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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泉市 대항면 운수리 216, 黃岳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古刹 直指寺는 大韓佛敎 曹溪宗 第8敎區 本寺이다. 新羅 訥祗王2년(418년)에 阿道和尙이 創建했다. 創建以後 645년(善德女王14년)에 新羅의 高僧 慈藏律師가 重創하고, 930년(敬順王4년)에 天默大師가 重建되었으며 그후 能如大師가 高麗 太祖 王建의 도움을 받아서 크게 重創했다고 전해오는데, 壬辰倭亂때, 活躍한 惟政 四溟大師가 이곳 直指寺에서 스님이 되었다. 黃岳山은 억세지 않은 稜線에 雜木이 가득 들어차 봄이면 畵宣紙에 물감이 번지듯 연둣빛·배춧빛이 산을 타고 오르고 가을이면 은근한 丹楓이 골을 타고 내리는 것도 黃岳山이다. 이 산 아래 新羅땅에 佛敎가 公認되기도 전에 산을 열어 터를 잡았다는 直指寺가 있다.
直指寺 全景 긴 歷史에 비해 古風스런 雰圍氣가 느껴지지 않는 直指寺에서 古刹임을 내보이는 唯一한 建物이 大雄殿이다.
直指寺, 敎理的으로 따진다면 禪家의 家風을 적실하게 드러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는 말에서 그 이름이 由來했겠지만, 절 이름치고 事緣 한둘쯤 갖지 않은
절이 어디 있으랴. 直指寺에서 創建主로 모시는 阿道和尙이 善山의 桃李寺를 짓고 나서 손을 들어 멀리 서쪽의 산 하나를 곧게(直) 가리키며(指) “저 산 아래도 좋은 절터가 있다”고 했다 한다. 그 山이 黃岳山이고, 그 아래 터를 닦은 절 直指寺의 이름은 阿道스님의 이 말에서 왔다는 이야기이다. 비슷한 逸話가 하나 더 있다. 高麗 太祖 때 이 절을 크게 重創한 能如大師가 큰 佛寺를 하면서 자를 使用하지 않고 손으로만 가늠하여 일을 했으며, 절 이름은 여기서 생겼다는 것이다. 阿道和尙이 이 절을 創建한 해가 新羅 訥祗王 2년, 西紀 418년이라고
한다. 이 말이 事實이라면 直指寺는 우리나라의 代表的인 큰 절인 海印寺나 通度寺, 松廣寺보다도 훨씬 먼저 세워진 것이 되며, 新羅에 佛敎가 公認되기도 前에 그 터전을 닦은 절이 되겠다.
一株門·金剛門·大洋門·天王門, 萬歲樓를 지나 大雄殿
마당에 서면 긴 歷史를 가진 절이 보일 법한 古風스런 雰圍氣가 느껴지거나 古格이 우러나는 遺物·遺跡을 대하게 되는 게 아니라 새 절에 들어선 氣分이 된다. 이런 느낌은 넓은 境內를 구석구석 돌아다녀보면 한층 심해지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극히 一部를 除外하고는 大部分의 建築物들이 새로
지어지거나 제 있던 자리를 떠나 이리저리 옮겨 앉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理由가 있다. 新羅 善德女王 14년(645) 慈藏律師에
의해서, 그리고 敬順王 4년(930)에는 天默大師에 의해서 한 차례씩 重創을 거친 直指寺는 이곳에 머물렀던 能如大師가 高麗 太祖에게 도움을 준 報答으로 太祖 19년(936) 그 寺勢를 크게 키우게 된다.
新羅 景哀王 4년(927) 甄萱이 徐羅伐을 陷落하고 景哀王을 殺害하자
이를 구하러 갔던 王建은 오히려 八公山싸움에서 甄萱에게 크게 패하고 겨우 목숨을 건져 退却하고 있었다. 直指寺 近處에 當到한 王建은 直指寺에
사람을 보내 妙策을 물었다. 能如大師는 하룻밤 사이에 삼은 짚신 2천 켤레를 王建에게 전하며, 말띠 해가 되면 큰일이 이루어지리라고 豫言했다.
그 짚신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王建은 그의 도움으로 困境에서 벗어났고, 豫言대로 말띠 해 934년부터 後百濟를 制壓하기 始作해서 統一을 이룰 수 있었다 한다.
高麗時代에
줄곧 큰 寺勢를 維持하던 直指寺가 흔들리기 始作한 것은 朝鮮時代부터다. 初期에는 定宗의 胎를 묻은 胎封이 大雄殿의 뒷봉우리에 모셔지는 因緣으로
그럭저럭 예전의 規模를 지탱해나갔지만 壬辰倭亂은 이 由緖 깊은 절에 決定的 打擊을 가했다. 더욱이 이곳은 壬辰倭亂 때 많은 功을 세웠던 四溟大師가 머리를 깎고 出家한 寺刹이라는 理由로 倭兵들의 酷毒한 報復을 받았다. 大雄殿 앞에 있던 五層木塔을 비롯한 40동의 建物이 불타고
전해져오던 모든 留物들이 遺失되었으며 오직 一株門·四天王門·毘盧殿만이 남은 廢墟로 변했다. 그뒤 여러 차례 손을 보아 寺勢를 回復해가던 이 절은 朝鮮의 國運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걸으며 最近까지 근근이 그 命脈을 이어왔지만, 1960년대 以來 옛 寺格을 되찾으려는 努力으로 30년도 넘는 佛寺를 줄기차게 이어오고 있다.
