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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과 지방 관제의 확립
- 수대의 3성제를 답습, 다만 내사성을 중서성으로 고치고, 3성이 해야 할일을 구분
- 중서성 : 안건을 기안
- 문하성 : 심의
- 상서성 : 집행
- 중서령과 문하시중은 최고 장관으로 바로 재상, 상서성 아래 6부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부
- 좌우복야가 상서성의 장관으로 각부의 장관인 상서를 다스림
- 중서성과 문하성의 의견이 대립,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중앙에 특별히 정사당을 설치
- 중서령이나 문하시중이 함께 정사에 참여, 상서좌우복야는 동중서문하평장사 또는 동평장사라는 직을 가져야 정사당에 참여할 수 있었다.
- 재상의 수는 늘어났고(정원이 없음), 상대적으로 황제의 권력이 강화
- 6부의 정령을 집행하기 위해 9시와 5감
- 9시 : 태상시, 광록시, 위위시, 종정시, 태복시, 대리시, 홍려시, 사농시, 태부시
- 5감 : 국자감(國子監), 소부감(少府監), 장작감(將作監), 군기감(軍器監), 도수감(都水監)
- 중앙의 감찰 기구로 어사대, 장관인 어사대부
- 형부나 대리시에서 판결한 내용을 감독
- 국가의 중대사가 일어나면 대리시 경과 형부상서 어사중승이 함께 공동으로 심리, 이르 ㄹ"삼사추사"
- 지방행정
- 수의 제도를 답습, 주현 2급제, 주에는 자사, 어떤 대는 군이라 하여 군수, 현에는 현령
- 현 아래로 향리제, 100호를 1리로 하여 이정을 두고, 5리를 1향으로 하여 기로(耆老, 정관 9년에 향장(鄕長)을 두었다가 후에 폐지)
- 도시에는 방(坊)을 단위로 방정(坊正), 역의 부과와 같은 기본적인 행정
- 변방 지역이나 중요한 지역에는 주나 군의 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도독을 두었는데, 본래 군사적 성격이었으나 소재지의 지사를 겸하여 행정권도 장악
- 태종은 전국의 산천 지형을 바탕으로 10개의 감찰구(도, 道)를 두어 10도,
- 관내(關內), 하남(河南), 하동(河東), 하북(河北), 산남(山南), 농우(隴右), 회남(淮南), 강남(江南), 검남(黔南), 영남(嶺南)도
- 현종 때 강남도가 좌우도로, 산남도가 동서로, 관내도에서 경기도가 분리, 검중도가 증설 15도
- 각 도마다 순찰사를 두어 주 현의 정무를 감찰
당의 법과 교육
- 수의 "개황률"을 근거로 정리
- 당의 법은 관대한 편
- 법전의 형식은 네가지 : 율(律), 영(令), 격(格), 식(式)
- 율은 법률, 영은 국가의 각종 제도상 해야 할 규정, 격은 각종 행정 명령, 식은 행정 기관에서 구체적으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세칙
- 영, 격, 식은 율을 표준으로 삼아 율과 충돌해서는 안되었다.
- 율, 영, 격, 식이 서로 보완해 주어 율령 제도가 완비
- 고조때 개황률을 참고하여 증감하고 "무덕률"을 완성, 수율을 크게 바꾸지 못함
- 정관 때 다시 혹법을 삭제하는 등 "정관율"
- 현존하는 "당률소의"는 개원 25년(737)에 개정된 "개황률"의 해석서, 당령은 이듬해 편찬된 "당육전"에 많이 수록
- 당의 율령 체제는 건국 초부터 안사의 난으로 당의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시기까지 유지
- 당의 율령 체제는 동아시아 각국에 전파, 각구의 법전 편찬에 영향
- 관리 선발은 과거,
- 수 양제 때 진사과, 당에 들어와 더욱 완비
- 당대에 관리가 되는 길은 국자감과 같은 학교 교육을 받은 생도, 독학하여 주 현에서 시험을 보아 뽑은 향공을 중앙의 예부로 보내 시험을 보게 함
- 정기적이어서 상거(常擧), 제거(制擧) : 황제가 특별히 필요한 인재, 부정기적
- 상거의 경우 급제하였다 해도 다시 이부에서 시험을 보아 관리로 임명, 제거는 이부 시험
- 시험 과목, 사공팔과
- 진사(進士), 명경(明經), 수재(秀才), 명법(明法), 명자(明字), 명산(明算), 도거(道擧), 동자(童子)
- 진사와 명경과가 중요
- 진사 : 시부(詩賦)와 책론(策論),
- 명경 : 경의(經義)
- 응시자의 사회적 신분이 다르기도 함
- 당시 30세에 명경에 급제하면 너무 늦고, 50세에 진사에 급제하면 너무 빠르다라는 말이 있다.
