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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99. [역경의 열매]
정진원 (1-15) 두번의 죽음 넘겨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 찬양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도 기쁨과 희망, 감사와 나눔의 한 해가 되리라 믿는다. 지금 우리는 안팎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지만 좌절하거나 낙담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겨레를 사랑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
돌이켜 보면 격동의 시대였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6·25 전쟁을 겪고 산업화, 민주화의 거센 물결 한가운데를 지나왔다. 간단치 않은 시대였지만 언제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로 목이 멜 정도로 감격스런 일이 많았다.
영등포의 작은 골목 안에 개업한 약국은 전국에서 몰려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영등포구의회 의장과 법무부 갱생보호공단 이사장으로서 공직에 봉사하는 행복도 누렸고, 대한기독교서회 대표이사 사장,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 기독교타임즈 사장으로 교계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나는 평생 하나님이 늘 나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을 갖고 살아왔다.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었지만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났다. 이후에도 고비마다 극복하도록 도와주시고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셨다. 아무것도 아닌 내게 이처럼 큰 복을 주신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들과 아낌없이 나누라는 뜻이셨을 것이다.
1937년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홍성의 홍성제일감리교회 바로 뒷집이었다. 어머니는 이 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하셨다. 새벽 다섯 시에 산통이 와서 홍성제일감리교회 담임을 맡고 계시던 전재풍 목사님의 사모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어머니 박애라 전도사님은 경기도 시흥이 고향이었다. 외가는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는데. 외국인 선교사가 시흥에 전도하러 왔을 때 제일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가정교회를 열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외삼촌은 배재학당에 진학했고, 어머니는 인천 영화여학교를 거쳐 평양신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을 지낸 고 오경린 감독의 손계옥 사모님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받으셨다고 한다. 신학교를 마친 어머니는 노래 실력이 뛰어나 일본 유학을 추천받았지만 전도사로 파송되는 길을 선택했고, 홍성에서 아버지 정순모 장로님을 만나 결혼했다. 아버지는 충남 청양이 고향이었는데 서른둘에 장로로 피택될 정도로 믿음이 좋은 분이었다. 결혼 당시에는 세무서에서 일했다.
내가 세 살 때 천안으로 이사를 나왔다. 어머니는 천안제일감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어머니 덕분에 교인들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옛날 교회에서는 의자 없이 방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교인들 앞에 나와 독창을 하곤 했다. 어머니께 야단 맞아가며 노래를 배우던 일, 독창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일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천안에서 첫 번째 생사의 고비를 넘었다. 당시로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이질에 걸렸는데 병원에서는 현대의술로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렸다.
정리=송세영 기자 sysohng@kmib.co.kr
* [역경의 열매] 정진원 (1) 두번의 죽음 넘겨 주신 '임마누엘 하나님' 찬양
* [역경의 열매] 정진원 (2) 아버지, 광복후 조국 미래위해 '천안의숙' 설립
* [역경의 열매] 정진원 (3) 6·25 와중 凍死위기서 주님 은혜로 구사일생
* [역경의 열매] 정진원 (4) 戰後엔 '청년으로서의 꿈과 도전' 신앙운동 펼쳐
* [역경의 열매] 정진원 (5) 서른둘 젊은나이에 영등포 약사회장 출마 당선
* [역경의 열매] 정진원 (6) 1972년 모 기관서 호출 "박정희를 써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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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1937년 충남 홍성 출생 △중앙대 약학대 졸업 △영등포구의회 초대의장 △대한기독교서회 대표이사 사장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 △장학법인 남부소년선도재단 이사장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 국민재단 총재 △기독교타임즈 사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법무부 한국갱생보호공단 이사장 △한국로타리 총재단 의장 △현 원풍실업 회장 △현 영등포구사회복지협의회 회장 △현 일청합창단 이사장 △현 영등포제일감리교회 원로장로
***[역경의 열매] 정진원 (2) 아버지, 광복후 조국 미래위해 '천안의숙' 설립2013.01.01 17:46
나를 끔찍이 아끼셨던 할머니는 손자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새벽마다 물을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별의별 약을 다 써봤지만 차도가 없자 가족들의 시름은 커져갔다. 아버지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눈물로 기도할 뿐이었다.
하루는 교회 사모님이 껍질째 짚으로 엮은 굴을 손주에게 먹여보라고 건넸다. 할머니는 굴을 받아들긴 했지만 날음식인 데다 깨끗한 것 같지도 않아서 먹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먹던 아이가 굴을 보더니 발을 동동 구르며 먹겠다고 졸라서 할 수 없이 먹였다. 신기하게도 굴을 먹은 다음 내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아들이 그렇게 권해도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던 할머니는 "예수님이 보배 같은 우리 손자를 살리셨다"며 그날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소천하실 때까지 열심히 교회 다니며 신앙을 지키셨다. 나는 그 후로 굴을 좋아해 즐겨 먹고 있지만 굴 속의 어떤 성분이 작용해서 나의 병을 낫게 했는지 모른다. 굴은 영양의 보고지만 그 속에 약리작용을 하는 특별한 성분이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적도 없다. 내가 기적처럼 나은 것은 분명 하나님이 교회 사모님을 통해 치유의 은사를 베푸신 것이다.
아버지는 광복 이후 일본인들이 모두 도망가면서 천안세무서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살림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신앙인으로서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아버지는 부정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박봉 외에는 다른 수입이 없었고, 그마저도 교회와 교육 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아버지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위해 장로 몇 분과 힘을 합쳐 천안의숙을 세웠다. 지금의 계광중학교, 천안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아버지는 집안일보다 천안의숙에 더 매달렸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고 대학생 하숙을 치면서 근근이 생활비를 댔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48년 서울 영등포로 이사왔다. 외삼촌이 영등포에 사셨는데 처남과 동생에게 이사를 권유한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세무서에 사직서를 내고 천안의숙은 다른 장로들에게 맡기고 영등포로 올라왔다. 서울에서는 철도국 인사과장으로 10년가량 일하셨는데 힘 있는 자리였는지 명절 때면 사과상자나 계란꾸러미 같은 선물들이 많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 선물들을 남김없이 모두 돌려보냈는데, 그때만 해도 철없고 어렸던 나는 아깝고 속상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고지식한 성품 때문에 어머니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서울에 와서도 삯바느질을 계속 했는데, 규모가 조금 더 커져 조수까지 2∼3명 데리고 포목상에서 주문을 받아 한복을 지었다. 급한 주문이 들어오면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밤을 꼬박 새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와 여동생, 남매가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삯바느질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이었는데 용산중학교와 특차였던 서울공업중학교에 붙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공업이 중요해질 것이고 용산에 가려면 강을 건너야 한다며 서울공업중학교 입학을 권하셨다. 내심 용산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서울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터졌다. 충남 홍성으로 피란을 갔다가 서울 수복 이후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3) 6·25 와중 凍死위기서 주님 은혜로 구사일생2013.01.02 18:32
영등포역 근처에 주둔하는 미군들을 보니 다들 크고 번쩍거리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반지 만드는 곳을 수소문해서 찾아갔다. 미군들이 좋아할 만한 큰 반지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기차역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수입은 꽤 괜찮았는데 반지값 받아내려다 또다시 생사의 고비를 맞았다.
