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을 깨는 두 방법
알은 불안하다. 그래서 ‘달걀을 지고 성 밑으로 지나지 못한다’는 속담도 생겨난 것 같다. 알의 껍질은 그렇게 얇고 힘이 없다. 알처럼 파괴되기 쉬운 것은 없다. 그것은 저항하지 못한다. 단지 둥근 모습으로 침묵할 뿐이다. 조금만 굴러도 유리창이 깨지는 그런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균열이 간다.
그러나 알속에서 생명을 꺼내려는 사람에게는 알의 껍질처럼 두꺼운 것도 없다. 알이 부화해 스스로 껍질을 깨뜨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을 필요로 하는가? 며칠이고 며칠이고 자리를 뜨지 않고 품어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만약 곡괭이로 벽을 허문다면 그것이 아무리 두꺼운 콘크리트라 할지라도 하루 이틀의 노력이면 될 것이다. 육중한 청동의 문이라 하더라도 다이너마이트나 혹은 산소용접기만 있으면 금세 헐어버릴 수가 있다.
생명을 꺼내는 알의 껍질은 얼마나 단단한가? 적어도 그 껍질에 금이 가려면, 그래서 그 벽이 무너져 새의 노란 부리와 솜털이 바깥 공기와 접하려면, 무수한 밤과 낮을 지나야만 한다.
알을 깨서 먹으려는 사람에겐 그 껍질이 연약하게만 보이지만, 알에서 생명을 꺼내려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콘크리트의 벽보다도 두껍고 단단하다.
사물들은 알처럼 모두 껍질을 가지고 있다. 외부와 내부와 경계선, 그것들은 얇은 피막 하나로 자신의 생명과 의미를 감추고 있다. 사람들은 이 사물의 의미를 꺼내기 위해서 폭력을 쓴다. 아주 쉬운 방법으로 그 의미를 꺼내려 한다. 저것은 구름이고, 이것은 꽃이고 그것은 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마치 알을 손으로 두드려 깨는 일과도 같다.
다만 시인만이 기다릴 줄 안다.
사물들의 의미를, 그 생명적인 의미를 꺼내기 위해서는 며칠이고 몇 해이고 참을성 있게 그것을 품어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인들은 그 부화의 방법을 자연과 인간과 역사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세계는 그렇게 해서 그가 감추었던 노란 부리와 털봉숭이의 몸을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이 스스로 병아리처럼 소리를 내는 것을 듣는다. 의미의 알이 얼마나 두꺼운 껍질을 가졌는가를 알았을 때 비로소 당신은 시인이 된다.
지은이: 이 어령
출 처: 『문학사상』, 1978. 4
인생의 고소한 진실
그곳에 갈 때면 이 세상에 없는 계절로 초대받는 기분이다. 초록 더께가 여울진 아름드리나무 터널로 밀물처럼 스미는 따사로운 햇살, 숱한 세월에 빛바랜 벽돌집들이 추억을 더듬는 한갓진 골목에 부는 남실바람, 문턱이 닳도록 정겨운 소식을 실어 나른 우체국에 진동하는 그리움의 향내, 그리고 이 모든 걸 평온하게 감싸는 너른 들판. 그 영원의 풍경 속에 나만의 작은 천국이 있다.
우리 동네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나타나는 꿈결, 유럽의 외딴 마을 정취와 닮은 웨이벌리(Waverly)가 돋보이는 이유는 베이커리 카페 ‘와일드 플라워(Wild flour)’ 가 자리한 까닭이다. 어느 농가의 창고였을까. 회색 슬레이트 벽 사이로 난 나무 문을 열면 갓 구운 황금빛 빵들이 나긋이 인사하는 공간이 펼쳐진다. 언제나 따스하고 고소한 향기를 발하는 장소를 곁에 두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파르스름한 새벽부터 살뜰히 치댄 반죽이 해처럼 봉긋 솟아오르면, 아침 안개로 치감긴 뽀얀 골목길엔 밤새 허기진 가슴들이 밀려든다. 부지런한 손이 빚어낸 풍성한 맛의 무대는 그렇게 하루를 여는 힘이 되어준다.
빵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빵의 품격이다. 그러나 와일드 플라워를 좋아하는 이유가 단지 밀 애호가인 내 취향을 만족시켜서만은 아니다. 그곳은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내게 존재의 기쁨을 일깨우는 온정 넘치는 쉼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구가 이토록 와닿은 적이 있었던가. 첫 방문 뒤,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한 풍미를 잊지 못해 다시 가게를 찾은 날이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와 포근포근한 녀석들을 먹음직스럽게 바라보던 순간,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선 내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는데….’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 가게의 제빵사 ‘세라’였다.
