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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선은 가곡 보리밭의 전파자.
작성자클마니|작성시간22.01.26|조회수461
보리밭 노래를 전파시킨 공로자 문정선
‘보리밭’은 1971년 대중가요 가수 문정선이 불러 크게 히트했고, 무명이었던 문정선도 일약 대 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보리밭의 원곡은 윤용하(1922-1965.7.23)씨가 6.25 부산 피난지절 가곡으로 작곡한 것인데 오래 동안 묻혀 있다가 그가 세상을 떠나고 6년이 지난 후 문정선 불러 대중가요로 히트시킴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문정선은 덕성여고 2학년 때 KBS라디오 프로그램 ‘천국노래자랑’에 출연을 시작으로 1970년엔 TBC 7대 가수신인상을 수상하면서 KBS악단장이었던 김강섭씨에 의해 가수로 발탁돼 ‘보리밭’을 약간 빠르게 편곡해 21세의 문정선에게 주어 KBS전파를 타게 함으로써 주옥같은 가사와 서정적인 음률로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천금 같은 기회를 만난 문정선은 방송국드라마 주제곡의 90%이상을 휩쓸며 방송국외에는 출연하지 않을 정도로 도망하다시피 방송 일을 하며 몇 년을 바쁘게 보냈다. 이렇게 문정선은 방송활동이 폭풍 같이 지나자 오늘 날 자신에 안겨준 영광은 보리밭의 작곡자 윤용하를 떠나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정선은 윤용하의 자녀들이라도 찾아보기로 했다. 어느 봄날 문정선은 맘껏 준비한 선물을 앉고 윤용하의 윤용하의 자녀들이 산다는 금호동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산비탈 허름한 집이었다. 문을 두드린 지 한참 만에 딸이라는 분이 나왔다. 문정선이 방문목적을 조아리듯 공손히 건네자. 딸은 대뜸 문을 쾅 닫고는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애긴 즉, 아버지 윤용하씨의 영혼이 깃든 가곡을 그런 저속한 유행가로 둔갑시킨 장본인의 치사는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문정선은 선물보따리도 전하지도 못한 채 무안만 앉고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던 것이었다.
이웃에 물으니 남편은 택시기사라고 들려줬고, 남동생 윤은철은 당구장 일을 본다고 했다. 당구장 주인이면 좋으련만 종업원이라면 신은 너무 무심하지 않은가.
윤용하씨는 남산 중턱 토굴 같은 단칸셋방에서 굶어죽었다는 기사가 떠돌 만큼 지독한 역경 속에서 가난에 쫓긴 채 두 자녀 앞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니 말이다.
이 같은 문정선씨의 윤용하씨의 가족 찾기 낭패담은 모 주간지 기사에 크게 실리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연 윤용하는 누구인가?
윤용하 그 사람!
윤용하는 1922년3월16일 황해도 은율군에서 4대 째 천주교 신자로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를 피해 구월산으로 들어가 옹기를 구워 팔던 가롤로 윤상근尹相根과 마리아 사이에서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고 은율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요셉’이라는 세례명은 외할아버지가 지어줬다고 한다.
윤용하는 3살 때 할머니 등에 엎여 평북 의주군 비현면으로 이사를 갔고, 이곳 비현본당에서 처음으로 오르간을 구경했다. 그는 어릴 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대축일에 성가를 독창으로 불렀고, 연극에도 출연해 본당신부의 귀여움을 받았다.
보통학교(초등학교) 5학년 때 옹기장이 아버지를 따라 만주 봉천으로 이주해 보통학교를 마쳤다. 가난이 숙명이었던 그는 이 보통학교 졸업이 윤용하의 최종 학력이었다.
이후 윤용하는 만주에서는 주로 외국인들이 모이던 가톨릭교회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더욱 심취했고, 당시 심양 관현악단의 일본인 지휘자 가네코(金子)로부터 틈틈이 작곡과 화성학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음악 공부는 거의 독학하다시피 했다.
