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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일정씨 포은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아키鄭(용화)
출처 http://cafe.daum.net/jwh9410/dFmA/103?q=%BF%B5%C0%CF%C1%A4%BE%BE
영일정씨(迎日鄭氏)생원공파(生員公派)효자공문중(孝子公門中)
襲明---1대조---(南聖齋)남성재(포항)---滎陽公(형양공)---始祖---
업습할습---실개천형---고려 仁宗(인종)때 樞密院知奏事(추밀원지주사)---포항시 남구 대송면 남성리 465번지
燮均---2대조---불꽃섭
謙牧---3대조---겸손할겸
麟信---4대조---기린린
之泰---5대조
宗興---6대조
林---7대조
仁彦(2)---8대조---松間公(송간공)---둘째아들---선비언---영천으로 이주를 하심---典工判書(전공판서)---典工司(전공사)의 장관직
光厚---9대조---判書公(판서공)---원당(原堂齋)---북안면 원당리---공조판서(工曹判書)
瑋---10대조---司正公(사정공)---당산재(唐山齊)---금호 원제리---옥위
文裔---11대조---生員公(생원공)---후손예---2파로 분류됨.포은(정몽주)할배와 같은 서열---오미동4번지---三歸齋(삼귀재)---靈山儒學敎道(영산유학교도)
---생원공파효자공파의 中始祖이십니다.
---8개파로 분류됨---大田洞(대전동)---단종복위사건으로 이보흠(영천이씨)선생이 참형을 당하심.처남매부지간이심.
從韶---12대조---司成公(사성공)---따르다종.풍류이름소---원당에 묘소가 계심(?)
以揮---13대조---牧使公(목사공)---휘두르다휘---三歸齋(삼귀재)
次諄---14대조---사천에 비로소 묘소가 생김---沙皐工(사고공)---타이르다순
---못고.연못고---1600년경에 처음으로 화남면 사천리로 입향(入鄕)하심---入鄕祖(입향조)---直長(직장)---묘소는 방학산에 계심---종7품관직---조종의 각 관청의 비품의 출납을 담당.
灝---15대조---參奉公(참봉공)---물넓을호
景禧---16대조---雪川公(설천공)---복희---禦侮將軍(어모장군)---무관정3품관직
山疑(억)---17대조---沙川門中---旌閭閣(정려각)---孝子公(효자공)할배---산높을억
---展力副尉(전련부위:펼치다전.버금부.벼슬위):조선시대 종9품 무관
---旌閭閣(정려각)은 동생(岑:잠:봉우리잠)역시 展力副尉(1535~1623)를 하시면서 효성이 지극한 것을 宣朝大王(선조대왕)이 하사하신 것임.
四海---18대조
現龍---19대조---나타날현
碩玄---20대조---크다석
道平---21대조
一權---22대조
趾先---23대조---발가락지(발지)
順天---24대조
周臣---25대조---두루주
大休---26대조
箕鐘(2)---27대조---둘째아들---키기---술병종---현조부.증고조부
淵伯---고조부---4대조
秉和(2)---증조부---둘째아들---잡을병
萬熙---조부---할배---빛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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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員公派8개파명
1.설천공(효자공)문중
2.화은공문중
3.선무랑공문중
4.교리공문중
5.지평공문중
6.감찰공문중
7.좌랑공문중
8.훈도공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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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員公派8개파명
1.雪川公(孝子公)門中---鄭景禧:시조---沙川.大川.泗日(사일)
2.華隱公門中---鄭次誠:시조---能溪.新基(신기)
3.宣務郞公門中----鄭次謹:시조---화남면 안천리---5개파가 분파
4.校里公門中(司成公派:從韶할배)----鄭以僑(높을교)---김천(문서).金山.鳳溪
5.持平公門中(司成公派:從韶할배)----鄭以諶(참으로심)---金山.慶山.古道.---가지다 지
6.監察公門中---鄭歸韶:시조---富溪(諸富)
7.佐郞公門中---鄭致韶(풍류이름소):시조---仙花.元堂.道川.庫旨(고지).明珠.
8.訓導公門中---鄭依韶:시조---錄田(기록할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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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정가8개파명
1.포은공파
2.생원공파(설천공파)
3.문계공파
4.문손공파
5.사정공파
6.정랑공파
7.만호공파
8.도사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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迎日鄭家8개파명
1파.圃隱공파---鄭夢周
2파.生員공파(설천공파)---鄭文裔
3파.文繼공파---鄭文繼
4파.文孫공파---鄭文孫
5파.司正공파---鄭文備
6파.正郞공파---鄭文彧(문체욱)
7파.萬戶공파---鄭亨之(형통할형)
8파.都事공파---鄭希孫(바라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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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8개派 - 정습명
포은공파(圃隱公派) - 정몽주-문충공(文忠公)--
생원공파(生員公派) - 정문예
문계공파(文繼公派) - 정문계---영조51년 정시 을과(乙科).
문손공파(文孫公派) - 정문손
사정공파(司正公派) - 정문비
정랑공파(正郞公派) - 정문욱
만호공파(萬戶公派) - 정형지
도사공파(都事公派) - 정희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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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襲明---"습"자 "명"자 할배---1대조---始祖---滎陽公(형양공)
2世: 燮均---"섭"자 "균"자 할배---2대조
3世: 謙牧---"겸"자 "목"자 할배---3대조
4世: 麟信---"인"자 "신"자 할배---4대조
5世: 之泰---"지"자 "태"자 할배---5대조
6世: 從興---"종"자 "흥"자 할배---6대조
7世: 林---"림"자 할배---7대조
8世: 仁彦---"인"자"언"자 할배---8대조---松間公(송간공)할배
9世: 光厚---"광"자"후"자 할배---9대조---判書公(판서공)할배
---원당(元堂)에 계심---경북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10世: 瑋---"위"자 할배---10대조---司正公(사정공)할배
11世: 文裔---"문"자 "예"자 할배---11대조---生員公(생원공)할배
---2派生員公派(생원공파) 始祖
12世: 從韶---'종"자 "소"자 할배---12대조---司成公(사성공)할배
13世: 以揮---"이"자 "휘"자 할배---13대조---牧司公(목사공)할배
14世: 次諄---"차"자 "순"자 할배---14대조---沙皐公(사고공)할배
15世: 灝---"호"자 할배---15대조---參奉公(참봉공)할배
16世: 景禧---"경"자 "희"자 할배---16대조---雪川公(설천공)할배
17世: 山疑---"억"자 할배---17대조---사천문중---旌閭閣(정려각)
18世: 四海---"사"자 "해"자 할배---18대조
19世: 現龍---"현"자 "룡"자 할배---19대조
20世: 碩玄---"석"자 "현"자 할배---20대조
21世: 道平---"도"자 "평"자 할배---21대조
22世: 一權---"일"자 "권"자 할배---22대조
23世: 趾先---"지"자 "선"자 할배---23대조
24世: 順天---"순"자 "천"자 할배---24대조
25世: 周臣---"주"자 "신"자 할배---25대조
26세: 大休---"대"자 "휴"자 할배---26대조
27世: 箕鍾---"기"자 "종"자 할배---술병종---증고조부
28世: 淵伯---"연"자 "백"자 할배---고조부---4대조로 본다.
29世: 秉和---"병"자 "화"자 할배---잡을병---증조부(曾;거듭)
30世: 萬熙---"만"자 "희"자 할배---빛날희---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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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지)伯(백)虎(호)(지백호)할배---元始祖(원시조)---得(득)姓(성)祖(조)
鷲(취)山(산)珍(진)支(지)村(촌)長(장)지백호가 득성조이시다.
