아빠! 나 학교 들어가면 제주도로 온다고 해놓고서 왜 안 오는 거야?”
은찬이도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는 신나서 우리 가족이 왜 서귀포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한마디 하면 은찬이가 추임새를 넣었다.
“엄마가 오래 살아야 하니까.”
“맞아! 맞아!”
“할아버지 혼자서 농사짓기 힘드니까.”
“맞아! 맞아!”
“따로 살면…… 심심하니까.”
“맞아! 맞아!”
은찬이와 나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것처럼 쿵짝이 잘 맞았다. 엄마와 아저씨는 화면 속에서 양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 생각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당장 짐부터 싸야겠다. 바로 이사하자.”
아저씨의 하하거리는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가 어찌나 명랑하던지 우리를 데리러 오는 자동차 소리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끝>
제4회 서귀포문학작품 전국공모 동화부문 심사평
서귀포문학상에 응모한 동화는 매우 풍성했다.
응모자들의 열정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의 동화 38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동화가 서귀포문학상이라는 걸 염두에 두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또한 전설을 변용하거나 차용한 작품들은 응모작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최 측의 의도대로 주제와 배경에 적합한 동화를 우선 골라내고 동화가 가져야할 문학적인 요소를 고려하면서 ‘설문대할망의 찻잔’, ‘남극노인성을 찾아서’, ‘이중섭거리를 걸으며’, ‘외돌개 할머니’, ‘민속촌은 살아있다’를 예심으로 뽑고 나서 정독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장력과 플롯이 탄탄하지 않은 동화, 사건의 나열에 그친 동화를 걸러내고, 끝까지 심사자를 긴장시키면서 주제가 잘 드러난 동화 ‘남극노인성을 찾아서’를 당선작으로 선정하는데 합의 했다. 재혼한 엄마와 새아빠의 아들 은찬이, 은찬이의 할아버지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주인공이 오해를 풀고 삼매봉에 올라가 할아버지가 오래 살기를 바라며 남극노인성에 빌어주는 아이가 된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솜씨가 남달랐다. 중편동화여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스토리의 전개나 문장력이 매우 훌륭했다. 주인공이 은찬이와 갈등을 겪으면서 스마트 폰을 잃어버리면서 삼매봉에 올라간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반전과 서귀포에서 살겠다는 결심의 결말은 서귀포문학상이라는 연결고리를 튼튼하게 해주었다.
동화는 소설처럼 산문문학이면서 판타지를 가진 문학이다. 그래서 동화 역시 3요소와 구성의 3요소에 충실해야 한다. 특히 플롯이 탄탄하지 않으면 동화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저하된다. 클라이막스가 없이 사건의 나열에 그치는 동화들이나 성인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선택하여 습작을 게을리 한 작품은 문학상 공모가 아니어도 곤란하다.
동화의 주 독자가 어린이이긴 하지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독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자녀의 감성과 교육을 염두에 두고 동화책을 고르는 엄마들을 만족시키고 감동시켜야 한다. 동화의 소재를 고를 때, 너무 안일하거나 평범한 이야기로는 감동을 담을 수 없다는 걸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당장 출판을 해도 좋을 그림동화 2편을 보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귀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작품들이라 선에 넣을 수는 없었지만 빼어난 그림과 글이었다. 그림책 공모가 있다면 응모할 것을 권하면서 좋은 동화를 응모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드린다.
(심사, 손동연 박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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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 짠한 감동이 밀려옵니다.
'남극노인성을 찾아서' 제목도 좋구요~
재혼가정의 갈등과 해피앤딩이 잘 표현되었네요.
그죠?
오늘 만난 감동입니다.~^^
아름다운 마음과 광경들이네요
마음이 쾅 뚫리네요!
함께 읽으셨네요^^~~동화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