- 과거제 실시로 교육이 중시
- 학교는 개국 이래 야 ㄱ백여 년 동안 상당히 완비
- 중앙 직계의 학교로 국자학, 태학, 사문학, 광문관, 율학, 서학, 산학
- 광문관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폐지, 6학, 또는 6관이라 부름
- 국자감과 태학이 귀족 자제를 위해 세운 것, 그 밖의 것은 평민에게도 개방
- 율(律), 서(書), 산학(算學)은 수대에 설치, 한때 폐지 되었다가 정관 시대 회복
- 당 초기, 과거 제도의 발달과 더불어 지방에도 학교를 설치
- 개원 시대 (713~41), 전국의 학생 수는 63,320명, 그 가운데 주현의 학생의 60,710명
- 과거를 중시, 학교 교육을 경시
- 안사의 난 이후 정치와 사회가 혼란, 학교 교육도 점차 쇠퇴
사회, 경제의 발전
- 수의 균전제와 조용조제를 답습
- 태어나면서부터 황남(4~15세), 중남(16~20), 정남(21~59), 노남(60세 이상)으로 나눠 매년 조사를 해 3년에 한번씩 호적을 만들었다.
- 중남과 정남은 구분전 80무, 영업전 20무, 노남은 구분전 40무, 과부와 처첩은 30무, 만일 이들이 호주이면 영업전 20무와 구분전 30무를 지급
- 상공업자나 관호는 백성의 반을, 도사나 승려는 전 30무, 비구니와 여도사는 20무
- 일반 부녀, 부곡, 노비는 토지를 받지 못함
- 귀족 관료들에게는 별도의 규정이 정해져 친왕부터 작위가 있는 사람은 영업전 100경, 1품에서 9품에 이르기까지 품에 따라 60경~2경
- 관료와 각 관청에게는 국가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직분전, 공해전을 주어 그 지조로 관료의 봉록을 보충, 관부의 비용으로 쓰게 함
- 귀족 관료에게 준 영업전, 사전(賜田, 황제가 하사)은 자유롭게 매매 가능
- 백성도 이사, 장례 비용을 위해 영업전 매매
- 협향에서 관향(寬鄕, 인구가 적고 땅이 넓은 지방)으로 이사를 하면 구분전도 매매
- 조용조제는 균전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것,
- 조(租) : 정남이 매년 국가에 속(粟) 2석을 납부,
- 조(調) : 비단 2장과 면 3량이나, 포 2장 5척과 마 3근
- 용(庸) : 정남은 매년 20일 부역, 만일 복역하지 않으려면 하루에 한번씩 비단 3척, 포 3척 7촌 5분을 대신 바침
- 관료나 귀족은 조용조의 면제
- 균전제의 실시는 지역에 따라 다소 다름
- 협향의 경우 관향의 반
- 당 초기, 수말기의 반란으로 인해 관향이 비교적 많은 편, 법에서 규정한 것만큼 줄 수 있었다.
- 잡호, 관호, 공상업자, 심지어 승려나 도사에게도 전을 주었기 때문에 이들의 신분적 지위가 향상
- 절과 도관의 경제가 남북조 이래 크게 발전,
- 당대에 다시 승려와 도사들에게도 토지를 주어 사관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 셈
- 수용대역은 농민들에게 비교적 많은 시간을 생산에 종사할 수 있게 한 점에서 좋았다.