생월은 기록에 없으나 아마도 기원전90년 조금전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박혁거세가 기원전 57년에 박에서 태어남으로 지백호의 년령을 따짐.
지백호의 字(자)는 인세.
시호는 문하 追(추)封(봉)왕명 甘(감)文(문)王(왕)이시다.
신라3대 유리왕9년(서기32년)에 本(본)彼(피)部(부)로 개칭되어 정씨의 성을 下(하)賜(사)받고 시호와 追(추)封(봉)왕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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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씨원류도(각파가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큽니다)
1세조:지백호(智(지)伯(백)虎(호))
2세조:정도
3세:가도
4세:빈
5세:동충.....군산
6세:남화
7세:북성
8세:개언
9세:기완
10세:가영
11세;병길
12세:순박
13세:덕성...........덕건
14세:덕성의 자손이 없음(無(무)后(후)).덕건의 자식은 충국
14세:충국---덕건의 자식
15세:호봉..........성봉
16세:해활
17세:완숙...........성.............신산...........혈
18세:군공
19세:급선
20세:지영
21세:수민
22세:동창
23세:문완...........문숙...........문진
24세:문완의 자손이 없음(無(무)后(후)).문숙의 자식은 임수.
24세:임수
25세:强(강)................剛(강)................敬(경)
26세:파동
27세:유
28세:年(년)(2):둘째아들
29세:文(문)
30세:손국(遜(손)國(국))
31세:종은(宗(종)殷(은))
32세:교림(僑(교)林(림))(2):둘째아들
33세:완(玩(완))
34세:의경(宜(의)卿(경))(2);둘째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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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宗殷---中始祖(중시조)---始祖(시조)---감무공파(監務公派)---31世(세)祖(조)---都(도)始(시)祖(조)
신라 각관.이시다(김유신과 삼국통일을 이룬 상장군)이상의 벼슬.관직.
후손인(의경)연일호장에 봉해졌다.
신라 태종 무열왕때 간의대부(諫議大夫)로 김유신장군과 협의.신라의 삼한통일에 공을 세웠다.그 뒤 왕께 간언(諫言)한 것이 화가 되어 인동(仁同)의 약목현(若木縣)에 유배.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그런데, 그 뒤으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고려때 감무(監務)를 거쳐 현감(縣監)을 지낸 정극유(鄭克儒)를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세대(世代)를 잇고 있다.
감무공(監務公)정극유(鄭克儒)의 후손으로 강화공파(江華公派).원평공파(原平公派).부마공파(駙馬公派).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이의공파(吏議公派).위양공파(威襄公派).김제공파(金堤公派)가 있다.
종은 字(자)와 생월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신라 진평원때 화랑출신으로 우리가문에 대명문거족 집안을 이룬 선조님이시다.
당시 신라시대때는 화랑에 입문하여 거쳐야 명문가로 인정 받았다.
선덕여왕(632~647년)시절에 상장군으로 김유신과 3국통일을 이루고 諫(간)官(관)에 올라 어떤 역모사건으로 若(약)木(목)縣(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나의 생각으론 당시 상대등인 비담편에 있었는 것으로 추정.
김유신은 가야출신으로 신라에 귀속되어 화랑에 입문하고 김춘추편에 있었고,선덕왕후의 왕을 이어받을 인물을 두고 김춘추와 비담이 치열한 정치적 권력다툼이 생기자, 역사서에는 비담이 반란을 도모하여 김유신이 반란을 평정했다고 하나 사실은 반란자는 석덕왕이 세력이 너무 강해진 비담이 부담스러워 비담을 죽이는 사건으로 고증하며,
어쨌든 종은중시조님을 사건에서 화백회의때 화백들에게 처형할 동의를 못받아 귀향을 보낸 것으로 보임.
유배당시의 년도는 (644년)전후임.
동국정씨기록에 종은의 아버지는 손국이고, 조부는 문,증조부는 년으로 기록했고,
아들은 길모요 손자는 선이다.(이것은 정확하지 않다.단지 동국정씨의 기록을 토대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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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오천정씨 선조님의 과거급제자는 생원시를 포함하여 모두 426명으로 문과 121명,사마시277명.무과34명.의과1명.음양과2명.율과1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보(鄭保)는 포은(圃隱)의 손자이다.조선왕실의 회유책으로 정(鄭)씨들은 조선조 세종조부터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정보는 예안현감(禮安縣監)사헌부감찰(司憲部監察)등 관직은 역임했는데,수양대군(首陽大君)의 쿠데타로 단종이 쫒겨나자 벼슬을 떠났다.
사육신(死六臣)사건으로 그들이 사형에 처하게 되자"성삼문(成三問)등은 의인이니 죽으면 후세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직언을 한 것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 사형의 극형을 받았으나 포은의 손자라 하여 감형돼 경남 단성(丹城)에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포은(圃隱)의 순절로 1차 화를 입은 뒤 9년만에 복권돼 벼슬길에 나섰던 정(鄭)씨들은 불과 50여년 만에 또다시 정보(鄭保)의 피화로 조선조의 벼슬과 인연이 멀어졌다.후손중에서 유일하게 정유성(鄭維城)이 우의정으로 정승에 올랐고 2명의 판서(判書)가 있으나,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는 기품이 전해져왔다고 한다.
정수번(鄭守藩)은 字는 정보(貞甫:크다보).1603년(선조36)무과에 급제한 후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역임하였으며 난공2등(難功二等)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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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의)卿(경)---34世(세)祖(조)
종은(宗殷)이 신라조에서 간관(간관)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 약목현에 유배된 후 후손 의경(宜卿)이 若(약)木(목)戶(호)長(장)을 지냈고,
영일로 이거하여 延(연)日(일)戶(호)長(장)을 지내고 迎(영)日(일)縣(현)伯(백)에 봉해졌으므로 영일정씨로 시적하게 되었다고 한다.
종은의 후손으로 연일호장을 지냈고
연일현백에 봉해지며 후손들이 연일정씨로 관향을 처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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襲明(1世)---滎陽公(형양공)---실개천형---始祖(시조)---起世祖(기세조)---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묘는 실전함---중시조(中(중)始(시)祖(조))
號는 동하(東河).형양(滎陽).출생년도는 정확하게 알수는 없으나 숙종(肅宗)朝초(1096년)경으로 추정됨.
공은 예종(睿宗:깊고밝을예).인종(仁宗).의종(毅宗:굳세다의)3대의 중신(重臣)으로 성품이 강직.性活하고 智,仁,勇을 겸비하였으며 문명(文名)과 기예(氣槩)가 높았던 직신(直臣)으로 우둔했던 의종(毅宗)을 문호왕(文好王)으로 인도해서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신이었다.
향공문과(鄕(향)貢(공)文(문)科(과))에 급제하였으며 석죽화라는 명시로 인하여 예종에 의하여 특천되어 옥당에 보하여 졌다 함.
1116년(예종11년:병신):약관에 서경도사를 역임하고 예종말에는 내직으로 내시(내시:고려때 내시부의 관원.예종 이후에는 환관들이 차지함)
1134년7월(인종12년갑인):안흥정(부안)부근의 조운을 쉽게하기위하여 서해도 태안의 동측 지협인 굴포(堀(굴)浦(포))에 방읍민 수천명을 동원하여 운하를 팠으나 10여리는 굴찰하고 7리를 남겨두고 실패.
1135년1월(인종13년을묘):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내시지후(內(내)侍(시)祗(지)候(후):공경할지)로써 수군을 이끌고 순화현남강에서 적을 막았으며,병선판관(兵(병)船(선)判(판)官(관))이 되어 상장군 이녹천(李(이)祿(녹)千(천))등과 함께 서적(묘청의 반란군)토벌을 도모하였으나 실패.
