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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문루 月精橋1
통일신라시대 서라벌에 세워졌던 다리로 일정교와 함께 국왕이 사는 궁전인 경주 월성과
그 남쪽 남천건너편의 남산쪽 지역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현재 나무로 된 다
리는 사라지고 다리 바닥을 지탱하고 있던 석조물만 일부 남아있었다(사457호)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신라 35대 경덕왕19년(760년)에 축조된 것으로 삼국사기에 최초
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 25대 충렬왕 6년(1280년)에 경주 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여몽전쟁까지 거치며 최소한 520년간은 존재했다고 한다.신라 때는 月淨橋
였는데,그후 月精橋로 이름이 바뀌어 쓰이고 있다.2007년 복원공사 시작으로 2018년 개방
했고 3월말 최치원선생 글씨체로 북쪽문루 현판을 설치했다.공사완료는 2018년 9월쯤이라
고 한다.
요석공주와 원효가 사랑을 맺고 아들 설총을 얻은 곳으로 유명한 월정교는 길이66m.높이
9m.화강석만 6300t에 이르는 현존 우리나라 최대 목조교량이자 최초로 기와지붕을 얻는
다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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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橋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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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橋 북쪽문루(최치원 글씨현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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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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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橋 북쪽문루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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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에서 본 교촌마을 풍경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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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교에서 본 남천과 교촌마을 풍경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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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사마소 影光臺(우측위)8
이 대석은 원래 사마소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또한 옛 사마소도 이곳에서 동으로 300m 떨어진
월정교 북단에 있었다.영광대는 1860년 가을에 경주 선비들이 무너진 월정교의 석재를 운반하
여 대를 쌓은 것이다.영광은 송나라 주희의 시 天光雲影共徘徊에 나온 글로 하늘빛과 구름 그
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뜻이며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勸戒가 되는 글귀
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영광대기가 李鍾祥(1799년-1870년)의 글을 모은 定櫶先
生文集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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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司馬所 炳燭軒.風詠亭.司馬所(문2호)(경주 교동)9
사마소는 조선시대의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건물이다.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연산군 때에는 생원.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주기
도 하였다는 곳이다.선조25년(1592년)불타고 영조17년(1741년)다시지어 風詠亭이라
불렀다.옆면의 사마소라는 현판은 영조38년(1762년)부윤 洪良漢이 쓴 것이다.함께 있는
炳燭軒은 순조32년(1832년)생원 崔祈永이 지은 것이다.이 건물은 동으로 300m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터 북쪽교대위에 세워진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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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司馬所 炳燭軒(문2호)(경주 교동)10
사마소는 조선시대의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토론하던 건물이다.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연산군 때에는 생원.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주기
도 하였다는 곳이다.선조25년(1592년)불타고 영조17년(1741년)다시지어 風詠亭이라
불렀다.옆면의 사마소라는 현판은 영조38년(1762년)부윤 洪良漢이 쓴 것이다.함께 있는
炳燭軒은 순조32년(1832년)생원 崔祈永이 지은 것이다.이 건물은 동으로 300m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터 북쪽교대위에 세워진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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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詠亭.司馬所11
司馬所 라는 글씨는 영조38년(1762년)부윤 洪良漢이 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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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買井碑閣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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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財買井(사246호)13
재매정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살던 집터라고 전해지는 곳에 남아있는 우물로서
재매는 김유신의 부인 이름이다.월성에서 서로 약400m거리에 위치하며 바로 앞에
는 南川이 흐르고 있다.우물은 높이가 35cm인 장대석 2개를 맞물려 놓았으며 안전
을 위해 위에는 판석을 덮었다.정사각형의 우물로 깊이는 약5.7m.최대지름1.8m
바닥지름1.2m이며 옆에는 조선 고종9년(1872년)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삼국사기
에 선덕여왕4년(645년) 김유신 장군이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중에 백
제군이 다시 침범해 온다는 급보를 받았다.장군이 쉴사이도 없이 출전하는 길에
자기 집앞을 지나게 되자 병사를 시켜 물을 떠오게하여 마신다음 우리집 물맛은 옛
날 그대로구나!!하면서 떠났다는 기록이 있다.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 일대
를 5차례 발굴조사한 결과 청동기시대 집터를 비롯하여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건물지가 확인되어 주변이 오랫동안 주거공간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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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태대각간 개국공 김선생유허비(조선 고종8년(1872년세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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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沙伐知旨15
장사벌지지는 신라 충신 朴堤上公夫人遺蹟으로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이 듣고 쫒아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입구 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드러 누워 길이 부르짖었으므로 그 모래를 長沙
라 하였다.그 친척 두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
나지 하였으므로 그 땅을 伐知旨라고 하였다(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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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望德謝址 幢竿支柱(보69호)(좌측)(경주 배반동)16
당간은 옛날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인데,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신문왕 5년(685년)
처음 건립되었다.이 당간지주도 절이 처음 건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따라서 통일신라 초기의 양
식이나 조각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다.