直指寺의
이러한 努力을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遺物이 너른 大雄殿 마당에 左右로 솟은 雙塔이다. 이 두 탑은 본디 쌍탑도 아니었을 뿐더러 태어난 고향은 문경이다.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도천사터에 모양이 같은 탑 셋이 넘어진 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것을 1974년 직지사에 옮겨와 대웅전
앞마당에 2기, 비로전 앞에 1기씩 나누어 세웠다. 대개의 유물은 제자리를 떠나면 그 의미와 가치를 상당히 잃게 된다. 그러니 관심 있는 이들은
이 탑의 이전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지역민들이나 해당 지역 관공서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무릅쓰고 옮겨진 탑이니 저간의 사정과
직지사측의 노력을 짐작할 만하다. 이 탑들은 제 고향 문경의 탑들과 닮아 있다. 다른 부분은 신라시대 석탑과 대동소이한데, 기단만은 일반적인 신라 석탑과는 달리 단층이다. 이런
형식이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과 봉암사 삼층석탑에서도 동일하게 보이니 그 지방 탑들에 나타나는 특색의 하나였던 듯하다. 본래 세 개의 탑이 나란히
있었던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같은 예를 보령 성주사터 정도에서 볼 수 있겠는데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려진 바 없다. 대부분의 지붕돌
모서리와 상륜부는 옮겨진 뒤 손을 본 것이다. 상륜부는 실상사 삼층석탑의 그것을 참고한 것이겠는데 몸체에 비해 다소 무겁고 화려하다는 인상을
준다. 위로 솟는 느낌이 강한 반면 아래를 든든히 받쳐주는 느낌은 적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대웅전 앞 동서 쌍탑은 보물 제606호이고,
비로전 앞 삼층석탑은 보물 제607호이다.
쌍탑을 거느리고 묵중하게 들어선 대웅전은 직지사가 고찰임을 내보이는 거의
유일한 건물이자 모두들 커지고 넓어진 절 안에서도 여전히 위풍을 잃지 않고 있는 법당이다.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점은 없어도 지대석 위에
검박하게 다듬은 넓은 면석을 세운 뒤 그 위에 갑석을 올린 축대도 수수하고, 정자살과 빗살로 꾸민 문짝들도 무난하여 오히려 부담이 없는
건물이다. 한 가지 악센트가 있다면 지붕 끝 수막새를 고정시키느라 생긴 못구멍을 가리기 위해 올려놓은 연봉이겠다.
임진왜란이 지난 선조 35년(1602)에 새로 지은 집으로, 영조
11년(1735)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1) 다포집이다. 직지사를 찾은 이라면 반드시 법당 안으로 들어가볼 일이다.
법당을 새로 지을 때쯤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벽화들이나 조각이 속되지 않은 수미단2)도 눈여겨볼 만하고, 삼존불 뒤에 길게 걸린 후불탱화는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고 음미할 만하다.
모두 길이가
6m가 넘어 아주 길게 늘어진 이 세 점의 후불탱화는 영조 20년(1744)에 그려졌다. 비단 바탕에 적색·녹색·황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했는데
약간 어두운 감이 있으나 차분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배색에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는다. 이렇게 삼존불 뒤에 세 폭의 불화를 각각 봉안한 점이라든지
본존불의 광배에 물결 같은 무늬를 가득 채운 점 등은 조선 후기 불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찬찬히 살펴보면 세로로 긴 화면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 구성이 짜임새 있고 세부까지도 묘사가 치밀하다. 조선 후기 불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며,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이 이 절의 상징적 중심공간이라면 실질적 중심공간은 비로전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법회와 행사가 이루어지고 기도하는 목탁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때 처음 세워져 임진왜란의 피해를 면했던 이 법당은, 그러나 1976년 원래의 옛 건물을 서쪽으로 옮겨 조사전으로 쓰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 옛맛을 잃어버렸다. 안에는 천 좌의 불상을 안치했다. 이 천불상은 고려 초 능여대사가 비로전을 지을 때 속리산의 경잠스님을 시켜 만들었다고 전한다. 법당 하나 가득 앉아 있는 불상들 속에 고추를 내놓은 탄생불이 가운데 서 있다. 법당에 들어설 때 이 불상을 가장 먼저 보게 되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전해져, 비죽이 웃음을 물고 돌아서는 젊은이들이나 온 하늘을 안 듯 큰 합장을 하는 아낙네를 심심찮게 대할 수 있는 것도 이 법당 앞이다. 천불상을 안치한 까닭에 천불전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1996년 3월에 문을 연 성보박물관도 빠뜨려서는 안될 곳이다. 경내의 한가운데쯤에 자리한 ㄱ자 건물 청풍료를 개조하여 만든 이 박물관에는 직지사의 유물뿐만 아니라 직지사가 관할하는 말사에 전해지던 유물들까지 함께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주목할 만한 유물도 적지 않다. 예천 한천사에서 출토되어 보물 제1141호로 지정된 금동자물쇠3)는 우리나라에 두 개밖에 전하지 않는 귀중한 유산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서 있는 석탑에서 문비에 새겨진 자물쇠를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이 유물은 그런 자물쇠의 본보기가 되는 셈이다.