1136년(인종14년병진):국자감(國(국)子(자)監(감))사업 및 중서문하성의 기거주(起(기)居(거)注(주))와 지제고(知(지)制(제)誥(고):고하다고) 겸임.
1140년閏(윤)6월(인종18년경신):김부식(金(김)富(부)軾(식))임원개.이중.최주.최자등과 함께 시폐십조(時(시)弊(폐)十條)를 上(상)奏(주)하였으나 거부당하자 奏(주)言(언)을 쫓지않는다하여 사직.
1142년(인종20년임술):김부식의 別(별)第(제)를 빌어 寓(우)居(거)하자 (靑(청)貧(빈)하여 私(사)邸(저)를 이루지 못하였음)
諫(간)官(관)의 체통을 잃었다는 僤(탄)劾(핵)을 받아 국자사업 기거주직에서 파직되었으나 곧 禮(예)部(부)侍(시)郞(랑)으로 昇(승)進(진)
1145년(인종23년을축):右(우)承(승)宣(선) 제수.김부식등과 삼국사기 50권편찬.
1146년1월(인종24년병인):예부시랑으로서 태자(의종)사부를 겸함.
당시 태자가 우매하여 廢(폐)太(태)子(자)직전에 태자를 적극 옹호<恭(공)睿(예)太(태)候(후) 任(임)氏(씨)>가 의종 대신 둘째아들 大(대)寜(령)侯(후) 暻(경)을 태자로 세우려함.인종은 선생의 충성심에 감격하고 器(기)量(량)이 넓은 風(풍)度(도)를 중히여겨 承(승)宣(선)(承(승)旨(지))에 발탁하고 겸하여 동관의 太(태)師(사)로 삼아 부족한 태자의 장래를 부탁함.
1146년(인종24년병인):인종 임종시에 태자와 선생을 동석시키고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언제나 鄭(정)承(승)宣(선)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태자에게 이르고(治(치)國(국) 當(당)用(용) 襲(습)明(명)之(지)言(언)).또 선생에게는 충직한 卿(경)이 있어 안심하고 禪(선)位(위)한다고 하며 아직 拔(발)本(본)하지 못한 잔재들이 왕의 측근에 머물지 못하도록 당부하고 崩(붕)御(어)하다.
1149년(의종3년己(기)巳(사)):翰(한)林(림)學(학)士(사).추밀원지주사에 제수됨.
우승선으로 고시관이 되어 詩(시)賦(부)로 오광윤.十(십)韻(운)詩(시)(음운)로 조정시(趙(조)挺(정)時(시):뽑을 정)를 試(시)取(취)(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함.
1151년(의종5년신미):의종이 부왕 인종으로부터 유언을 받아 처음에는 공을 두려워하여 감히 放(방)心(심)치 못하더니 정함과 김존중의 讒(참)言(언)(거짓말할참)에 쏠려 병중에 있는 공을 김존중으로 대신케 하였다.공은 왕의 뜻을 알고 격분하여 약을 먹고 자진(自(자)盡(진))하였다.
號는 동하(東河).고려 예종조에 향공시문과(鄕貢試文科)에 올라 옥당(玉堂)과 한림(翰林:날개한)을 거쳐 은청과록대부(銀靑光祿大夫:보록)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고 형양군에 봉해졌다고도 한다.지주사공파의 시조는 신라육촌장의 일인인 지백호로 하나 그 뒤의 세계(世系)가 확실치 않아 정습명을 기세조(起世祖)로 한고 있다.원파록(源派錄)을 비롯하여 모든 족보에 선조는 형양공정습명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고려의종(毅宗:굳세다의)때 추밀원(樞密院)지주사(知奏司)역임
[추밀원}(중추원)은 고려때 왕명을 출납하고 왕을 경호하고 궁중을 방어하는 업무를 수행하던 기관으로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업무를 동시에 수행했다.
[지주사]추밀원에서 왕의 명령을 출납하는 정3품의 관리로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해당된다.
조선시대에는 도승지라 했다.
정문예(文裔)=지주사공파 11대孫.생원공파(2파)시조.
정몽주(夢周)=지주사공파 11대孫.포은공파(1파)시조.
고려말기(고양왕)에 수문하시중(守文下侍中.現 총리)역임
강의공파 시조는 정세아(世雅).지주사공파 16대孫이다.
고례 예종때 석죽화 시조로 인한 예종의 부름을 받으시고 예종의 명으로 태자후에 인종과 학문을 함께 무루익혀 동문서학의 교분으로 인종의 절친한 친구의 신분으로 인종대에 두터운 신임으로 한림학사의 벼슬에 오른다.
'고려사"에 실린 그의 열전에 의하면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지주사공파의 시조인 정습명은 고려 인종,의종때의 명신(名臣)이다.향공진사(鄕貢進士)로 등제(登第)하여 내시(內侍)에 속하였다.인종조의 국자사업(國子司業),기거주지제고(起居注知制誥:고하다고)를 지냈다.낭사(郎舍)최재(崔梓)재상(宰相)김부식(金富軾)등과 시폐(時弊)10조를 상서(上書)하였다.간신(諫臣:간하다간)으로서 시폐를 개혁하고자 하는 강직한 일면을 볼수 있다.예부시랑(禮部侍郞)을 거쳐 의종이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날개한)를 거쳐 추밀원지주사가 되었다.의종이 원자(元子)였을때 정습명이 시독(侍讀)이 되었는데,인종과 임후(任后)(공예태후恭睿太后:지혜예)는 원자가 제왕의 그릇이 못된다고 여겨 둘째 아들로 태자(太子)를 삼으려 하였다.그러나 정습명이 진심으로 받들어서 원자(의종)를 폐하지 않았다.그는 간관직에 오래 있었는데 쟁신(諍臣)의 풍모가 있어서 인종이 귀중하게 여겼다.
태자(太子)의 앞날을 부탁하였고,임종에 다다라 의종을 불러"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습명을 써라"고 하였다.정습명은 선왕의 명에 따라 의종에게 직언(直言)을 늘 하였고,
혹시나 시류(時流)에 영합할까 염려하여 하지 않는 얘기가 없었다.의종은 바른 말하는 그를 꺼렸을 뿐 아니라 다른 관료들도 그를 헐뜯었다.드는 왕이 자신을 꺼리는 것을 알고 스스로 약을 먹고 죽었는데, 그가 죽은 후 의종의 방탕함은 법도가 없어졌다.
정습명같은 강직한 간신(諫臣)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더라면,의종은 후일 신하(臣下)의 손에 죽음을 당(當)하는 비극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습명은 영일현 사람이다.
쾌활하고 작은 일에 속박당하지 아니하며 기이하게 局(국)量(량)이 큰 인물로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통하였다.마침내 향공(鄕(향)貢(공))에 급제하여 곧 내시에 임명되었다.숙위 및 근시의 일을 맡아보는 관원으로 시문과 경문에 능통한 문신출신을 보임(補(보)任(임))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환관을 보임하므로 천시(賤(천)視(시))의 대상이 되었다.
인종조(仁(인)宗(종))에 여러차례 승진하여 국자감(國子監)의 사업을 거쳐 지제고(知制誥)에 있을 때
량사(郞舍) 최자와 재상 김부식 임원개 이중 최주 등과 함께 시폐십조를 임금께 상소하고
사흘동안 편전의 문앞에 부복하여 임금의 윤허를 기다렸으나 아무회답이 없으므로 모두 관직을 사임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집주관을 파하고 소속사무의 권한을 덜어 내시별감(內侍別監) 및 내시원별고(內侍院別庫)의 임무도 대체하였다.그리고 최자 등을 불러 집주관의 일을 보게 하였는데 습명은 호자 십조를 다 관철하기위하여 임금께 계속 아뢰었고 임금은 종용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우상시(右常侍)최근은 자기 혼자만 습명과 같이 상소하는데 참여하지 아니 하였다.함께 일을 하다가 이와같이 하였으니 그를 낮추어 의리업는 사람이라 하였다.