영등포역에서 한 미군에게 반지를 팔았는데 돈을 주지 않았다. 울며 매달리니까 대신 모포를 한 장 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다른 병사들 안 볼 때 주려나보다' 하고 기다리는데 기차가 출발해버렸다. 어떻게든 모포를 받아내겠다는 마음에 위험한데도 기차에 매달려 따라갔다. 결국 모포는 받았지만 밤늦은 시간 인천항까지 오고 말았다. 서울로 돌아갈 차편은 이미 끊어지고 없었다. 새벽 첫차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창고 처마 밑에 모포를 두르고 앉았다. 추운 겨울밤이라 인적이 거의 없었다. 손발이 시렸지만 하루 종일 장사하느라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너 이 자식, 빨리 일어나지 못해."
잠결에 누군가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발로 몸을 걷어찼다. 깨어 보니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였는데 "너 큰일 난다. 이대로 자면 얼어 죽는다"며 일어나 따라오라고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갔더니 근처의 교회였다. 교회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따뜻한 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예배당의 온기 속에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나는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겨울 인천항 부둣가에서 가족들도 모르게 얼어 죽었을지 모른다. 전쟁 중에 그렇게 죽어나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운이 좋았다고 치부하기엔 너무 큰 은혜였다. 나를 교회로 인도해준 그 분도, 따뜻하게 재워준 교회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게 아닐까. 먼 훗날 나를 쓰시기 위해 하나님이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려주셨다고 믿는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했다. 이때 아버지도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닥뜨린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등을 돌려 뛰었다. 중공군이 총을 겨누며 소리를 질렀다. '서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총알이 날아올 수도 있는 급박한 위기의 순간, 다행히도 아버지가 멈춰 섰다. 중공군은 몸수색을 하고 몇 가지 물어보더니 "왜 도망갔느냐. 우리는 아무한테나 총을 쏘는 그런 나쁜 사람이 아니다"며 풀어줬다. 중공군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해도 놀랍지 않은 시절이었다.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외가가 있는 경기도 시흥으로 피난 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쟁이 터진 뒤 담뱃잎을 종이에 만 궐련은 품귀현상을 빚고 있었다. 애연가들은 말린 담뱃잎을 신문지에 싸서 피웠다. 피난 가기 전 남대문시장에 들러 담배를 마는 수제 기구를 하나 샀다. 시흥에 도착해서 작두로 담뱃잎을 썬 뒤 이 기구에 넣고 종이에 말아 팔았는데 불티가 났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들켜 크게 혼이 난 데다 종이까지 떨어져 얼마 못가 중단했다. 중2밖에 안 된 아이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신기하기만 하다. 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 그런 대담함을 갖게 한 게 아닌가 싶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서울공업중학교는 훈육소라는 명판을 달고 서울의 여러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학생들이 전쟁 전 입었던 교복에 각각 다른 학교 배지를 달고 모여서 공부를 했다. 군사훈련도 많이 했는데 비상시 학도병으로 투입하려 했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4) 戰後엔 '청년으로서의 꿈과 도전' 신앙운동 펼쳐2013.01.03 18:31
1953년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났다. 나는 56년 중앙대 약대에 진학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많아서 의사가 돼 병들고 아픈 사람을 고쳐주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당시 약대가 인기를 모으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버지는 의대 대신 약대에 진학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 말씀에 순종해 시험을 보러갔는데 경쟁률이 16대 1이었다. 한 수험실에 60명 정도 모여 시험을 봤는데 감독관이 "이 중에 서너 명 붙겠구만"이라고 해서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때는 감리교청년회(MYF, Methodist Youth Fellowship) 한남지방연합회 회장으로 일했다. 연합회는 당시 영등포역 앞에 있던 영등포중앙교회에서 매달 유명인사들을 초청해 청년부흥회를 열었다. 부흥회를 할 때마다 임원들과 함께 풀통을 지고 다니며 직접 벽보를 붙였다. 당시 한남지방은 서울의 한강이남지역을 뜻했는데 강남에서부터 영등포, 김포공항까지 아주 넓어 달리 홍보할 방법이 없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뛰어다녀야 했는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청년들이 많이 와서 우리 부흥회는 유명한 집회가 됐다. 전후의 폐허 가운데 좌절과 절망만 안고 살아가던 청년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전하는 말씀에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활란 박사가 단골 강사였는데 강연을 부탁드리러 가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뜻 허락했다. 청년들이 강연회장을 가득 채운 데다 기도소리에도 힘이 넘쳐 김 박사도 흡족해했다. 이후 MYF 전국연합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까지 맡았다. 미국에서 목회하다 지금은 은퇴하신 차연희 목사님이 MYF를 열정적으로 지도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청년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60∼70년대 영등포는 경성방직과 방림방적 원풍모방 대한중석 영창악기 같은 큰 공장들이 즐비한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대였다.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전국에서 근로자들이 몰려들었다. 잔업에 철야근무로 일은 고됐지만 월급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부치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어쩌다 쉬는 날 여가나 문화생활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든 젊은 근로자들이 대부분이어서 지식과 교양에 대한 욕구도 높았다. 사회 비판의식도 싹트기 시작했다.