이 당시 윤용하와 만주에서 보통학교 시절을 같이 보낸 성악가 오현명씨는 초등학교 5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어린 시절 윤용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주에서의 보통학교시절, 나는 방과 후 학교운동장에서 공차고 노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전학해 온 낯선 아이가 운동장 한쪽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학교 졸업 후 서로 소식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5년쯤 후 합창단원 모집광고를 보고 갔더니, 곱슬머리 친구가 피아노 반주로 지원자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바로 ‘조선합창단’의 단장 겸 지휘자 윤용하였다. 바로 다음날부터 약 20명이 합창연습에 참여했다. 단원들은 대부분 악보를 볼 줄 몰랐기 때문에 그저 윤용하가 불러주는 노래를 익혀서 부르는 실정이었다. 나는 그때 겨우 악보를 읽기 시작한 수준이었는데, 윤용하는 혼자서 작곡과 편곡, 지휘까지 맡아서 했으니 그의 음악적 재능은 지금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윤용하
17세 때, 이 천재소년의음악적재능을 알아본 프랑스 신부는 그를 음악신부로 키우고자 제안을 했지만, 부모가 장남이라는 이유로 반대를 해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19세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윤용하는 만주작곡가협회 회원, 봉천조선인합창단 단장, 신경가톨릭성가대 지휘자로 활동하며 칭송받았다.,
20세 때는 첫 작품 칸타타(교성곡) ‘조선의 사계’를 직접 지휘해 봉천 조선 합창단과 봉천 방송 관현악단의 협연으로 공연하며, 김동진, 김대현, 김성태씨 등과 눈부신 음악활동을 했다. 1년 뒤에는 신경에서 ‘백조합창단’을 조직해 자작곡 합창 발표회를 두세 번 열었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징병 당해 끌려가던 도중 탈출해 간도로 피신해 간도사범학교에서 강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리곤 만주 용정으로 가 용정사범학교에서 음악강사 자리를 얻었고 최옥섭과 결혼도 했다.
다시 함흥으로 이주해 영생여자중하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공산정권에 신물이 난 나머지 1946년 여름 아내와 함께 월남해 서울 동북고 음악교사를 지내며 음악인들과 함께 음악가협회를 조직해 ‘새 가곡 보급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통학교 학력으론 별로 발붙일 곳이 없었던 차에 1949년 광복절이 제정되며 ‘광복절노래’ 가사공모가 있자, 이듬해인 4월26일 정인보가 작사하고 윤용하가 작곡한 노래가 당선되는 영광을 앉았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그러나 이 곡은 두 달 뒤 6.25남침으로 불리지도 못하고 말았다. 필자는 초등학교시절 윤용하가 작곡한지도 모르고 부르던 바로 그 노래였다.
보리밭 작곡사연
6.25한국전쟁이 터지자 부산 남포동으로 피난 온 윤용하는 생활비를 벌기위해 종종 방송국을 찾았고, 그곳에서 보리밭 작사자 박화목 시인을 만났다. 박화목도 황해도 황주출신으로 은율출신의 윤용하와 이웃한 고향에다, 나이도 2살 위라 두 사람은 자연스레 친해졌다.
1951년 봄 윤용하는 박화목과 송도 다방에서 만나 두고 온 고향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무리 피난살이지만 보람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남길만한 노래를 만드세”라면서 박화목에게 글을 부탁했다고 한다. 2-3일 뒤 박화목이 가사를 써서 윤용하에게 줬는데 원 제목은 ‘옛 생각’이었다. 윤용하는 이 가사를 들고 강서구의 드넓은 보리밭을 뚜벅 뚜벅 걸어가며 목이 타도록 영감을 갈구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를 거듭하던 중 불현듯 누가 부르듯 악상이 떠올라 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그냥 강바람에 일렁이는 창창한 보리밭뿐이었다. 윤용하는 내쳐 스치는 영감을 주섬주섬 음표로 담아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뒤 용용하는 술자리에서 박화목을 만나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꾼 악보를 내밀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폭음과 아우성의 전쟁의 한 복판에서 너무나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보리밭’이 기대고 설 땅이 없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윤용하는 국민작곡가
윤용하는 부산에서 한국전쟁을 치르며 종군음악가로서 해군군악대가 주둔하고 있던 남포동 자갈치 해변을 자주 찾았다. 이곳에서 군가 ‘사병의 꿈’ 등을 작곡했다. 짬을 내어 대한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어 전시동요 작곡발표회를 열고, 동요집 ‘소년 기마대’를 출판했다. 국기게양대의 펄럭이는 태극기를 배경으로 어린이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는 윤용하의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은 이 당시 사진가 임응식의 작품이다.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 어린이합창단을 조직해서 동요를 가르치면서 찍은 사진
1951년 6월,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북한군 2개 사단과 양구 도솔산지구 전투에서 17일 간의 공방전 끝에 24개 고지를 모두 탈환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도솔산 전승지를 방문하여 ‘무적해병’이란 휘호도 내렸고, 이에 고무 받은 해병대 사령부가 군가를 현상 모집했다. 이렇게 하여 이혁 작가가 글을 쓰고 윤용하가 곡을 붙인 그 유명한 ‘해병대노래’ 가 탄생을 보게 되었다.