습명은 이로 인하여 그 벼슬이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올랐다.
의종(毅宗)이 쥐위하여 한림학사에 제수되었고,또 승진하여 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다.
의종이 원자(元子)가 되던 처음에 습명이 세자(世子)의 시독(侍讀)이 되었는데 인종이 걱정하기를 장차 왕위에 올라 임금으로써 막중대사를 아 감당할는지 원자의 불민을 염려하였다.왕후 또한 차자(次子)를 총애하여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습명이 정성을 다하여 원자(의종)을 가르치로 보호하여 태자(太子)로서의 품위를 지키게 하여 폐세자를 면하게 하였다.습명은 인종이 인격을 크게 인정하고 승지의 직에 발탁하여 뒷일을 부탁하였다.그러므로 의종이 즉위하게 된 뒤로 선조에 부탁받은 신하로써 모든 일을 아는데 까지는 의종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의종(毅宗)은 이것이 마땅치 않았으며 따라서 습명을 꺼려하였다.
김존중.정성 같은 간신(奸臣)들이 이 기미를 알아차리고 밤낮으로 모여 앉아 임금께 습명을 참소하여 모함하였다.
따라서 습명의 간언(諫言)도 받아들여지지 않게되자 습명은 병을 칭탁하여 벼슬을 사임하기로 아뢰었다.임금은 김존중으로 하여금 그 직책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습명은 이미 임금의 뜻이 바로잡히지 않을 것을 알고 약을 넘기시고 스스로 자결하였다.
이 일이 있은후로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들이 나날이 등용되었고,임금은 더욱 더 무절제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으며 유흥 향락에 젖어 방일함이 임금으로서 그럴수가 없었다.
의종이 한번은 귀법사(歸法寺)에 놀러 나갔을 때 임금이 갑자기 말을 달려 나아가 혼자 달령다원(獺嶺茶院)까지 가게 되었다.신하가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임금은 나무기둥에 의지하고서서 거기 있던 사람에게 이르기를 만약 습명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러겠는가 하고 탄식하였다.
始祖 滎陽公
영일정씨의 시조는 고려 때의 추밀원지주사 형양공 휘(諱: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이름)는 습명이고 호(호:본명이나 字이외에 쓰는 풍아한 이름)는 동하(東河)이시며,경상북도 영일현(迎日縣:고을현.매달현)에서 태어나시었다.
출생연대는 알수없으나 그 행적을 미루어 고찰해보면 고려 숙종(肅宗)초기의 인물로 일찍이 학문에 능숙하여 예종(睿宗:깊고 밝을 예)때 鄕(향)貢(공)進(진)士(사)로 급제하여 곧 내시로 임명되었으며 소년시절에 고향에서 패랭이꽃(石(석)竹(죽)花(화))이란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세상에 널리 애송되고 궁중에까지 알려져 예종임금도 즐겨 애송하였다는 기록이 “동국문헌”에 실려있다.
시조이신 형양공은 타고나신 성품이 곧고 청령 강직하여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았으며 체격이 크고 기품이 있으셨으며 知(지).仁(인).勇(용)을 겸비하신 巨(거)儒(유)로서 고려 예종.인종.의종까지 3대 왕조의 중신으로 문명과 공덕으로 높이 떨치신 名(명)臣(신)이다.
石(석)竹(죽)花(화)
世(세)愛(애)牧(목)丹(단)紅(홍) 載(재)培(배)萬(만)院(원)中(중)
誰(수)知(지)荒(황)草(초)野(야) 亦(역)有(유)好(호)花(화)叢(총):모이다 총
色(색)透(투)村(촌)塘(당)月(월) 香(향)傳(전)娘(낭)樹(수)風(풍)
地(지)偏(편)公(공)子(자)少(소) 嬌(교)態(태)屬(속)田(전)翁(옹)
세상에선 모란꽃이 제일 곱다고
화원에 심어놓고 좋아하건만
푸른나무 우거진 산과 들에도
더 좋은 패랭이꽃이 피어있는 걸
밤에는 고운 자태 못속에 안겨
향기로움 바람따라 풍겨주누나
산골이라 호화로운 손님이 적어
순진한 농부들께 아양 보내요.
◈기록으로 본 시조 형양공
1.향공문과로 급제
2.인종원년(1123년 3월).왕명을 받들어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80칸의 巨(거)刹(찰)인 법흥사창건
3.1135년 妖(요)僧(승)妙(묘)淸(청)DL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서해도에 가서 왕명으로 수군 4천6백여명과 전함1백40여척을 징발해서 적의 진로를 봉쇄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5.인종조 18년(1140년)에 김부식과 함께 國(국)泰(태)民(민)安(안)을 위한 時(시)弊(폐)十(십)條(조)를 상소
6.인종 12년 甲(갑)寅(인)(1134년)가을 紅(홍)州(주)의 蘇(소)大(대)縣(현)(현 변산반도인 태안군)에 수로를 개발하는 책임자로 임했다.
7.인종 23년 乙(을)丑(축)年(년)(1145년 12월)에 金(김)富(부)軾(식)등과 함께 三(삼)國(국)史(사)記(기)를 편찬.
8.인종 24년(1146년)정월에 임금은 태자(의종)에게 명하여 예부시안 정습명에게 대인종(仁(인)宗(종))은 임종시에 태자와 형양공을 한자리에 앉혀놓고 유언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데는 마땅히 정습명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태자에게 분부하였다.
9.벼슬이 禮(예)部(부)侍(시)郞(랑),翰(한)林(림)學(학)士(사).左(좌)承(승)宣(선)을 거쳐 樞(추)密(밀)院(원)知(지)奏(주)司(사)(의종3년)가 됨.
10.의종3년(1149년)8월에 임금께서 평장사高(고)兆(조)基(기).어사대부文(문)公(공)元(원).증서사인王(왕)軾(식).좌승선정습명등을 불러 酒(주)床(상)을 마련하여 국사를 의논하였다.
11.의종5년(1151년)3월21일에 추밀원지주사 정습명이 自(자)決(결)하시어 세상을 떠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정습명지주사 선생이 선조(인종)의 고탁을 받들어 의종을 보필하여 날로 다사다난한 국정을 다스려서 광구 진력한 공헌이 크고 많았다.
그러나 포악하고 어두우며 방종하는 의종은 더욱더 교사가 심하여졌으니 많은 간신들이 임금을 에워싸고 있었다.그들은 정습명이 임금을 가까이 하는 것을 보았고, 또 정습명의 충언이 임금을 설득하게 된 것을 꺼려하였다.그들은 임금이 바른 정사를 시행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정습명은 임금의 주위에 이와 같은 아첨하는 소인 간신배들이 물러나지 않는 이상 임금은 끝끝내 임금다운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마침내 앙약결행하였으니 그의 선견지염을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정습명선생이 돌아가신 2년뒤인 1153년7월이었다.의종이 귀법사에 행행했을 때 헌화사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임금은 말을 달려 나갔다.결국 달령다원에 이르게 되었는데 신하들은 아무도 따르지 못하였다.임금은 호자 원주에 기대어 서서 거기 있던 어떤 시자에게 말하기를 정습명이 지금 살아 있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하였다.