YMCA의 한 간사가 청년근로자들을 위한 교양강좌를 열어보자고 제안했다. 내가 섬기는 영등포제일감리교회는 그때 영등포시장 근처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푸른세대 강좌를 열기로 했다. 상공회의소에 등록된 영등포지역의 기업 120여개를 찾아다니며 강좌안내 벽보를 붙였다.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고 있던 연세대 김형석 교수를 비롯해 유명 대학교수들을 초빙해 강연을 하고 통기타와 노래도 가르쳤는데 대성황이었다. 강좌를 하는 날이면 교통경찰들이 교회 앞에 와서 질서 유지를 해야 할 정도였다. 강연 내용은 주로 '청년으로서 꿈과 도전' 같은 것이었는데, 최근 붐을 이루고 있는 청년들을 위한 토크콘서트와 비슷했다.
강좌를 1년 정도 진행했을 무렵, 경찰서 정보과에서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70∼80년대 노동운동을 선도했던 도시산업선교회와 민주노조운동이 모두 영등포에서 태동했을 정도로 지역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공안당국은 푸른세대 운동에 대해서도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했다. YMCA측과 상의해 강좌를 중단키로 결정했다. 푸른세대 강좌는 이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식 교양 프로그램이었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5) 서른둘 젊은나이에 영등포 약사회장 출마 당선2013.01.06 17:48
대학을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다. 약사여서 광주 상무대 77육군병원에 배치받았는데 병원 일이 아닌 서무 일만 시켰다. 10개월 정도 근무하다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로 차출돼 서울 용산의 미군 통신대대로 옮겼다. 여기서 함께 근무한 동기 중 한 사람이 안정남 전 국세청장이다. 나이는 나보다 어렸는데 똑똑했던 기억이 난다. 통신대대에서는 일부러 일주일에 이틀 철야근무를 하는 보직을 지원했다. 철야근무를 하는 대신 나머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군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약국도 개업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오류동장로교회 박선택 목사님의 딸이었다. 장인은 북한이 고향으로 월남해 오류동장로교회를 세우고 은퇴할 때까지 시무하신 분이다. 노회장을 두 차례나 지내실 정도로 신망도 높았다. 고 한경직 목사님과도 친분이 두터웠는데, 두 분 고향이 같았던 데다 한 목사님이 1926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장인이 뱃삯을 보탰다고 한다. 장인이 소천하셨을 때 한 목사님이 문상 오셔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한 목사님은 미국으로 건너가 캔자스주의 엠포리아대학을 마치고 프린스턴 신학원을 졸업한 뒤 1932년 귀국했다.
아내는 당시 숙명여대 약대를 졸업하고 고용약사로 일하고 있었다. 신혼에 남편이 군에 있었으니 고생이 많았다. 이후에도 사회활동하고 봉사한답시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면서 아내 고생을 많이 시켰다. 그런데도 불평 한 번 하지 않고 순종했다. 나를 대신해 약국을 지키던 아내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는데, 7년 전 자궁암 3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 은혜로 성공적으로 수술받고 더 이상 전이 없이 완치됐다. 허약해진 아내는 다리가 골절돼 고관절 수술까지 받았다. 기도하는 중에 '착한 아내 너무 고생시키지 마라'는 응답을 받았다. 지금은 아내를 쉬게 하고 내가 약국 운영을 도맡아 하고 있다.
서른둘에 서울시 영등포구 약사회장에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모교인 중앙대 약대 교수들까지 휴강을 하고 투표하러 왔다. 임영신 총장이 이 사실을 알고 교수들을 불러서 혼을 냈다. 죄송한 마음에 임 총장을 종종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임 총장은 유력 정치인들이 인사하러 오면 꼭 나를 불러서 "정 회장. 이분들 잘 도와드려"라며 인사를 시키곤 했다. 이때 소개받은 분 중에 박충훈 전 국무총리서리와 장덕진 전 농림수산부 장관도 있었다. 두 분은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 공화당 공천으로 출마했는데, 야당 바람이 거세게 불어 고전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장 전 장관은 나와 둘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정 회장, 내가 말이야, 어떤 여자가 표 하나 주겠다고 하면 치마폭에라도 뛰어들 것 같아"라고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원래 무엇이든 맡으면 대충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약사회장도 그랬다. 주로 하는 일은 약화사고 처리였다. 당시에는 약사들이 직접 주사까지 놓던 시절이어서 주사 맞거나 약 먹고 사망하는 사고가 간간이 발생했다. 더구나 관할지역인 봉천동은 도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이 거대한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주거환경이나 치안이 엉망이었다. 이런저런 시빗거리를 만들어 약국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떼를 쓰는 사람이 많았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다 보니 수습을 위해 서울지검 영등포지청을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야 했다. 덕분에 영등포지청에 근무했던 엘리트 검사들을 자주 만났는데,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 안강민 전 대검 중수부장과도 이때 친분을 쌓았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6) 1972년 모 기관서 호출 "박정희를 써보시오"2013.01.07 18:43
영등포 약사회장을 3년 정도 했을 무렵인 1972년 11월, 모 기관의 약사회 담당자가 나를 찾아왔다.
"정 회장, 본부에 들어가 보셔야겠습니다."
권력기관들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라 덜컥 겁부터 났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반대세력과 정면 충돌하던 때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날 부르는 겁니까" 하고 묻자, 담당자는 "좋은 일이니까 들어가 보세요"라며 웃기만 했다.
그 기관의 본부로 갔더니 간부급으로 보이는 사람이 백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내주면서 '박정희'라고 써보라 했다. "한글로 쓸까요, 한자로 쓸까요"라고 물었더니 "한글로는 누가 못 씁니까. 한자로 쓰세요"라며 면박을 줬다.
한자로 박정희라고 썼더니 빙긋이 웃으며 "내일부터 선거 준비하세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출마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준비도 안 돼 있고 재력도 없는데 어떻게 선거에 나갑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선거는 우리가 하는 겁니다. 정 회장은 출마해서 열심히 뛰기만 하면 됩니다"라며 잘라 말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0월 유신에 따른 헌법 개정으로 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구성된 헌법기구였다. 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된 박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했다. 대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게 대통령 선출권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정당원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출마할 수 없도록 규정돼 있었는데, 이는 야당의 영향력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출마는 이미 그쪽에서 결정한 상태였다. 영등포를 15개 지역으로 나누고, 한 지역마다 여섯 명의 대의원을 뽑았는데, 김두만 전 공군참모총장, 삼립식품 설립자인 허창성 회장,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의 며느리 최계옥 여사 등이 나와 함께 영등포 지역에서 당선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해 12월과 78년 7월 두 차례 박 대통령을 선출하고 80년 8월 전두환씨까지 대통령으로 뽑은 뒤 해체됐다.