慶州 望德寺址(사7호)목탑지.금당지(우측)(경주 배반동)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5년(685년)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외침을 막기 위하여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지었는데,당나라에게는 황제를 위한 절이라고 거
짓으로 말하였다.이 말을 듣고 당에서는 예부시랑 악붕구(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를 살펴
보게 하였다.신라 조정은 사천왕사를 보여서는 안 되리라 여겨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곳으로 당의 사신을 인도하였다.그러나 사신이 사천왕사가 아니라 하여 새로운 절에는 끝내 들어
가지 않아 신라의 관리들이 사신에게 금을 주었다.그 후 사신은 돌아가서 사천왕사는 황제의 만수를
빌고 있는 절이라고 거짓 보고 하였다.이후 새로지은 절을 망덕사라 하였다. 현 망덕사지에는 동.서
13층 목탑지.금당터.강당터.중문터.회랑터.익랑 등이 남아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쌍탑 절 배치를
보이고 있다.2013년 정비를 위하여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강당터 위치를 추가로 확인했고 고려초
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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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四天王寺址(사8호)(경주 배반동)17
사천왕사지 목탑지.금당터(좌측).사천왕사지 당간지주(우측)
狼山 남쪽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염원이 깃든 사찰로 신라 문무왕19년(679년)明朗法師가 발원하여 세
웠다.지금은 금당터.목탑터.중문터.회랑터.익랑터.당간지주.머리부분이 없어진 거북모양
비석받침돌2기.강당터 등 유적일부는 파괴되었다.발굴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으며
신라 최고의 조각가 良志가 만든 소상인 錄釉四天王像塼이 출토되었다.2006년 학술조가
가 7년 실시되어 錄釉四天王像塼의 圖像이 완전 복원되었고 가람 배치가 명확하게 밝혀졌
다.비각지.석교.비판 등도 추가로 발견되었으며 이중 석교는 불국정토로 들어가는 것을 상
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어 미학적인 면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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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거북모양의 비석받침돌2기(좌측).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우측)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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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狼山 一圓(사163호)(경주 배반동)19
경주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처럼 누워 양쪽에 각각 봉우리를 이루었다.
높이는 108m로 예로부터 신라의 진산으로 불리며 신성스러운 산으로 여겨졌다.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는 낭산에 구름이 일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향기가 피워올랐는데,왕이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 노니는 것으로 여기고 그 후
부터는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다.산자락에는 거문고의 명인 百結先生이 살았
으며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도 있다.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의 릉이 있고 그
아래쪽에는 호국사찰로 알려진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터가 있다.동북쪽에
는 皇福寺址와 삼층석탑.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보살삼존불상이 있다.주변에는
문무왕의 화장터 또는 소조불상을 모셨던 곳으로 여겨지는 陵只塔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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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善德女王陵(사182호)(둘레73.3m.높이6.86m.지름23.4m)20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632년-647년.김덕만)을 모신 곳으로 경주 동남쪽 낭산 남쪽기슭에 있다.
선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분황사.황룡사9목탑층탑 등을 건축했고 김춘추.김유신을
거느리고 신라의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삼국유사에는 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라고 하였는데,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했다.그날에 이르니 왕이 진짜로 세상을 떠났는데,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
쪽에 장사를 지냈다.30여년이 지난 문무왕19년(679년)에 왕의 무덤아래 사천왕사를 처음 건립하
였다.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
러움을 알 수 있었다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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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릉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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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陵只塔址(기34호)22
이 탑지는 낭산서쪽 기슭에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건조물로 높이는
4.49m이다.능지탑.陵市塔.蓮華塔으로 불린다.무너진 것을 다시 쌓을 때 원형을 알 수 없어
2단만 쌓고 나머지 돌은 옆에 모아 었다.이 탑지는 문무대왕 화장터로 추정되며 발굴시 굴방
서 큼직한 소조불상 파편이 나왔으므로 탑묘였을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1979년 기단부를
복원했고 상부를 추정하여 정리했다.원래 기단 방에 십이지신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던 5층탑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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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탑 십이지신상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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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탑 십이지신상24
(2018.03.03)
첫댓글 옛고사를 추정하여 참으로 월정교 멋지게 지었네. 그리고 김유신의 집터 재매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사잔으로 나마 처음 보게 되었네.
이번 답사에서는 월정교와 재매정 등 전에 가보지 못했던 곳을 봤기에 더욱 좋았다네...특히 선덕여왕에 얽힌 이야기가 더욱 흥미로웠다.내가 아무날에 죽을 것이니 도솔천에 묻어달라는 예언을 했다고 한다.그많큼 예지력이 있었던 여왕같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