애석하게도 임그의 곁에는 충정지신이 단 한사람도 없었으니 임금은 또 다시 부박 경조한 것이 마치 성난가운데 있는 것 같았으며 간신한뇌의 무리들이 임금의 좌우에서 조석으로 조종하게 되니 임금은 더욱더 어두워져서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였다.
임금께 바치는 글음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꾸며 나라는 태평하여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으로 임금을 속였다.
그렇게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그 교만방자하고 기고만장한 기세가 넘쳐도 막을 자가 없었다.아!만조의 많은 조신들 중에 정습명같은 이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능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을수가 없었고 비참한 화를 당헤게 되었으니 딱한 노릇이다(무신정변).
고려의 문신으로 향공과에 문과급제.내ㅌ부에 들어가 인종때 국자사업.기거주.지제고를 역임하고 최충과 김부식등과 시폐십조를 왕께 올려 굽히지 않았고 1146년에 예부시랑.
태자(의종)에게 강서하고 승선에 오르며 김부식과 함께 삼국사기를 편찬했으며 선왕(인종)의
유명을 받들어 의종을 세우고 의종3년(1149년)한림학사.추밀원지주사에 오르고 직간하다.
영일오천에 귀향하여 마지막 상소를 올리고 스스로 약을 마시고 자결하셨다.
滎陽(형양)公(공)
영일정씨는 신라이전의 경주땅 경계선 위로 해서 현재의 오천.포항.울진.영천전체까지의 한나라를 구성해온 지백호 선조님이 다스리던 한나라였다.신라개국이전에는 6부촌 부락장의 중심으로 농사철에는 농사와 어업으로 종사하고 농번기가 지난 초겨울부터는 서로 땅을 많이 차지하기위한 군사들의 전쟁으로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난후 지백호 선조님 시대에 주위 부락의 촌장들이 모여 남산에서 화친을 약속하며 발전하는 기틀이 잡혀 6부촌장들의 작은 나라를 합하여 한국가를 만드는 것이 서라벌이 탄생하고 이어서 신라가 탄생한다.
현재 우리鄭氏(정씨)의 지백호 후손의 본이 현존하는 것이 34본이라 한다.이 34본중에 동국정씨에서 본다면 경주정씨가 원손으로 되어있고,여기에서 분파된 후손들이 영일.동래.하동.청주.ㅎ주.등등이다.그러나 누구도 동국정씨 원류도를 인정하고 믿으려 하는 집안이 없고 다만 경주정씨만이 제일 큰집이라며 고집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한자손이라는데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전해지는 문헌의 기록이 없으니 고증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나 이 후대에 만약 깊숙한 땅속에서 비문같은 물증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실정이니 그것은 후대에 맏기고 우리 집안기록에는 지백호 후손 기록은 신라때 3국통일을 이룬 벼슬이 간관으로 선덕왕때 어떤 사건으로 휘말려 약목으로 귀향가신 宗(종)殷(은)이요.이분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며 그 증손자가 宜(의)卿(경)이 지배호 후손으로 인정받아 연일호장에 봉해져 약목현에서 선조의 고향인 오천으로 이거해 살아왔다 전하고 그 후손은 또 다시 기록이 없다.
신라가 다하자 신라는 나라를 통째로 왕건에게 상납하는 국운이고,왕건은 고려의 태조가 되면서 고려를 세우는 과정에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이 막강한 군사력의 힘이 쏠려있는 촌장들이었다.이러한 촌장을 끌어안아야 할 지경에 처한 왕건은 촌장들에게 개국공신이라는 상을 주어 각각 지방의 戶長(호장)과 감무를 설치하여 작위를 주어 여기에 지백호후손들도 고려개국공신이 드러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영일정씨는 고려를 개국할 때 신라를 통째로 고려에 바치는 것을 반대하는 파의 일종으로 구분된 것으로 보이고,이러한 풍습에 이어지다가 고려 成宗(성종)대 이전후에 벼슬하여 睿宗(예종)때부터 우리선조님들은 빛을 본다.
중시조 이신 습명은 출생기록이 없으나 추정되는 출생은 서기 1106년에서 1109년 이내로 보인다.
이러한 추정은 예종임금이 이자겸(예종의 장인)에게 권력다툼에 몹시 시달리고 있을 때 궁밖에서 어느 소년이 석죽화시를 지어 부르는 것을 가만히 듣고는 시의 구절이 너무나 흡족하여 그 소년을 대궈로 불러와 시험하니 그 소년의 학문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예종의 아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명하였다.
정습명은 호가 동하이나 세상 사람들은 그를 형양공이라 불렀고,형양공은 인종때 김부식을 두고도 가장 신임을 받은 까닭이 바로 어릴 때부터 동문수학한 친구의 사이라 누구보다도 형양공의 성격과 인품을 능히 잘알기에 인종의 신임이 두터운 까닭인 것이다.
(인종:1106~1146).(습명1106.1109~1151년 3월21일)
서두는 여기에서 가름하고 더욱더 많은 기록과 좋은 자료수집에는 후대에 물증으로 보충고증을 당부하면서 명문가중 명문가문인 우리 영일정씨의 대대손손 빛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滎陽(형양)公(공)사위가 태조이성계의 19대조부인 天祥(천상)이복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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燮均(2世)---
우위주부이시다.
고려조 衛(위)衛(위)主(주)賦(부)同(동)正(정)
묘소:불명(고려때는 불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茶(다)昆(곤)(장남곤.후손곤)하였을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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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牧(3世)---
내시주부이시다.
고려조 內(내)侍(시)主(주)賦(부)同(동)正(정)(구실부)
묘소: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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麟信(4世)---
태학박사이시다.배위는 기계윤씨이다.
3대손 정인신은 태학박사(太學博士)였다.奉(봉)衛(위)同(동)正(정).
묘소:불명
次(차)延(연)(끌다연)(4世(세))--司(사)宰(재)主(주)賦(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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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泰(5世)---
전서(典書)이시다.
고려조 主(주)賦(부)同(동)正(정)
배위는 기계군부인 윤씨이며 監(감)察(찰)御(어)使(사) 昇(승)의 따님이다.
묘소: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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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興(6世)---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과 중현대부(中顯大夫)감문위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시다.
배위는 陳(진)씨 西(서)丞(승) 就(취)列(열)의 따님이시다.軍(군)器(기)監(감)令(령) 規(규)의 손녀이다.
묘소: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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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7世)---
고려조 봉익대부(奉(봉)益(익)大(대)夫(부))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배위는 義(의)昌(창) 朴(박)氏(씨) 익(益)의 딸이다.장군 승합의 손녀이다.
浩(클호)(7世)---保勝郞將(보승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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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彦(8世):둘재아들(2)---판도판서공 林할배의 둘째아드님---松磵公(송간공)---경실헌
고려 충숙왕 1315~.
號(호)는 송간(松(송)磵).
관직:고려조 봉익대부(奉益大夫) 전공판서(典工判書).
배위:오천군 부인 영일정씨(고려 충숙왕 1324~.)로 종부령(宗簿令) 유(侑:권하다유)의 따님이며 의랑(議郞) 윤(潤)의 손녀이고.의랑 인천 蔡惟吉(채유길)의 외손녀이다.
