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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신명기 34장 1-12절
제목 : 모세가 죽을 때에
일시 : 2018년 7월 1일
여는 말 : 삶을 원하거든
“Si vis vitam, para mortem.”(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우리말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을 로고스서원의 ‘희망의 인문학 프로젝트’ 일환으로 김해에 있는 새빛 청소년회복센터의 한 아이의 팔뚝에서 보았습니다. 제 오른쪽 아이인데 까무잡잡한 피부의 굵은 왼쪽 팔뚝에 문신을 했더군요. 물어보았죠. 이게 뭐냐?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이랍니다. 이 말이 뭔가 좋아서 새겼다고 하네요.
찾아보니 최근 베스트셀러인 한동일신부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 157쪽)에 나오더군요. 누구의 말인지 설명이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기억되는 존재라는 말과 함께 저 말이 있어서 사실 뜻을 헤아리기에 부족하네요.
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슨 뜻일까? 아마도 모멘토 모리와 비슷한 뜻이지 싶습니다. 삶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는 죽는다는 것을, 어쩌다 죽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날마다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오늘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요?
죽음을 준비한다에 초점을 두고 해석할 수도 있다면, 반대로 삶을 원한다에 방점을 두고 읽을 수도 있겠네요. 지금 여기서 잘 사는 것이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산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잘 살지 못하고서는 잘 죽지 못합니다. 참 다운 삶이 참된 죽음을 죽을 수 있겠지요. 죽음을 기억해야 참되게 살 수 있고, 참되게 살아야 참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은 동일한 말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되게 살았고, 참되게 죽었던 한 사람의 마지막을 보게 됩니다. 바로 모세의 죽음입니다. 그가 살아온 길이나 쌓아둔 업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의 시조인 아브라함보다도, 왕 중의 왕인 다윗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 모세이지 싶습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탁월했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 이야기를 통해 잘 살기 위해 어떤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참된 삶을 위해서 기억해야 할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기어코 죽고 싶지 않았던 사람, 모세입니다.
사람은 결코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공인된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노인들이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 포함된다고 하지요. 어쩌면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염원의 다른 말일 것입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어적으로 하는 것일 겁니다. 삶에 대한 갈망,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한데 뒤섞여 있을 겁니다.
교우 중 한명이 얼마 전에 자신의 최근 근황이라면서 페이스북이 올린 글입니다.
“4. 오늘 진료실에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돌아가는 것도 두려울 일이 아님을, 내 생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 일도 아님을 생각해보았다. 그럼에도 살 수 있으면 오래 살고 싶고, 조금이라도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을 숨길 순 없었다. 내게 더 많은 삶의 기회가 주어지길, 그것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평안하면서도 두려운 그런 시간들이다.”
최근에 심장이 좋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나 봅니다. 다행히 괜찮다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 모양입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 죽음도 그리 두렵지 않겠지만, 애써 괜찮다고 자기 스스로를 토닥일 수는 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건강하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은 모든 사람의 것일 겁니다.
불세출의 영웅 모세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명기의 곳곳에 모세의 죽음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예고의 내용이나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횟수가 많습니다. 총 ?번입니다. 왜일까요? 신명기가 죽음을 예감한 모세의 고별사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에게 신명기는 유언인 게지요. 그래서 모세가 죽는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관한 모세의 불평이 이곳저곳에서 툭툭 튀어나옵니다.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명시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절입니다. 죽기 직전의 모세의 건강에 관한 기록입니다. 생물학적 나이로 보자면 죽을 나이가 지났거나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만, 그의 건강 상태는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눈의 건강이고, 다른 하나는 기력입니다. 두 단어 모두 한 곳을 겨냥합니다. 모세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입니다. 아직 건강이 정정하다는 말입니다.
십여 년이 더 지난 목회 초기 시절에 모세에 관해 설교한 것이 기억납니다. 설교 파일이 사라졌더군요. 열심히 찾았는데 보이질 않네요. 그때 제가 어디서 보았는지, 그 출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대략 이런 것입니다. 모세가 죽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죽으라고 설득했다는 거지요. 서른하고도 아홉 번을 설득하고 협박해도 모세는 요지부동이었답니다. 마지막으로 마흔 번째에 가서야 모세도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사가 아닌 야사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떨어지겠지만, 저는 이것이 실화인지 신화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죽기 싫어서 안 죽겠다고, 죽고 싶지 않다고 울며 울며 항변하고 떼쓰는 모세가 안쓰럽기는커녕, 추레해 보이기는커녕 정녕 인간적인 모습이고, 이래서 모세가 위대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보면 화가 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마치 남의 일인양 저렇게 초연하게 말할 수 있는지 부럽기도 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가지고 장난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자기 스승의 죽음을 두고 저렇게 말할 수 있나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헬레니즘의 사람이 아니라 헤브라이즘의 사람인가 봅니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떠는 모세가 더 정겹습니다.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저자거리의 민초를 닮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사람은 죽는다는 것, 그러나 죽기 싫다는 것, 죽는 것이 무섭다는 것, 삶에 대한 집착은 질기고 강하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외 없는 죽음의 살아있는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죽었습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았지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서 보듯이,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죽지 않을 수 없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죽는다는 점을 똑똑히 기억하라고 모세의 마지막 죽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어떻게 살았든지, 무엇을 했든지 간에 너희는 죽고 만다.