정당에 가입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 활동 자체를 정치활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거에 출마까지 했으니 본의 아니게 정치의 주변부까지는 가본 셈이었다.
나는 평소 정치에 전혀 뜻이 없었다. 아버지도 정치라면 펄쩍 뛰셨다. 통일주체국민회의 외에 국회의원 출마 제안도 몇 차례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결정인 것 같다. 정치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처음 국회의원 선거 출마 제안을 받은 것은 박 대통령 시해와 신군부의 등장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던 80년 말에서 81년 초쯤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80년 8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총 투표자 2525명 가운데 1명의 기권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전두환 정권은 이듬해 3월 총선을 실시키로 결정하고 착착 준비 중이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있던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하루는 "정 회장, 같이 가볼 데가 있어"라며 나를 불렀다. 이 전 총리와는 영등포지청에 근무할 때부터 친분을 쌓은 데다, 그와 절친한 경복고 동기동창 두 사람과 내가 친한 사이여서 자주 어울렸다. 당시 보안사가 있던 광화문 근처 찻집으로 갔더니 군인같은 인상의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7) 두번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에도 "정치는 No!"2013.01.08 18:19
군 관련 기관의 고위 간부였던 그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중 2명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키로 했다면서 나에게 영등포에서 출마하라고 권했다. 지금과 달리 지역구마다 2명의 국회의원을 뽑을 때여서 여당 후보는 출마만 하면 당선은 따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와 함께 추천된 사람은 대원고속 권영우 회장이었는데, 권 회장은 동대문에 출마해 당선됐고 후일 여당 재정위원장까지 지냈다.
아버지께 상의 드렸더니, 예상했던 것처럼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으냐"며 극구 반대하셨다. 아버지는 평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를 하면 아무리 잘하려 해도 결국 죄인이 된다. 절대 정치하지마라"며 내가 정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어쩌면 나한테 그런 기질이 있어보여서 더 우려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말씀대로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몇 차례 더 만나자는 요청이 왔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다. 그쪽에서는 나 대신 노총위원장 출신의 인사를 공천했고 그는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96년 초에는 김종필 총재를 중심으로 새로 창당된 자유민주연합에서 날 찾아왔다. 김 총재는 1995년 3월 민자당에서 탈당, 자민련을 창당하고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정통 보수세력의 대표를 자임했다.
날 찾아온 이는 육군 대장 출신으로 민정당과 민자당 사무총장을 지낸 박준병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1995년 10월 민자당에서 탈당해 자민련에 합류했다. 지팡이를 짚고 왔기에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더니 얼음판에서 넘어졌다고 했다. 박 의원은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도장부터 찍으라"고 재촉했다. "왜 나를 공천하려 하느냐"고 물었더니 "여러 의원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면서 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거듭 다그쳤다.
정치는 절대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놓고는 일본으로 출국해 버렸다. 자민련은 그해 4월 12일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무려 50석을 얻으며 '녹색바람'을 일으켰다. 나도 출마했더라면 당선됐을지 모르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출마 제의는 모두 거절했지만 1991년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는 출마했다. 구 의원의 경우 정치활동이 아니라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가깝다고 판단했다. 그때는 지방의회 의원에 대한 정당공천제도가 없어 정치색도 옅었다. 당시 나는 영등포구 구정자문위원장이자 서울시 자문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두 곳 자문위에서 20년 가까이 활동해왔기 때문에 지방자치제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구의회가 구성된 뒤 초대 구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는데 2년 임기를 마친 뒤 한 번 더 뽑혀 4년 내리 의장을 지냈다. 감사하게도 동료 의원들은 압도적 표차로 두 번이나 나를 지지해줬다.
의장으로서 한인타운이 속해있는 미국 LA시의회와 자매결연을 하기 위해 미국 방문을 추진한 일이 있었다. 그 무렵 다른 지자체 의원들 중 일부가 나랏돈으로 직무관련성도 없는 집단 외유를 해 물의를 빚는 일이 발생했다. 당초 구 예산으로 33명 의원 전원이 가려 했지만 전액 자비 부담으로 바꿔버렸다. 결국 13명만 다녀왔지만 자비 부담이었기에 떳떳하게 관광일정도 추가했다. 지방의회 의원들의 해외출장에 좋은 선례를 마련했다는 호평을 받았지만 그 후로는 비슷한 사례가 없었던 것 같아 아쉽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8) "새마을금고 파산 막자" 금싸라기땅 9000평 내놔2013.01.09 18:27
정치를 하자는 제안은 뿌리쳤지만 나는 원래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다. 이 때문에 능력도 없으면서 이런 저런 일을 많이 맡았다. 많을 때는 현직만 16개에 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돈을 쓰는 자리였고 봉사하는 자리였다.
이렇게 맡은 자리 중 하나가 지역 새마을금고 이사장이었다. 80년대 중반 주민들의 부탁으로 설립초기단계였던 새마을금고를 맡았다. 새마을금고라 해도 별도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동사무소 한쪽에 책상 놓고 일하던 시절이었다. 이사장이라고 해봐야 비상근인데다 사무실이나 책상도 없어 명예직에 가까웠다.
그런데 미혼의 젊은 여직원 한 명이 못된 남자의 꾐에 넘어가 공금에 손을 대고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면 예금을 인출하려는 주민들이 몰려들어 새마을금고가 파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돈을 맡긴 서민들은 큰 피해를 볼 수도 있었다. 여직원의 가족으로부터 피해액을 보전받을 수 있을까 해서 집으로 찾아가봤지만 가정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허름한 집에서 점을 보는 무속인이었다. 피해 배상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여직원에게 몹쓸 짓을 하고 돈까지 빼돌린 남자가 근처 사무실의 유부남 모씨라는 짐작이 갔지만 증거가 없었다.