묘소:불명
공은 忠(충)惠(혜)왕.忠(충)穆(목)왕.忠(충)定(정)왕.恭(공)愍(민)왕 4대의 重(중)臣(신)으로 당시 주변국가 특히 중국은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신흥 명나라가 세력을 확장해 감에 따라 원의 지배하에 있던 고려는 恭(공)愍(민)왕이 反(반)元(원)政(정)策(책)을 쓰고 또한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잦고 국내 사정은 조정 중신들간에 신진파와 구귀족간,친원파.친명파로 갈리던 혼란한 시대였으며 특히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사후 신돈에게 모든 정사를 맡겨 辛(신)旽(돈)이 마음대로 정사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이며 또한 힘없는 禑(우)王(왕)때에는 신흥귀족인 李(이)成(성)桂(계) 일파가 威(위)化(화)島(도) 回(회)軍(군)으로 軍(군)事(사).政(정)治(치)의 전권을 장악하고 역성혁명의 꿈을 꾸던 때였다.이러한 국내외의 어지러운 상황에 처하자 松(송)磵(간)公(공)은 나라의 보전은 從(종)曾(증)孫(손) 圃(포)隱(은) 先(선)生(생)(포은은 신진파 중에서도 李(이)崇(숭)仁(인)등과 같이 勤(근)王(왕)主(주)義(의)者(자)임)이,가문보전은 공께서 담당하니 당시 尙(상)州(주)牧(목)使(사)이던 아드님 光(광)厚(후)와 함께 포은공의 子(자)弟(제).兄(형)弟(제)들을 비롯하여 門(문)內(내) 젊은이들을 어디론가에 隱(은)迹(적)시키고 자신들도 영천 錢(전)村(촌)(영천시 도동.당시에는 최하층 천민들이 거주하던 곳.즉 所(소)部(부)谷(곡)이다)으로 피신하여 풍전등화같던 우리 가문을 보전케한 선조이다.만약 이때 피신하지 않았다면 고려의 遺(유)臣(신)이고 또한 포은의 從(종)曾(증)祖(조)父(부)가정이기 때문에
역성혁명을 한 이성계.이방원 부자와 그 도당에게 무참히 도륙당하여 멸문지화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공판서(典工判書)에 올라 충혜왕(忠惠王)이하 3대왕을 섬긴 충신(忠臣)이었다.
전공판서(典工判書)
인언의 호는 송간(松間)이요.
배위는 오천군대부인 감무공파의 종부령 유(侑:권하다유)의 따님이시다.
신유보(辛酉譜)서(序)에 의하면 시조 정습명(鄭襲明)의 대부터 경북 영일(迎日)에 서거하였다.고려말에 정몽주(鄭夢周)가 순절(殉節),가문(家門)이 위기를 맞자 전공판서(典工判書)였던 정인언(鄭仁彦)이 아들 공조판서(工曹判書)정광후(鄭光厚)와 함께 영천남전촌(永川南錢村:현재도동)으로 은거(隱居)하게 됨으로써 영천(永川)이 세거지(世居地)가 된 것이다.
군기감 인수의 동생으로 고려 공민왕때 봉익대부.전공판서를 역임하고 고려가 다하자 아들 광후와 큰집 증손자 포은선생 아들 종성.종본을 은닉시켜 대를 잇게한 선조이시고,영천 도동 派(파)祖(조)이시다.
배위는 1324년생으로 오천군 대부인 영일정씨 종부서령 侑(유)(권하다유)의 따님이시다.
송간선생께서 증손자 달가(정몽주)를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시며 달가를 걱정하시는 유문이 화해사전 송간선생 유문이 있고,이 글은 간재선생 신용희의 사실기록이며 후에 도 운곡 원천석고 복애 원세동선생이 엮은 여조의 사상지에 있다.
仁(인)壽(수)(8世(세)):장남(1)---검기감(檢(검)器(기)監(감)).贈(증) 봉익대부(奉(봉)翊(익)大(대)夫(부))개성윤(開(개)城(성)尹(윤))상호군(上(상)護(호)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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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厚(9세)---
3男(남)1女(녀)를 낳으심.
공조판서 정2품(조선의 관직)
배위는 영천이씨이다.
고려 공조판서.검교 한선윤.상주목사.조선조1402년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배위는 1344년생으로 영천이씨로 厚(후)龍(룡)의 따님이시며 아들은 瑋(위).번.영이다.
당시에 監(감)司(사)가 안동에 있었는데 安東府(안동부)에 기록된 戶籍(호적)상의 기록이다(아래문건).
전 상주목사 정광후는 당년이 48세로 甲(갑)申(신)生(생)(1344년)이며 본관은 迎日縣(영일현)이다.
父(부)는 봉익대부 전공판서로 諱(휘)는 仁(인)彦(언)이며 당년이 77세였다.
祖(조)는 봉익대부 판도판서로 諱(휘)는 林(임)이다.
曾祖(증조)는 중현대부 감문자아 대호군으로 諱(휘)는 宗(종)興(흥)이다.
母(모)는 오천군부인 鄭氏(정씨)로 당년이 68세이며 甲申(갑신)生(생)(1324년)으로 본관은 영일현이며 부는 중현대부로 종부령을 역임한 鄭(정)侑(유)이다.
안(아내)은 익양군부인으로 당년이 48세이며 甲申(갑신)生(생)(1344년)에 生(생)하였으며 본관은 永州(영주)로 父(부)는 봉익대부 판서 厚(후)龍(룡)이요.증조는 호장 李(이)松(송)賢(현)이며,母(모)는 해레군부인 金(김)씨로 본은 동군이요.외조는 金(김)祥(상)이다.
슬하에 1년가 있으니 당년23세로 己酉(기유)生(생)(1369년)이다.夫(부)(남편)는 내시소부주부 鄭(정)齊(제)(가지런할재)로 당년이 37세이며 관향은 본현이다.
고려 충혜왕 (1344~.)
관직:고려조 문관.嘉(가)善(선)大(대)夫(부) 尙(상)州(주)牧(목)使(사).우리 가문을 보전하기 위하여 근세조선기에 공조판서를 하셨다(조선초기).
묘소:영천시 북안면 원당리.묘비가 있고,묘소아래 원당재가 있다.
배위:익양군(益(익)陽(양)君(군)) 夫(부)人(인) 영천이씨로 奉(봉)翊(익)大(대)夫(부) 典(전)理(리)判(판)書(서) 厚(후)龍(룡)의 따님이며 散(산)員(원) 海(해)豊(풍) 金(김)祥(상)의 외손녀이다.
묘사일: 음력 10월 16일
묘소:영천시 금호읍 원제리(원기리)
墓(묘)祀(사)日(일):양력 4월 둘째 일요일.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올라 검교한성윤(檢校漢城尹).상주목사(尙州牧使:오히려상.고을주.부릴사)등을 역임했으나 정몽주의 순절을 보고 벼슬을 버린 뒤 영천(英川)의 천민촌(賤民村)이 전촌(錢村:영천의 도동)에 숨었다가 뒤에 공조판서(工曹判書)로 강압에 의해 제수받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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瑋(10世)---司正公(사정공)
사정공의 배위는 달성서씨이다.
관직:돈용교위 웅무시위 사후령사정(敦(돈)勇(용)校(교)尉(위)) 웅무시위(雄(웅)武(무)侍(시)尉(위)) 사후령사정(司(사)後(후)領(령)司(사)正(정))
배위:대구 서씨로 同(동)正(정) 裕(유)(넉넉하다 유)의 따님.
묘소: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당지(唐(당)旨(지)).묘소아래 唐(당)山(산)齋(재)가 있음
묘사일:陰(음)曆(력) 10월 16일
字(자)는 未(미)傳(전)이다.
광후의 세아들중 장남으로 돈용교위.웅무시위사 후령 사정을 거쳤다.
사정공 瑋(위)의 아들은 文(문)裔(예).文(문)繼(계).文(문)孫(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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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裔(11世)---生員公(생원공)
1402년(근세조선 태종2년)에 생원하여 영산유학교도를 지냄.