선산 도리사에서 발견되어 국보 제208호로 지정된 금동육각사리함은 손바닥보다도 작은 여섯 면에 골고루 불상을 새긴 선묘가 유려하면서도 거침없고, 정치하면서도 한치의 망설임이 없어 신라의 높은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보물이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마멸이 심한 대로 부드러움을 간직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319호이다. 이밖에도 무슨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사람을 매료시키는 조각솜씨가 뛰어난 목조보살상, 사자를 마치 귀여운 강아지인 양 두 손으로 잡고 어르는 목조동자상, 절집 안에 무슨 까닭으로 이런 그림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관우나 조자룡으로 보이는 장수가 말을 달리는 불화 따위가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박물관을 나와 마당을 돌아들면 직지사에 있는 또 다른 석탑을 볼 수 있다. 원래 선산의 낙동강변 원동이란 마을에 있던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선산군청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안(移安)된 이 삼층석탑은, 옮겨온 사연도 그렇거니와 그 생김새도 문경에서 옮겨온 세 탑과 거의 같다. 하지만 세 탑보다는 훨씬 안정감이 있고 균형도 잡혀 있어 조형적으로 이 탑이 한층 우수하다. 역시 상륜부는 다시 만들어 올렸고, 지붕돌 모서리나 기단부도 군데군데 수리하거나 보충하였다. 보물 제1186호이다.
이렇게 직지사를 한 바퀴 돌아나오면서 기대했던 ‘산사의 맛’이 덜해 영 아쉬운 이라면 겨울, 그것도 눈이 푸욱 내린 겨울날에 이 절을 다시 찾을 일이다. 이때는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하고 가릴 것은 적당히 가려주는 눈 덕분에 절은 한결 푸근하고 은은해진다. 감을 유난스레 즐기는 이라면 깊지 않은 가을날 이 절을 찾는 것도 좋다. 일주문 앞 비석거리에서 차나 오르내리는 돌길을 따라 수십 보를 걸으면 늙고 키 큰 감나무 아래 서게 된다. 다른 감나무 열매들이 겨우 붉은빛이 돌까 말까 할 무렵 이 나무는 벌써 말갛게 익은 제 열매들을 길 위에, 풀밭에 무시로 떨어뜨린다. 터졌으면 터진 대로 이것들을 주워먹는 맛은 그만이다. 씨도 없고 한입에 쏙 들어갈 만한 작은 열매들이 남보다 일찍 익는 조홍나무다.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에 있다. 경부고속도로 김천IC에서 김천 시내로 들어가 지통교를 건너면 바로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추풍령·영동 방면으로 약 6.5㎞쯤 가면 길 오른쪽에 검문소와 함께 왼쪽으로 977번 지방도로가 나
있다. 977번 지방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다시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 10번 시도로를 따라 가면 길 오른쪽에 직지사 입구가 나온다.
검문소 앞에서 직지사 입구까지는 약 3㎞이며 입구에서 직지사까지는 약 0.8㎞이다.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IC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김천 방면으로 약 8㎞ 정도 가도 길 오른쪽에
직지사로 가는 977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직지사 입구에는 여관과 식당 등 숙식할 곳이 많이 있으며 넓은 주차장도
있다. 김천 시내에서 직지사 입구까지는 약 10분 간격으로 버스가 다닌다.
① 백두대간의 중앙에 위치하여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산 정상에서 갈라놓는 황악산은 1,111m로 그리 높지 않은 펑퍼짐한 육산이다. 그러나 황악산 정상에 오르면 끝없이 펼쳐지는 백두대간과 함께 금오산·팔공산 일대가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다. 또한 직지사 외에는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 호젓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황악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산행길은
직지사 매표소→직지사→직지사를 지나 계곡 갈림길에서 오른쪽
큰길로→운수암→정상→정남향 능선의 억새밭을 지나→동쪽 능선길→직지사→매표소로 내려오는 산행으로 약 13.5㎞이며 5시간 정도
걸린다.
② 남산동에 있는 과하천의 맑은
물로 빚은 김천의 명주 과하주는 끈적하면서 약간 신맛이 나지만 맛과 향기가 독특하고 부드러워 예로부터 임금님께도 진상했다는 유명한
전통민속주이다. 일제강점기 때 잠시 명맥이 끊어졌지만, 해방 후 조금씩 다시 빚어오다가 근래에는 과하주 공장이 세워져 많은 사람이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과하천은 옛날에는 ‘황금의 천’이란 뜻의 금지천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금지천의 물맛을 보고 중국의 금릉 과하천과
물맛이 같다고 하여 과하천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