결국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피해액을 변제키로 결정했다. 하지만 약국을 통해 버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천안에 사두었던 임야 9000여평을 팔았다. 아버지가 허락하시면서도 무척 속상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단국대 천안캠퍼스 근처라 그대로 뒀더라면 지금쯤 귀하게 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까운 사람목숨 잃고, 평생 모은 것보다 더 큰 재산을 잃었으니 충격이 컸다. 아버지께도 큰 불효를 했다는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마음에 병이 생겨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다. 한두 달 만에 체중이 수십 킬로그램이나 빠져버렸다.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지만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가슴 속에선 미움과 원망만 자라났다.
그러던 어느날 괴로운 마음에 뒤척이다 잠이 들었는데, 눈앞이 환해지면서 눈이 부셨다. 누군가 달려오며 "하나님 음성 들린다"고 소리를 쳤다. 신기하게도 달려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신발 몇 켤레만 보였다.
그러다 깼는데 밤새 흘린 눈물로 베개는 흠뻑 젖어있었다. 그때 살던 집 바로 뒤에 신풍감리교회가 있었는데, 새벽 종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가슴 밑바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아주 깊은 한숨이 나오더니 몸이 공중에 뜨는 것처럼 가벼워졌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제도, 치료법도 없는 마음의 병으로 다 죽어가던 나는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
어려운 시간 시간마다 나를 붙들어주시는 하나님 은혜에 뜨거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찬송가 413장(통 470) '내 평생에 가는 길'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교회로 달려가 참회와 반성의 기도를 드렸다. 목숨도 재산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집착하고 욕심내고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다. 이후 완전히 회복해서 새벽기도도 열심히 다니고 전 교인들 앞에서 간증도 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9) "적자경영 대한기독교서회를 살려주십시오"2013.01.10 18:52
젊었을 때 교계 어른들을 만나면 나는 늘 정순모 장로의 아들로 소개됐다. 아버지는 평신도였지만 영등포제일감리교회와 감리교단을 충심으로 섬기셨다. 내가 후일 감리교단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던 데도 아버지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아버지는 서른둘에 장로로 피택됐지만 주일학교 교사직을 천직으로 여겼다. 환갑이 넘어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교회학교 아동부 교사로 봉사했는데, 할아버지 선생님이 어린이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가르치던 모습은 교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버지는 주일이면 누구보다 먼저 주일학교에 가서 예배실을 둘러보고, 교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아이들이 오면 인자하게 맞아주고, 벗어놓은 신발도 신발장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아버지는 "하나님은 목사에게 교회와 어른 성도를 맡기셨고, 교사에게 어린 아이들을 맡기셨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언제까지 주일학교 교사를 하실 것이냐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셔야만 그만둘 수 있다"고 답했다.
교회학교를 위한 아버지의 헌신은 교회 밖으로도 확대됐다. 1971년 감리교교회학교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돼 12년간 일하셨다. 72년에는 최초로 어린이찬송가를 발행했고 73년에는 제1회 어린이 성가경연대회도 열었다. 감리교단에서는 아버지를 71년부터 83년까지 12년간 CBS기독교방송의 재단 이사로 파송했다. CBS 부이사장을 거쳐 76년 11월에는 제8대 이사장으로 선출돼 2년 가까이 봉사했다.
95년 말쯤 감리교단에서 어려움에 처한 대한기독교서회의 사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아버지의 뜻을 좇아 감리교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고 수락했다. 96년 2월 열린 실행위원회와 이사회에서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출됐다.
'왜 목사도 아닌 평신도에게 사장을 맡겼을까' 궁금했는데 취임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1890년 설립된 한국교회 최초의 연합기관으로서 기독교 정신문화를 선도해온 기독교서회였지만 50억원의 빚을 안고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적자의 원인은 간단했다. 기독교서회에는 경영이 없었다. 1년 매출은 50억원 안팎인데 직원이 무려 80명이었다. 더구나 출판산업은 이미 내리막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적자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전임 사장이었던 김소영 목사님께 "왜 이렇게 직원이 많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이사님들이 자꾸 채용해 달라고 부탁하는데 거절을 못했습니다"라며 미안해했다. 인품 좋고 점잖은 김 목사님으로서는 딱 잘라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막한 심정에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 기도 끝에 "너부터 먼저 행하라"며 솔선수범하라는 답을 받았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사도 바울도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보였다.
나는 먼저 사장으로 있는 동안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법인카드도 사용하지 않겠다며 반납해버렸다. 나 때문에 다른 국장들도 법인카드를 쓰지 못했다. 사택은 임대료 받고 세를 주고, 관용차는 팔아서 영업용 트럭을 구입하게 했다.
직원들도 줄여야 했지만 회사가 어렵다고 그냥 해고할 수는 없었다.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다. 서회회관에 입주해있는 업체들이 떠올랐다. 입주사 대표들을 초청해 점심을 사면서 사정을 설명하고 채용을 부탁했다. 몇 차례 밀고 당긴 끝에 서회에서 일할 때와 같은 조건으로 채용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런데 직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사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0) 임직원 노력에 기독교서회 6개월만에 흑자 기록2013.01.13 17:54
감량경영을 원칙으로 해서 직원을 48명으로 정예화했다. 다행히 기독교서회의 부채는 회관에 입주한 업체들의 전세보증금 등이어서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기독교서회에서 책을 내는 것은 큰 명예였기에 이런저런 경로로 출간을 부탁하는 분들이 적지 않았는데, 정중하게 설명을 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서회 직원들의 노력과 이사들의 협조로 1996년 상반기 기독교서회는 흑자를 기록했다.