배위:영천 이씨로 司(사)直(직) 玄(현)實(실)의 따님이며 判(판)書(서) 釋(석)之(지)의 손녀.
묘소:영천 嗚(오)山(산)里(리) 三(삼)歸(귀)洞(동)(영천시 오미동 삼귀).묘소아래 삼귀재가 있음.
묘사일:陰(음)曆(력) 10월 17일
전촌에서 대전동(영천시)로 이거.
자손 양대에 8及(급)第(제)가 나옴.
생원 영산유학교도 2파 파조.조선 태종(太宗)왕조.임오(壬午)
배위는 영천이씨 대전공 이보흠의 누이이시다.이이해.
문예는 영천 도동에서 출생하시어 1402년 생원하여 이해에 혼인하여 대전동으로 처음 이거하여 정착하신 대전동 입조(입향조)이시다.이때 대전공께서 생질이 장원급제하니 가장 기뻐하시어 직접 생원공에게 축하편지를 보낸일이 문헌에 기록이 있다.
錢村(지금의 도동)에서 大田(대전)동으로 이주하시고 대전 이보흠선생이 단종복위 운동에 가담하여 참형을 당하고 생원공과 처남남매 지간으로 우리 가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또 다시 인근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셔서 지금은 대전(大田).석동(영천시 녹전동).녹전.화남.화북.자양.임고 등으로 옮겨 성거하고 있다.
형양공파(滎陽公派)
태종때 왕의 억압으로 별시에 나아가 생원이 된 선조
1.정회형:後諱(文裔.문예)영산유학교도 2파 파조.조선 태종완종.임오(壬午)
2.정문계(文繼)조선 태종왕조
3.정문손(文孫)조선 태종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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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韶(12世)---司成公(사성공)---성균관司成---종3품
字는 사정(司貞)이고 號는 정헌(靖軒:추녀헌).144기(세종29년)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에 올랐으나 1456년(세조2)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등이 단종(短宗)의 복위를 괴하려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었던 사건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조부님.부군과 4분의 숙부님과 모두 한집에서 문과8급제가난 대전동의 왕성한 집안을 이룬다.
사성공의 배위는 파평윤씨(경주윤씨)통의 따님이시다.
윤통은 무남이라 후손이 없고.산소도 실묘했다.그러나 (윤통)의 부인은 (영천이씨)로 우리문중에서 400년동안 묘사를 지내고 있고 산소는 경주아화부근에 있었다.
몇 년전에 도로공사로 인한 하절옆에 이장하여 모셨다.
1388~
사성(司成)오천선생.정헌공.
字는 가정 號는 정헌이다.
영산유학교도 (문예)의 장남으로 외3촌 大田公(대전공) 이보흠 문인으로
1447년 식년 문과급제하여 성균과 학유로 성삼문.박팽년.이개,류성원 등과 동방이사고
성균관.학유.학록.학정.박사를 거쳐 이조좌랑 이후 영천군수때 향약을 제정해 향서당을 짖고 기문하니 후에 점필제공(김종직)이 공경해 主公의 으뜸이라 하시고 烏川鄭선생님이라 일컬었다.의성.예천군수.안동진관첨 절제사.함양군수.경연관봉사 사정사성(司成)으로 관직을 끝으로 하고,이대전공과 단종을 도운 유신으로 계룡산[숙모전]에 배향되었다.
세종(世宗)29년 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형제가 급제한자.
정종소---세종29년 중시(重試) 을과(乙科)삼등1위.통훈대부 성균관 사성(종3품)
정귀소---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정6품)
정지소---단종2년.증광시.병과(丙科)---학유(學諭:깨우치다유).진사.분과.성균과 학유(9품)
정치소---세조(世祖)8년 식년시(式年試)정과(丁科)---공좌(工佐:돕다좌)---예조좌랑(정6품)
정의소---훈도(訓(훈)導(도))(9품)
세종29년 문과 시험 합격자(선조님업적)
조선실록 문과 방목
시험일자:세종29년(1477년)8월18일
합격자 발표일자:세종29년 8월27일
시험종류:중시
시험명:정묘29년 중시방
시험장소:경복궁 근정전
시험관(시관):좌의정 하연 시관:예조판서 허후 시관:승지.도승지 이사철
시험문제 전의 집현전진 팔준도
합격자:
문과장원 장원급제 합격인원:19명
성삼문.김담.이개.신숙주.박팽년.최항.이석형.송처관.유성원.이극감.정종소(鄭從韶).이예.김증.조변룡.이승소.이극효.정창손(동래인).김예몽.김통.
무과장원 인원 민유등 21명
율과1등:1위 성삼문
율과1등:2위 김담
율과1등:3위 이개
율과2등:1위 신숙주
율과2등:2위 박팽년
율과2등:3휘: 최항
율과2등:4위: 이석형
율과2등:5위: 송처관
율과2등:6위: 유성원
율과2등:7위: 이극감
율과3등:1위: 정종소(鄭從韶)
율과3등:2위:이예
율과3등:3위:김증
율과3등:4위:조변룡
율과3등:5위:이승소
율과3등:6위:이극효
율과3등:7위:정창손(동래인)
율과3등:8위:김예몽
율과3등:9위:김통
이상19명입니다.
정종소:오천인(烏川人)거(居):경상도 영천 명산리(현:대전동) 부(父) 정회형(문예) 조(祖) 정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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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甫欽
1397~1457
字는 경봉이고 號는 대전이고 私號는 충장이다.
玄實의 장남으로 순흥부사로 있을시에 영월 단종을 문후드리고 금성대군(瑜)와 단종복위운동 결탁후 격문을 짣.이 격문을 금성대군의 시녀와 관노가 결탁해 격문을 훔쳐 한양으로 가던중 풍기군수가 이를 알고 격문을 빼앗아 상경하여 세조께 고변해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참수된다.
참수당시에 이보흠의 동생 보관이 관군몰래 형을 따라가 형이 참수되시자 생질인 종소(從韶)와 함께 형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 대전까지 가져와 아무도 몰래 화남 죽곡 단애에 묘을 지었다.
생원공 문자예자할배와 처남매부지간입니다.
9급제가 나왔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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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揮(13世)---牧使公(목사공)찰방공할배
문과하여 장수도찰방을 거쳐 지평.목사의 벼슬승진했다.
배위는 창년오씨와 순천박씨이다.
아들로서는 차순(次諄)..차성(次誠).차근(次謹)이다.
문과 방목에서의 기록은 병술.세조12년 1466년에 고성춘시(高城春試)2위로 급제하고,기해 1479에 전력(展力).서령(署令),찰방(察房)등을 역임 했고,
父는 鄭從韶 祖父는 鄭淮衡(정회형),증조부는 鄭井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字는 자건이요.初諱(초휘)는 以恭(이공)이고 영천대전동에서 사성공 從韶의 장남이시다.병술(1466년)문과 급제하여 장수도찰방.지평.양주목사를 거치며 부공과 4분의 숙부님과 무사를 이루신 점필제공(김종직)과도 교분이 두터워 자주 시문을 주고 받으며 지내셨다.
부공과 숙부님들께서 단종사건때 낙향하여 성종때 다시 벼슬했으나
연산군(무오사화)의 화를 피하여 부공과 숙부님들과 함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배위는 창녕오씨와 순천박씨이다(원문에는 춘천박씨)
목사공의 아들은 차순(次順),차성(次誠).차근(次謹)이다.
以僑(13世)---높을교
이랑(吏郞:아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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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諄(14世)---沙皐公(사고공)---孝子公門中(효자공문중)---沙川入鄕祖이십니다.