안 죽을 것처럼 살지 말고, 죽을 것처럼 살라!
지혜로운 현자가 남긴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합니까?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 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그 날이 오면 두 팔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문장같이 되고, 두 다리는 허리가 굽은 군인같이 되고, 이는 맷돌 가는 여인처럼 빠지고, 눈은 일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는 여인들같이 흐려지리라.(12:1-3, 공동번역)
죽는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을 찾을 뿐만 아니라 잘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죽는 것이 예외 없는 보편 법칙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죽느냐, 이겠지요. 참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죽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둘째, 무덤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덤이 없는 삶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라면, 무덤과 관, 등을 준비해야지 않을까요?
외국 여행을 가보면, 대개 역사 유적지는 무덤이 많습니다. 이집트에 가면 피라미드가 있고요, 중국에 가면 진시황릉이, 우리나라에는 조선의 왕릉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 인물 가운데 무덤이 없는 예외적 사람이 몇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칭기즈 칸입니다. 그리고 모세이고요.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의 죽음은 애매한 것이 많습니다. 일단 그가 죽은 것을 본 사람도, 묻은 사람도 누구인지가 불분명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으로는 묻었다는 사람을 단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 후보는 둘입니다. 하나는 여호수아입니다. 모세의 시종이자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모세의 영면을 지켜 보았고, 그를 조용히 묻어드리고, 눈물을 훔치며 산에서 내려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여호수아라고 콕 집어 지명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누구냐는 거지요.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의 임종을 지켰다는 거지요. 한편으로 그만큼 친밀했다는 뜻도 되고요, 다른 한편으로 위에서 말한 바대로 죽기 싫어하는 모세를 강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암시를 주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구약성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일부 번역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부 일꾼들이나 아니면 부족장들이 임종을 보았고, 어떤 묘비명도 없이 묻고 내려왔고, 그곳을 말하지 않아서 무덤의 위치를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학설이 많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모세의 무덤이 예배장소로 변질될 우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구리 뱀을 히스기야 왕이 이스라엘을 개혁하면서 그것을 산산이 조각냅니다(왕화 18:4). 왜냐하면 구리 뱀에게 백성들이 분향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가 높이 치켜들었던, 그리하여 염병을 제거하였던 그 구리 뱀이 후대에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에는 알려졌으나 후대에는 잊혀졌다는 주장도 있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하나님의 말을 어기고 이스라엘이 모세의 시신을 운반하여 요단강을 건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사실, 저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왜 무덤이 없느냐, 보다는 무덤이 없다는 것이 말하는 바, 그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고 중요하다면, 무덤이 그 삶과 죽음에 관해 어떤 메시지를 던지느냐는 것입니다.
무덤의 부재는 기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는 물리적인 환경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를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무덤이 없다는 것은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의 무덤이 없다고 모세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를 기억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 모세 말입니다.
무덤의 부재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죽은 자를 어떻게 기억하느냐를 말해주고, 죽은 자의 자리에서 보자면, 자신을 이렇게 기억해 달라는 무언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저는 무덤으로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덤 곧 죽음과 사자(死者)가 아니라 생명으로, 살아있는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이지요. 죽었으나 죽지 않은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정녕 죽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어떻게요?
죽어도 죽지 않는 삶, 참답게 사는 삶을 위해서는
첫 번째는 축복의 말입니다. 모세의 마지막은 야곱과 마찬가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맘껏 축복해 줍니다. 그 이야기가 33장입니다. 열두 지파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그들에게 최고의 복된 말을 남깁니다. 죽어서, 죽으면서 축복을 베풀었다는 말은 살아있을 때에도 축복의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후회하며 미안하다, 잘못했다, 는 말을 우리 인간이 안할 수 없겠지만, 모세처럼 사랑한다, 축복한다, 는 말이 우리의 마지막 말이 되었으면 좋겠고, 매일의 언어이기를 바랍니다.
축복의 말과 함께 두 번째는 책입니다. 모세는 글을 남깁니다. 신명기 30장 1절입니다. “모세가 이 율법을 기록하여, 주님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에게 주었다.” 우리 맥락에서 보자면, 이 율법은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정리한 것입니다. 동시에 신실하게 사명을 감당했던 자신의 삶의 이야기이자, 끝없는 배교와 배반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고, 한없는 사랑과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하기 바랍니다.