평신도로서 교계 정치를 잘 모르던 내게 교계 연합기관의 대표는 결코 쉽지 않은 자리였다. 기독교서회 이사회는 주요 교단에서 파송된 신망 있는 분들로 구성돼 있었다. 감리교단에서 나를 사장으로 추천해 이사회 표결을 거쳐 선출되긴 했지만 다른 교단 파송 이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작은 성과도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사로 모신 분들 중에는 훌륭한 분이 많았다. 점잖고 신실했던 신촌성결교회 정진경 목사님과 붓글씨를 써주곤 하시던 광주제일교회 한완석 목사님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목사님이 은퇴하신 뒤 "요즘 어떻게 소일하십니까"하고 전화 드렸더니 "요즘 이 교회, 저 교회 다닙니다"고 하셨다. "왜 섬기던 교회 나가시지 그러십니까"하고 여쭸더니 "목사님께 부담 주기 싫어서 안 나갑니다"고 했다. 목사님의 대쪽같은 성품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감리교단에서는 광림교회 김선도 감독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 사장으로 선임되자마자 이사회에서는 소속 교단장의 재정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시 감독회장이던 김 감독을 찾아갔더니 "우리 감리교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서회 사장을 맡으셨는데 도와드려야죠"라면서 비서를 불러 도장을 찍어주셨다. 보증이라는 건 위험이 따르게 마련인데 선뜻 허락하시는 걸 보고 '참 그릇이 크신 분이구나'하고 감탄했다.
기독교서회에서는 좋은 책이 많이 나왔다. 그중 가장 귀한 책은 57년 창간돼 지금도 발행되고 있는 월간 '기독교사상'이 아닌가 싶다. 신학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독서로서 '기독교사상'을 인용하지 않으면 학위 논문을 쓸 수 없을 정도였다. 예일대 등 해외 명문 대학 도서관에도 비치돼 있을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포켓용 묵상집인 '다락방'의 한국어판도 내용이 참 좋았다. 특히 군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기독교서회 사장 임기는 4년이었지만 2년도 채우지 않고 그만뒀다. 당시 감리교단의 김동완 목사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로 있었는데 연임을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감리교단은 NCCK와 기독교서회, 기독교방송 등 3대 연합기관 가운데 두 곳을 맡고 있어 논란이 됐다. 내가 그만둬서 다른 교단에서 오신 분이 서회를 맡도록 하면 논란이 수그러들 것이라 생각됐다. 첫 평신도 출신 전문경영인으로서 서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급한 일들은 마무리된 상태였다. 건강을 이유로 그만둔다며 이사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사 중 한 분이 찾아와 "장로님, 꼭 그만두셔야겠습니까"하고 물었다.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고 했더니 "순교하는 마음으로 더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래도 내가 사퇴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다. 퇴직금도 사양하고 바로 물러났다.
기독교서회 사장에서는 물러났지만 1998년 나는 CBS기독교방송 후원회장으로서 한국교회 연합기관을 위해 한 번 더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선친과 함께 CBS 이사로 활동하셨고 당시 CBS 이사장으로 계시던 표용은 감독이 요청한 것이어서 기쁘게 받아들였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1) 故 김수환 추기경과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인연2013.01.14 17:43
2001년 말에는 감리교단 신문인 기독교타임즈 사장으로 선임됐다. CBS후원회장은 실질적 업무를 책임지지 않는, 명예직 비슷한 것이었지만 기독교타임즈 사장은 달랐다. 대외적으로 신문사를 대표하고 경영도 책임을 져야 했다. 언론사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중책을 맡았으니 힘에 부칠 때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심했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도 많이 했다.
감리교단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보수적 교단인데 기독교타임즈의 논조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기독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진 훌륭한 기자들이 많았지만 신문이 발행되면 항의전화가 많이 왔다. 큰 교회들이 특히 더 비판을 많이 받았으니 신문에 협조적일 리 없었다. 광고수입이 없으면 신문사를 경영하기 어려운데 큰 교회들이 광고게재를 기피했다. 일일이 찾아다니며 양해를 구하고 광고를 부탁하는 게 사장의 역할이었다. 하나님 하시는 사업이니 나를 내려놓고 맡기자는 마음이 없었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김수환 추기경이 2002년 2월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사장 취임예배에 와서 축사를 한 일이다. 단상에 오른 김 추기경은 "제가 여기 왜 온지 아십니까. 정 장로에게 마음의 빚이 많아서 왔습니다"라며 "기독교타임즈가 크리스천 정신으로 혼탁한 세상에 밝은 빛이 되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는 축사를 해주셨다. 추기경이 감리교단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어서 교단 원로들이 깜짝 놀랐다.
김 추기경과는 1999년 5월 설립된 재단법인 자녀안심하고학교보내기운동 국민본부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재단설립 당시 김 추기경은 이사장, 나는 총재를 맡았다. 설립초기 재단에는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기금은 20억원 정도 있었는데 직원들 월급만 매달 1000만원 넘게 나갔다. 기금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인건비까지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별 수 없이 내 사비를 들여 재단 직원들 월급을 줬다.
김 추기경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사비를 쓰면 어떻게 하느냐"며 무척 미안해했다. 그리고는 "정 회장, 나는 돈 만드는 재주는 없어. 내가 광고모델을 서면 안 될까"라고 제안했다. 귀가 솔깃했다. 재단 홍보도 하고 기금도 확충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대형 생명보험사 사장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김 추기경의 제안을 전했더니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면 반색을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 "연락 주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했더니, "아이고 말씀 마세요. 사장단 회의에서 이야기 꺼냈다가 점잖은 분 모델로 세워서 몰매 맞을 일 있냐고 혼이 났습니다"며 되레 하소연을 했다. 아무 소리 못하고 광고모델 출연은 없던 이야기로 했다. 이 일로 추기경께는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많았다. 생신 때 하얀 강아지 두 마리를 선물해드렸는데 참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를 비서수녀에게 들었다.
재단의 어려운 자금사정이 알려지면서 여러 법조인들이 발벗고 나섰다. 덕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기금을 출연해줘 재단 기금은 50억원대로 늘어났다. 2002년 아무 미련없이 총재직을 그만두고 나왔다. 김 추기경은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다가 내가 기독교타임즈 사장에 취임한단 소식을 듣고 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2) 大盜 조세형 출소후 도움 요청에 "내가 돕겠다"
지역사회에서는 범죄예방을 위한 활동을 많이 했다. 1960년대 사회생활 초기부터 청소년선도위원으로 봉사하다 나중에는 검찰청의 범죄예방협의회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 96년에는 서울지검 남부지청 범죄예방협의회장까지 맡게 됐는데, 이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대도 조세형과 조우했다.