동해의 솟는 해를 가슴에 안고
저녁 바다밀물의 파도를 타며
가는 곳마다 그 이름 승리의 용사
오~ 아느냐 대한 해병대
9.28 서울수복 후 귀경한 윤용하는 의 서울 생활은 전성기였다.
미완성 오페라‘견우직녀’,교향곡 ‘개선’, 교성곡 ‘조선의 사계’을 작곡하고 공연했으며, 1960년에는 ‘나뭇잎 배‘,’노래는 즐겁다’, ‘오막살이’등 자작동요 100곡 발표회가 열렸다. 그 외에도 국토아리랑,‘ ’구궁화‘ ‘민족의 영광’, ‘희망의 노래’, ‘동백꽃’,‘한가위 달’, 등을 비롯해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소년의 노래’와 ‘성당 종’등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가곡중심의 국민가요 작곡자로 후세에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는 유행가를 대놓고 폄훼한 것이 아니라 가곡이 유행가 이상으로 국민가요로 불려지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가요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부르기 위한 곡이다. 따라서 작곡가들이 국민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국민가요 작곡에 임해서 그들이 좋은 작품을 즐겨 부르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작곡가들이 국민가요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도 않고 유행가 작곡계를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행가 작곡가들은 우리 작곡계의 어느 누구보다도 솔선해서 6·25사변 후부터 국민가요뿐 만이 아니라 군가도 작곡했다. 그리고 전쟁터를 누비면서 이를 보급함으로써 일반 국민이 국민가요를 노래하는데 기여했다. 이같이 유행가 작곡계에서는 전시 중에도 활약한 바 있으나, 우리 작곡계는 과연 어느 정도의 일을 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신앙생활을 성실히 이어갔다. 사순시기40일 동안은 좋아하는 술도 끊었단다. 한국전쟁 중에는 가돌릭음악가협회 부회장을 지냈고, 신당동 본당과 인천 답동 본당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했다.
윤용하 평생의 꿈은 자신의 작곡집을 출판하는 것과 함께 가톨릭 주일학교용 동요집 출판, 대한어린이 합창단 재건이었다.
윤용하의 선종
그러나 윤용하는 생전에 이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7월 23일 밤 서울 필동의 단칸 셋방에서 43세란 짧은 나이에 부인과 두 남매 윤은희와 윤은철을 두고 생을 마감했다. 윤용하의 사인은 간경화이지만 사실상 영양실조였다. 항간에는 굶어죽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사실, 윤용하는 부산피난 시절부터 서울에서 숨질 때 까지 줄곧 끼니를 걱정하는 연속이었다. 윤용하는 아귀다툼의 생존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패한 현실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술을 자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윤용하는 막걸리를 마지지 않은 날이 이상할 정도로 안주 없는 술을 마시는 것으로 유명했다. “윤용하는 술을 퍼마신 게 아니라 인생을 퍼마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삶을 회고 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신앙과 작곡과 술’이렀다고 한다. 그는 안주 없는 술을 마시는 걸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술을 많이 셔도 주정하지 않고 마실수록 조용해지고 수집어 지는 것이 그의 특징이라고 한다.
명색이 작곡가 이면서도 생전에 작곡집을 한 번도 내보지 못한 그는 그 모든 것을 술로 풀어버리려고 술에 함몰당해 초탈한 생활무능력자 이었다.
윤용하의 요절소식이 전해지자 기자들이 윤용하의 번지를 뒤졌지만 한 번지에 수천호가 잡거한 판자촌인 지라 이들을 넘겨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천재가 누었던 곳은 판자 집도 못되는 종이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 위였다. 미의 순수한 응어리가 이승을 마친 뒷모습이었다. 당시의 모습을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비망록에 따르면, 그가 만년에 폐인이 되어 이곳저곳 구걸하려 다닐 때 추념해 주었던 사람들의 액수가 300원, 500원…, 으로 나와 있다. 그는 친구들의 신세를 졌지만 그 갚음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운명하는 순간까지 암흑과 고뇌의 시대를 남산 중턱 움막 판자 집 단칸 셋방에서 처절히 살다 간 이승의 마지막 현주소였다.