- 문벌 세족의 세력은 점차 약화
- 귀족의 토지는 "주가적(注家籍)"에 세습된 전객과 부곡이나 노예에 의해 경작, 수말기의 반란으로 부곡과 노예들이 상당수 해방되었기 때문
- 한문 귀족이 발전, 이들과 관계된 것으로 계약성의 조전(租佃) 관계가 나타남
- 계약성의 조전 관계는 투르판 지역에서 발견된 계약 문서를 통해 지주와 조전인, 기간 및 전조의 액수 등을 파악할 수 있다.
- 이들 계약 전농의 신분은 주가적의 전객이나 부곡보다 신분적으로 자유로웠다.
- 균전제와 조용조의 시행 등은 농민의 처지를 크게 개선, 당 전기 사회의 변화와 생산력의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작용
- 균전제 가운데 영업전의 비율이 높고, 토지의 자유 매매 제한이 비교적 관대, 이를 시행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 정해진 토지 이상을 점유하는 현상이 비일비재, 당 초기의 문무관은 642명(정관 6년, 632)이었으마, 중기(개원 25년, 735)에는 1만 8805명, 이들에게 지급된 것이 3배
- 국가가 통제하는 토지는 감소, 무측천부터 현종 때까지 농민에게 규정된 토지를 나누어 줄 수 없는 지경,
- 균전제가 파괴, 안사의 난 후, 빈부의 차가 확대
- 대지주 등장, 토지뿐 아니라 여기에서 생산에 종사하는 농민들도 토지와 함께 연계, 하나의 생산 단위를 형성하는 전장(田莊)을 가짐
- 관의 전장은 국가의 소유, 황실의 전장은 황제의 사유
- 전장은 관료뿐 아니라 불교가 발전하면서 사원도 전장을 소유
- 전장의 생산자는 장객과 고농,
- 장객 : 장호, 객호 또는 객이라 부르고, 부득불 전장주의 요구에 따라 생산량의 일부(심하면 수확량의 50%)를 바침
- 고농 : 당 후기 보편적, 생활은 더욱 형편 없음
- 전장의 등장으로 균전제의 파괴가 확대되면서 더욱 많은 농민들이 파산, 유민으로 전락
- 안사의 난 이후 더욱 심해짐
- 정남을 중심으로 죠용조 세법도 더 이상 실시할 수 없음
- 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세목을 늘려야 했으므로, 더욱 문란
- 건중 원년 (780), 양염의 건의에 의해 잡세를 폐지하고 양세법을 실시
- 양세법은 정부에서 예산을 편성, 그 예산에 의해 세금을 징수,
- 정남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어 세액을 정해 매년 여름과 가을 두 차례 납부
- 자기 토지가 없이 남의 토지를 경작하는 전객은 단시 호세만 납부
- 세제가 간편, 관리들은 부정할 수 없었고, 두 번에 나누어 세금을 징수, 백성의 부담도 경감, 국가의 재정 수입은 배 이상 증가
- 토지를 구각에서 나누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가 개인의 재산으로 바뀌고 자유롭게 매매, 대토지 소유자가 나타나는 결과
- 처음 물가가 비싸고 돈의 가치가 낮았을 때 실물을 돈으로 환산해 세금을 납부, 부담이 적었지만
- 반대로 물가가 싸고 돈의 가치가 비싸지면서 농민들은 먹어야할 식량을 싸게 팔아 환전,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생활이 더욱 곤궁
농업과 수공업
농업
- 당대의 양식은 속(粟)과 도곡(稻穀)
- 논농사는 모를 이양, 재배하는 방법이 채용,
- 1년에 두번 수확하는 2모작이 남방에 등장, 북쪽에는 2년에 세번 수확하는 경작법
- 고량과 교맥(메밀과 밀)이 황하 유역으로 유입
- 채소는 40여종이 재배
- 상추와 시금치 등이 서역으로 들어오고, 채소의 재배 기술에도 새로운 방법이 등장
- 장안 부근의 농민은 여산의 온천수를 끌어들여 오이와 비채(순무와 같은 야채)를 재배, 봄에 수확, 이는 대체로 수당 시대 시작