조세형은 98년 11월 재수감 15년 만에 청송감호소에서 출소했다. 출소하자마자 자신을 기소했던 검사를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그 검사가 당시 남부지청장으로 있던 정홍원 검사였다. 조세형은 정 검사를 만나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정 검사보다 내가 적임자였다. "내가 도우마" 하고 조세형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다. 마침 2층이 비어 있었는데 별도 주방도 있어서 지낼 만했다. 조세형은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마음에 들었는지 "신세 좀 지겠습니다"하고는 돌아갔다. 그러곤 소식이 없더니 1주일쯤 뒤 "회장님, 조세형입니다"하고 전화가 왔다. "온다고 하더니, 왜 안 왔어" 하고 물었더니 "교도소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친구가 같이 지내자 해서 거기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끔 들러야지" 했더니 바쁘다고 했다. 잡지사와 방송사에서 인터뷰하자고 성화라는 것이었다. 조세형이 인터뷰한 내용들을 보니 교정당국이나 검찰이 불편해할 내용들이 많아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우리 집에 머물진 않았지만 틈틈이 만나고 연락하며 지냈다. 한번은 주일날 내가 섬기는 교회에 데려갔는데, 찬양을 어찌나 잘하는지 교인들이 놀랄 정도였다. 더구나 그는 통일찬송가 558곡을 거의 다 외우고 있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죽을 것처럼 답답할 때는 소리를 마구 질러야 하는데 그냥 소리지르면 두들겨 맞습니다. 그런데 찬송을 부르면 아무리 크게 불러도 괜찮아서 매일같이 찬송만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하고 털어놨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훌륭한 믿음의 일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교회를 다니면 간증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심 '잘됐다' 싶었는데 출소하고 1년6개월쯤 지났을 무렵 전화가 걸려왔다. "목사님 모시고 결혼하게 됐습니다. 분에 넘치는 좋은 사람 만났습니다" 하고 알려왔다. 그게 마지막 전화였다. 6개월쯤 지나서 조세형은 일본에서 절도행각을 벌이다 검거돼 다시 교도소로 갔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앙생활을 좀더 열심히 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쉬웠다.
조세형과의 인연은 출소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02년 여름 김정길 법무장관이 불러서 법무부에 들어갔더니, "법무부 갱생보호공단 이사장을 맡아서 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관 예우를 받는 자리입니다"고 말했다. "예우보다 뭐하는 자리인지 알고 싶습니다" 했더니 "만기 출소자들 교육시키는 곳입니다" 하고 설명했다. 조세형의 재범을 막지 못한 데는 내 책임도 있는 것 아닌가 자책하던 때여서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으로 이름을 바꾼 갱생보호공단은 직업훈련과 취업알선, 주거지원 등을 통해 출소자들의 사회적응을 돕고 재범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단은 무의탁 출소자들을 위해 15개의 합숙생활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크고 작은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나는 낯선 사회환경에서 힘들어하는 출소자들에게는 신앙생활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수요일에는 생활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에는 교회에 출석하게 했다. 성경다독상도 만들어 성경을 많이 읽도록 지도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덕분에 내 임기 중에는 큰 사건이 없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3) 한 정치인 찾아와 "회장님 장학금 받고 이렇게…"
얼마 전 50대 초반의 한 정치인이 나를 찾아왔다. 뉴스에서 종종 보긴 했지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회장님, 제가 회장님 장학금 받고 공부했습니다"라면서 내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매달 받았던 장학금의 액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돈을 받으면 절반은 육성회비 등의 명목으로 학교에 내고 절반은 학용품을 샀다고 했다. 내가 사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가스를 먹어봤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서울로 올라와 시장에서 행상을 하며 4남매를 키웠다.
솔직히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모교인 우신초등학교 앞에 약국을 개업했을 때 청소년선도위원을 하면서 모교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줬던 기억은 어렴풋이 났다.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세세한 것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고 큰돈도 아니었는데 지금까지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사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처럼 훌륭하게 성장해서 나를 기억하고 찾아주니 아주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하나님께 뜨거운 감사 기도를 드렸다.
선친은 생전에 "남을 위한 일은 미루지 마라. 선한 일을 뒤로 미루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생활이 안정된 다음에 하는 식으로 미루다 보면 기회를 영영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도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이었지만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이후 로타리클럽 등 여러 단체에서 활동할 때도 장학사업은 빼놓지 않고 챙겨왔다.
서울지검 남부지청 범죄예방협의회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97년 말쯤 나를 부끄럽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연화자씨라는 분이 불우청소년교육기관인 성지고를 찾아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써 달라며 1000만원을 내놓았다. '영등포시장 커피아줌마'로 불리던 그는 16년 동안 영등포중앙시장에서 조그만 수레를 끌고 다니며 커피와 차를 팔아왔다. 고생 끝에 작은 가게와 세 칸짜리 전세방을 마련하자, 어려울 때 다짐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그는 살기 위해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3년 만에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해 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을 데려왔다. 그때 '언젠가 자리를 잡으면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는 아이들을 돕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연씨는 커피행상 시절 음식을 나눠주던 식당주인, 동사무소에서 라면과 구호물품을 받을 수 있도록 알려준 이웃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해 동사무소에도 1000만원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기탁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넉넉하지 않아도 나눌 줄 아는 그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앞섰다.
나와 성지고 김한태 교장과 김원치 남부지청장은 이 숭고한 돈을 종자로 삼아 장학기금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98년 2월 26일 KBS 공개홀을 빌려 장학회 발족식을 겸한 음악회를 개최했다. 준비하면서 "외환위기로 어려운데 잘될까" 하는 걱정들이 많았다. 하지만 음악회는 1800여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뤘고 1억5000만원을 모금했다. 남부지검에서 거의 전 직원이 모금에 동참하고, 범죄예방협의회 회원 등도 힘을 모아 그해 6억원 가까운 장학기금을 마련했다. IMF 외환위기 속에서 이룬 작은 '기적'이었다. 나는 남부소년선도재단이라 이름 붙인 이곳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돼 10년 정도 봉사하다 물러났다. 재단은 해마다 40∼50명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4) 합창단·푸드마켓 운영…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1998년 2월 KBS공개홀에서 가졌던 모금음악회는 합창단을 본격 창단하는 계기가 됐다. 나는 1991년 지역 학교 학생들의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고운빛여성합창단을 설립해 운영해왔다. 아마추어 합창단이었지만 96년 미국 LA시의회 초청으로, 97년에는 일본 NHK초청으로 해외공연을 했을 정도로 팀워크가 좋았다.