성당 성가대를 지휘하는 윤용하
박화목은 그가 쓴 <윤용하 일대기>에서 “그는 체념이 몸에 밴 낙관주의자인 듯싶었다.”라고 말했고, 그의 친구 김대현씨는 윤용하와 그의 가족이 살았던 남산 아래 필동 단간 셋방에 가 보고 “그 방은 북간도 일본헌병대의 감방만큼이나 침침했어요.”라고 그의 처참했던 윤용하의 생활이야기를 했다. 윤용하는 평생을 지긋지긋한 가난과 고독과 싸우며 종이 상자를 뜯어 여민 단칸방의 거적위에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가 남긴 예술적 업적으로 볼 때 그의 죽음은 매우 불공형해 보인다. 당시에는 저작권료 같은 것이 있을리 만무한 시기였다. 윤용하가 살았던 시기는 가난하고 병이라도 나면 참 불운한 생을 보내야 했던 시절 보통학교만 나온 학력으론 아무리 음악적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윤용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그의 소유된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칸 셋방살이를 전전했고, 피아노는커녕 낡은 오르간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친구인 성악가 오현명이 남산음악학교에서 공부를 더 할 것을 권했지만 “예술을 한다는 사람이 무슨 자격이 필요하단 말이오?”라고 반문하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윤용하의 소식을 들은 노기남 대주교가 성모병원 의사를 필동 그의 단칸 셋방으로 보냈으나 이미 대가 늦어 치료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가 병상에 누운 지 3개월, 최모이제 신부에세 마지막 종부성사를 본지 사흘 만에 아내와 어린 남매 윤은희와 윤은철을 두고 선종하니 1965년 7월23일 이었다. 26일 명동 대성당에서 영결미사를 마치고 금곡리 천주교묘지에 먼저 간 그의 부친 무덤이 마주 보이는 곳에 안장되었다.
노래비로 부활한 윤용하
윤용하의 대표곡 ‘보리밭’은 윤용하 선생이 떠난 지 6년이 지난 1971년에야 문정선에 의해 대중가요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대중가요는 물론 가곡으로도 널리 애창되기에 이르렀다. 문정선의 보리밭이 히트하자 그 이듬해엔 '경향잡지' 8월호에 윤용하의 일대기가 실렸으며, 잇따라 윤용하가 그토록 바랐던 작곡집도 같은 해에 출간됐다. 1974년엔 동아일보기자출신 이부영의원이 <윤용하 평전>이 동아일보에 게재되어 그의 전모가 세상에 소상히 알려졌다.
2005년엔 광복60주년과 그의 40주기를 맞아 문화훈장도 추서됐고 호암아트홀에서 성악가 오현명씨가 중심이 돼 결성한 윤용하기념사업회 주관 하에 기념연주회도 열렸다. 20주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윤용하의 작품 연주회였다.
마침내 2009년엔 윤용하가 해군군악대를 따라 종군작가로 일했던 부산시 자갈치 시장에 보리밭 노래비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2살 때 부산피난살이를 했던 윤용하의 딸 윤은희씨는 부산에 아버지의 노래비가 건립된다니 꿈만 같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을 위해 이름 없이 생명을 바치신 순국선열들이 얼마나 많으신가? 그 후손들 중에 아마도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이 아직도 떠도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나의 아버지는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사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해주는 분들이 있으니 말이다. …음악을 너무도 사랑하신 나의 아버지!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던 시대 상황 아래에서 생명을 더 연장하셨던들 오히려 더 누추한 모습이지 않았을까?’” 2009년 5월 22일 <부산일보>는 “아버지의 가곡이 탄생한 부산에 노래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래서 늘 기도했는데 드디어 응답이 온 것 같다”고 기뻐하는 딸 윤은희 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윤은희씨와 부산의 보리밭 노래비
윤은희씨는 문정선이 가곡을 유행가로 불러 아버지의 참된 예술 혼을 훼손했다면서 금호동 집을 찾아 온 그녀를 홀대해 돌려보냈지만, 돌아보면 부산에 보리밭노래비가 세워지기 까지 그 공을 생각하면 뭐니 뭐니 해도 문정선씨의 노래히트가 그 효시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깊은 잠에든 윤용하를 세상에 깨워낸 것이다. 더구나 보리밭이 가곡으로도 대중가요로도 애창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윤은희씨도 이즈음 마음을 돌린 듯해서 마음이 가볍기만 하다. 윤용하의 가난에 대해서도 윤은희씨는 굶어죽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조금 불편했을 뿐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다고 소문을 정정하기도 했다.
202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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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돌멩이 작성시간22.01.27
보리밭 노래를 전파시킨 공로자 문정선 깊은 잠에든 윤용하를 세상에 깨워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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