미국은 대부분의 카페에서 음료나 디저트를 시키면 이름을 묻는다. 같은 가게에 몇 번을 가도 그 일이 생략되는 법이 없어서 매번 말해주는 게 당연하다. 가게에 오가는 수많은 손님 틈에서 나 하나쯤은 쉽게 잊기 마련일 텐데 그녀는 아니었다. 단 한 번에 초면인 객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나는 쫀득한 바게트와 솜털처럼 부드러운 크로아상을 주문하며 그녀에게 고마움을 맘껏 표현했다. 그러곤 내 이름은 쉬운 편이 아니라 한국사람조차 잘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그리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다. 내 질문에 인정을 담뿍 담아 전하는 그녀의 진심은 여러 인종의 틈바구니에서도 나는 여전히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린 친구니까요. 친구끼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잖아요? 난 한 번 들은 이름은 잊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에요. 발음이 익숙지 않아 외우기 조금 힘들지만 그래서 더 인상적이기도 했죠.”
나를 허물없이 대해주는 그녀와 마음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던 5월의 어느 날, 내 생일을 맞아 주문한 케이크를 찾으러 간 토요일 오전이었다. 그날따라 이른 시각부터 브런치를 즐기러 온 발길이 어찌나 많던지…. 카페 마당까지 이어진 줄에 합류해 30분을 넘게 기다린 뒤에야 겨우 케이크를 받았다.
평소에는 메뉴를 정하고 계산하며 세라와 나누는 짧은 수다가 브라우니만큼이나 달달했는데 이날은 도저히 짬이 나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헛걸음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오픈 주방에서 쉴 새 없이 반죽을 매만지는 분주한 뒷모습에 차마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도란도란한 시간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그녀를 위한 배려일 것 같았다. 속으로만 안부를 물은 뒤 잠시 매장에 앉아 케이크를 확인할 때였다. 정신없는 틈에도 내가 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세라가 곁에 서있었다.
“생일 축하해요, 연혜! 당신처럼 다정한 동양인 친구를 사귀게 되어 기뻐요. 그리고 당신 가족의 화목한 모습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요.”
그녀는 여느 날처럼 나를 살갑게 부르며 꼭 안아주는 것으로 생일 선물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초를 하나 꺼내서는 함께 노래하고 촛불을 끄자고 제안했다. 만사 제치고 축복의 자리를 마련해준 따뜻한 심성 덕에 난 파란 눈의 이웃들에 둘러싸여 축하받는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괜찮다. 서로의 진심은 이름 하나, 몇 마디 단어만으로 충분히 전해지기 마련이다. 남미 출신의 손님과 소통하기 위해 간단한 스페인어를 배울 만큼 사람에게 정성을 쏟는 그녀가 있기에 와일드 플라워엔 버터 향보다 그윽한 인간미가 가득하다.
누구보다 빵을 좋아하지만 소화 기능이 약해 잡곡이 주재료인 것을 고르는 내가 세라의 가게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호밀 사워도우다. 밀가루보다 거칠어도 문제없다. 그녀의 섬세하고 능숙한 손길을 거치면 속까지 포실하게 익은 호밀 덩어리가 탄생한다. 후끈한 열기를 견뎌낸 뒤 텁텁하고 쓴 맛은 덜어내고 담백함만 담아낸 둥글넓적한 사워도우를 건네 받으며 인생의 고소한 진실과 마주한다.
이따금 황량한 바람이 불어 닥치는 나날을 뜨거운 용기로 헤쳐 나갈 수 있는 나는 존재 자체로 충만한 꽃이었다. 제멋대로 부풀어 오르는 상념을 잠재우고, 모난 감정은 삶의 지혜로 숙성시키는 동안 나는 더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은이: 조연혜 (프리랜서 에디터)
출 처: 샘터 2025.7
<봄밤>
김수영(1921∼1968)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켤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1957)
꽃들의 세상입니다. 지난 이틀, 봄비 내리면서 매스컴에서는 벚꽃 엔딩이라고 아쉬워하는 기사들이 떴는데
강원도 지역 특히 춘천지역은 오히려 지금부터 벚꽃철을 맞은 듯 합니다. 불과 보름전 만 하더라도 높은 산 계곡에는 눈덩이가 보였는데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삼월 하순부터 한창 보기 좋던 노란 동백꽃(생강나무꽃)은 이젠 그 색이 퇴색하여 희부유스름 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진달래는 오히려 지금이 더 고왔습니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꽃이라 연분홍색이 '곱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주변 풀잎들이 피어나면서 연두를 바탕에 두고 피어나는 진달래가 더욱 새뜻해보였습니다. 아, 개나리도 만개했더군요. 산벚꽃이며 산목련도 지금이 절정인 듯 싶었습니다.
꽃소식은 이쯤 전하고.........유정독서모임 4월 16일 목요일 오후 2시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역에 있는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이번 목요일에 함께 읽을 김유정작품은 <동백꽃>, 그리고 한강 작가의 < 작별하지 않는다> 입니다.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6. 4. 11 강버들
첫댓글 감사합니다 💮🌸
수필가 이영희선생을 김유정 문학열차에서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