- 차를 마시는 풍조가 남북조 시대 장강 유역에서 유행, 당대에 전국적으로 보급
- 차의 생산은 강남 지역 농업의 중요한 부분
- 차의 종류도 20여종,
- 육우, 처음으로 차에 관한 "다경"을 지음
- 의복은 비단과 마를 재로
- 양잠과 뽕나무의 재배를 장려,
- 양잠도 황하 유역이 중심, 장강 유여에도 발전, 복식은 사회 신분 등급을 나타내는 것, 관복은 물론, 평상시에 입는 상복의 경우 색상이나 모양, 장식된 문양이 각각 다름,
- 농기구 개량,
- 곡원려와 관개를 위해 통차를 만듬
- 황무지 대대적으로 개간,
수공업
- 수공업은 관영, 민영
- 전기는 관영 수공업이 중요한 자리
- 작방의 규모도 크고, 분업, 생산품은 주로 관에서 사용
- 후에 민영, 개인 작방이 출현, 규모는 관영보다 작음
- 장인들은 장호라는 호적, 세습, 관의 통제, 제품은 대부분 궁정이나 관료들이 사용, 상품화가 낮음
- 당대 중기 이후 장인들의 신분이 비교적 장유로워 민영 수공업이 발전
- 특히, 북쪽은 전란이 빈번하였것에 비해, 남방은 사회가 안정되어 수공업이 크게 발전, 기술 수준도 북방을 능가
- 작방 안에는 최고의 기술자,
- 방직업의 작방에는 각종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염색, 송주와 박주의견, 익주와 양주의 금은 유명
- 자기는 일상 생활용품으로 사용되어 여러 종류의 그릇
- 월요의 청자와 형요의 백자가 유명, 특히 당삼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
- 금속 그릇도 당대 사람들의 생활용품으로 사용
- 귀족은 금, 은, 종류도 다양, 야주업이 많이 발달
- 중종 때 양주에서 만든 네모난 동경이나 장안의 대안탑 철종은 그 기술 수준이 높음
- 조선업 제지업이 발달
- 도시에 여러 직방이 병립, 이들 작방의 행회 조직, 임금의 조정, 고용주와의 관계, 동업자의 경쟁 방지 등을 도모
상업과 도시의 발달
- 장안, 각 주현의 행정 도시에는 시(市)가 설치,
- 같은 종류의 상품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한 구역을 차지, 이를 행(行)이라 부름
- 저점이 있어 객상이 머물고, 화물을 보관
- 궤방과 비전이 등장
- 궤방 : 대도시의 큰 상점 부근에 상품과 돈을 보관해 주면서 보고나비를 받지 않고 맡겨진 돈을 비밀리에 빌려 주고 이자를 챙기는 곳
- 찾을 때는 맡길 때 받아 두었던 서첩을 가지고 찾을 수 있어 서첩은 일종의 수표
- 비전 : 현환이라고 부르는데 관영과 민영 두 종류, 상인들이 물건의 판매 대금인 현금을 맡기고 대신 영수증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일종의 송금 수표
- 당의 국력이 널리 확산, 교통이 편리, 문화 교류뿐만 아니라 무역도 번성
- 바닷길의 요충지인 광주에는 시박사, 육상 교통의 중심지였던 무위, 장액 등지에는 호시감,
- 도시는 장안, 낙양, 양주, 성도
- 장안에는 성 안에 상업구로서 시와 주택구로서 방
- 도시 구획은 마치 바둑판, 거리는 양쪽에 배수 시설, 녹화 사업을 중시, 여러 종류의 나무를 재배
- 궁성은 황제의 거주지와 정무를 처리하는 황궁으로 나뉨
- 장안의 인구는 100만 명, 고유한 민속의 복장을 입은 변방 민족과 외국인이 운집, 시내 점포에는 약 200여종의 업종, 사방의 진기한 화물
- 서시는 더욱 번화, 외국 상인의 점포도 많음
- 여관은 물론 화물 보관소, 다관
- 페르시아 인의 주점에는 호족 무희가 많은 문인들을 유혹
- 장안은 종교의 중심지, 각종 종교 사관이 150여 곳,
- 그 가운데 불교의 대자은사, 이슬람 교의 청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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