모금음악회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수들을 섭외했는데 합창공연이 없으니 뭔가 허전했다. 고운빛여성합창단에 전문 성악교육을 받은 단원들을 영입해 준프로 합창단으로 발전시켜 공연을 하도록 했다. 지금은 일청합창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혼성합창단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청은 선친의 고향인 청양에서 '푸를 청'자를 따와 영원히 푸르다는 의미에서 지었다. 순천시립합창단 지휘자이자 전국합창지도자협회 부회장인 이병직씨가 지휘를 맡고 있는데, 해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정기연주회를 갖는다. 개척교회를 찾아가 찬양하기도 하고 교도소 소년원 같은 곳에서 위문공연도 하는데, 사례비는 일절 받지 않는다. 대신 합창단 운영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내가 책임지고 지원하고 있다. 일청합창단은 음악을 전공한 크리스천들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하거나 성가대 지휘를 하는 친구들이 많다. 무반주합창과 뮤지컬합창이 특기인데 성가를 공연할 때는 나도 은혜를 참 많이 받는다.
최근 들어서는 장학사업 외에 사회복지 사업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2009년 10월 영등포구사회복지협의회 회장에 취임했는데, 여기는 사랑나눔푸드뱅크 사랑나눔푸드마켓 사랑의빨래방 등을 운영하며 지역사회복지에 앞장서고 있는 곳이다. 특히 기존의 시혜자 중심 서비스에서 벗어나 수혜자 중심으로 전환한 푸드마켓은 모범적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어려운 이웃들에게 생필품을 일방적으로 나눠주던 방식에서 탈피해 필요한 것을 직접 선택할 수 있게 한 게 푸드마켓이다. 물품들은 지역 내 기업이나 독지가로부터 기증받아 충당한다. 사랑의 빨래방은 무의탁 독거노인들을 위해 이부자리 빨래를 대신해주는 서비스인데 이 또한 반응이 참 좋다.
영등포구사회복지협의회에서는 얼마 전 '좋은 이웃들' 사례발굴단이라는 봉사단도 만들었다. 사각지대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을 찾아내서 도와주자는 취지다. 법적 보호대상이 아니어서 정부 지원은 받지 못하지만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주위에 많다. 관공서에서 이런 분들을 찾아내기는 힘들지만 동네 이웃들이 관심을 갖고 나선다면 어렵지 않다. '좋은 이웃들'에는 현재 73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는데 오는 9월까지 1200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이 분들이 사명감을 갖고 봉사할 수 있도록 충남 온양온천에서 1기에 30명씩 1박2일 연수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미 4기까지 배출됐다.
가정교회에서 힌트를 얻어 가정사회복지협의회를 운영하는 방안도 구상중이다. 다섯 명 정도를 하나의 단위로 해서 1주일에 한 번 정도 모여 주위에서 자원봉사할 일을 찾아 봉사하는 모임이다. 돈으로 돕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어르신들 어깨 주물러 드리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아주 소중한 봉사다. '좋은 이웃들' 연수를 마친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봤는데 반응이 아주 좋았다. 동네 사랑방처럼 가까이 있고 친근한 자원봉사 조직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정진원 (15·끝) 백두산 나무 십자가를 약국에 걸어놓은 까닭은?2013.01.20 18:16
내가 운영하는 약국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십자가가 보인다. 나무를 깎아 만든 거친 모양의 십자가인데 특별한 사연을 갖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를 지낸 김동완 목사로부터 선물받은 것인데 백두산 깊은 숲속에 숨어 예배를 드리던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이 직접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매일 아침 출근하면 이 십자가 아래에서 직원들과 함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약국 문을 연다. 약 봉투에는 성경 구절을 새겨놓았다. 손님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도 많다면서 반대하는 직원도 있었지만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다. 농어촌 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들께는 무료로 약을 지어드렸다.
많을 때는 하루 400명 가까운 손님이 우리 약국을 찾는다. 멀리는 전남 목포 신안 해남에서도 찾아온다. 무슨 비방이 있나 캐내려고 위장 취업했다 며칠 만에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약사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 약국에 특별한 비방이나 비법은 없다. 그런데도 약효가 좋다고 소문나 전국에서 찾아온다. 개업한 지 50년이 됐지만 우리 약국에서 약을 지어먹고 잘못된 사람도 없고 시비를 걸어온 사람도 없다. 기도하면서 약을 짓는 약사의 마음과 기도하면서 약을 복용하는 환자의 마음이 하나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약사는 주로 앉아서 일하는 직업이다 보니 허리디스크로 고생을 많이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두 차례나 받았는데, 90년대 중반에 받은 두 번째 수술은 여덟시간이나 걸린 대수술이었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마취과 의사는 내 심장이 약하다고 주저했지만 난 수술을 받겠다고 고집했다. 집도의는 교회 장로였는데, 내 손을 꼭 붙잡더니 "장로님, 우리 기도하면서 하십시다"며 나를 격려했다. 당시로서는 쉬운 수술이 아니었지만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나 후유증 없이 완쾌됐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성격이라 글로 다 옮기지는 않았지만 험한 일도 적지 않게 겪었다. 보증을 섰다 빚을 떠안기도 하고, 돈을 빌려줬다 떼이기도 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도 있다. "날마다 기도하라. 고난이 닥치면 성경을 묵상하며 지혜를 구하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라 오직 하나님께 의지해 다시 일어섰다.
나는 아들만 3형제를 두었다. 선친께서 아들 중 하나는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둘째가 신학 공부를 마치고 미국 LA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첫째는 내 사업을 돕고 있고, 셋째는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사회복지에 뜻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모두 감사한 일들이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모자란 나에게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셨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나를 붙들어주고 지켜주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고전 1:27)라는 말씀에 그 뜻이 있다고 믿는다.
어릴 적 부모님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잠 3;27) "그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같은 구절을 들려주셨다. 그 말씀대로 지금껏 세상 높은 곳 바라보지 않고 낮은 데 바라보며 낮은 이들 섬기며 살려고 노력했다. 세상적 기준으로 이것저것 계산하고 따졌다면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이라 여기고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앞으로도 미력하나마 힘 닿는 한 내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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