字는 和補(화보)이고 號는 沙皐(사고)이며 목사공 이휘의 장남으로 벼슬은 직장으로 화남면 사천리의 입향조이시면 문헌으로는 4세단비문.완의좌목이 있고 묘는 방학산이다.
사고공의 셋째아우(次誠:차성:14世:華隱公)께서는 능계(화남면 안천리)로 가셔서 그곳의 입향조되시고(華隱公派),
다섯째이신 선무랑(宣務郞)공(次謹:14世)께서는 자양면 노항으로 가셔서 자양 입향조라 말하며 자양 하절묘소의 수위가 되신다.
선무랑공(次謹:14世)에서 정세아(鄭世雅:아담할아:16世)의 자손4분(의번.유번.안번.수번)
1.柏巖公門中(백암공문중)---정의번(鄭宜藩)--정세아의 장남(맏이)
2.處士公門中(처사공문중)---정유번(鄭維藩)--정세아의 차남(지차)
3.萬戶公門中(만호공문중)---정안번(鄭安藩)--정세아의
4.護軍公門中(호군공문중)---정수번(鄭守藩)--정세아의 막내
5.奉事公門中(봉사공문중)---정영번(鄭寧藩)--정귀아(鄭貴雅)의 장남.
이 나옴.
사고공할배가 戊午史禍를 피해서 사천으로 입향하신 沙川入鄕祖입니다.
사송공할배가 무오사화를 피해서 사천으로 입향하시고, 경주김씨집안에 장가를 가셨읍니다.
경주김씨집안에 장가를 가셔서 묘소를 같이 나누어서 사용하게된 경위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세단비를 기준으로 좌측은 영일정가사 사용하고 우측은 경주김씨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측의 경주김씨집안의 최상위 망부석이 있는 묘소가 사고공할배의 장인어른입니다.
또 좌측의 영일정가의 묘소가 사세단비로 보자면 묘소가 4곳이어야 하는데 할머님이 한분이 들어가 계시고 상하의 위계로 계산한다면
"차"자"순"자할배
"호"자할배
"경"자"희"자할배
"억"자할배의 순이 되어야 하지만
중간에 할머님이 한분 또 계시니 계산과 정확한 묘위를 알기가 힘들어서
분간이 힘들어 四世壇碑라고 하고 다 같이 묘사를 지내고 있읍니다.
아래에 芳華齋가 있읍니다만 방화재가 다 기울어가는 상황입니다.
약500년정도됨니다.
사고공할배가 경주김씨에 장가를 가니 순흥안씨와 고산박씨와 동서,처남지간이 됩니다.
그래서 계를 맺어서 나중에 방화재를 짓게 됩니다.
그 계가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읍니다.
방화재는 이 계(순흥안씨.고산박씨,경주김씨,영일정가)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밀어버리고 새로 지을까하다가 짓지말자고 해서 방화재가 무너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세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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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禧(16世)---雪川公(설천공)
~1592년
號는 설천으로 직장 次諄(차순)의 손자로 벼슬은 어모장군(御侮將軍)이며 회재선생 이언적의 문하에 올라 지결을 들었다.
사세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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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疑(억)(17世)---孝子公(효자공)---旌閭閣(정려각)
字는 태로 號는 완계로 展力副尉 겸 司僕을 지냈고 묘소는 화남면 사천리 방학산이며 세효록.감물록등을 남겼고,1614년 효자정려가 내려 화남면 사천리에 정려각이 있다.
비문은 지수 규양이 짓고 정려각 기문은 양산 이매(李梅)가 지었다.정잠(鄭岑:1535~1623)字는 주로 號는 매헌으로 展力副尉(전력부위)를 지냈고 묘는 화남면 사천리이다.
1614년에 정려됨.
화남면 사천리 국도변에 새로 단장되어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이 효자각은 1614년에 정려된 정억의 정려각과 사당입니다.
정효자는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써 채소와 육포등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항상 어버이 상에 오렸으며,성장하여서는 더욱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 하였습니다.날이 저물면 허락없이는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고 어버이 친구를 어버이 섬기듯 하니 어버이께서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병환에 들자 애간장을 태우며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어버이께서 이질을 앓으시자 병의 얕고 깊음은 대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면 안다고하여 아버지의 대변을 핥아 맛이 쓸때는 잠시라도 기쁜 얼굴을 하며 안심하였습니다.
또한 겨울철에 잉어를 드시고 싶다 하시어 개울가를 샅샅이 뒤지며 눈물을 흘리니 갑자기 한 자나 되는 잉어 한쌍이 튀어나와 그를 잡아 회를 만들어 상에 올리니 병환에 차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웃집에 불이나서 집의 뜨락까지 번지자 공은 머리를 숙여 땅에 대고 하늘을 향해 절을 하며 통곡하여 불효를 용서빌며 "병든 어버이를 어디로 모셔야 합니까"하며 애걸하니 잠시후 바람이 반대방향으로 불어 불이 꺼져버렸습니다.
아버지 상을 당해 식음을 전폐하고 기절을 하였다 깨어나길 네 차례나 하였으며,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란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례를 행하니 왜군도 손을 맞잡고 경의를 표하고는 떠났으며,여묘3년시 호랑이도 감응하여 여막앞에 노루를 잡아다 놓기도 하였습니다.아우 잠(岑)의 효행
또한 형에 못지 않아 주위에서는 유검루와 황상에 비유하여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이러한 사실을 지수 정규양이 지은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하고 있기에 이 각을 세워 기리고 있습니다.
사천리는 노방.사상.사중.사하동으로 이 중 으뜸은 사라곡 또는 효자문이라고 하는데 사고공의 증손 전력부위(展力副尉:조선시대 종 9품 무관)를 하신 억(山疑:17世).역시 전력부위를 하신 잠(岑:17世:1535~1623)형제의 효성이 지극하였기에 효자문이라 한다고 하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형제는 천성이 지효하여 어버이의 뜻이면 무엇이든지 하고,병든 어머니의 변을 맛보아 쓰면 걱정없고 달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사리로서 병을 치유,불치를 판가름하고,겨울에 생고기회를 원하기에 개울에 가서 하늘을 쳐다보고 기도하고 큰 소리로 우니 큰 코기가 튀어나왔다는 전설이 있으며,돌아가심에 시묘살이한 즉 호랑이가 와서 도와주고,임란이 나서 왜적들이 침입하였으나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한다.
천성이 효자라는 사실을 선조대왕이 들으시고 정려(旌閭)하사하여 현재까지 전하며,숙종시 현의 어풍을 진작시킨 경주김씨,구산박씨,순흥안씨,오천정씨의 네 문중이 합해서 지은 재사 방화재(芳華齋)가 있으면,선원에서 시집온 동식이 사천1리의 부녀회장을 맡고 있다.
한편 안천리의 옛지명인 능계에는 평구도 찰방을 하신 차성(次誠:14세)이 입향조로 그의 아들 윤검(15世)은 장사랑이고 창능참봉을 하였으며,무과 훈련원정을 하시며 임란시 영천복성시에 공이 많은 응서(應瑞:17世:1557~)를 추모하는 능산재(陵山齋)가 있고, 조선 인조조 성현도찰방을 역임한 극양(克讓19世1632~1690)을 추모하는 봉능재(鳳陵齋)가 있으며,순조시치우(致于26世)를 추모하는 한암정(漢巖亭)이 있다.또한 청년회11대 회장(1993~1994)으로 포항 남성재화수회장을 역임한 고(故) 상일ㅆ가 이 마을 출신으로 숭모사업에 많은 업적을 남겼고 그의 아들 우용이 청년회 재무로 봉사하고 있다.
사세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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