모세가 남긴 세 번째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지요. 모세가 했던 일을 완성할 후계자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하는 것을 보았던 여호수아입니다. 그랬기에 모세의 명령에 순종했던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시를 잘 듣고 잘 따랐다고 34장 9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잘 보시면, 모세오경과 흡사합니다. 하나만 간단히 말하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과 요단강을 건너는 장면이 비슷합니다. 모세 따라쟁이가 여호수아이고, 여호수아서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일을 할 사람,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을 남겼습니다.
저 세 가지 중 기록과 사람은 제가 이곳저곳에서 말하던 것입니다. 첫 번째 축복의 말은 「내 안의 야곱 DNA」에서 말한 것이고, 두 번째 기록은 자서전을, 세 번째는 사람을 남기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목사인 제게 가족과 교회 식구, 그리고 로고스서원 제자들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남길 것이 있다는 말이고,
잘 죽는다는 것은 남긴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로고스교회 식구 여러분,
무엇을 남기시렵니까?
무엇을 남기고 있습니까?
타인에게 축복의 말을 많이 하고
일기와 자서전을 꾸준히 쓰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길이고, 결국 잘 죽는 길입니다.
셋째, 자기만의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10-12절).
모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는 점에서 여느 인간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무덤이 없는 대신에 자신을 기억해 줄 기록물과 사람을 남겼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그는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모세 사후에 모세에 대한 평가가 10-12절입니다. 10절에서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이후로는 없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했다, 11절에서는 이집트에서의 초자연적 이적을,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큰 권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하나하나 나누면 4가지이고, 줄이면 2가지입니다. 10절이 종교적인 면과 11-12절의 사회적인 면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누렸습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 빼고 말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저 구절을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바로 ‘비교불가능성’입니다. 모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후대의 평가의 첫 부분이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없다고 했고, 맨 마지막 구절이 이런 사람 없다, 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비교불가능한 우위를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인입니다.
이런 독보성은 모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4장은 비교불가능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4장 7-8절입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이 모든 율법과 같은 바른 규례와 법도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하나님 없기에 이런 모세도 없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토록 위대했던 비밀은 그가 믿었던 비교불가의 하나님에 있고, 그 하나님에 값하는 믿음과 순종을 했기에 비교불가의 모세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 사람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바로의 궁전에서 안전하고도 안락한 삶을 누릴 기회가 충분했습니다. 그럼에도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인간적으로 말하면,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걸었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했고, 무척 고생했지만 말입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과의 독대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대화의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이 정도 말하면, 여러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세 알아챌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 또 말씀 묵상하라는, 기승전 묵상이구나.’라고요. 가장 귀한 시간, 아까운 시간을 하나님에게 바쳐 보십시오. 말씀을 묵상하고, 예배를 귀하게 여기고, 그리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고, 잘 사는 삶이고, 그렇게 살다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닫는 말 : 잘 먹고 잘 살자
로고스교회 식구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저의 소원 말입니다. 교우들이 모두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 김기현목사의 소원이라고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오늘 본문은 첫째, 너는 반드시 죽고 만다는 팩트폭격을 가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죽습니다. 모두 버리고 갑니다. 가져 갈 것도, 가져갈 수도 없습니다. 둘째, 죽는다는 진실 앞에서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을 결심합니다. 바로 남기는 삶입니다. 좋은 말을 하고, 책을 남기고, 사람을 남기고요. 마지막으로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길이고, 잘 죽어가는 길입니다.
모압 산지에서 가나안 땅의 최북단에서부터 남단까지 돌아본 모세는 마지막 숨을 거둡니다. 이스라엘 여행, 성지순례라고 하지요. 그곳을 다녀온 저는 요단강 이편에서 강 너머의 모압 산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여리고성 근처입니다. 여리고는 평지이었고요, 강 건너편은 산지이었습니다. 제가 서 있던 여리고쪽 맞은 편에서 제가 있던 곳을 바라보는 모세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바라보았습니다. 34장 본문에는 눈이라는 단어와 보여주었다, 보았다는 동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보기만 보았지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물리적 눈으로 보았다는 말만 뜻하지 않습니다. 상징적으로 차지했다는 표현입니다. 모세는 이미 보았고, 보았으므로 성취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잘 먹고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을까요?
모세가 그 땅을 보고 죽었던 것처럼,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았습니다. 모세의 죽음이 지닌 비밀과 능력을 알아버렸습니다. 비교불가능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 하나님을 날마다 만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잘 먹고 잘 살게 해 줄 것입니다.
서두에 저는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참답게 사는 삶, 잘 죽는 삶에 관해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합니다.
비교 불가능한 하나님을 비교불가능한 믿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을 오늘도 성경을 통해 만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